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스페셜'이 전한 진정한 행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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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스페셜'(사진출처:MBC)

지리산 동래마을에 사는 버들치 시인 박남준은 자장면 하나를 먹으면서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고생만 하면서 사냐"고. "이런 호강도 가끔은 가져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지리산 중기마을에 사는 낙장불입 시인 이원규는 말한다. "몇 십 억씩 가진 사람들 많지만 자기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저기 섬진강이 내려다보이고, 친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최도사로 불리는 최현은 목욕을 하면서 "4500원 주고 이렇게 행복한 게 없잖아"하고 말한다. 이런 호사가 없다는 얘기다.

아마도 도시의 욕망에 찌들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장면 한 그릇과 내려다보이는 섬진강 풍경이나 친한 친구들, 그리고 4500원짜리 목욕을 가지고 호사라고 표현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최도사가 겨울 한 복판에서 햇볕 한 자락을 맞으며 겨울에 빨리 지는 햇볕을 아쉬워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 되었다. 아마도 욕망 없이 가벼워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도사의 삶'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런 까닭일 게다.

'MBC 스페셜-지리산에서 행복을 배우다' 편이 지리산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은 진정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일간지 기자로 살다가 시인의 길로 들어선 이원규 시인은 "최저로 조금 벌어도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10분의 1 정도로 살 수 있다"며 심지어 "가난함을 견디는 재미"도 있다고 말한다. 박남준 시인은 "도시에서 살다보니 삭막하고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느꼈다"면서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젊은 날엔 외항선도 타보고 안 해본 일이 없다는 최도사 최현은 "마음이 비워지면 힘들게 없다"며 "힘들다는 건 뭐냐면 욕심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근원은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낸 공지영 작가는 더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행복해지기를 위해서 고민하는 이 사람들의 "얽매이지 않는" 삶이 너무나 부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고립되어 얻는 그런 행복이 아니다. 박남준 시인의 집 보일러가 고장 나자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뚝딱뚝딱 고쳐주고는 막걸리 한 사발에 그 수고로움을 나누는 삶이 주는 공동체적 행복감처럼, 그들의 행복은 세상과의 고리를 끊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세상과 나누어 함께 행복해지는 삶이다. 지리산 학교와 동네 밴드는 바로 그런 그의 실천이 담겨진 문화운동의 일환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MBC 스페셜' 역시 그들의 행복 나눔을 영상으로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하고 싶은 걸 다하고 갖고 싶은 걸 다 갖는 게 행복은 아니다.-박남준 시인" "지금 행복하고 내일 불행한 게 낫다-최도사" "내가 내 자신을 밀어붙이다 보면 시는 발자국처럼 남을 것이다-이원규 시인" 도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들의 가난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삶이 전하는 울림은 크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터진 보일러를 고쳐주고는 갑작스런 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난 고 안차종씨의 부음 앞에 오열하던 박남준 시인이 봄바람에 복수초 새싹이 피어난 걸 보고 누가 밟을까 저어하며 푯말까지 만들어 세우는 그 소박한 삶이 깊은 여운을 주는 건 어쩌면 거기서 진정한 행복의 한 자락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MBC 스페셜-지리산에서 행복을 배우다' 편은 그 가난하지만 부자인 행복을 전해주었다.

시사랭크쇼 '열광', '명작스캔들', 코멘트로 즐거워지는 토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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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스캔들'(사진출처:KBS)

코멘테이터(commentator). 쉽게 말해 '해설자'다. 흔히 우리가 보는 코멘테이터는 스포츠 해설가다. 경기를 보면서 흐름과 전략 등을 짚어주고 전체의 맥을 그려준다. 코멘테이터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축구경기를 볼륨 없이 보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한 해설은 그 사안 자체를 더 즐기게 해준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방송에 이 코멘테이터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물론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코멘테이터들은 늘 등장해왔다. 하지만 정보에 재미가 겹쳐지면서 코멘테이터로 방송 출연하는 전문가들은 정보만이 아니라 재미까지 전해주고 있다.

시사랭크쇼 '열광'은 아예 엔터테이너에 가까운 코멘테이터들의 각축장이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저자이자 명지대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인 김정운 교수는 깊이 있는 해설과 함께 재치 있는 예능감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열광'은 시사를 소재로 끌어온 예능 프로그램으로 이러한 예능감을 가진 코멘테이터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는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은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거의 모든 사안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잡학의 달인'으로 불리는 그는 방송 내내 쉴 새 없이 이야기에 토를 단다. 심지어 김정운 교수가 혀를 내두를 정도. "얘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더 힘들다"고 할 정도로 재치 있는 코멘테이터로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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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랭크쇼 열광'(사진출처:tvN)

클래지콰이의 호란 역시 독특한 코멘테이터다. 연세대 심리학과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겉보기에는 섹시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일단 어떤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도 지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사실 코멘테이터로서 이런 양가적인 모습을 모두 갖추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진지함과 솔직함이 그녀가 던지는 코멘트의 매력이다.

