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챔프', 공정한 기회의 세상을 꿈꾸다

그들이 원한 건 최소한 공정한 기회였다. 성공? 그건 일단 기회가 있는 사람이어야 꿈꿀 수 있는 거니까. 똑같이 6주 휴식을 요하는 부상을 입고도 어떤 이는 선수촌에서 쫓겨나고 어떤 이는 버젓이 훈련을 하는 상황. 의료과실을 보고 눈감아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다른 어떤 병원에도 발붙일 수 없게 된 상황. '닥터 챔프'가 그리는 세상은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돌아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선수촌이든 병원이든, 그들은 어떻게든 버텨내려 하지만 세상은 늘 이들을 쫓아내려고 한다. '닥터 챔프'라는 드라마 속의 갈등은 바로 이 기회조차 공정하지 않은 만만찮은 사회와 그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청춘들 사이의 대결에서 비롯된다.

스포츠 의학이라는 일반외과보다는 조금은 여유롭게(?) 느껴지는 의학 분야가 등장하면서도 이 드라마가 여전히 흥미진진한 이유는 태릉선수촌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메달의 꿈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연습을 하지만, 그렇다고 부상을 입게 되면 국가대표 선발에서 밀려나게 된다. 즉 일반외과를 다루는 의학드라마에서처럼 생사를 오가는 질환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릉선수촌의 의료실에서는 죽음보다 더 한 퇴촌 명령이나, 선수 생명이 끝나는 부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적어도 이 선수들에게 대회에 못나가거나 운동을 더 이상 못하게 되는 일은 죽음만큼 고통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런데 이토록 생명처럼 여기는 선수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잣대가 공정하지 않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체급의 다른 선수를 찾기 위해 퇴촌의 명분을 찾는 감독이라면? 물론 이것은 극화된 것이지만, 작금의 우리네 청춘들이 겪는 '기회의 격차'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점점 태생의 조건에 의해 교육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사회로의 진입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고착화되어버린 사회 앞에서 청춘들이 느끼는 절망감 같은. 아무리 해도 이미 안 되는 것이 정해진 현실 앞에서 꿈이 더 이상 기회가 아니라 고통이 되는 세상. '닥터 챔프'의 지헌(정겨운)이 힘겨운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헌을 통해 차츰 선수들(청춘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연우(김소연)가 의료실장인 도욱(엄태웅)을 통해 배워가는 건 바로 이 공평함이다. 내부고발자인 연우를 선수촌 의료실의 의사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료과실을 알고 있는 연우를 해고시켜달라는 담당의에게 거꾸로 해고 통보를 내리며, 최고의 스타로 특별대우 받는 수영선수에게 다른 선수와 똑같이 대하는 도욱은 마치 공평함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다지 남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던 연우가 차츰 타인들의 입장을 고려하기 시작하는 건 지헌이 보여주는 사랑과 도욱이 행하는 정의로움을 보기 때문이다. "이젠 포기하지?"라는 도욱의 말에 "포기하지 말란 말이죠?"하고 그것이 반어법임을 알아차리는 연우는 그래서 현실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지헌은 불공정하게 선수촌에서 쫓겨나고, 연우는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 선수를 치료해주는 것뿐이다. 이것이 냉정한 그들의 현실이다. 하지만 '닥터 챔프'가 꿈꾸는 세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쫓겨났지만 다시 선수촌으로 들어가겠다며 연우에게 치료를 구하는 지헌에게서, 그럼에도 꿈꾸기를 포기 않는 청춘의 건강함을 본다면 지나친 낙관일까. 그래도 도욱 같은 인물이 있어 '기회의 격차'를 줄여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드라마처럼 적어도 포기 않는 청춘이기를.

사극을 넘어선 시대극의 저력과 그 문제점

시대극 전성시대다. ‘제빵왕 김탁구’가 7,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넘어서 성장해가는 김탁구를 시대극의 틀 안에서 그리며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면, ‘자이언트’는 강남 개발이라는 소재를 시대극으로 풀어내며 경쟁 작품이었던 사극 ‘동이’의 시청률을 앞지르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새롭게 시작한 ‘욕망의 불꽃’은 엄밀히 말하면 시대극이라고 하기가 어렵지만, 시대극이 갖는 장치들을 백분 활용하면서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 시대극을 막강하게 만드는 걸까.

