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이 현재에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

 

그건 알아라. 양반이 내지도 않는 조세, 우리처럼 피죽도 못 먹는 사람들이 내고 평생 군역에 시달린다. 특산품까지 공납하라고 목을 죄니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란 말인가. 이런 나라에 살 바에야 왜놈이든 되놈이든 중요치 않다.”

 

'징비록(사진출처:KBS)'

KBS 주말사극 <징비록>에서 조선의 매국노 사화동은 류성룡(김상중)에게 그렇게 일갈했다. 반역자지만 왜구들의 첩보활동을 폭로하면서 목숨을 구걸한 사화동을 류성룡이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던진 한 마디다.

 

실록에 등장하는 사화동은 진도 출신으로 일본에 잡혀가 온갖 충성을 다한 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죽음에 즈음해 던지는 일갈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마치 현재에까지 와 닿는 듯하다. 왜구들의 출몰로 피폐해진 백성들이지만, 그들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심지어 나라를 버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왕과 대신들이다. 사화동은 말한다. “내가 죽을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네들 양반과 왕이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나라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양반과 왕은 붕당 정치라는 틀 안에서 권력 게임을 계속 하고 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동인을 서인들을 밀어내고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있지만 동인의 거두였던 최연경이 삼봉을 자처했다며 무고로 끌려와 옥사하면서 조정은 다시 윤두수와 정철을 앞세운 서인들이 장악한다. 왕은 이 동인과 서인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의 균형을 통해 정치를 이끌어가려고 한다.

 

이 붕당정치는 정치 역학으로서는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붕당정치 속에서 정작 민초들의 삶은 점점 힘겨워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화동의 입에서 나온 비격진천뢰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미 조선의 군사기밀들이 첩자들에 의해 왜에 넘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선조와 대신들은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양반과 왕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쟁투가 국가에 드리워진 위기를 가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겪은 후 낙향해 쓴 <징비록>은 바로 그 피로 물든 산하를 뒤늦게 되돌아보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적어나간 책이다. 수차례 정치를 권하는 조정의 요구를 마다하고 <징비록> 집필에 말년을 쏟아 부은 이유는 다시는 그런 위기상황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금 현재 왜 <징비록>이 다시 꺼내져 사극이라는 형태로 보여지고 있는가 하는 근거이자 의도일 것이다. 지금 우리네 서민들의 삶을 돌아보라. 잘 사는 이들이야 더 잘 살게 된 시스템이지만 못 사는 이들은 거의 절망의 끝에 놓여진 상황이다. 물론 <징비록>이 그 위기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지만, 이 시대가 처한 위기는 그것보다는 경제적인 위기가 더 크다. 지금은 전쟁보다 무서운 게 경제위기다. 전쟁조차 경제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나라의 살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그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서민들의 조세부담을 더 얘기하는 상황은 저 사화동의 일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와중에 정치는 서민을 서로 호명하지만 사실 관심은 권력에 집중된 느낌이다. 모두가 서민을 얘기하지만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다.

 

<징비록>이 그토록 긴 세월을 넘어 이 시대에 다시 재해석되면서도 어떤 공감대를 주는 이유는 거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지금의 서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아픈 인식에서 비롯한다. 앞으로 펼쳐질 임진왜란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의 삶이 도륙될 것인가. 그리고 이 위기의 국가를 구원하는 건 과연 누구인가. <징비록>이 현재에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이다.

 

군림 하는 작가와 감사 표하는 작가

 

SBS <펀치>의 종영을 앞두고 박경수 작가가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진심어린 편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부끄러운 대본을 부끄럽지 않은 영상으로 만들어주신 이명우 감독님, 김효언 감독님, 윤대영 촬영감독님, 그리고 모든 스태프분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한정환 EP,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출연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목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펀치(사진출처:SBS)'

“<펀치>의 박정환은 래원 씨가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전 래원 씨가 만든 박정환을 따라간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훌륭했어요. 래원 씨.” 박경수 작가는 극중 주인공인 박정환을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 연기자 김래원이 만든 걸 자신이 따라간 것뿐이라고 말했다. 또 이태준 역할의 조재현에게는 한 수 배웠습니다. 카리스마와 유머러스함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이태준을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활자의 인물이 어떻게 실제의 인간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어요라고 했다.

