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대중문화에 있어서 동성애는 이제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물론 동성애 코드와 동성애 컨텐츠는 다르다. 동성애 코드는 남장여자 같은 캐릭터가 등장해 동성애 같은 상황을 연출하지만 분명히 이성애를 다룬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 ‘미인도’같은 것이 그 부류다. 반면 동성애 컨텐츠는 게이들의 문제를 천착한 ‘후회하지 않아’나 최근 개봉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같은 것들로 이들 컨텐츠들은 진짜 동성애자들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동성애 코드나 동성애 컨텐츠나 불문하고 바라보면 지금 대중문화 속에서 동성애라는 소재 자체는 과거처럼 음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특히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 이르면 동성애는 마치 공기처럼 일상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 꽃미남 게이를 조연으로 세운 영화는 대중들에게 “넌 여자를 좋아해? 난 남자를 좋아해! 그게 어때서?”하고 묻는 것만 같다. 과거 무언가 진중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연상케 했던 동성애라는 소재에 익숙한 대중들은 이 명랑발랄한 동성애 영화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지금, 동성애가 대중문화 속에서 공기처럼 퍼져나가고 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이성애, 즉 이성 간에 벌어지는 멜로가 어느덧 식상한 어떤 것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깔려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드라마에서 우려먹을대로 우려먹은 삼각 사각의 멜로나 신파조의 설정들은 이런 인식의 밑바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영화로서는 늘 연말이 되면 쏟아져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가 그 역할을 했을 터이다.

이런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멜로가 아닌 인간애를 다루려고 하는 영상 컨텐츠는 때론 남녀의 출연을 꺼리기도 한다. 동성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본래는 남녀 주인공을 세우려했다가 결국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준익 감독은 이미 전작 ‘왕의 남자’에서도 두 남자의 동성애를 끌어들여 예술혼과 인간애로 컨텐츠가 가진 주제를 확장시킨 전례가 있다.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남녀로 구분되던 성별구분이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명확히 나눠져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농경사회에서의 성별 역할의 차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육체적인 노동력이 아닌 정신적인 노동력을 사용하는 정보사회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사라진다. 오히려 여성들의 노동력이 섬세한 정보사회의 업무에 더 적합해진다.

남녀 구분은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으로 바뀌게 된다. 남자라도 여성성이 많은 사람이 있고, 여자라도 남성성이 많은 사람이 지금 시대에 남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동성애는 바로 이 시선 속에 자연스러움을 얻게 된다. 남성이지만 강한 여성성이 실제 생물학적 성까지도 변모시킨 존재로서 동성애자는 외계인이 아닌 우리들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실제 사회의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특히 금기시되었던 남자와 남자 간의 동성애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문화구매자들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의 위상이 그만큼 커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등장하는 남성들이 모두 꽃미남들인 점은 과거 여성들의 성 상품화가 이제는 남성들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대중문화를 장악한 동성애는 그저 자극적인 소재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점점 중성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를 보여주는 지표인지도 모른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이하나의 이미지에 맞춰진 음악 프로그램, ‘이하나의 페퍼민트’

‘윤도현의 러브레터’의 자리에 ‘이하나의 페퍼민트’가 들어섰다.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윤도현의 러브레터’의 분위기에 익숙해졌었던 분들이라면 ‘이하나의 페퍼민트’가 낯설게도 느껴졌을 것이다.

가장 다르게 다가온 것은 분위기가 훨씬 차분해졌다는 점이다. ‘러브레터’가 윤도현의 록커로서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프로그램 속으로 가져와 좀더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무대를 연출했다면, ‘페퍼민트’는 이하나 특유의 엉뚱하면서도 귀엽고 또 한편으로는 차분한 이미지를 프로그램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대로 무대의 변화로도 연결되었다. 록커로서의 윤도현과 어울리는 ‘러브레터’의 넓은 무대는 통기타를 들고 분위기 있는 노래를 조분조분 들려줄 것만 같은 이하나와 어울리는 소극장 분위기로 바뀌었다. 서서 진행하는 윤도현과 앉아서 얘기하는 이하나도 이 무대 분위기와 같이 달라진 점이다.

게스트에 있어서 달라진 점을 찾기는 어렵다. 때론 감미롭고 때론 힘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온 박효신, 환상적인 기타의 선율을 느끼게 해준 이병우, 늘 생동감 넘치는 무대매너를 보여주는 이승환, 그리고 엉뚱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까지 다채로운 장르를 한 무대 위에 세우는 그 방식은 동일했다.