한때 시대극은 실패작의 전형처럼 여겨지곤 했다. 과거 방영되었던 ‘사랑과 야망’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다시 리메이크된 ‘사랑과 야망’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에 이어진 ‘로비스트’나 ‘에덴의 동쪽’ 그리고 ‘태양을 삼켜라’ 같은 시대극도 거의 모두 실패했다. 이유는 당연하다. 과거 시대극들이 갖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어딘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미 드라마들은 성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방영되고 있는 시대극들은 이들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성공에 대한 집착이 그 속에도 꿈틀대지만, 이들 작품들은 거꾸로 그 집착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에 더 집중한다. 따라서 현재의 시대극들 속에 성공에 집착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부분 악역들이다. ‘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주원) 혹은 서인숙(전인화)이나, ‘자이언트’의 조필연(정보석) 같은 인물들을 끝없는 성공에 대한 욕망을 보이지만 그것이 결국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빵왕 김탁구’가 ‘행복’을 주제로 빵을 만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불꽃’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나영이라는 성공하기 위한 욕망에 불타오르는 캐릭터가 바로 그것 때문에 얼마나 처절한 불행을 맞이하는가를 바라보는 드라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니의 자리까지 빼앗아 버린 그녀는 결국 정점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죄들이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개발시대가 남긴 아픔을 이 욕망의 불꽃을 가진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금의 시대극이 과거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면서 오히려 시대극이 갖는 장점이 부각된다. 그것은 폭넓은 시청세대의 가능성이다. 과거는 넘어서야 할 막장에 가까운 시대의 장벽이지만 한 세대에게는 향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성장드라마는 젊은 세대들의 판타지가 된다.

물론 시대극의 힘이 이처럼 막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두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시대극은 특성상 과거의 드라마들이 가진 자극적인 설정들을 끌어오게 마련이다. 그 설정들 자체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들이 지나치게 자극으로 흐른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욕망의 불꽃’에서 낙태나 강간, 뺑소니 게다가 아이의 자살시도 장면이 등장하고, ‘자이언트’에서 납치와 폭력 수위가 높은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그 의미는 이해가 되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막장이라는 비판은 이런 부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시대극은 과거 어느 때보다 그 힘이 막강해졌다. 하지만 시대극이 본래의 목적인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보다 자극에만 더 치중하게 될 때, 그것은 자칫 시대극의 동반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극은 더 큰 감각적인 자극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떤 한계수위에 도달해 충족되지 않을 때 자칫 달라진 시청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와이파이 시대, 우리는 진정 소통하고 있나

휴대폰, 인터넷, 와이파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구든 얘기하고픈 사람에게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얘기를 건넬 수 있는 세상이다. 심지어 화상으로 뜬 얼굴을 마주보면서. 하지만 미디어가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촘촘하게 이어주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과연 잘 소통하고 있을까.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은 무한연결되어 있는 와이파이 시대에 물음표를 하나 던진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은 지금껏 단체로 미션을 수행해온 것과는 달리, 각각 사방 팔방으로 떼어놓고 미션을 시작한다. 김태호 PD는 1시간 내에 각자 지정된 방향으로 가장 멀리 간 사람을 포상할 것처럼 해 멤버들을 떼어놓은 후, 그들이 ‘무한도전’을 그동안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모일 것을 진짜 미션으로 내놓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실제 ‘무한도전’의 많은 미션에서 도구로도 활용되었던 휴대폰을 모두 반납시켰다는 점이다.

