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이라는 시공간은 기막힌 구석이 있다. 먼저 시간적으로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구한말이다. 이것은 장르적으로는 사극의 시간이다. 여기에 '제중원'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라는 공간을 세웠다. 장르적으로는 의학드라마의 공간이다. 즉 '제중원'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간을 제중원이라는 근대문명이 들어오는 공간 속으로 포획함으로써, 장르적으로는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하이브리드를 가능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두 차원의 볼거리를 하나로 결합해낸다. 조선이라는 시기에 처음으로 우뚝 세워지는 근대적인 병원공간인 제중원은 그 자체로 신기한 볼거리이면서, 동시에 사극이라는 장르적 공간 속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의학이 침투해 들어가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안에는 갓 쓰고 가마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조선의 양반들과, 기와집 안에서 스테이크를 구우며 브랜디를 마시는 양인들이 공존한다. 또한 그 곳에는 사극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으로 나뉘어진 공간이 있는 동시에, 중인이든 환쟁이든 모두 의생으로 불리는 제중원이라는 공간도 존재한다.

의학 사극 '제중원'은 500년 전통으로 견고하게 유지되어온 조선의 체계와 공간이 허물어져 내리고, 그 혼란 위에서 새로운 시스템이 세워지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시공간 위에 서 있는 소근개 황정(박용우)은 그 변화를 몸소 보여주는 캐릭터다. 백정 소근개가 황정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은 과거 계급사회의 껍질을 깨고 나와 미래를 향해 힘겹지만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근대적 인간의 탄생이다.

소근개에서 황정으로의 이행
따라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소근개(개의 새끼라는 뜻이다)라고 태생적으로 백정의 운명으로 한계 지워져 태어난 인물이, 그 한계를 벗어던지고 저 스스로 선택한 황정이라는 이름으로 서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으로서의 의학이다. 마마를 귀신으로 생각하고 부적을 붙이거나 굿을 하고, 마마로 죽은 아이를 귀신이 노한다며 매장하지 않고 나무에 매놓는 풍습은 중세적 사고방식으로서 비합리적이다. '제중원'이 우두백신을 만들어 예방접종을 하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 즉 과학적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접종하는 것과 같다. 어느 정도 생채기가 남겠지만 그것은 결국 합리적인 근대적 이성을 형성해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소근개가 황정이 되는 과정에 이 과학이라는 기술이 개입한다는 점이다. 소를 잡는 일을 하는 백정이라며 한 인간을 개 취급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런데 그 백정이 하는 일을 합리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상당부분 쓸모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 사람 몸에 칼을 대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던 시대에 소 잡는 백정은 이미 동물 해부 실험을 생활 속에서 해온 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백정이 천시되는 이유는 바로 그 육신에 칼을 댄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서양의학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각과도 일치한다. 제중원 의생들은 필요하면 아기를 받아내야 한다는 말에도 천하다며 펄쩍 뛰는 위인들이다.

즉 조선인들에게 백정과 서양의학은 그 거부감에 있어서 동일하다. 다만 다른 것은 백정은 소에 칼을 댄다는 것이고 서양의학은 사람에 칼을 댄다는 것이며, 백정은 소를 죽이지만 서양의학은 사람을 살린다는 점이다. 소근개는 그 칼을 댄다는 그 천대받는 기술을 갖고 서양의학 속으로 들어가, 그 용도를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을 황정이라는 근대적 인간으로 구원해낸다. 소 잡는 백정이 사람 살리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제중원'의 구한말이라는 독특한 시공간 속에서나 가능해지는 이야기다.