최근 KBS에서 새로 시작한 '명작스캔들' 역시 코멘테이터들의 프로그램이다. '열광'에 이어 이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김정운 교수는 조영남과 함께 그 날 그 날 소개되는 명작들에 대한 재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명작을 놓고 다차원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한 이 프로그램의 형식 상, 다채로운 코멘터이터들은 필수적이다. 드가의 '스타'를 놓고 발레리나 김주원의 코멘트를 듣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미술관에 도슨트(Docentㆍ안내인)가 명작 감상에 깊이를 더해주듯이 '명작스캔들'의 코멘테이터들은 좀 더 즐겁게 명작에 빠져들게 해준다.

코멘테이터들의 시대가 오는 이유는 그 어느 때보다 정보에 대한 지적인 갈증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정보는 더 이상 배워야할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지식은 물론이고 끼로 무장한 코멘테이터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예능보다 재미있는 해설이 가능해진 요즘, 시사나 교양 프로그램 역시 고리타분함을 벗어던지고 부쩍 대중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코멘테이터가 코멘테이너(코멘테이터+엔터테이너)로 넓혀져 가는 과정. 어쨌거나 대중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말해주는 우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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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 감독의 '격정소나타'

'그 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어째서 이렇게 예의바르게 마지막 쪽지를 남겼을까.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녀는 왜 오히려 창피하다고까지 말하며 쪽지를 남겼을까. 왜 그냥 밥도 아니고 남는 밥이라도 달라고 했을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은 사람이 어쩌면 이다지도 반듯할 수 있었을까.

지난달 말 경기 안양시 월세방에서 지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급기야 운명을 달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남긴 마지막 쪽지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21세기에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나리오 작가라면 그래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도대체 지금은 어떤 일들이 벌어지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걸까. 이것은 과연 시나리오 작가군에 한정된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땅에 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통용되는 이야기일까. 어쩌면 앞뒤 꽉 막힌 삶을 버텨내야 하는 88만원 세대 전체의 비극일까. 비정규직으로 통칭되는 이 사회의 부조리일까. 혹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가려져왔던 비극은 아닐까. 이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고 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화조차 내지 못하고 간 최고은씨처럼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영화판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게 영화판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가를. 1년 내내 시나리오를 붙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작업을 하고 고작 300만원이란다. 그런데 실제 영화판 얘기를 들어보면 그나마 300만원이라도 받는 건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받는다는 얘기다. 뭐 하나 명함 내밀 것 없이 영화가 좋아 이 판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그런 용돈(?)조차 없다고 한다. "한 번 해봐"하고 부추기고, 곶감 빼먹듯이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모조리 빼서 투자자들에게 던져놓고는 잘 안되면 "네 실력 탓"이라고 말하는 게 부지기수란다.

상황이 이러니 영화판에서 오로지 시나리오만을 쓰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래서 입봉이 걸려있는 연출 파트쪽에서 일을 하는 감독 지망생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계약금이라는 것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달에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를 착수금조로 몇 달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다 영화화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야무야되기 마련이다. 그나마 나은 편이 감독인지라, 시나리오 작가는 물론이고 스텝들도 대부분 감독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딱히 감독이 꿈이어서가 아니라, 감독이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판에 비일비재한 부조리한 일처리 방식들은 악명 높기 이를 데 없다. 마치 대단한 거라도 주는 것처럼 취업에 목마른 영화 지망생들을 꼬드겨 아이디어만 쏙 빼먹고 버린다거나, 3개월 찍고 제작비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6개월이고 1년이고 계속 찍으며 다 찍어야 돈을 준다고 한다거나, 마치 금방이라도 영화화 될 것처럼 시나리오 작가를 부추기고는 몇 년 동안 작가를 오도 가도 못하게 묶어놓는다거나... 이것은 시스템이 부조리하다기보다는 아예 시스템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다. 그래서 업계에 있는 젊은이들은 차라리 회사 같은 시스템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봉이 적더라도 어떤 룰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진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막혀있는 건, 단지 영화판만의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종 공모에서 당선되었다고 해도 드라마판에서 이런 신예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신진들이 그나마 숨통을 틜 수 있었던 단편 드라마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무엇보다 새로운 신인들에 투자를 하기보다는 이미 뜬 기성작가들에만 몰려드는 제작 분위기는 큰 문제로 지목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이런 투자 개념 없이 대박만을 노리는 상황을 "비겁한 짓"이라고 꼬집는다.

