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사랑 사이, 당신은 행복한가

고단한 도시생활에 지쳐 며칠 쉬러 내려간 시골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나. 시간이 멈춰버린 듯 늘 그 자리에 앉아 언젠가는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묵묵히 한 때의 밥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에게서 당신은 무엇을 느꼈나.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은 바로 그 때 느꼈던 포근함, 피폐해진 몸을 다시 되살려놓던 창조적인 힘, 잔뜩 중독된 생활 속에서 날카로워진 신경을 보듬는 해독의 손길, 그런 것들로 인해 충만해지는 생명감 같은 걸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클럽이 망하고, 술 담배에 몸도 망가진(간경변이다) 영수(황정민)는 도시생활에 지쳐 시골 요양원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을 닮은 은희(임수정)를 만난다. 그녀는 폐 질환 환자로 8년 째 요양원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사랑을 한다. 허진호 감독이 캐릭터들의 몸을 병으로 망가뜨리고 이토록 먼 길을 떠나 시골 한적한 곳에서 둘을 만나게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 직전에 가서야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욕망이 아닌 사랑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어 두려우면서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 하루 하루가 소중해지는 시간, 영수는 도시에서는 잊고 있었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종종 도시적 삶의 재미로서의 쾌락과 혼동되어 왔던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은희가 주는 자연의 사랑 속에서 영수는 회복된다. 그리고 회복된 몸은 제멋대로 소비적이고 중독적이며 파괴적인 도시의 삶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다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욕망의 존재가 가진 얄궂은 운명으로 제시된다.

시골에 눌러앉아 이제는 시골 일도 하면서 살아가던 영수(황정민)는 어느 날 아저씨가 일당을 주면서 권하는 맥주를 단번에 비워내고는 말한다. “술 담배 어렵게 끊었는데.” 그러자 아저씨가 담배까지 권하며 말한다. “건강에는 좋은데 재미가 없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영수는 그 순간 자신이란 존재의 가벼움에 픽 웃어버린다. 도시에서 찾아온 친구 동준(류승수)은 사랑과 행복감이 깃든 영수와 은희의 보금자리를 “한 평에 얼마냐”고 재단해 놓는다. 함께 온 옛 애인 수연(공효진)은 은희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예쁘시네요”라며 “오빠는 복도 많다”고 함부로 말한다. 그래도 영수는 그들에게 뭐라 대들지 않는다. 그저 함께 웃으며 유희적 삶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시골집 자연처럼 질박하지만 정성스런 사랑을 담아 낸 어머니의 밥 한 끼에 원기를 회복한 철부지 아들들이 다시금 뒤편에 자연을 두고 무정하게 도시로 떠나가듯 영수도 은희를 떠난다. 그리고 비로소 시골집과 자연과 사랑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것은 파괴된 몸에서 욕망의 끝을 보았을 때이다. 도시에서 옛 애인인 수연(공효진)과 동거하면서 방탕하게 살던 어느 날, 영수는 수연에게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게 넌 재밌냐?” 재미를 좇던 삶이 파탄날 즈음, 영수는 그때서야 저 시골집이 주었던 진정한 행복감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영화 ‘행복’은 도시적 삶을 살아온 남자, 영수와 자연적 삶을 살아가는 여자, 은희의 사랑을 통해 단순한 남녀간의 멜로의 틀을 넘어선다. 영수와 은희는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욕망으로서의 술, 담배와 그것을 회복시키는 약초처럼, 도시와 자연, 소비와 생산, 중독과 해독, 욕망과 사랑,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쾌락과 행복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된다. 영화는 이로써 욕망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의 전형적 멜로드라마를 통해 “당신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한가”하고 묻는다.

