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들에게 들국화의 의미

 

‘난 니가 바라듯 완전하진 못해. 한낮 외로운 사람일뿐야. 제발 숨~막혀. 인형이 되긴 제발~ 목말라. 마음 열어 사랑을 해줘~’ 전인권이 ‘제발’을 부르자, 유재석은 눈물을 훔쳤다. 28년 만에 첫 예능으로 <놀러와>에 놀러온 들국화였다. 그 긴 세월 동안 방송 출연이 고작 5회였다는 사실은 들국화가 살아낸 세상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아마도 들국화와 함께 나이 든 중년들이라면 유재석의 눈물을 백분 공감했을 것이다.

 

'놀러와'(사진출처:MBC)

‘제발’이 말하듯, 들국화가 꿈꾼 건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장발 단속으로 길거리에서 무단으로 연행(?)되어 바리깡으로 머리가 밀리던 시절, 치렁치렁한 머리를 자유의 상징처럼 흔들며 살았던 청춘이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들이 불렀던 The Hollies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에 깜짝 놀란 가수들과 음반제작자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가요사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아마도 당대를 살았던 청춘들이라면, 들국화 1집을 사고는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듯 설렜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놀러와>에서 들국화가 술회한 것처럼, 당시 방송은 어딘지 억압적인 분위기였다. ‘기나긴 하루 지나고-’로 시작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가 “왜 하루가 기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던 시절, 방송은 가사에서부터 외모까지 들국화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섯 번 나온 방송들을 보면, 긴 머리 치렁대는 전인권의 열창하는 모습은 클로즈 샷으로 찍히는 법이 없었다. 방송에서조차 들국화는 얼굴도 잘 식별되지 않는 먼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번의 구속. 대마초 혐의로 거의 막장까지 다다랐던 전인권은 점점 폐인처럼 세상에서 멀어져버렸다. 그렇게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일어났다. 가족과 팬들의 힘 덕분이었다. 요양원에서 1년 넘게 버텨내며 술까지 끊어버린 그는 그의 말대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났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폐인처럼 쓰러져가던 친구를 걱정해오던 최성원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떡하니 나타나 “지금까지 들은 목소리 중 최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는 전인권에 뭉클해진 건 최성원만이 아니었다.

 

<놀러와>에 앉아있던 MC들과 방청객들, 그리고 그걸 보는 시청자들 마음 또한 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너무 강해서 거칠게 느껴지던 한 인간이 지난한 세월을 겪으며 한없이 모든 걸 껴안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진 그런 모습을 보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30년을 묵혀야 비로소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귀하디 귀한 대기만성 와인의 맛을 느끼는 듯한 그 목소리는 절규하지 않아도 절절한 깊은 울림을 담고 있었다.

 

유재석은 “세 분의 예전 모습과 겹치면서 눈물이 솟구쳤다”고 눈물의 이유를 말했다. 그 야생마 같던 시절에서 이제 멀리까지 걸어와 여유로워진 그 모습에서 유재석은 아마도 거친 인생과 예술에 녹아든 깊은 페이소스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들국화와 함께 나이 들어버린 중년들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여전히 야성의 젊음을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고 있지만, 이제는 생활 속에서 그걸 긍정함으로써 어떤 깊은 향을 내고 있는 중년들처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마치 들에 핀 국화 같은.

<런닝맨>에서 개리가 차지하는 비중

 

<슈퍼7> 콘서트 논란으로 개리는 예능활동 중단 선언을 했다. 멀쩡히 잘 하고 있는 <런닝맨>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런닝맨> 제작진은 물론이고 <런닝맨> 팬들에게도 그렇다. 개리가 <런닝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중단 선언과 함께 <런닝맨> 팬들이 “개리쒸 없으면 무슨 재미로...”라고 우려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런닝맨'(사진출처:SBS)

아마도 <슈퍼7> 콘서트 논란이 가중되기 이전에 찍은 것이겠지만, 태연과 중년의 미친 존재감들 손병호, 신정근, 이종원, 고창석이 출연한 분량에서 개리는 그 존재만으로도 <런닝맨>에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개리는 송지효와 짝을 이뤄 서로의 존재감을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다. 둘의 밀고 당기는 멜로적인 관계 설정은 액션과 승부의 장일 수밖에 없는 <런닝맨>에 로맨틱 코미디적인 웃음을 만들어주곤 했다.

 

송지효의 열애사실이 공표된 후에도 개리는 그녀와의 관계를 잊지 못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고수하곤 했다. 마치 헤어진 연인처럼. 이 관계는 게스트가 출연했을 때 적절히 활용될 수 있었다. 멋진 남자 게스트가 나와 송지효와 어떤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개리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는 식이다. 이런 순애보적인 느낌은 순수한 멜로의 주인공처럼 개리를 캐릭터화 했고 바로 이 캐릭터는 여자 게스트가 나왔을 때도 그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태연과 우연하게 포옹을 하게 되자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파티션을 넘어뜨리기도 하는 그런 장면은 개리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분량이다. 이것은 <런닝맨>에서 여성 시청층들에게 개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잘 말해준다. 개리가 있어 만들어지는 그 남녀 간의 밀당과 로맨틱한 분위기의 웃음(게다가 순수한 느낌까지 준다)은 하하나 광수가 만들어내는 조금은 장난기 가득한 설정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개리가 있는 <런닝맨>과 없는 <런닝맨>은 그 공기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굳이 개리가 예능 중단 선언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사실 <슈퍼7> 콘서트 논란에서 리쌍이 그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됐던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리나 길이나 모두 예능에서는 한참 후배격일 수밖에 없다. <슈퍼7> 콘서트를 (주)리쌍컴퍼니에서 주최했다고 해도 그 주도권이 리쌍에게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무한도전>의 예능 선배들이 어쩌면 부탁한 일일 것이며, 그래서 좀 더 잘해보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김장훈도 실질적으로 콘서트를 구상한 건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던가.