실제로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들 속에서 신예 작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기획안들이 편성을 잡아내기 위해 방송사로 속속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이미 검증된 작가들만이 겨우 그 바늘구멍을 뚫기 마련이다. 이건 작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톱 배우들은 여기저기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바쁘지만 신인 배우들은 새롭게 자리를 차고 들어갈 여지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가요계의 불공정 계약 문제 역시 이런 신인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돌이 되려는 가수 지망생들은 넘쳐나고 그들을 키워내는 기획사의 문은 좁기 때문에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해도 일단 채용만 되면 이를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 대형기획사들은 그래도 그나마 과거보다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는 편이다. 팬들이나 대중들의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이 기획사 시스템에까지도 넓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기획사의 생리상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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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

하지만 가요계 전체를 들여다보면 기획사 중심의 가요판에 가려진 그림자가 암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그토록 깊었던 것은 우리 사회 청춘들 앞에 놓여진 장벽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굳이 88만원 세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작금의 청춘들은 기성사회로의 진입로가 막혀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문화 전반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된 이유로 사회가 자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돈을 쥔 자본주들이 신인을 키워내기보다는 이미 진출한 기성인(기성작가, 기성배우, 기획사 가수, 경력자들)들에게 몰두하고 그러다보니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젊은 피들이 고갈되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문화계까지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게임이 된 상황 속에서, 심지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젊은 희생을 담보로 굴러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당장에는 한류다 OECD다 하면서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사회가 신인들의 사회 진입 없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은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청년 실업 같은 작금의 청춘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대체 언제까지 젊은 희생을 담보로 갈 것인가. 최고은씨가 남긴 쪽지가 가슴 아프고 심지어 화가 나는 건, 그 죽음 앞에서까지 여전히 그 고통을 내면화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여주는 반듯함 때문이다. 왜 그녀는 화라도 내지 않았던가. 아니 어떤 현실이 그녀를 화조차 내지 못하고 마치 자기 잘못처럼 여기게 만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이대로 놔두면 장차 벌어질 대중문화의 죽음을, 또 나아가 사회의 죽음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다양성을 담은 ‘종결자’, 표현은 획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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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송승헌'(사진출처:OSEN, MBC)

이른바 ‘종결자’ 시대다. 인터넷을 열거나 TV를 켜면 어디서든 ‘종결자’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종류도 가지가지다. 아이유처럼 고음 종결자가 있는 반면, 송승헌 같은 복근 종결자도 있고, ‘시크릿 가든’의 김사랑에서부터 패션모델 장윤주까지 무수히 많은 몸매 종결자들도 있다. 물론 투기 종결자라거나 정치개그 종결자처럼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

사실 너무 많은 종결자들이 넘쳐나다 보니 이제 누가 진짜 종결자인지는 잘 모르는 지경이다. 하지만 그래도 ‘종결자’라는 표현 자체가 강하다보니 일단 그런 제목이 붙어 있으면 들춰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 이렇게 보면 이 단어는 이 시대 최고의 ‘낚시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종결자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최고’라는 뜻이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말미에 종결자라고 붙여놓으면 그 분야에서 더 이상은 넘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즉 누가 낫고 누가 덜하다고 말들이 많은데, 그런 말들을 ‘종결’시킬만한 존재라는 얘기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왜 ‘종결자’라는 단어가 이처럼 횡행하는지가 보인다.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저마다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현실이 ‘종결자’ 속에는 배경으로 깔려 있다. 즉 현실은 정반대로 어느 하나가 최고로 군림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종결자’라는 말은 ‘최고’ 혹은 ‘1위’ 같은 단어가 가진 구체적인 이유가 삭제된 경우가 많다. 그저 감성적으로 느낌으로 ‘종결자’라 붙여지고 추앙되어지는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

언론이 이 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프로그램이나 연예인 띄워주기에서 이 만큼 강력한 ‘낚시’의 힘을 가진 단어가 없는데다가, 1위니 최고니 하는 말에 따라붙는 구체적인 책임 또한 없다. 종결자라는 단어에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면서도 시선 잡아끄는 데는 확고한 힘이 느껴진다. 수많은 정보들이 경쟁하듯 서야하는 인터넷이나 방송 같은 공간 속에서 ‘종결자’는 말 그대로 표현의 종결자다.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 특별한 분야의 ‘종결자’라고 주장한 후에 말 뜻 그대로라면 더 이상 없어야 할 그 분야의 ‘종결자’가 계속 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금의 정보들이 가진 유희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엄밀하고 진지한 정보들보다는 휘발성 강한 유희적인 정보들이 난립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 자체는 점점 놀이화되고 있는 작금의 매체 환경 속에서 지극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무수한 ‘종결자들’의 홍수 속에 진정한 고수들이 묻히고 있다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서로 ‘종결자’라 소리치는 상황은 때론 공해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한 때의 유행어라 해도 너무 획일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종결자’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많은 다양성을 밑그림으로 갖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종결자라는 이 다양성의 주장은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 ‘종결자’라는 말은 유행처럼 번지며 그 다양성을 해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다양한 최고들만큼, 최고를 표현하는 다연한 말들이 나타나기는 어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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