도시로 친구와 애인을 만나러 왔을 때 영수에게 친구가 말한다. “우리 나이에 노후자금이 얼마가 필요한 지 알아? 4억 7천만 원이래.” 그 이야기를 은희에게 전하자 그녀가 말한다. “난 내일 없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안돼?” 감독은 아마도 이 대사를 통해 행복이 어디 있는가를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일이란 이름으로 경박한 수치의 돈 액수만큼의 두려움과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 속에서, 하루 하루를 그 자체로 행복하게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달고 살기에 본질에 가까워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은희 같은 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결국 대지모(大地母)에 한 점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왕과 나’와 ‘이산’, 같은 구도 다른 시점

‘왕과 나’와 ‘이산’은 여러 모로 닮은 점들이 많다. 먼저 이 두 사극은 과거의 왕조사극들이 다루던 정치와 전쟁이란 소재에서 벗어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의 구도를 보면 이 두 사극의 유사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왕과 나’는 성종(고주원)이 있고, 왕을 사모하는 윤소화(구혜선)가 있으며, 그 윤소화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김처선(오만석)이 있다. ‘이산’에는 이산(이서진)이 있고, 이산을 사모하는 성송연(한지민)이 있으며, 그 성송연을 남모르게 애모하는 박대수(이종수)가 있다.

이들이 서로 만나고 얽히는 과정 또한 유사하다. 어린 시절 우연히 세 사람은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왕이 될 세손은 여인에게 정표를 남기고 궁으로 돌아간다. 그 정표를 가진 여인은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또 한 사내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세손과의 약속에 따라 어떻게든 궁으로 들어가 왕을 만나려 한다. ‘왕과 나’와 ‘이산’의 인물설정과 이야기 구조는 이렇게 같다. 이유는 두 사극이 모두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과, 그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신분의식이 약한 어린 시절이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사한 구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극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무얼까. 사극을 이끌어 가는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과 나’의 시점은 전적으로 ‘나’인 김처선의 시점을 따라간다. 신분의 벽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충성해야할 왕 사이에 선 김처선은 한 보 떨어진 곳에서 더 멀리 가지도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반면 ‘이산’의 시점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궁에 들어가 정적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어린 시절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여인을 그리워하는 이산의 시점이 하나이고, 궁 밖에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이산과의 약조를 기억하면서 도화서를 통해 어떻게든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성송연의 시점이 또 하나다.

이렇게 다른 시점은 사극의 분위기를 확연하게 갈라놓는다. ‘왕과 나’의 시점이 되는 김처선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다. ‘삼능삼무의 운명’은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나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캐릭터를 대변한다. 따라서 이 사극은 비극을 그린다. 드라마 속에 잠시 쉬어갈 만한 코믹 캐릭터조차 허락하지 않는 처절한 비극이다.

하지만 ‘이산’은 이산과 성송연의 두 시점을 가져가기 때문에 비극이 되지 않는다. 사흘에 한 번씩 암살기도를 받아야 했던 이산이 가진 시점은 비극적이지만, 성송연이라는 상승하는 캐릭터는 이산마저도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산’에서 비극적인 캐릭터는 구도로 보면 ‘왕과 나’에서 김처선에 해당하는 박대수가 될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초점을 그에게 맞추지는 않는다. 드라마 속에 박달호(이희도)나 이천(지상렬) 같은 코믹한 캐릭터가 감초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점이 주는 발랄함 때문이다.

김재형 PD와 이병훈 PD는 제작발표회를 통해 이번 자신들이 연출할 사극이 과거의 자기 스타일과는 다를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의 이야기를 다루던 김재형 PD가 내시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과, 평범한 인물들의 성장기를 그리던 이병훈 PD가 왕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일 뿐,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연출스타일이 다르다는 건 아니었다. 김재형 PD는 특유의 클로즈업을 통해 비극적인 인물들의 감정선을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이병훈 PD는 단계마다 꽉 짜인 에피소드와 절제된 화면미학을 통해 시청자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어느 쪽이든 제대로 작품을 만난 셈이다.

