엄태웅, 실력보다 매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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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사진출처:KBS)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실력만큼 중요한 건? 매력이다. '1박2일'의 새 멤버로 첫 여행을 보낸 엄태웅이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강호동은 엄태웅이 "특별한 재능은 없어 보이지만 다행스러운 건 승부욕이 있다"며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1박2일'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허당 이승기는 엄태웅에게 '무(無)당'이라는 캐릭터를 부여하며, '예능백지상태'인 그에게 오히려 기대감을 표현했다. 이수근은 엄태웅이 "뭔가 잘 하는 게 있을 텐데, 우리가 아직 '발견'을 못했다"고 말했다. 예능 첫 출연을 한 엄태웅에게서 예능감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아무 것도 써지지 않아 오히려 빛나는 백지의 가능성을 그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채워 넣었다.

첫 여행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콘셉트로 치러진 미션에서 강원도 양양 낙산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낙오 미션으로 히치하이킹을 하려 손을 들지만 그냥 지나치는 차를 보며 엄태웅은 허허 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우연히 만난 대학생들의 차를 탄 그는 그들에게 "팬티 바람으로 끌려나왔다"며 첫 날의 인상을 전한다. 대학생들은 오히려 엄태웅을 걱정하며 조언을 해주기 시작한다. 자신은 "가만히 있겠다"는 말에 "가만히 있으면 안돼죠. 콘셉트를 잡아야죠." 대학생이 그렇게 말하자 엄태웅은 진지하게 귀를 쫑긋 세운다. 그는 지나는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캐릭터에 대해서 그 대학생이 "김C씨 마냥 박식한 콘셉트는..."하고 입을 떼자, 그는 한 마디로 "박식은 안돼."하고 잘라 말하는데 거기서 그의 솔직함과 소탈함이 엿보인다. "원래 예능은 잘 안 나오시잖아요."하고 묻자, 재차 "못나갔지"하며 말의 뉘앙스를 바꾼다. "새로운 멤버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에 반색하고, 5명으로는 편을 나눌 수 없어 뭔가 아쉬웠다는 말에는 "전문가네"하며 감탄을 한다. "첫날이 다 그런 거죠 뭐."하는 위로의 말에 엄태웅은 놀라며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하고 묻는다.

오히려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대학생을 통해 함께 따라다니는 VJ와 인사를 나누고, 미션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다급함에 "안전속도를 유지해야 되는데 조금 더 밟아도 될 것 같은데..."라고 하고, 대학생이 "제한속도는 지켜야죠. KBS는 그런 방송이니까..."라고 말하자 와 하고 놀란다. 사실 이 대학생들과의 짧은 만남은 '1박2일'에서 엄태웅의 기대감을 한껏 높여놓았다. 어디서든 "1박!"하고 외치면 누구나 "2일!"하고 붙여주는 요즘, '1박2일'은 어쩌면 대중들이 더 많이 아는 프로그램이 된 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히려 예능 좀 안다고 하는 인물보다는, 아예 몰라서 일반 대중들의 조언에도 감탄하며 얘기를 들어주는 엄태웅의 캐릭터가 훨씬 매력적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체력도 남다르지만, 아무리 급해도 신호등 앞에서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고, 미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행선지를 끝까지 밝히지 않는 엄태웅은 자막으로 나온 것처럼 '순둥이'다. 아침 미션에서 개울 너머 있는 깃발을 전부 가져가다 나눠줄 정도로 의리도 있고, 복불복으로 게임을 할 때는 나름 '즐기는' 면모도 보여준다. 이수근의 말처럼 그가 잘하는 것은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발견'되지 않은 점이 바로 엄태웅의 매력이자 그가 가진 힘이다.

