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역사에 이름 한 줄 없는 그들만의 역사

송태하(오지호)가 석견(김진우)을 구명하기 위해 한밤중 몰래 저자거리에서 봉림대군(이준)을 만나는 장면에서 대길(장혁)은 태하처럼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저 건들대며 간단한 목례를 할 뿐. 짧은 장면이지만 이 길바닥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추노꾼 대길과 봉림대군의 만남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것은 우리가 사극이라고 하면 늘 봐왔던 그런 풍경, 즉 왕이나 세자 앞에서는 누구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그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봉림대군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곳은 대길과 태하가 그를 좇는 철웅(이종혁)과 부하들이 한 판 벌이는 자리로 바뀐다. '추노'는 이처럼 역사 속의 인물을 어둠 저편으로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역사 바깥에 존재하던 인물들을 세워놓는다. 봉림대군은 아마도 역사에 수많은 말을 남겼을 것이지만 이 사극에서는 주인공인 민초들이 심지어 농 섞인 말을 계속 떠들어댈 동안 줄곧 침묵하고 있다. 허구의 인물 대길은 그렇게 역사의 인물 봉림대군을 만나 "여기는 내 세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추노'가 그리는 세계는 확실히 과거의 사극들과는 그 시선부터가 다르다. 과거 사극에 등장하던 천민들은 신분상승을 꿈꾸었지만, '추노' 속의 천민들은 더러운 양반들의 세상과 한 판 대결을 벌이고 있다. 신분이 엄연한 시대에 천민들과 양반들이 벌이는 대결. 즉 이 사극은 세상이 뒤집어질 혁명을 꿈꾼다. 하지만 어디 혁명이 쉬운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그 혁명이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혁명은 그리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송태하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열망이 욕망으로 바뀐" 조선비(최덕문)로 인해 뒤집어지고, 노비들의 세상을 꿈꾸는 노비당은 결국 그 분(박기웅)이 이경식(박응수)의 사주를 받은 인물로 밝혀짐과 동시에 와해된다. 업복(공형진)의 의구심은 현실로 나타난다. 즉 '추노'는 저 '수호지' 같은 혁명의 낭만성을 판타지로서 그려내는 사극이 아니다. 오히려 '추노'는 그 혁명의 실패를 아프지만 똑똑히 바라본다.

그래서 결국 남은 것은 혁명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이 되었다. 대길은 조용히 살아가라고 하지만 송태하는 석견과 혜원을 데리고 청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그들을 좇는 철웅과의 마지막 대결이다. 하지만 이 대결 역시 이제는 혁명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대결이 되어버렸다. 대길은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꼭 갚는다"는 말처럼 철웅에 남은 빚을 갚으려는 것이고, 송태하는 개인적인 이유로 끝없이 그를 추격하는 철웅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혁명은 저물었고, 남은 자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렇다면 민초들이 꿈꾸었던 혁명이 이처럼 무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이 사극은 왜 굳이 주목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실패했으나(그래서 역사에 한 줄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당대에 사람답게 살고자 꿈꾸었고 싸웠던 민초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추노'를 통해 수없이 죽어나간 민초들의 삶을 보았고, 그 역사에 한 줄 남겨지지 않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더럽게 팍팍한 인생을 살다간 천지호(성동일)는 물론이고, 업복이와 짝귀(안길강) 그리고 노비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개놈이(이두섭)와 끝봉이(조희봉) 같은 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추노' 속의 혁명은 실제 역사에서처럼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혁명을 낮은 자들의 위치에서 조명함으로써 '추노'는 저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기존 역사의 재현으로서 시작되었던 사극이, 지난한 세월을 거쳐 이제는 사극 스스로 역사를 써가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로 추노가 그려내는 역사는 공자왈 맹자왈 하는 양반들의 이야기를 알아먹지 못할 외계어로 만드는 세계다. 낮은 자의 시각으로 저자거리의 언어로, 때론 몸의 언어로 한 컷 한 컷 그려진 민초들의 역사, 사극이 복원해낸 그네들의 역사, 그것이 바로 '추노'다. 역사의 사극에서 사극의 역사로. 혁명은 과거의 그 때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작품,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은 끝났지만 엔딩에 대한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지붕킥'의 엔딩은 실로 파격적인 면이 있다. 지훈(최다니엘), 세경, 정음, 준혁의 얽히고설킨 멜로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지훈과 세경의 죽음'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뉘앙스만으로 '지붕킥'을 그저 새드엔딩이라고만 단정할 수 있을까. 물론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지붕킥'이 그 죽음을 어떻게 보여줬는가도 중요하다. '지붕킥'은 사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 사망 사실도 3년이 흐른 후 성장한 정음과 준혁(윤시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주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세경이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요"하고 말하는 대사와 거기서 멈춰져 흑백 사진의 추억으로 바뀌는 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분명 이건 새드엔딩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깊은 여운을 남긴 아름다운 새드엔딩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엔딩에 몰두하느라 지금껏 '지붕킥'이 달려온 웃음과 감동의 시간들이 주는 의미에 대해 지나치게 소홀한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엔딩은 수많은 마무리 중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하나로 지금까지 걸어온 '지붕킥'의 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가 아닌 이상 말이다. 혹자는 "이 마지막 엔딩 한 편으로 모든 걸 망쳤다"고까지 말하는데, 이건 지나친 결과지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결과에 대한 몰두는 자칫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만들어낸다. 반 년 이상 지속되는 드라마에서 태반 이상을 자극적인 막장으로 끌고 오다가 결말에 이르러 해피엔딩을 한다고 해서 그런 막장드라마가 이해될 수는 없는 일이다. '천만번 사랑해'가 그랬고, 현재 '수상한 삼형제'가 그렇다. '수상한 삼형제'는 아예 막장인 가족을 설정으로 하고 그 집이 차츰 화해되고 봉합되는 과정을 그리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과지향적으로 바라보면 납득이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과정 자체로 바라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정된 시간에 끝나는 영화라면 모를까, 드라마는(특히 연속극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이제 곧 '추노'가 종영한다. 벌써부터 그 엔딩에 대한 예측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붕킥'에 이어 '추노'도 새드엔딩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지금까지의 흐름 상 해피엔딩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드엔딩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껏 이 작품이 어떤 과정을 밟아 마지막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그 점이다. 해피엔딩이니, 새드엔딩이니 하는 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 그것으로 작품 전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아울러 엔딩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그것 하나로 과정 자체를 덮어버리려는 막장드라마들의 변명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지붕킥'이 열어놓은 시트콤만의 가능성