물론 음악전공자로서 실제로 노래도 하고 연주도 하지만 프로가수는 아니라는 점은 윤도현과 확실히 차별화 되는 지점이다. 윤도현의 진행이 기본적으로 음악 자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깔고 들어간다면 이하나는 오히려 관객의 입장으로서 같은 눈높이에서의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하나는 아마도 첫 회여서인지 아직까지는 적응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진행자로서 주도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때론 지나치게 웃으면서 탄성을 흘리다 진행을 놓치는 부분은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이다. 첫 회라지만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할 정도의 어색함은 분명 수정되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이하나가 가진 순수한 면모는 그대로 살려야 할 것이다. 혹자는 오히려 어색함이 이하나의 매력이라고도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게스트들은 여전히 그 선정이 균형 잡혀 있고, 무대도 이하나를 위해 준비가 끝났다. 또 아직 긴장해서인지 매력이 드러나지 않지만 최소한 그 순수한 면모는 확인한 셈이니 확실히 이하나의 출연이 프로그램의 차별화를 만들 가능성은 보인 셈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하나가 자신감을 찾는 일이다.

‘미인도’의 남장여자, ‘바람의 화원’과 뭐가 다른가

신윤복 열풍이다. 이정명 작가의 팩션 ‘바람의 화원’이 이 불황기에도 연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고,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매회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지난 달 열렸던 간송미술관 개관 70주년 행사에는 때아닌 관객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었다. 다름 아닌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화 ‘미인도’가 개봉함으로써 신윤복 신드롬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전망. 왜 신윤복은 갑자기 이 시대에 등장했을까. 그것도 남장여자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 예술가의 초상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사료가 만든 상상력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그나마 남아있는 그림들의 필치가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흔하게 알려진 ‘단오풍정’같은 그림을 두고 봐도 세세한 붓 터치와 인물묘사, 게다가 철저히 계산된 듯한 구도와 색감까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호방함이 느껴지는 김홍도의 남성적인 필치와는 대조적이다. 이정명 필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바로 그 그림이 전해주는 여성성의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림의 배경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새 그림은 신윤복이 당대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억압적인 체제 속에 자유를 갈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배경은 없고 중심인물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 사람의 심정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새를 그려놓고 “이 새는 배경이 없을 때는 그저 새일 뿐”이지만, 배경으로 새장을 그려 넣으면 “새장 밖으로 날아가고픈 심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림의 소재나 화풍이 이미 정해져 있어 그 틀을 벗어나면 이단이 되어버리던 당대 사회에서 신윤복이 가졌던 ‘배경에의 의식’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창조하려는 그 여성성의 마음을 가졌지만 체제에 순응해야 하는 남성성의 사회 속에서 겪었을 억압.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남장여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남자로서 살아가야 하고, 대신 자신 속의 여성을 숨겨야 하는 신윤복이 자신이 채우지 못하는 여성의 욕구를 그림을 통해 표출한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드라마 속,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가 가지는 의미는 그저 그것이 신윤복의 자화상이라는 표면적인 설정에만 있지 않다. 거기에는 남장여자로서 억압된 미적 욕구를 채우려는 욕망이 꿈틀댄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영화 ‘미인도’, 성이라는 자유
하지만 영화 ‘미인도’로 오면 이 남장여자라는 껍질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담는다. 각종 성행위를 묘사한 그림들에 대해 조정대신들이 음란하다고 꾸짖을 때, 신윤복은 자신의 손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 그림 속의 남녀는 자연스럽게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서로에게 이끌리는 모습들이며 그 인간적인 부족함은 자신에게는 오히려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신윤복은 말한다.

영화 ‘미인도’에도 새장과 새의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예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미로 읽힌다. 스승 김홍도가 그 그림이 가진 체제반항을 운운할 때, 신윤복은 자신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보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미인도’는 어린 시절 자신 때문에 오빠가 자살을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남자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다 어느 날 당당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지점에 남장여자의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극중 신윤복이 껍질로서의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오로지 한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지나치게 멜로와 성적 묘사에 집착한 면이 있다. 따라서 남장여자 설정이 가진 본래의 이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 속에 묻혀 버린다. ‘센세이션 조선 멜로’라는 문구는 자칫 신윤복이라는 천재를 상업적으로 활용한 혐의를 갖게 만든다.

그 성과가 무엇이든 간에 신윤복이라는 인물이 남장여자로 이 시대에 탄생한 것은 아마도 지금 시대가 지향하는 여성성의 사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던 과거에서 이제는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누어지는 시대, 남장여자는 어쩌면 바로 이 중성적인 시대를 담는 아이콘인지도 모른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바람의 화원’은 바람 같은 작품”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다. 아니 이건 인터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강남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고 차를 마시며 ‘바람의 화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사생활을 중시해 인터뷰를 극도로 꺼린다는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필자는 사진기와 녹음기, 심지어는 노트까지 포기했다. 대신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다. 그러니 이 글은 애초부터 인터뷰 형식에 앉혀질 운명이 아니었다. 다만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바람처럼 떠다니는 이정명 작가의 이야기, 그 단편들을 적어놓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 막연함 속에서 이정명 작가가 신윤복의 그림을 앞에 두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며 느꼈을 막막함과 또 그 속의 어떤 설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첫 인상, 성냥갑에 그려진 신윤복의 ‘단오풍정’
이 불황에, 그것도 한번도 불황 아닌 적이 없었던 출판계에서 꾸준히 베스트셀러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이정명 작가의 첫인상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그런 사람, 마치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 그저 지나가는 행인 같은 평범함을 간직한.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동그란 안경 너머로 진지하게 쳐다보는 그 눈빛은 ‘바람의 화원’의 애체를 끼고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김홍도를 닮았다. 어딘지 빈 듯 보이지만 막상 작품 앞에 서면 특유의 열정 속으로 빠져드는 그런 사람.

