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극 점령한 <착하지>의 세대적인 안배와 공감대

 

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는 세 세대별로 각기 다른 관전 포인트가 있다. 그 첫 번째는 강순옥(김혜자)과 장모란(장미희)의 복잡 미묘한 심리전이다. 사라진 남편을 사이에 두고 본처와 내연녀인 두 사람의 관계는 앙숙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면이 있다. 처음 만나자마자 강순옥이 장모란의 가슴을 발로 차버린 것에서 드러나듯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앙금이 깔려 있지만, 그럼에도 시한부 인생인 장모란을 집으로 초대해 좋은 약과 밥을 챙겨 먹이는 강순옥에게서는 여성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의 정 혹은 동지의식 같은 것이 느껴진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사진출처:KBS)'

아마도 강순옥과 장모란의 이런 관계는 그 연령대의 시청자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공감가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 나이대의 시청자들이 자주 봐왔던 불륜이라는 익숙한 소재가 들어와 있지만, 거기에 대한 접근방식은 새로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불륜 코드라고 하면 본처와 내연녀가 드잡이를 하는 설정이 하나의 클리셰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틀에 박힌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다. 남성을 중심으로 두고 보면 대결구도가 되지만 동시에 여성들만의 관점으로 보면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점도 생긴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다른 관점이다.

 

강순옥의 딸 김현숙(채시라)은 중년 여성들의 삶에 대한 성취와 회한 같은 것들이 관전 포인트다. 레이프 가렛의 열혈 팬이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고등학교 퇴학을 당하게 된 그녀는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세운 편견 덩어리 선생님 나현애(서이숙)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자신의 굴곡진 인생의 시작점이 거기서부터 비뚤어졌다는 걸 알고는 분노하게 된 것.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자식교육에 집착하는 김현숙이라는 중년의 캐릭터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어떤 상실감을 가진 여성들의 그 답답함을 대리해주는 인물이다. 그녀를 끝까지 지지해주는 친구 안종미(김혜은)와의 끈끈한 우정이나, 전시회에서 그녀를 모욕하던 나현애의 머리채를 잡고 사과하라고 하는 장모란과의 부모 자식 관계와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인간적인 관계는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만든다. 여기에 남편 정구민(박혁권)과의 은근한 멜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관전포인트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청춘들의 멜로가 빠질 수는 없다. 김현숙의 딸 정마리(이하나)의 이루오(송재림)와 이두진(김지석) 사이에 벌어지는 화학작용은 젊은 시청자들이 흐뭇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검도 도장을 하는 이루오에게 배경음악을 잘못 보내줘 엉뚱하게도 자신의 호감을 드러내게 된 정마리의 이야기는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든다. 또 엄마와 그렇게 각을 세우고 있는 나현애가 이두진의 모친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복잡미묘하게 만든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MBC <킬미힐미>를 제치고 또 SBS <하이드 지킬 나>를 따돌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이런 김혜자, 채시라, 이하나로 대변되는 각기 다른 세대를 그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공감시키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자가 어르신들의 공감대를 끌어간다면, 채시라는 중년이 겪는 상실감과 성취 욕구를 그리고 이하나는 젊은 세대의 사랑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세대적인 안배와 다층적인 공감대는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풍문>, 드라마에 조명이 왜 필요한가를 묻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답답하다? SBS 수목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화면이 너무 어둡다는 시청자 의견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조도는 여타의 드라마들과 비교해볼 때 확실히 낮다. 무언가 명확하게 보고자 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이처럼 조도를 낮춰 피사체를 불명확하게 만들어내는 조명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사진출처:SBS)'

