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불패 신화, 새로움에 달렸다

한 때 사극의 기본 시청률은 20%라고 했다. 그만큼 사극은 극성이 강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시청률을 먹고 들어간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이젠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사극과 의학드라마, 중세와 근대의 하이브리드를 주창하며 야심차게 시작한 '제중원'은 초반 현대극 '파스타'에 밀리더니 정작 '파스타'가 종영한 후에도 26회가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13% 대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다. 새롭게 시작한 이병훈 감독의 '동이'는 한효주와 지진희가 등장하면서 차츰 시청률을 회복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14%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부자의 탄생'이 두 사극을 앞지르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주말시간대에 편성되어 있는 '거상 김만덕'도 마찬가지다. 조금씩 시청률이 오르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15%에 머물러 경쟁작인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에 밀리고 있다. 물론 '동이'나 '거상 김만덕'은 초반이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중원'을 통해 우리는 사극이면 무조건 된다던 그 사극 불패 신화가 깨져가고 있다는 징후를 읽을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에 이른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사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기 때문이다. 작년 '선덕여왕'에 이어, 올해의 '추노'는 사극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최대치로 보여주었다. '선덕여왕'은 여성사극의 성장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스토리의 극점을 보여주었고, '추노'는 스타일리쉬한 영상을 통해 사극이 제공할 수 있는 볼거리의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 '제중원'의 스토리는 너무 정석적이었고, '동이'의 볼거리는 사뭇 밋밋하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제중원'은 구한말 제중원이란 공간의 좋은 소재를 갖고 있으면서도 시청자들에게 어떤 매력을 제시하지 못했다. 주인공 황정(박용우)은 착하나 남성적인 매력이 돋보이지 않았고, 여주인공 석란(한혜진) 역시 개화된 여성이기는 하나 어떤 당찬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다. 황정의 라이벌인 도양(연정훈)은 신분 이외에 황정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는 인물로 설정되어 라이벌로서의 매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이 보여주는 멜로가 신분제에 얽매여 신파로 흐르는 반면, 제중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추진력을 만들기보다는 일회적인 에피소드의 나열에 머무르는 경향이 짙었다. 가장 극성이 큰 부분일 수 있었던 황정이 형장에 서게 되는 위기상황에서 왕의 부름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는 고대 그리스극의 한 방식)를 떠오르게 하는 해결방식으로 시청자들을 맥 빠지게 만들었다. 또한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 같은 거대한 사건이 지나치게 소소하게 다뤄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동이'는 초반부 캐릭터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빠른 스토리 전개로 몰입이 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이병훈 PD 특유의 추리적인 연출기법은 캐릭터가 형성되었을 때는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극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성인 연기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부분은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또한 '추노' 이후 생겨난 사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새로움에 대한 욕구 역시, 성인 연기자들로 전환되면서 '동이'가 소재로 내세운 음악이 등장하며 차츰 채워져 나가고 있다. 이 상황이라면 '동이'는 초반의 부진을 금세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거상 김만덕' 역시 이미연의 등장과 함께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 복수극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상황이 차츰 나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그 스토리가 가진 전형성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이미 '대장금'이 보여준 성장스토리에 '상도' 이후 일련의 퓨전사극들이 보여준 경제 이야기의 재미, 그 이상의 새로움을 현재의 시청자들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극이면 무조건 되던 시대는 지났다. 그만큼 사극은 우리에게 친숙한 장르가 되었고, 어떤 새로움을 기대하게 만드는 장르가 되었다. 그러니 역사 바깥에서 인물을 찾아내고, 거기에 상상력을 붙여낸다고 해서 모두 성공적인 사극이 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제 사극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움이다. 지금껏 다루지 못했던 소재와 지금껏 듣지 못했던 이야기구조, 그리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상미학. 이제 작금의 사극에 요구되는 것들이다.