'제중원' 의생들을 통한 다양한 근대적 인물의 조명
황정은 따라서 '제중원'이 다루려는 이야기의 가장 중심 모티브와 골격을 잡고 있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 근대적 인간으로 성장해나가려는 황정 주변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배치되면서 이야기는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도양(연정훈)은 황정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근대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즉 사대부 양반가의 자제에서 제중원 의생이 되는 것. 그는 엄격한 사대부가의 관습을 깨고, 실용적이지 못한 성균관 교육을 박차고 나온다. 양반의 습속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의학이라는 하나의 뜻 아래서는 고개를 숙인다. 석란(한혜진)은 이미 서양문화에 익숙하고, 영어에 능통할 정도로 개화되어 있는 인물이지만 여성이라는 성 차별과 그 성에 따라 요구되는 행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즉 그녀 역시 황정이나 도양처럼 이 구한말이라는 시간이 부여한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인물이 자신을 넘어서 근대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이들이 엮어내는 멜로의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계급적으로 보면 도양이 양반으로 맨 위에 서고, 석란이 중인으로 중간에 서며 황정이 백정으로 맨 아래에 서는데, 멜로는 계급과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엮여있다. 즉 백정인 황정을 중인인 석란이 흠모하게 되고, 그런 석란을 도양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멜로가 황정과 석란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만일 도양이 인정해준다면 그 각각의 선택은 이들이 근대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한계 하나씩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즉 백정인 황정은 자기 비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중인인 석란은 늘 선택받는 여자라는 입장에서 선택하는 능동적인 인물로 바뀌며, 양반인 도양은 스스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양반이라는 계급의식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황정이 갖고 있는 이야기 골격과 목표의식은 이처럼 도양과 석란으로까지 확장되고, 그것은 또 제중원 의생들로까지 퍼져나간다. 황정과 같은 방에서 기거하는 고장근(송영규)은 화원으로 천대받지만 황정처럼 그 특유의 기술을 의학을 하는데 활용한다. 생생한 해부도를 그려내는 것이다. 미령(김태희)은 관기로 천대받으며 살아오지만 제중원에 들어와 차츰 간호사로서의 꿈을 펼친다. 미령의 몸종으로 있던 낭랑(신지수)은 거꾸로 선 아기를 제왕절개로 출산시켜 산모와 아기 모두를 살리는 것을 도우면서 간호사의 꿈을 갖는다. 동생을 낳다가 죽게 된 엄마로 인해 간호사의 꿈을 키우는 낭랑의 이야기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해 죽게된 어머니로 인해 황정이 의사가 되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제중원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근대적 인간이 되어가는 황정의 또 다른 버전들로 그려진다. '제중원'이 황정을 위시하여 그 주변 인물들의 집단적인 성장드라마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개화를 향해 달려간다.

'제중원', 사극으로서의 한계 의드로서의 한계
'제중원'은 이처럼 매력적인 시공간 위에 매력적인 인간을 세워놓는데 성공한다. 저마다 성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그들은 이 구한말이라는 과도기적 시간 속으로 들어가 제중원이라는 공간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극이 갖추어야 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로 잘 설정된 드라마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구한말의 제중원이라는 시공간을 붙여놓음으로서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한 점은 가치를 인정받아야할 덕목이지만, '제중원'은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한다. 성공적인 봉합술로 만들어진 '제중원'이라는 생명체는 살아있기는 하지만 아름답지는 않아 보인다.

'제중원'은 사극이 갖는 계급적인 문제를 드라마의 힘으로 잘 살려내지 못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제중원이라는 공간 때문에 생겨난다. 이 사극에서 알렌 원장이라는 서구적 의식에 의해 경영되는 제중원이란 공간은 계급이 지워지는 공간이다. 그 안에는 천시 받던 백정도 화원도 양반가 자제와 똑같이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물론 그렇다 해도 신분적인 차별은 여전하지만, 황정은 그 백정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있다. 그가 의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도양의 아버지를 수술 중 죽게 했다는 윤제욱의 누명 때문이지 신분적 차별 때문이 아니다. 황정이 신분을 숨긴 채, 제중원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한, 이 사극이자 황정이라는 인물이 넘어서야 하는 그 계급이라는 한계는 첨예화될 수 없다.