하지만 이 조명을 단지 어둡다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거기에 담겨진 많은 미학적 의미들이 상쇄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제작진이 밝힌 것처럼 어둡다기보다는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조명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운 게 우리가 실제로 현실에서 느끼는 밤의 풍경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조명은 리얼리티를 추구할 뿐, 그저 어둡게 보이려고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 조명에는 그만한 작품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대부분 그 이야기가 한정호(유준상)의 집에서 전개된다. 그러니 이 집이 가진 흡인력이 드라마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즉 모든 걸 다 드러내 보여주는 집은 더 이상 흡인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잘 드러나지 않고 문으로 겹겹이 막혀 있어 그 안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가 계속 궁금하게 여겨질 때 이 집은 계속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소 흐릿한 조명이 주는 효과는 지대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수군대고 벌어지고 있는 듯한 그 느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드라마가 8회를 지났지만 한정호의 집이 여전히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건 그래서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집은 마치 RPG게임의 던전처럼 저 앞으로 걸어 나가야 비로소 거기 무언가가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흐릿한 조명은 그 던전 효과(?)’를 만들어낸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이러한 보통 드라마들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조명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사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현재 우리네 드라마가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사실 조명이 이렇게 화제가 되는 건 거꾸로 말하면 그간 드라마에서 조명은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조차 생각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신기한 일이지만 드라마 제작에는 조명 감독이 있기 마련이다. 조명 감독이라면 단순히 빛을 쏘아 피사체들을 잘 보이도록 하는 것만이 그 역할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결국은 빛의 예술이다. 그 빛이 어떻게 음영을 만들고 그 음영이 입체감을 만들어내 작품의 이야기와 맞닿게 하는가는 조명감독이라면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드라마들을 보라. 거기 어디 조명이 존재하는가. 그저 노출 과다처럼 보일 정도로 확연히 드러내는 조명만 있을 뿐, 무언가를 가리거나 감추거나 음영을 만들어 그것이 하나의 영상을 통한 이야기가 되는 조명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런 조명은 마치 포르노처럼 피사체의 구석구석을 드러내기만 할 뿐 거기에 빛의 언어를 담아내지 못한다. 막장드라마에서 조명은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저 환하게 비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안타까운 건 이러한 막장드라마의 포르노적인 조명에 점점 시청자들이 적응되어 간다는 점이다. 뭐든 잘 안보이면 답답하게 느껴지는 정도라면 막장드라마의 조명이 얼마나 우리의 성급한 감각을 자극해왔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다소 흐릿한 조명에 대한 반응들은 그래서 지금 현재 막장드라마들이 얼마나 드라마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이 큰가를 에둘러 말해주기도 한다.

 

사실 막장드라마는 조명뿐만 아니라 스토리도 포르노적이다. 그 안에 어떤 문학적인 뉘앙스나 상징적인 의미 같은 걸 담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극적인 대사들만 오갈 뿐이다. 결국 막장드라마의 시퀀스란 만나면 드잡이하듯 한 판 붙는 것이 대부분이 아닌가. 가려지거나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사라지고 그저 직설적으로 툭툭 뱉어내기만 하는 대사들의 연속은 그 포르노적 속성으로 시청자들의 조급증만 점점 키워놓는다. 빠른 전개에 대한 강박은 바로 거기서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건 단지 포르노적인 자극만을 얻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언가 세계를 발견하고 싶어 하고 또 우리가 사는 삶과 현실을 공감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출만이 아닌 감춤의 미학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 사실 막장드라마 같은 노출증 양상을 보이는 드라마에는 조명이 필요 없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다소 흐릿한 조명은 그래서 거꾸로 조명이 왜 드라마에 필요한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흥미로운 '풍문'의 화학실험, 신데렐라 아닌 갇힌 소녀

 

요즘 같은 시대에 귀족이 어디 있습니까.” 한정호(유준상)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민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운운한다. 하지만 그렇게 평등한 시민사회의 한 일원인 척 하는 한정호의 실상은 뼛속까지 귀족인 양 특권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실제로 그는 엄청난 대기업들의 대리를 해주는 로펌의 대표로서 권력을 행사한다. 비상한 머리로 타인의 치부를 들춰서라도 얻을 건 얻어내는 그런 인물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사진출처:SBS)'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 대부분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이 한정호의 집이다. 벌써 7회를 넘기고 있지만 이 집의 구조는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 집을 무작정 쳐들어온 서봄(고아성)의 엄마 김진애(윤복인)너무 커서어지럼증을 느낄 정도다. 공간과 조명을 잘 활용하는 안판석 감독 특유의 연출은 한정호의 집을 거대한 미로처럼 만들어놓는다. 어두침침한 그 곳은 늘 문이 닫혀 있고 그 문 안쪽에서는 누군가의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풍문이라는 어감이 가장 잘 시현된 공간구성이다.