이처럼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사극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해졌다는 반증이다. 과거의 사극이 역사 자체를 드라마화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면, 지금의 사극은 드라마가 역사를 입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만큼 사극은 재미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왕과 나’와 ‘이산’이 보여주는 비슷한 구도, 그러나 다른 시점이 주는 사극의 다른 맛은 우리에게 다양한 시각을 즐길 것을 요구한다.

‘이산’만이 가진 재미, 생존의 드라마

“저는 절대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갓 11살인 세손(박지빈)이 어미인 혜경궁 홍씨(견미리)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사극에서라면 모두들 들어가고 싶어하는 궁이며, 되고 싶어하는 왕이지만 세손은 왕이 되지 않겠단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혜경궁 홍씨의 답변은 더 충격적이다. “왕이 되어 권세를 누리라는 게 아닙니다. 세손께서는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산’은 궁이라는 세상의 감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어야 하는 한 남자, 이산의 이야기다.

세손이 성송연(이한나)을 만나 “이름을 불러다오”라고 말하고, 성송연이 거기에 맞춰 어색하게 “산아!”라고 부르며, 장차 왕이 될 세손이 천한 성송연과 박대수(권오민)에게 동무라 부르는 것처럼, 이 사극은 정조라는 왕을 그리기보다는 이산이라는 한 사내의 고달픈 삶을 그려낸다. 따라서 이 사극을 부르는데 있어서 흔히 ‘이산 정조’라 칭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굳이 사극의 제목을 ‘이산’이라 한 뜻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세손이라는 상징적인 위치로서 겪는 일로 치부하기엔 11살짜리 아이가 겪는 온갖 시험들은 너무나 가혹해 보인다. 성송연, 박대수 같은 동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의젓함이 어엿한 왕의 씨임을 증명하지만, 혜경궁 홍씨 앞에서 “어마마마 궁이 무섭습니다. 할바마마도 무섭습니다.”라고 흐느끼는 세손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이런 시련 속으로 빠뜨렸을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인 사도세자(이창훈)의 죽음 때문이다. 드라마는 영조(이순재)가 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저 영조가 꿈을 꾼 장면이 등장할 뿐이고 누군가의 모함(아마도 노론의)을 받은 것으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도세자가 왜 죽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죽음으로 해서 남겨진 불씨, 즉 세손 이산마저도 제거될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게 하고 권세를 얻은 이들이 장악한 궁은 이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거처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 죽음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장이 된다. 이산은 그들 앞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해 살아남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는 위기상황에 몰린 한 주인공이 그 단계를 헤쳐나가는 롤 플레잉 게임을 닮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단지 이산 단독의 게임이 아닌, 성송연과 박대수 같은 지체 낮은 자들이 함께 하는 게임이란 점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궁 밖에서 저자거리로 도망쳤다가 왈자패들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나, 세손이 거처하는 궁 앞마당에서 조총이 발견되어 위기상황에 몰렸을 때도 결정적인 힘을 주는 이는 성송연이다. 그것은 먼 거리에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상관없이 사건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니 이들 간에 피어하는 사랑은 애틋함 이상의 애절함을 담는다. 함께 서로를 생존하게 하면서 생겨난 애정이기 때문이다.

‘이산’은 궁에 갇혀 저자거리 보통사람들보다도 불행한 삶을 살아야했던 이산이란 이름의 정조를 다룬다. 무소불위의 왕이 중심에 되어 흘러가던 과거의 사극들과 비교한다면 ‘이산’이 그리는 왕은 이다지도 다르다. 왕이 싫고 궁이 싫은, 하지만 생존을 위해 왕이 되어야만 하는 한 사내가 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사투의 시간들. 그리고 기서 피어나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 이것이 ‘이산’이란 사극만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영역이다.

‘태왕사신기’의 배용준 vs ‘히어로’의 기무라 타쿠야

최근 우리나라와 일본의 드라마 팬들은 두 명의 카리스마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왕사신기’로 컴백한 배용준과,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동명의 드라마를 영화화한 ‘히어로’로 일본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기무라 타쿠야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드라마가 모두 영웅과 카리스마에 대한 이야기란 점이다.