'제중원'은 또한 의학드라마의 결과를 알 수 없는 그 수술대 위의 긴박감을 드라마 속으로 끌고 오지 못했다. 의학드라마가 극적인 것은 그 수술대 위의 생명이 과연 수술을 통해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주목할 때다. 하지만 구한말의 제중원에서 벌어지는 수술과 처방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긴장감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상식적이다. 여기서 긴장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보편적인 의학적 정황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을 갖고 온 인물들의 특별한 이야기이다. 죽어나가는 민초들을 위해 백신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흐뭇한 일이고, 구한말에 어떻게 그런 것을 만들었을까 살피는 것은 분명 볼거리지만 그것이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드라마 '제중원'은 이 제중원이라는 매력적인 시공간에 붙박여 있음으로 해서 사극이 갖는 장점인 계급이 유발하는 힘과, 의학드라마가 갖는 긴박감을 살려내지 못했다. '제중원'은 황정의 어눌한 목소리처럼 극적인 상황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긴장감을 높여주지 못하고 있다. 설정은 완벽하지만 과정은 그렇지 못하다. 과정이 효과적이지 못하고 설정만 반복될 때, 드라마는 예정된 길로만 걸어가는 단조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역사책을 통해서 마마를 어떻게 우두백신으로 예방했는지 잘 알고 있으며, 죽어가는 환자를 어떻게 수술했고, 거꾸로 선 아기를 어떻게 제왕절개로 안전하게 출산시켰는지 다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매력적인 설정을 가진 '제중원'이 고민해야 할 것은 이 드라마가 갖는 현재적인 의미일 것이다. 사극은 단지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거기서 발견할 때 의미를 갖는다. '근대적 인간의 탄생'은 학문적으로는 의미 있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무엇을 보여줄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왜 보여주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 '제중원'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중원'이 갖는 사극으로서의 한계(계급적인 문제는 현대재 의미를 획득할 때 힘을 얻을 수 있다)와 의학드라마로서의 한계(초기 의학 도입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가질 때 긴박감을 확보할 수 있다)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다.

'명가', 착한 메시지의 힘, 계몽적인 시선의 한계

'명가'에서 주인공 최국선(차인표)에게 그 부친인 최동량(최일화)은 "내가 너로 인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청빈(淸貧)'의 길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국선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잘 사는 '청부(淸富)'의 길 또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 이 최동량의 대사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압축해 설명해준다.

'명가'는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하는 사극이다. 병자호란으로 피난 온 사람들에게 곶간을 열어 구휼죽을 베풀면서 가세가 기울어 버린 집에서, 가난을 타개해 보고자 최국선은 집을 나서 저자거리로 간다. 거기서 그는 장길택(정동환)을 만나 그 상단에 들어가 돈을 벌지만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던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이기영)이 준 깨달음 덕분이다. 그는 밥상 위에 여러 반찬을 올려놓고 그것을 이리 저리 옮겨 놓은 후, "이것이 바로 장사"라고 말한다. 즉 장사란 물건을 이쪽 저쪽으로 옮겨서 이문을 남기는 것일 뿐이라는 것. 즉 밥상 자체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장사가 아니라 농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의 멘토이자 할아버지인 최진립(장영철)이 유언을 대신해 남긴 '쌀되'는 국선의 뜻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쌀되'는 바로 '농사의 길'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함께 사는 길'을 상징하는 오브제다. 세금으로 이자로 민초들의 식량을 수탈해가는데 사용되는 그 '쌀되'는 국선의 손으로 오자, 흉년에 구휼죽을 나눠주는 도구로 바뀐다.

'명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 최국선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분명 착한 것들이다. 이 메시지가 승자독식의 사회, 흔히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말하는 현재에 던지는 무게감은 적지 않다. 그런데 왜 '명가'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까. 이야기가 너무 착해서였을까.

문제는 이 착한 메시지가 어떤 방식으로 제시되었는가에서 생겨난다. '명가'가 '청부의 길'을 제시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최국선에게 부친인 최동량이 깨달음을 말하는 장면은 물론 흐뭇한 설정이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최국선은 물론 조선 후기에 농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실제 인물로 현재에도 큰 의미를 던져주는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정작 이 꿈을 함께 일궈나가는 민초들을 자세히 조명하지 않는다. 민초들은 늘 가난함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심지어 죄까지 저지르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런 그들을 긍휼히 생각하고 품에 안는 최국선의 모습은 뭉클한 것이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민초들은 지나치게 수동적인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 착한 메시지를 가진 드라마가, 그 선함을 의심받게 되는 이유는 능동적이고 선구적인 일인과 대다수의 수동적인 민초들이 대비되며 나타나는 그 계몽적인 시선 때문일 것이다. 즉 우매한 민초들은 선견지명을 가진 한 인물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그 시선이 주는 뉘앙스가 현재의 능동적인 대중들에게는 어떤 거부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결국은 부의 축적을 전제로 한다는 것,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부의 명분으로서 세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이 시대의 대중들은 이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착한 사극 '명가'의 실패는 드라마 속의 최국선이 그러하듯이 현재의 대중들을 계도하고 가르치려는 그 태도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새롭게 주목받는 그들의 까칠 훈훈 리더십