 

박경수 작가는 신하경 역할을 한 김아중에 대해서도, 윤지숙 역할의 최명길에게도, 최연진 역할의 서지혜에게도, 또 조강재 역할의 박혁권에게도 또 이 드라마에 출연한 모든 출연자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낮췄다. “<펀치> 대본 작업을 하면서, 부끄러웠던 제 자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훌륭했던 여러분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감사의 글을 마무리했다.

 

박경수 작가의 이 편지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드라마에서 작가라고 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처럼 받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의 의해서 작품 속의 인물들이 살고 죽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경수 작가는 그것이 자신이 만든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거기에 살을 붙이고 숨 쉴 수 있게 해준 이들은 다름 아닌 연기자들의 몫이었다는 걸 감사의 마음으로 전해왔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의 패러디로까지 등장하고 있는 임성한 월드의 데스노트 이야기가 씁쓸함을 전하는 것은 거기에서 마치 신적인 지위를 가진 듯 휘둘려지는 갑의 권력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제 아무리 극중 인물을 잘 소화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어느 날 갑자기 푹 쓰러져 죽음을 맞는 건 허무하고도 쓸쓸한 일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금의 서민들이 가진 정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 노력하는데 대우는커녕 진짜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

 

박경수 작가의 편지가 깊은 감동을 전하는 것은 이 천재 작가의 겸손이 죽을 듯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수치로 표현되는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라면 그 성과를 고스란히 작가와 주인공 몇몇이 가져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영역이 어디 그런가.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조명 하나, 소품 하나까지도 작품을 빛나게 해준 소중한 누군가의 손길이 묻어나는 것이다.

 

갑질 하는 세상이다. 어디에서든 우리는 그 갑의 힘을 느끼며 살아간다. <펀치> 같은 좋은 드라마를 써준 것도 고마운 마당에, 이런 훈훈한 마음까지 읽게 해준 박경수 작가에게 새삼 놀라게 된다. 그 천박한 숫자의 시청률을 내세워 많은 이들이 작가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게 작가라는 존재의 증명으로 완전할까. 작품과 작품의 인물 하나하나와 그 인물을 살아있게 만들어준 배우들과 또 그것을 잘 담아내준 모든 제작진들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한 박경수 작가. 그가 바로 진정한 작가다.

 

욕먹어도 보면 그만? 임성한 월드의 참상

 

이제 임성한 월드는 더 이상 욕하는 것도 지겹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아예 임성한 월드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비판 기사는 사실상 임성환 월드가 먹고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임성한 월드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칭찬은 당연히 논란으로 이어지고, 당연한 비판 역시 그 논란을 부추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이것이 임성한 월드에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무관심이 답일 수 있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조금 오른 시청률 때문에 자꾸만 임성한 월드에 대한 재조명 기사들까지 나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시청률은 작정하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장 쉬운 것은 룰을 깨는 것이다. 드라마라는 창작의 공간에도 정해진 룰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이걸 깨버리면 당연히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그 시끄러움은 임성한 월드가 목적하는 것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여기서 함정은 방점이 욕하면서에 찍히는 게 아니라 보는에 찍힌다는 점이다.

 

이렇게 찍힌 방점은 본말을 전도시킨다. 보게 하기 위해 욕먹기를 자초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등장인물(그것도 주인공급)의 어이없는 죽음은 욕먹기가장 좋은 수단이다. 물론 거기에는 작가의 욕망이 들어 있다. 이 세계에는 작가가 신이다. 그는 인물과 인물을 이어붙이는 것에서 장애물이 있다면 거침없이 제거해낸다. 그 세계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시청자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데서 나오는 잡음들은 오히려 을 통한 시청률로 이어진다.

 

죽었던 인물이 다시 유령이나 환시로 재등장하는 건 그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논란의 불씨를 끄기 보다는 오히려 계속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 섬뜩해진다. 마치 길거리에서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임성한 월드는 무관심이나 비판조차도 가만두지 않고 오히려 키워버린다.