 

집이 갖고 있는 이 겉모습의 고요함과 그 안에서의 소란은 한정호라는 인물의 이율배반적인 삶과 일치한다. 교양인으로서 모든 걸 이성과 대화로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그들의 내부에서는 무언가 뜨거운 것들이 울컥 울컥 밖으로 빠져 나온다. 인간이 아닌 완벽한 존재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만 한정호는 탈모 때문에 고민하고 그의 아내 최연희(유호정)는 허한 마음을 부적으로 달래는 인사다.

 

이런 집에 그의 아들 한인상(이준)이 임신한 서봄을 데리고 오고 바로 그 날 최연희의 침대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건 이 드라마가 가진 흥미로운 실험의 첫 단계다. 너무나 이질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서봄이라는 서민이 이 이성과 교양을 가장하고 있지만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때로는 기괴한 느낌마저 주는 이 집에 들어옴으로써 어떤 파장과 변화가 벌어지는가 하는 점이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다.

 

이 화학실험은 우리가 흔히 보던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서봄이라는 똑똑하고 현명하며 생명력이 넘치는 서민이 마치 죽은 관 속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한정호의 집에 들어와 신데렐라로서의 부유한 삶을 누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답답해하고 괴로워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마치 괴물의 성에 갇힌 소녀처럼 보인다.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의 <밀회>가 상류층이 가진 허위의식을 시종일관 진지한 시선으로 비판하는 작품이었다면 <풍문으로 들었소>는 다소 블랙코미디적인 여유가 느껴진다. 한정호의 갑질은 분노를 일으키기보다는 실소를 터트리게 한다. 그토록 외치는 평정심은 사실 자주 깨지는 모습을 통해 웃음으로 전화된다. 양갓집이 함께 만난 자리의 그 의전이 깨질 때 그 진짜 속내가 드러나는 것처럼, 한정호와 최연희의 그 데드마스크가 어떤 감정을 드러낼 때 <풍문으로 들었소>의 통쾌한 풍자가 시작된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래서 그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게 만든다. 서봄과 한인상의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라며 과외선생에게 한정호가 요청하자 그가 해주는 명료한 세계관강의는 그것이 섬뜩한 현실이면서도 실소를 짓게 만든다. 한정호는 사람은 괴물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그래서 필요한 것이 훈육임을 강조하지만 그 훈육이란 다름 아닌 모든 것을 누르는 힘의 세계를 받아들이라는 것일 뿐이다. 괴물은 결국 한정호인 셈이다.

 

하지만 힘과 윤리라는 명료한 세계관’ 2탄 강의에서 서봄은 그런 비윤리적인 사람을 변호해주는 것이 맞는 일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한정호의 집이라는 괴물의 성에 갇혀 있는 서봄이라는 소녀는 그녀의 엄마인 김진애의 증언처럼 결코 호락호락하게 잡혀먹힐 위인이 아니다. 그녀는 그래서 처음에는 구속된 존재처럼 보이다가 차츰 이 성을 변화시키는 인물처럼 보인다. 아니 이미 한인상이라는 인물을 변화시켰을 때 그래서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겨났을 때부터 그녀가 일으킨 변화는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정호의 세계와 서봄의 세계의 부딪침. 그 화학작용을 웃음으로써 그려내는 이 작품은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연 어떤 세계의 삶을 진정으로 원하는가. 서봄의 가족들은 가난하고 사업에 실패해 부채도 많다. 또 첫째 딸은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시험을 치르고 있지만 배경이 없어 1차에서 번번이 떨어진다. 그들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 한정호는 거래를 하려 하지만 그 때마다 이 서봄의 가족들은 흔들리기는 해도 결코 꺾어지는 않는다. ‘돈으로 빤스 벗게 만드는세상에 대해 항변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가능한 건 서봄이라는 사랑하는 가족의 존재와 그 서봄이 낳은 아기라는 축복받아야 하는 생명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부유한 데드마스크의 삶을 살아가는 한정호와 최연희보다 때로는 툭탁거리며 지지고 볶는 서형식(장현성)과 김진애의 삶이 더 건강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서봄은 그 이름처럼 이렇게 자본에 의해 화려해졌지만 그만큼 메말라버린 차가운 현실 속에서 봄 같은 생명력을 돋보이는 존재다. 과연 서봄은 이 괴물의 집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그 괴물에게 먹혀버릴까. 이 드라마가 흥미진진해지는 대목이다.