'1박2일'에 예능 능력자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자꾸만 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인물은 귀하다. 이미 오랫동안 출연하면서 대중들과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탓이다. 엄태웅은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이 난다.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서지 않는 차를 보며 쑥스럽게 웃을 때, 차를 태워준 아주머니가 "TV에서 봤던 그대로다."라고 하자, "그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죠 뭐."하며 머쓱하게 웃을 때, 그의 존재감은 빛난다. 그에게 마치 '1박2일' 전문가처럼 조언을 해주고, 그가 차에서 내릴 때 "잘 하세요"라고 격려해주는 대중들을 만들어내는 그 자리가 바로 '1박2일'에서 엄태웅이 설 자리다.

'싸인'이 멜로에 빠지지 않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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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마지막회에 와서야 왜 '싸인'이 많은 시청자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멜로를 발전시키지 않았는지를 알 것 같다. '싸인'의 현실 인식은 섬뜩할 정도로 비장하다. '산 자는 거짓말을 하고 망자가 진실을 말한다'는 말은 그저 하나의 수사가 아니라 이 드라마가 가진 비정한 세상에 대한 시각이다. 모든 명확한 심증과 정황을 갖고 있으면서도 권력의 힘을 빌어 증거를 인멸하고 살아남는 범법자들에게, 윤지훈(박신양)이 스스로 '진실을 말하는' 증거로 죽음을 선택한 것은 '싸인'이 전하는 세상에 대한 준엄한 경고다. 이렇게까지 해야 겨우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멜로에 빠지는 것 자체가 너무나 한가하고 심지어 이 땅의 수많은 억울한 망자들에게는 죄스럽게까지 여겨졌을 일이다.

따라서 멜로 없이도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 '싸인'의 성공은 오히려 그 멜로가 없을 수밖에 없는 작품의 진정성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죽어나가고 있고, 누군가는 그 죽음을 덮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망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그들밖에 없다. 그 속에서의 사랑타령은 배부른 일로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윤지훈이라는 캐릭터의 진지함은 바로 이런 작품의 분위기 속에서 창출된 것이다. 그에 대한 고다경(김아중)의 마음이 사랑 그 이상의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이 멜로의 부재는 작품의 장르적 완성도를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즉 첫 번째 사건이 마지막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 작품에서 그 사건의 해결방식으로서 윤지훈의 죽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마지막 죽음에 증거를 남긴다는 그 강렬한 설정만큼 이 드라마의 주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예정된 윤지훈이 고다경과의 멜로를 너무 깊게 끌고 가게 되면 그것은 제작진에게도 부담이 됐을 수밖에 없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멜로란 시청자들의 감성에 의해 가장 좌지우지되기 쉬운 설정이 아닌가.

이것은 거꾸로 윤지훈과 고다경이 깊은 멜로 관계를 그렸을 때, 마지막 회 초반부에 일찌감치 윤지훈의 죽음이 드러나는 그 장면에서 느껴졌을 당혹감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윤지훈은 이제 자신이 죽게 될 사실을 알고 마지막을 정리하듯 고다경과의 마무리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시청자들과의 마무리이기도 할 것이다.

한 법의학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권력의 심층부와 연결된 살인사건이 해결되는 이 상황이 말해주는 건 명백하다. 그만큼 권력의 시스템은 공고하고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권력의 힘으로 그것마저 덮어버릴 수 있는 사회에서 그것을 넘어서고 정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위치에 있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희생이 '싸인'에서처럼 굳이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망자들의 이야기를 좀더 가까이 듣기 위해 국과수를 나와 실제 현장으로 뛰어드는 윤지훈처럼 다만 자기의 이권마저 버리는 그 희생의 정신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얘기다.

'싸인'이 멜로 없이도(어쩌면 멜로가 없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깔려진 깊은 진정성 때문이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망자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사랑타령마저 사치이자 호사로 여기는 그 태도. '싸인'의 작품적 완성도와 성공은 바로 그 태도가 보이는 진지함에서 비롯된다.