 

당연히 작품을 일관적으로 통과하는 메시지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 지극히 이상한 임성한 월드가 마치 보편적인 세계인 양 매일 같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끔찍한 악영향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장면들이 주는 황당함과 어이없음은 그 강도가 너무 강해서 비판조차 허탈하게 만든다. 그러니 작품성 자체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자극만을 쳐다보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시청패턴이다.

 

이 황당한 세계가 매일처럼 대중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등장인물을 의심 없이 바라보다보면 마치 사람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듯한 세계관을 내면화하게 될 수도 있다. 룰 자체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야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마치 그런 임기웅변식의 삶이 우리가 지향해도 무방한 삶의 본질이라는 것에 승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임성한 월드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세계를 매일 매일 보여주는 방송사의 윤리 부재의 현실이다. 시청률만 되면 뭐든 받아들인다는 이런 식의 태도는 모든 가치들을 경제적인 논리 아래 굴복시킨다. 일부 기자들을 비판하는 기레기라는 말을 끌어와 작레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을 방송사는 왜 좌시하고만 있는 걸까.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디즈니랜드에 비유해 설명하며,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임성한 월드가 갖는 정치적 위험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극단의 막장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지독한 현실의 막장을 은폐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펀치>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막장의 현실들을 환기시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임성한 월드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막장에 쏟아지는 욕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괴물처럼 보인다. 이 룰도 없고 삶과 죽음의 예의도 없는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혀를 차고 있는 순간, 저 바깥세상에서 돌아가는 막장의 현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마비된다. 과연 욕먹어도 그만일까. 이런 세계를 방치하는 것은.

 

시청률의 늪에 빠진 MBC드라마, 문제는?

 

또다시 임성한 작가다. 이번 <압구정백야>에서는 잠잠하다 싶었는데 데스노트 논란이 터져 나오고 있다. 백야(박하나)와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조직폭력배와의 실랑이 끝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조나단(김민수)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상황에 따라 인물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성한 작가 드라마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럽고 허무한 느낌마저 준다는 점에서 전작인 <오로라공주>의 데스노트의 시작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오로라공주> 때 연달아 죽음을 맞이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낸 논란은 작가의 하차 운동까지 벌어질 정도로 그 파장이 컸다. 그걸 의식했는지 MBC 측은 부랴부랴 또 해명에 나섰다. 애초에 조나단의 죽음은 예고되어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갑작스런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은 아니더라도 이번 <압구정백야> 역시 자극적인 장면들의 연속으로 시청자들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수영장 격투신은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화제가 되었다. 물속에서 상대방의 허벅지를 꼬집는 장면은 역시 임성한 작가라는 얘기를 만들었다. 친모인 서은하(이보희)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한 백야가 그녀에게 시어머니인지 친정어머니인지를 묻는 장면은 거의 한 회를 다 채울 정도의 치열한 육박전을 통해 보여줬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그걸 보여주는 방식 또한 보는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만든 장면들이었다.

 

드라마를 하면서 방송사가 나서 해명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유독 임성한 작가의 작품을 할 때면 방송사의 해명이 이어지는 건 그 작품이 가진 논란과 파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논란이 벌어지는 작가의 작품을 계속해서 그것도 일일극으로 편성하는 MBC의 저의는 뭘까.

 

작년 MBC 드라마의 얼굴이 된 건 <왔다 장보리>였다. 물론 임성한 작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막장 논란이 제기된 김순옥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가족애를 그리려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연민정(이유리)이라는 캐릭터의 악행은 상식 이하로 자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이 드라마가 막장 논란을 벗어난 것은 35%를 넘는 시청률 덕분이었다.

 

임성한 작가나 김순옥 작가 같은 자극적인 드라마를 그리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는 당연히 시청률이다. 실제로 이들 작가들은 논란은 일으키지만 확실히 시청률 제조기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과연 시청률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청률을 가져가는 사이에 MBC드라마의 이미지가 점점 자극으로 점철되어가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 드라마 공화국이라고 부르던 시절 MBC드라마를 떠올려보라. MBC에서 만들어진 <여명의 눈동자> 같은 대하드라마에서부터 <전원일기> 같은 장수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도전적인 퓨전사극들이 전체 드라마업계를 견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물론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 시끄럽고 시청률에 경도된 임성한 작가나 김순옥 작가가 만든 드라마들이 마치 MBC드라마의 얼굴이 된 듯한 인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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