'오 마이 레이디', 그 오지랖과 발연기의 의미

흔히들 연기력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고 한다. 캐릭터라는 옷을 입고 타인의 삶을 살아내는 연기자들에게 그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란 이야기. ‘오 마이 레이디’는 톱스타 성민우(최시원)의 쳐다보기조차 쉽지 않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발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국어책을 읽는 듯한 어색함은 기본이고 캐릭터와 일체되지 않는 그 어정쩡한 연기동작. 무엇보다 이 톱스타는 자신의 발연기를 고칠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연기가 아니라 톱스타라는 그 화려함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이돌들의 연기진출이 점점 일상화되어가는 요즘, 실제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최시원이 발연기로 특징되는 성민우를 연기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선택이다. 거기에는 인기를 업고 연기의 세계로 뛰어든 아이돌들의 발연기에 대한 귀여운 비판이 들어있으면서도, 실제 아이돌 최시원이 그 ‘발연기를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연기를 연기’하는 최시원은 꽤 괜찮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아줌마 윤개화(채림)는 성민우가 발연기를 하는 이유를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민우는 “당신의 딸을 잘 부탁한다”는 편지와 함께 자신의 공간 속으로 들어온 예은(김유빈)을 부정하기만 한다. 안하무인에 뭐든 제 멋대로인 이 톱스타 성민우의 타인에 대한 배려 없는 태도는 그의 발연기에 근본적인 이유를 제공한다. 자신의 일(그것도 자기 좋은 일만)에만 관심이 있는 성민우에게 타인의 삶을 연기한다는 게 가당한 일일까.

반면 성민우와 달리 윤개화는 주변 모든 이들의 일들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오지랖 아줌마’다. 이혼 당했고, 집도 직장도 없어 아이를 전 남편에게 보내놓은 상태지만, 그 와중에도 성민우에게 갑자기 나타난 딸을 걱정할 정도. 그녀의 오지랖이 타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데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 오지랖이 어떻게 발연기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를 잘 말해준다.

윤개화의 오지랖이 타인에 무관심한 성민우를 변화시키고, 그를 통해 발연기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이 이 드라마가 가진 주요 스토리텔링이다. 여기에 멜로드라마적인 장치가 곁들여지면서 톱스타에 대한 아줌마 판타지가 극성을 끌어올린다. 즉 윤개화와 성민우 사이에 벌어지는 로맨스는 서로를 성장시킨다. 윤개화는 오지랖만 넓었지 뭐 하나 자기 일에 충실하지 못했던(이것은 오지랖 넓은 캐릭터들의 특징이다) 삶을 성민우를 통해 바꿔나가게 되고, 성민우는 거꾸로 윤개화를 통해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고 그를 통해 발연기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 유쾌한 코믹 로맨스 드라마는 또한 이를 연기하는 채림과 최시원에게는 의미있는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채림은 과거의 앳된 이미지에서 아직까지는 아줌마 연기 같은 본격 연기자로서의 모습으로 변신을 완수하지 못했다. 따라서 ‘오 마이 레이디’의 오지랖 윤개화는 채림의 연기 스펙트럼을 적어도 걸(girl)에서 레이디(lady)로 확장시켜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시원은 아이돌이라면 늘 백안시되기 마련인 발연기에 대한 오해를 극중 성민우의 발연기를 통해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극중 캐릭터들의 성장처럼 연기자들의 성장까지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채림과 최시원에게 ‘오 마이 레이디’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다.

사랑을 넘어 인간애로 가는 멜로드라마

수목의 밤, 방송3사가 동시에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것들은 모두 멜로드라마다. '신데렐라 언니'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를 언니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따라서 그 안에 사랑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드라마는 매번 새로운 남자를 갈아 치우는(?) 엄마 덕분에 이집 저집을 전전해온 은조(문근영)가 엄마가 마지막이라고 한 효선(서우)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 자매는 한 남자를 두고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애증의 과정 속에서 차츰 성숙해져간다는 이야기다.