'하얀거탑'에서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성공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며 욕망을 불태우는 인물이었고, 최도영 역할의 이선균은 착하기는 하지만 어딘지 칼바람 나는 세상에서 버텨내기에는 연약한 인물이었다. 그 후 김명민은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로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내는 까칠하지만 그 속에 훈훈함을 숨긴 인물로 돌아왔다. 이선균은 '커피 프린스 1호점'과 '트리플'에서 특유의 훈훈함을 강화하더니, '파스타'에서는 까칠함까지 더한 최현욱 셰프로 돌아왔다.

강마에와 최현욱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강마에가 마이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들에게 "똥덩어리"라고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들을 지원하고 챙겨주는 것처럼, 최현욱도 주방에만 들어오면 요리사들을 잡아먹을 듯이 요리(?)하면서도 그들을 스스로 생존하게 해준다. 주방에서의 최현욱이 손님의 주문 폭풍 앞에서 요리사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주문을 하는 장면은 마치 강마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어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연상시키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캐릭터가 비슷한 것은 그 리더십이다. 그들은 좀체 자신들의 팀원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욕을 해대고 모욕을 주면서 그들을 강하게 담금질한다. '파스타'의 최현욱은 부주방장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회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는 "부주방장에서 쉐프가 되는 그 시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레스토랑 사장과 쉐프라는 자리는 건설적인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그를 직접 도와주기 보다는 그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한다. 결국 부주방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그 줄다리기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주방 보조인 막내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겉으로는 그러라고 하지만 그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주방 보조란 자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쓰는 자리라는 걸 그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셰프로 온 오세영(이하늬)이 개발해낸 육수가 훨씬 괜찮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반대만 해온 이태리파 요리사들을 그는 옥상으로 데려다가 벌을 준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요리사들이지만, 요리 앞에서는 정직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이들의 까칠 훈훈한 리더십은 멜로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그 멜로의 양상 또한 두 드라마가 비슷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단원으로서의 두루미(이지아)를 혹독하게 이끌지만, 멜로의 대상으로서 그녀를 알게 모르게 돕는다. '파스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주방에서는 쉐프와 요리사의 관계로 있다가 주방 밖으로 나오면 연인관계로 돌아간다. 최현욱은 일을 할 때는 아무리 연인이라도 모질게 대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서유경(공효진)은 웃으며 받아들인다. 일과 사랑에 있어서 이들은 그만큼 쿨하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들어 까칠 훈훈한 리더십이 드라마 속에 자리하면서 어떤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이른바 버럭 범수로 주목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무엇이 이처럼 까칠하면서도 훈훈한 캐릭터의 리더십에 주목하게 만드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사회생활이 혹독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병원이나, '베토벤 바이러스'의 공연장, 그리고 '파스타'의 라스페라라는 공간은 모두 현실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그려진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진 그 현실에서 팀원들이 살아나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팀원들이 더욱 강하게 만들어 자신이 없어도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일과 사랑을 동시에 그려내는 우리식의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의 새로운 선택이기도 하다. 일에 있어서는 까칠함을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는 훈훈함을 전하는 것이 드라마가 현실의 빈자리를 채워 넣는 방법인 이상, 그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캐릭터로서 까칠 훈훈한 인물이 창조되고 있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파스타'의 최셰프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혹독해진 현실이 새롭게 요구하는 리더십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아결녀'와 '섹스 앤 더 시티'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우리는 무엇에 열광했을까. 그녀들의 일과 사랑에 대한 절절한 공감일까. 아니면 뉴욕이라는 먼 거리에 있는 도시공간이 제공하는 로맨틱한 판타지일까.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뉴욕은 서울이라는 현실공간이 갖지 못하는 판타지를 준다. 화려하고 세련된 패션과, 파티와, 모닝 커피와 브런치. 그리고 당당한 여성들의 일자리와 능력있는 남자들과의 로맨스. 물론 그것은 완전한 현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역만리에서 매일매일 일과 결혼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공간이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이하 아결녀)'는 '섹스 앤 더 시티'의 한국판이다. 서른 네 살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노처녀 셋이 일과 사랑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드라마. 거기에는 방송국 기자라는 선망의 직업을 가졌지만, 나이든 여자라는 이유로 퇴출 일순위로 몰리는 이신영(박진희)이 있고, 동시통역사로서 세계를 비행하며 능력을 보이지만 늘 남자에게 채이는 정다정(엄지원)이 있으며, 한 때 한 남자의 뒷바라지만을 하며 살아오다 문득 자기 자신을 위한 삶으로 선회한 김부기(왕빛나)가 있다.