아우라를 더하는 오디션, 아우라를 빼는 리얼 버라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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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이소라가 정말 저런 가수였나. 과거 '이소라의 프로포즈'로 익숙하게 그녀를 봐왔던 이들이라면 '나는 가수다'의 첫 무대에 올라와 눈을 지그시 감고 온 몸 세포 하나하나로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부르는 이소라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바람이 분다'를 부를 때 진짜 바람이 부는 듯한 그 스산함과 처연함과 강렬함을 느꼈을 지도. 아마도 '나는 가수다'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느낌만큼은 분명했을 것이다.

이소라라는 가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은 '나는 가수다'가 가진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형식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일반인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 최후의 1인까지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일반인은 스타가 된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그 살아남는 과정의 스토리가 부여되고, 또 때로는 심사위원이 그 후보자에게 권위를 부여하면서 그 일반인은 하나의 스타로서의 아우라를 갖게 된다. 이것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구조다.

이소라는 그 무대에 첫 발을 디딘 것이다. 이소라는 물론 이미 가창력을 인정받은 기성가수다. 하지만 대중들의 기억 속에는 가물가물한 존재다. 오래도록 활동을 하지 않았고 무대에 선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가요계가 아이돌 중심으로 편제되면서 점점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 아마 이것은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대부분의 가수들(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소라는 그 첫 무대에서 확실하게 자기 존재감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그 사실은 이미 음원차트 꼭대기에 랭크되어 있는 '바람이 분다'라는 곡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소라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는 가수다'라는 서바이버 과정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 것이고, 이것은 그간 지워졌던 가수로서의 이소라라는 아우라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1박2일'에 합류한 엄태웅의 첫 신고식은 팬티 바람에 까치집 지은 머리칼로부터였다. '1박2일' 멤버들이 새벽에 엄태웅의 집을 급습해 그의 가감 없는 리얼한 모습을 끄집어냈다. 어찌 보면 무례할 수 있는 그 행동에 대해서 엄태웅은 오히려 사람 좋은 미소를 던졌다. 어딘지 어색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그 수수함과 꾸미지 않은 모습에 대중들을 반색했다.

엄태웅은 엄포스라고 불리며 독특한 자기만의 아우라를 가진 배우다. 하지만 첫 신고식에서 강호동이 이미 여러 차례 선언한 것처럼, 엄태웅은 앞으로 계속해서 이 아우라를 벗겨내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톱 연예인이 들어와 자신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던져버리고 보통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드러낼 때, 그 리얼리티에 열광하게 되는 형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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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사진출처:KBS)

우리는 이승기가 첫 등장했던 그 어색한 첫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추운 날씨에 찬물에 손 담그는 게 귀찮아 세수조차 안하는 멤버들과 달리, 세안을 하고 피부 관리까지 하는 '1박2일'의 야생에 적응 안 된 모습을 보였었다. 현재 이승기는 그 때의 모습과는 달리, 완전히 야생에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여전히 자신만의 아우라를 갖고 있지만, 아우라를 벗어내고 망가질 때는 확실히 망가지는 모습도 선사한다.

엄태웅도 그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는 첫 등장에서부터 확실하게 그 친근하고 털털하며 선한 이미지를 선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굳이 예능에 적응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적응이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엄포스의 아우라가 하나씩 벗겨져나갈 때마다 큰 웃음을 줄 것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형식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새롭게 아우라가 덧붙여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우라가 벗겨져나가는 이 두 모습은 아마도 작금의 예능 프로그램의 두 축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오디션 프로그램과 리얼 버라이어티쇼. 위로 올라가는 구조와 한없이 대중들 가까이 내려오는 구조.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없이 일반인을 상승시켜 스타의 위치와 만나게 한다면, 기성가수가 참여하는 '나는 가수다'는 가수의 오디션의 심사를 일반인이 한다는 위치에서 접점을 만든다. 일반인의 위치를 높여놓은 것이다. 반면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스타를 한없이 낮춰 대중들과 만나게 한다. 결국 이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대중들과의 눈높이이고 공감이다.