'신데렐라 언니'는 그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의 선악구도를 뒤집는다. 즉 신데렐라는 늘 착하고 옳고 그 언니는 늘 악하며 옳지 않다는 그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려는 것이 이 설정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신데렐라 언니도 언니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며, 동생인 신데렐라도 어떤 면에서는 그 언니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는 것. 즉 이것은 어찌 보면 신데렐라와 신데렐라 언니를 동등한 위치로 바라보면서 그 둘의 갈등과 화해를 모색하는 드라마로 볼 수 있다. 결국 사랑을 두고 벌이는 멜로의 갈등 속에서 똑같은 눈높이로 서로의 성장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의 틀을 넘어선다. 사랑 끝에 인간을 세워두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 역시 마찬가지.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구조를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려는 이야기는 멜로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쩌다보니 게이 행세를 하게 된 남자, 전진호(이민호)라는 존재다. 장차 이 완벽남이지만 게이라는 너울을 쓰게 된 인물은 솔직하고 내숭 없는 어리버리 박개인(손예진)과 동거를 하며 가까워지게 되는데, 여기서 사랑과 우정은 미묘해진다. 게이 남자친구와의 우정인지, 아니면 그를 남자로서 바라보는 사랑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 이 유쾌하고 발랄한 해결과정 속에 나올 수 있는 것은 결국 두 인물의 성장을 통해 갖게 되는 남녀라는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즉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찬란한 유산'의 후속작으로 소현경 작가가 들고 온 '검사 프린세스'는 얼핏 보기에는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 속에 깃든 사회(의 정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검사 프린세스'는 검사라는 직업이 가진 사회정의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그 직업의 외적인 것에 혹한 '프린세스' 마혜리(김소연)가 차츰 진짜 검사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즉 프린세스로 시작해 검사로 성장하는 마혜리의 이야기는, 좌충우돌의 멜로에서 차츰 사회로 넓혀져 갈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수목극의 방송3사가 모두 멜로드라마를 그리고 있지만, 또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멜로에 머물지 않고 차츰 인간애로 그 관심을 확장해나가는 것은 왜일까. 이것은 어쩌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일과 사랑에 대해 고민했던 청춘 멜로드라마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이제는 멜로드라마의 관심이 남녀 간의 사랑에서 차츰 성장해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을 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는 진지하고(신데렐라 언니), 하나는 로맨틱하며(개인의 취향), 다른 하나는 따뜻한(검사 프린세스) 이 세 멜로드라마들은 각각의 서로 다른 재미를 내포하면서도 저마다 하나씩의 성장드라마를 담는다는 점에서 작금의 달라진 멜로드라마의 태도를 잘 드러내준다. 멜로드라마를 통해 멜로 그 이상을 담아내려는 이런 시도는, 매번 늘 같은 남녀 간의 그저 그런 시시한 사랑타령에 머물던 멜로드라마를 또한 성장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역사가 외면한 낮은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추노’는 왜 그토록 많은 죽음을 보여주었을까. 혜원을 호위하던 백호(데니안), 명나라 출신 여자 자객 윤지(윤지민), 원손을 지키던 궁녀 필순(사현진)의 죽음은 소소한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을 저주한 천지호(성동일)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가장 안타깝게 했으며, 태하의 심복 한섬(조진웅)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울렸다. 본래 죽을 운명이었던 최장군(한정수)과 왕손이(김지석)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순진하게 ‘노비들의 세상’을 꿈꾸던 개놈이(이두섭)나 끝봉이(조희봉)를 위시한 노비당 인물들은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 업복이(공형진)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경식(김응수)과 그 분(박기웅)을 죽이고 결국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주인공 대길(장혁) 역시 사랑하는 여인 혜원과 이제는 같은 길을 걷게 된 송태하(오지호) 그리고 원손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위해 죽는 길을 선택했다.

이처럼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줄초상을 당한 경우가 있을까. 캐릭터는 일종의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대리자라는 점에서 그 캐릭터들의 연속된 죽음은 실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따라서 ‘추노’의 줄초상에 대한 일부 시청자들의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추노’는 엔딩에 공을 들였다. 실제 엔딩은 대길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초복(민지아)과 은실이 해를 바라보는 장면(이를 통해 이 실패한 혁명이 실패가 아니라는 전언을 남겼다)과 대길이 해를 향해 화살을 먹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것도 아쉬웠는지 드라마가 완전히 끝난 그 자리에 왕손이와 최장군이 땅을 일구는 장면까지 삽입되었다. 그만큼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고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캐릭터들은 죽었지만, 그 캐릭터들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생생히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캐릭터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결국 새드엔딩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이 사극이 가진 메시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사극 속에서 우리의 시선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많은 낮은 자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쟁 사극 속에서는 한 신에 수십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말 그대로 ‘높은 자들’, 주인공들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그런 사극과 비교해볼 때, 이 사극 속의 죽음은 실로 그 수가 적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저들과는 달랐을 뿐이다. 그저 산 속 나무 둥치에 쓰러져 죽어간 낮은 자들을 ‘추노’는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타의 사극이 지나쳐버린 이름 모를 낮은 자들의 죽음에 대한 조명. 역사가 외면한 그들을 기억하라는 것. ‘추노’의 줄초상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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