그녀들은 겉으로 바라보면 저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어떤 판타지적인 동경의 대상들이다. 그들은 이미 전문직종에서 뛰고 있는 인물들이고, 그녀들의 라이프 스타일, 즉 패션이나 파티문화, 멋진 음식들 같은 것들은 보는 이를 충분히 설레게 만든다. 그녀들은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의 미혼이라는 사실이 외롭고 힘겨운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여유 있는 삶 속에서 여전히 로맨스를 꿈꾸는 배부른 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어 하지만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와 오히려 전문직 종사자라는 점이 그것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또래의 미혼 남자라면 능력 있는 나이 많은 커리어우먼보다는 그저 평범해도 더 젊은 여자를 원하기 마련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게다가 그 나이까지 버텨온 캐리어우먼의 직장생활이 그다지 순탄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겹다고 토로한다.

여기에는 이 드라마가 가진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거리감이 존재한다. 보여지는 삶은 판타지인데, 그녀들은 현실이 힘겹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이런 거리가 생겨나는 걸까. 이것은 우리가 '섹스 앤 더 시티'를 바라보는 그 마음과 일치한다. 어쩜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동경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 한 구석에 그 판타지를 몰아내는 자신이 서 있는 서울이라는 현실 공간의 힘겨움. 뉴욕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부모들의 차가운 눈 아래 어쨌든 결정해야 하는 이 땅의 결혼이라는 현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안타깝게도 배경이 뉴욕이 아니다. 바로 현실 공간 서울이 그 배경이다. 그러니 그녀들이 꿈꾸는 판타지는 현실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 '아결녀'는 일과 사랑 사이에 서서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드라마지만, 뉴욕만큼의 거리를 둘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 판타지에 쉽게 빠져들기 어렵다. 그래서 현실을 자꾸 떠올리다 보면, 심지어 '아결녀'의 전문직 여성들이 힘겹다고 토로하는 부분이 엄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들은 일에서 성공한 여성들이고, 그녀들 주변에는 여전히 한의사, 파일럿, 가수같은 직업을 가진 잘난 남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래서 아마도 아직 결혼은 못했지만 결혼을 꿈꾼다는 의미의 이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라는 제목은 몇 가지 다른 뉘앙스로도 읽힌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 혹은 '그렇게 성공했는데도 아직도 결혼이라는 걸 굳이 하고 싶어하는 여자'.

이처럼 '아결녀'는 깊이 현실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면 공감하기가 어렵지만, 그저 하나의 판타지로서 바라보면 꽤 괜찮은 재미를 선사하는 드라마다. 문제는 작금의 취업난이나 정리해고 같은 직장의 현실이 너무 첨예해 언뜻 언뜻 그 판타지 속에서도 자꾸만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거리가 바로 우리네 성공한 커리어우먼들이 갖는 그대로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능력 있고 당당한 그녀들은 뉴욕의 삶을 꿈꾸지만 여전히 결혼이라는 틀 속에 가둬두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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