그의 첫인상이 익숙해질 즈음, 그가 신윤복이란 화원을 접하게된 첫인상이 궁금해졌다. “처음 신윤복을 접한 건 아주 어렸을 적 성냥갑에 그려진 여인이 그네를 타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신윤복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림, ‘단오풍정(端午風情)’이었다. 그 그림의 여성적으로 보일 만큼 섬세한 필치와 색감을 보면서 어린 미래의 작가는 그 그림의 화원을 여성으로 상상해왔다고 했다. 오히려 나중에 그 화원인 신윤복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정도로.

그림은 그리움, 그 그리움을 이야기로 엮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 김홍도의 질문에 도화서 생도인 신윤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바람의 화원’에 등장하는 이 대화는 또한 이정명 작가가 이 작품을 어떻게 써나갔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연대기적으로 신윤복의 삶을 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림들이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림을 앞에 놓고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말해주는 것을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상상하는 작가의 눈길이 느껴졌다.

“서양화에는 그림만큼 유명한 일화들도 많이 내려오고 있죠. 그 이야기들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림을 더욱 풍요롭게 해줍니다.” 작가는 우리네 그림들 속에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일화를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정명 작가가 밝힌 ‘바람의 화원’의 작법은 그림들이 말해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짧은 이야기들을 구성과 상관없이 적어두는 것이었다. 사실상 작가의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2006)’보다 더 먼저 이 작품에 대한 구상과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진 메모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메모만큼 쌓여진 그리움은 다시 작품으로 꿰어졌을 터였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좋은 이유
“이 작품은 장태유 PD가 아니면 어려운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정명 작가의 장태유 PD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장태유 PD 특유의 미술적인 감각은 물론이고, 특유의 완성도에 대한 근성은 남다르다고 한다. 이것은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특히 이정명 작가는 사실 별로 드라마에 대해 상의를 한 적도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장태유 PD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면서 전율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캐릭터를 생각할 때, 조금은 허술한 듯 보이면서도 작업에 들어가면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그런 인물로 그려졌으면 하고 생각”했다는 이정명 작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장태유 PD는 그렇게 그려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소설에서는 군더더기로 생각되어 사용하지 않았던) 그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 같은 것들이 오히려 드라마에서는 리얼리티를 강화해준다는 점이라고 이정명 작가는 밝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PD를 신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이미 밝혔던 ‘그림 속의 이야기에 대한 매혹’을 드라마가 실제 영상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일 것이다. ‘단오풍정’ 그림 속의 아낙네들은 드라마 속으로 걸어나와 신윤복을 만나고, 드라마는 신윤복이 그 그림을 그리게 되는 상상의 이야기를 눈앞에 그려낸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정명 작가의 겸손일 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는 또한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보다 소설이 좋은 이유
“팩션은 역사소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역사에 추리가 들어가는 하나의 장르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죠. 굳이 말하자면 팩션은 역사추리에 가깝습니다.” 이정명 작가는 최근 영상 컨텐츠로 각광받고 있는 팩션이 그저 말 그대로의 팩트(사실)+픽션(상상)의 결합체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바로 잡아주었다. 팩션은 저 ‘장미의 이름’처럼 역사적인 팩트를 추리형식으로 파고 들어가는 하나의 특정한 장르라는 것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소설 ‘바람의 화원’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팩션이라는 장르의 성격으로 규정되는 추리형식이 소설 속에 더 많이 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직 드라마가 반 정도만 진행되어 있어 후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까지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추리형식보다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의 화원으로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드라마와는 달리 소설은 팩션 특유의 추리가 주는 묘미가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신윤복 신드롬? 바람으로 끝나지 않길
“매체의 힘을 느꼈지요.” 드라마화 되면서 불기 시작한 신윤복 신드롬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운을 뗐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간송미술관은 신윤복 신드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신드롬은 현재 개봉을 준비중인 영화 ‘미인도’를 통해 또 한번 이어질 태세다. 하지만 이런 신드롬에 대해서 작가는 신중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이런 신드롬은 금세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생리죠. 제발 한 때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꾸준히 이어지길 바랍니다.”

‘바람의 화원’은 그 제목처럼 손아귀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작품이라고 작가는 밝혔다. 드라마 속에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사랑은 사제지간(김홍도)의 정인지, 형제지간(신영복)의 우애인지, 혹은 예술가가 갖는 미의 화신, 즉 뮤즈(정향)에 대한 사랑인지 모든 것이 복합적이고 애매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이 ‘바람의 화원’만이 주는 독특한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그림자처럼 보이고, 때로는 실체처럼 보이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김홍도가 어진화사 앞에서 신윤복의 그림자에 매혹되면서 느꼈던 그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과 작가는 닮는다더니,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의 화원’과 이정명 작가는 서로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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