그 누구도 시트콤을 하위 장르라 내놓고 얘기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시트콤을 보는 시선은 늘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시트콤 작가들이 정극으로 빠져나가고, 새로운 작가들도 시트콤에 도전하려 하지 않게 된 건 그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대접받지 못하는 시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을 통해서 시트콤은 더 이상 하위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지 일일극과의 대결에서 거둔 그 대중성 때문만은 아니다. '지붕킥'은 시트콤의 웃음이 힘겨운 현실과 결합해 어떻게 재미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지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시트콤이 웃음은 물론이고 멜로도 그릴 수 있으며 때론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트콤이라서' 낮게 보던 그 시선은, '시트콤이어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시트콤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시트콤의 강점은 정극의 허구성을 뒤틀었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보석과 현경이 눈밭에서 싸우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노부부가 '러브스토리'를 떠올리며, "우리도 젊었을 때 저랬었지"하고 말하는 장면은 이미 클리쉐화 되어버린 정극의 멜로 장면을 뒤튼다. 웃음은 바로 그 허구가 드러났을 때 터지게 되는데, 따라서 장르를 패러디하는 시트콤은 정극이 갖는 허구나 판타지를 리얼하게 폭로해내는 경향을 갖게 된다. 김자옥을 위해 엄청난 이벤트를 준비하는 이순재는 정극이라면 감동으로 끝났을 장면을, 노래를 하다 혼절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하는 짓을 질책하는 속마음을 드러냄으로서 웃음으로 바꾼다.

클리쉐화되어 버린 정극은 어떤 면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허구의 세계라고도 볼 수 있다. 일일드라마가 대표적인 경우. 늘 똑같은 설정과 늘 똑같은 흐름이 몇 년째 계속 되고 있지만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에 여전히 대중들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시청한다. 따라서 일일극이 장악한 저녁 시간대에 그것과 차별화를 이루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장르로 시트콤만한 것도 없다. 시트콤은 일일극이 가진 그 클리쉐를 부수는 것으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트콤의 '현실 폭로(?)' 경향은 정극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것이 마치 진짜 현실인 양 웃고 있는 사회의 얼굴 그 이면을 뒤틀어 보여주기도 한다. 서운대생임을 숨기며 살아가는 정음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우습지만 깊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어찌 보면 세경과 지훈(최다니엘)의 만남으로 시작해 그들이 함께 시간이 멈추는(?) 그 장면으로 끝나는 것은, 지훈이라는 도시인의 메마른 감성과 세경이라는 산골의 따뜻한 감성이 부딪쳐 한 자락 촉촉한 비로 내리는 것으로, 도시와 시골, 디지털과 아날로그, 현재와 추억으로 나뉘어지고 변해가는 세태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트콤은 이처럼 웃음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정극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웃음에 충실하다면 대부분의 장르 실험도 허용된다.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추리적인 요소나 멜로적인 요소, 휴먼드라마적인 요소, 심지어는 신파적인 요소까지 아무런 부담감 없이 즐겨왔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시트콤은 정극이 가지는 견고한 장르적 틀에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훨씬 다채로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것은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 풍자의 가벼움과 정극의 진지함 같은 요소들을 균형 있게 잘 연출해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그 성공적인 실험을 경험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시트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시트콤을 여전히 웃음만 주면 되는 그런 장르로 낮춰본다면 시트콤은 늘 하위 장르에 머물면서 그 가능성의 싹을 틔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제작자든 시청자든 좀 더 확장된 마인드로 시트콤을 바라볼 때, 시트콤은 정극이 주지 못하는 재미와 의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시트콤이라서 안 된다는 생각은 바꾸어야 한다. 시트콤이어서 되는 것이 더 많다. 이것이 '지붕킥'은 끝났지만 앞으로도 이어질 시트콤에 대해 갖게 되는 기대다.