포용하는 카리스마, 담덕
‘겨울연가’의 부드러운 남자, 배용준이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를 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우려했던 것은 카리스마 연기가 될까하는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인 대결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태왕사신기’ 속에서 배용준이 연기하는 담덕은 그 어떤 영웅들보다 인상적인 카리스마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포용하는 카리스마다.

‘태왕사신기’는 궁극적으로 이 카리스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카리스마라고 하면 우린 흔히 무언가 강압적인 힘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카리스마는 막스 베버가 지배형태의 유형을 설명하면서 종교용어에서 차용한 단어다. 베버는 카리스마가 강압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고 피지배자의 자발적인 인정, 신뢰, 숭배를 통해 생겨난다고 말한다. 즉 ‘태왕사신기’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지배형태 중 카리스마적 지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태왕이 태왕으로 서기 위해 사신(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드라마 설정이 그걸 말해준다. 사신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신화적 영물이고 그것은 또한 네 부족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태왕사신기’는 쥬신의 별이 빛나던 날, 신탁을 받고 태어난 두 명의 인물이 사신을 취하는 장기게임 같은 드라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담덕과 연호개(윤태영)가 구사하는 카리스마가 된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은 강한 것까지를 포용한다’는 말은 배용준이 담덕을 통해 보여주는 카리스마의 전모이다. 부드러운 미소 속에 숨겨진 강인한 결단력과 포용력은 장차 태왕이 될 담덕의 카리스마가 사신들을 어떻게 사로잡을 것인지를 예견케 하는 대목이다. 주목할 것은 마초적인 과거 카리스마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최민수가 화천회의 대장로 역할을 하면서 담덕과 대결한다는 점이다.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카리스마를 요구한다.

숨겨진 카리스마, 쿠리우 코헤이
반면 ‘히어로’에서 중졸에 검정고시로 검사가 된 쿠리우 코헤이를 연기하는 기무라 타쿠야는 일본인 특유의 숨겨진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도무지 검사 같지 않아 보이는 쿠리우에게 팀원들은 모두 불신을 보이고, 부검사가 되고자 열성을 다해 쿠리우의 사무관이 된 아마미야(마츠 다카코)마저 점점 실망하게 되는 상황. 그러나 쿠리우는 자신이 해결한 일마저 남이 한 것처럼 둘러댈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했던 관료주의에 의해 매몰되고 있던 팀원들이 이 쿠리우 검사에 의해 차츰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에서, 기무라 타쿠야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된 일본사회의 리더 상을 제대로 연기해낸다. 이 드라마가 역대 시청률 1위에 랭크된 것은, 일본 관료주의사회를 대변하는 듯한 도쿄지검에 벌어지는 변화가 강압적이거나 과격한 양상이 아닌 남 모르는 영웅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데서 많은 공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숨은 손’과 ‘숨은 발’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가는 쿠리우가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집단을 이끌어나가기 보다는 ‘원칙에 맞게 솔선수범 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지배는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발적인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역시 사무라이로 대변되던 일본 전통의 카리스마와는 달라진 카리스마라 할 수 있다.

달라진 시대, 달라진 카리스마
나라가 다르고 작품이 달라도 거기 표현되는 카리스마의 양상은 유사하다. 그것은 강력한 힘 앞에 굴복시키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저 스스로 진심에서 우러나는 충성심을 끌어내는 카리스마다. 이것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조직 속의 팀장과 팀원의 관계를 대변하기도 한다. 상명하복하던 과거의 수직적인 리더십은 이제 구태가 되었다.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카리스마를 가진 팀장의 리더십이란 팀원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장점을 극대화시켜주는 사람이다.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이 희구하는 영웅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다. 이제 영웅은 더 이상 신화적인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평범 속의 비범을 보이는 자다. 한일 두 드라마 지존이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이러한 현재적 가치를 반영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작금에 방영되고 있는 사극들이 일제히 왕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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