‘텔레파시’라는 아이템에는 ‘무한도전’이 교육실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붙여진 과장이 있다. 각자 공간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장소로 오라고 다른 멤버들에게 마치 진짜 텔레파시를 보내듯 과장하는 모습은 예능으로서의 웃음을 주기 위한 과장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간 ‘무한도전’이 해왔던 미션들에 대한 추억과 향수또한 담겨져 있다. 그 아련한 기억을 좇고 그 기억 속을 함께 했던 멤버들에 대한 소중함을 담아내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었다면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은 프로그램 전체를 감싸는 아련한 느낌까지 연출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텔레파시’라는 과장 이면에 담겨진 ‘소통’이라는 메시지는, ‘소통’되지 않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담아내면서 의미를 확장시킨다. 여기에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이 보여준 역설이 있다. 휴대폰 같은 보다 손쉬운 통신기기를 단절시켜놓자 더 절절해지는 진짜 소통의 욕구.

만일 각자 떼어놓고 휴대폰을 지참하게 한 채로 만나고 싶은 곳에서 만나라고 했다면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저 전화 통화하고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한 뒤 만나면 끝났을 테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과 마음이 전하는 소통은 찾기가 어려워진다.

멤버들이 허공을 향해 과장된 몸짓으로 텔레파시를 보내는 그 모습이 처음에는 우습다가 차츰 어떤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똑같이 생각한 장소에서 간절히 원했던 멤버가 서로 만났을 때 어떤 작은 울림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프로그램 중간에 자막으로 등장한 왓비컴즈를 비판한 패러디 노진요(노홍철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는 그래서 그 의미가 더 깊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속도나 전달력은 엄청나게 빨라지고 손쉬워졌지만 그것이 거기에 맞는 소통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무한도전’ 특유의 풍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대물'의 판타지, 현실 정치의 부재를 채우다

'대물'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서민들의 고충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표를 얻는 것, 그래서 권력을 계속 쥐고 있고 차츰 그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물론 이건 드라마 속 얘기다. 현실에는 그래도 서민들의 삶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통령. 온 김에 우리 동네나 한 번 들려주지. 당췌 모기 땜에 살 수가 있어야지. 지옥이 따로 없어." 매립지에 생긴 웅덩이 때문에 모기떼들이 마을을 덮쳐 사람이건 동물이건 살기 힘들어하지만, 정치인들의 관심은 보궐선거에 가 있다. 검사들은 현장에는 나가보지도 않고 모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주민들의 집단 폭력으로 몰아 부친다.

"그럼. 이 사람들 대신 나 구속해. 야.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냐? 이분들 데모한 거 김태복 때문이 아니라 모기떼 때문에 데모했다잖아. 검사란 게 현장 한 번 안가보고 사무실에 앉아서 뭐? 구속? 구속이 그렇게 쉬워?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나가는 판에 무조건 법 지키라고? 지키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딨어?"

서혜림(고현정)의 이 말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이것이 판타지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작금의 대중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물'이라는 드라마가 그토록 파괴력 있게 쭉쭉 뻗어나가는 이유가 된다.

'대물'은 바로 이 현실에서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사건들을 드라마라는 공간으로 가져와 한바탕 속 시원히 풀어내는 드라마다. 따라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드라마의 이야기는 당연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현실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이다.

정치인 혹은 검사 같은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이들이, 차 안에서, 공연장에서, 헬기 위에서, 정당 사무실에서, 갤러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서혜림이 모기떼로 고통 받는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충을 듣는 장면은 사뭇 대조적이다.

서혜림이 하도야(권상우) 검사에게 주민들의 입장에서 한 마디 쏘아부칠 때, 정치권에 새 인물을 찾는 강태산(차인표)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그녀에게 "정치할 생각 없냐"고 묻는 장면이 전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미 이 대조적인 장면들을 통해 '저런 정치인 하나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현실에서 정치라고 하면 으레 그러려니 포기하며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그래서 '대물'이 보여주는 정치의 세계는 하나의 판타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판타지라고 해서 그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것은 아니다. 바로 이 판타지는 다름 아닌 선거철만 되면 등장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사라지던 것이지만, 때론 정치인들의 최대관심사인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이 때문이다. 물론 구체적인 현실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드라마가 판타지를 통해 어떤 비전을 제시한다면, 그것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물'의 인기가 수직상승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팍팍하다는 반증이다. 서민들이 바라는 세상과 실제 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물'의 판타지는 액면 그대로 현실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적어도 서민들이 뭘 바라고 있는 지는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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