막장이 국민이 되는 시청률 지상주의의 폐해

끊임없는 막장 논란을 가져오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에 대해 진형욱 PD는 "이 작품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드라마"라고 밝혔다고 한다. 진 PD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 드라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작가가 쓰는 드라마"이며 "평범한 위기나 너무나 편안한 일상만 펼쳐진다면 드라마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 안내상은 "시청률 40%를 기록하면 국민드라마가 아니냐"며 막장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이 "드라마가 불편한 이야기를 건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지금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하늘이시여'는 끊임없는 논란의 도마 위에 올라섰지만 시청률은 40%를 훌쩍 넘어섰다. '별난 여자 별난 남자'도 각종 논란에 휩싸였지만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들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한다고 해서 '국민드라마' 운운하고 나온 적은 없다. '수상한 삼형제'가 시청률을 내세워 국민드라마 운운하는 상황까지 온 것은, 시청률 지상주의 속에서 그만큼 자극에 둔감해진 드라마 제작 행태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 같다.

무엇이 막장이냐에 따른 정확한 기준은 없다. 다만 대중들의 정서가 그것을 막장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요소들이 막장의 징후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은 대충 짐작될 수 있다. 대체로 막장은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막장과 완성도의 측면에서의 막장으로 나뉘어진다. 얼개가 느슨한 것은 완성도가 막장이라는 것이며, 소재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은 윤리적인 막장이란 얘기다.

'수상한 삼형제'는 얼개가 그다지 느슨한 드라마는 아니다. 따라서 완성도 측면에서 이 드라마를 막장이라 부르기는 어렵다(물론 비정상적인 관계들은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막장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하지만 윤리적인 측면을 보면 지나치게 자극적인 상황으로만 몰고 가는 드라마의 행태가 막장 논란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워진다. 즉 '수상한 삼형제'의 막장 논란은 좋은 필력을 가진 작가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시청률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극적인 상황을 적재적소에 넣고 빠지는 것을 반복하는데서 나온 것들이다.

'수상한 삼형제'는 지금껏 흘러온 것을 보면 작가가 캐릭터 게임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캐릭터를 하나씩 끄집어내 자극적인 관계들을 얽는 것으로 극성을 올리고, 어느 순간 그 힘이 빠지면 다른 인물로 넘어가는 과정을 반복한다. 물론 그것이 파편화되는 현재가족의 모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만큼 이 드라마는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시청률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는 이야기다.

이즈음에서 국민드라마라는 호칭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막장드라마가 시청률을 갖고 국민드라마라고 주장하는 상황은, 이 사뭇 달라 보이는 두 용어 사이에 근본적으로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같은 조건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시청률을 넘긴 드라마를 흔히 우리는 '국민드라마'라고 부른다. 그만큼 많이 봤다는 뜻이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국민'이라는 호칭이 붙여지는 분야는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국민예능'이라 불려지고, '해운대' 같은 1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국민영화'라고 부른다. 국민배우, 국민가수, 국민여동생, 국민남동생, 국민개그맨... 이제 '국민'이라는 호칭은 조금 잘 나가는 장르나 연예인들에게 붙여주는 왕관 같은 것이 되었다.

잘 나가는 드라마나 예능에 '국민'이라고 붙여준 들 무슨 상관일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국민'이라는 호칭이 야기하는 집단적이고 강박적인 사회 분위기는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시청률 50%나 관객 수 1천만이 정상적인 수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온 국민의 반이 같은 드라마를 보고, 국민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같은 영화를 보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시청률 지상주의 속에서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라고 한다면, 그 말은 국민이 막장이란 얘기인가.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라고 말해지는 상황 속에서 드라마에 국민을 호명하는 이 상황도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청률만 높으면 다 용서된다는 이 상황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