 

<징비록>, 임진왜란을 통해 보는 국가의 위기

 

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생겨날까. KBS 주말사극 <징비록>이 던지는 굵직한 질문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벌어진 여러 국가적 사안들과 전쟁의 전조들, 피폐해진 나라 살림에 더해 붕당을 이뤄 권력에만 몰두하는 정치세력과 국제정세를 읽어내지 못하는 왕의 리더십 등 <징비록> 안에는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드러나는 다양한 증상들이 보여진다.

 

'징비록(사진출처:KBS)'

하필 지금 현재 <징비록>이 사극으로 만들어진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한 일이다. 물론 당장 왜란과 같은 전쟁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이보다 더 심각한 사안이 터질 위험성이 다분한 현재가 아닌가. <징비록>에 등장하는 몇몇 사례들이 그저 옛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 건 그래서다.

 

선조(김태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물론 그것이 흩어진 민심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지라도 왜란을 방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건 국가 지도자로서의 명백한 직무유기다. 선조는 군역을 통해 축성을 멈추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류성룡(김상중)에게 당장 먹고 살 것도 없는 백성의 고통만 가중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거기에 대해 류성룡은 지주들에게 제대로 된 세금을 받아 군역을 하는 백성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선조는 지주들 또한 백성이라며 갑작스런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금문제는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연말정산 문제만 두고 봐도 가진 자들이 더 많이 내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들의 세 부담만 더 커졌다는 게 그 현실이 아닌가. 사실 국고가 여의치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서민들이 세금을 내지 않아 생긴 일은 아닐 것이다. 4대강 사업 같은 나라 망치는 엄청난 사업에 엉뚱하게도 재원이 투입되는 것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군량미를 빼돌려 치부하는 양반들의 이야기는 최근 벌어진 방산비리로 구속된 일광그룹 이규태 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클라라와의 개인 메시지 공방을 벌였던 일로 존재가 알려진 이규태 회장의 이 비리 규모는 무려 500억대에 달한다고 한다. 국가의 방위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국민의 혈세가 사적인 치부로 이어지는 상황. <징비록>이 그리고 있는 왜란 직전의 분위기와 무에 다를 게 있을까.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에게 군역과 축성이 힘들다고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낸 선조의 조치는 마치 대선 때마다 흘러나오던 선심성 공약을 그대로 닮았다. 기초노령연금 공약을 뒤집고,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공약을 내걸고는 결국 흐지부지 중단하는 상황들에 나오는 이야기는 당장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변명이다. 애초에 할 수 없는 공약을 왜 내건단 말인가.

 

이미 왜국에서는 전쟁준비에 돌입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은 동인 서인으로 나뉘고 또 그것도 모자라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각자 이권에만 몰두하는 상황 또한 지금의 정당 정치와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늘 국민을 호명하지만 거기에 늘 국민들은 소외되는 아이러니한 현실. 양극화는 더 심해지지만 돈이 있어야 선거를 치르는 현실 속에서 지주의 눈치를 보는 정치인들에게서 진정 서민들이 보이기는 하는 걸까.

 

<징비록>400여 년 전에 벌어진 임진왜란 전후의 역사를 다루지만 그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는 지금 현재에 닿아 있다. 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반복되어 비슷한 양상으로 생겨나고, 그 결과는 또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이 사극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류성룡이 <징비록>을 써내려간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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