 ‘블랙스완’, 예술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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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사진출처:20세기폭스)

“느꼈어요. 저는 완벽했어요.”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무대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건넬 때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 완벽함에 대한 전율을.

‘블랙스완’. 발레를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백조가 아닌 흑조를 다룬다. 그러니 발레라는 백조의 겉모습을 생각하고 극장문을 들어선 관객이라면, 그 충격적인 흑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할 지도 모른다. 휴먼드라마 같은 장르를 기대했다면, 심지어 공포에 가까운 파격적인 영상으로 주인공의 이상 심리를 포착한 이 작품을 과잉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의 겉면이 아니라 그 뒷면을 경험하거나 목도한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그 소름끼치게 충격적인 장면들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과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니나에게서 전율을 느낄 지도 모른다.

백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우아함을 보여주는 발레리나 니나. 솔로이스트로서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 그녀의 꿈이지만, 그 우아함 이상의 욕망의 흑조를 더불어 연기해야 하는 (재해석된)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어떤 역이든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또 늘 완벽해지고 싶은 그녀에게 이 공연을 총감독하고 있는 토마스 르로이(뱅상 카셀)는 말한다. “완벽함이란 통제하는 것만이 아니야, 흘러가게 두는 것이기도 해.” 즉 겉면으로서의 백조가 아닌 내면에 잠재된 욕망으로서의 흑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통제하려는 자신을 버리고 본능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끝없이 통제되도록 훈련되어져 왔다. 발레리나를 꿈꾸었지만 자신을 임신한 것 때문에 그 꿈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늘 죄책감에 빠뜨리는 엄마는 그녀를 오르골을 열면 돌아가는 발레리나 인형처럼 통제하려 한다. 게다가 솔로이스트로 서 있다가 자신에게 밀려난 절망감에 자동차로 뛰어든 베스(위노나 라이더)에 대한 죄책감과, 친구처럼 다가와 “즐기면서 살라”는 릴리(밀라 쿠니스)에 대한 경쟁심리와 두려움은 그녀를 끝없이 괴롭힌다.

백조로서 우아한 척 살아가는 그 세계에 머물렀다면 느끼지 않았을 고통을 그녀는 솔로이스트가 되면서 갖게 된다. 즉 흑조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간 통제해 왔던 자신의 본능을 열어젖혀야 하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본능의 분출은 그것을 통제하려는 자신과 그 주변의 상황들(특히 인물들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공격성으로 복잡하게 얽힌 심리)과의 일대 전쟁을 의미한다. 영화는 니나가 흑조가 되기 위해 겪는 예술가적 투쟁의 과정을 일일이 보여줌으로써 그 내면을 시각화한다.

엄마의 통제를 부정하고, 숨겼던 성적 본능을 분출하며, 베스에 대한 죄책감과 릴리에 대한 경쟁심리를 이겨내는 과정은 그래서 피와 살점이 튀는 끔찍한 장면들로 그려지지만, 그것이 고스란히 한 예술가가 자기 성장을 통해 예술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어떤 감동에 도달하게 만든다. 특히 몸을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발레라는 예술형식의 속성상 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몸의 고통스런 장면들은 끔찍하다기보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머릿속이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등짝을 파고 나오는 날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피부를 뚫는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백조가 흑조가 되는 이 성장과정을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 속에서의 니나의 발레리나로서의 성장과정과,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니나라는 캐릭터의 성장과정, 그리고 이를 연기한 연기자 나탈리 포트만의 성장과정을 중첩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과정을 하나로 묶어낸 영화 역시 예술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의 탄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가를 보여준다. ‘블랙스완’은 멀리서 바라보면 우아한 백조처럼 보이지만 아주 가까이서 보면 피와 눈물이 철철 넘치는 흑조들의 고군분투를 소름에서 전율로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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