 

물론 자신이 대중들에게 곡해되는 그 심경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건 이해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던 프로그램을(해도 너무 잘 하던) 갑자기 그만 두는 것은 자칫 그 프로그램과 그걸 바라보고 있는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 수 있다. 개리 스스로도 <런닝맨>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또 시청자들도 그런 개리를 계속 보고 싶어 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런닝맨>측은 “개리가 하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말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 하고 있다. 이것은 대중들도 원하는 일이다. 물론 힘겨운 선택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대중과 함께하는 개리이길 모두가 바라고 있다. <런닝맨>에서 다시 힘차게 달리는 그를 볼 수 있기를.

싸이의 소통방식, 거창할 것 없이, 즐기듯

 

NBC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의 한 장면. 한 모자가게 직원들이 누군 승진하고 누군 못했다는 얘길 하며 풀이 죽어 있을 때 그걸 한 방에 날려 보낼 방법이 있다며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뒤에서 싸이와 똑같은 분장을 한 남자가 나와 어색한 한국말로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치며 말춤을 춘다.

 

'강남스타일'(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어딘지 루저들 같은 찌질함이 느껴지는 그들의 상황과 하소연이 반복되고 그 때마다 기분을 업(up)시켜주는 <강남스타일>을 듣기 위해 그들은 연실 버튼을 누른다. 유재석과 노홍철과 똑같은 분장을 한 남자들의 춤(뮤직비디오에서 봤던)이 덧붙여지면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그러다 터보 버튼을 누르자 진짜 싸이가 유유히 걸어 나온다.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소리 속에서 그는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친 후 말춤을 춘다.

 

이것은 그들의 표현대로 ‘한국의 랩 센세이션’, 싸이가 미국인들에게 비춰지는 이미지다. 뭔가 다운된 분위기를 업시켜주는 즐거운 음악과 춤이 거기에 있다. 콩트 속에서 한 직원은 이 노래와 춤을 이렇게 표현했다.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멋진 것 같아." 이것은 미국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토크쇼 중 하나인 NBC '더 엘런 드제너러스 쇼'에서 그가 보여준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하다. 객석까지 뛰어든 싸이는 모든 관객들과 함께 신나게 말춤을 추었다. 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들썩들썩 했다.

 

싸이의 성공을 분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지만(물론 그 글들도 대부분 일리가 있지만) 진짜 성공요인은 그 솔직하고 명쾌한 즐거움에 있다. 굳이 거창하게 ‘한류’ 운운하거나, 국가 경쟁력, 경제적 효과 같은 걸로 포장될 수 없는, 있는 그대로를 툭 털어놓고 열정을 다하는 그 쿨한 즐거움, 그리고 한바탕 놀자는 솔직함에 미국인들까지 열광하고 있는 것.

 

이런 점은 기획되고 연출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싸이를 통해 익히 봐왔던 것들이다. 싸이는 노래 ‘챔피언’을 통해 이미 ‘진정 즐길 줄 아는 여러분이 이 나라의 챔피언’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싸이가 자신의 개성을 <강남스타일>이라는 전 세계 보편적인 리듬에 실어 최대치로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의 지금의 성공이 있는 것이다.

 

싸이에 열광하게 되는 것은 그 특유의 ‘흥’에 있다. 젠 체하지 않고 기꺼이 온 몸을 던져 보는 이를 열광케 만드는 우리네 광대들이 보여줬던 그 서민적이면서도 어깨춤이 절로 나게 만드는 ‘흥’.

 

싸이는 주저리주저리 자신을 소개하거나 멋지게 포장하기보다는 대중들에게 ‘놀자’고 손을 내민다. 미국의 유명한 쇼에 나와서도 그가 줄곧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거다. 그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말춤을 가르치면서 했던 말, '옷은 고급스럽게, 춤은 싸구려처럼(Dress Classy, Dance Cheesy)!'이란 말은 그래서 싸이의 소통 방식을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잘 차려입고 싶은 욕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고 싶은 욕구. 싸이 자신이면서 어쩌면 국가나 인종을 넘어서 누구나 갖고 있을 감성.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한류 한류 하며 무언가 포장하려 하고 거창하게 우리 입으로 떠들어댈 때 진정한 문화적 소통은 어쩌면 더 멀어진다. 소통을 상품분석의 마케팅처럼 생각할 때 그것은 진솔함과 소박함(혹은 진정성) 같은 인간적인 매력을 잃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소통에 실패한다. 싸이가 전 세계적으로 소통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먼저 한류라는 껍질로 포장하고 떠들어대기보다는 그 격식을 파하고 ‘놀아보자’고 손 내민 솔직함과 독창성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문화적 소통은 국가가 주관하거나 어느 한두 대형 기획사가 기획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솔직함과 독창성이 자유롭게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문화적 풍토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 더 다양한 문화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 많은 진정성이 느껴지는 다양성 속이야말로 더 많은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싸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세계인들이 한국문화를 즐기고 싶어 하고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어딘지 다운(down)된 분위기를 업시켜주는 지극히 한국적인 멋과 흥을.

<광해>, 이병헌의 연기학 개론

 

왕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자리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화 <광해>가 던지는 질문이다. 왕을 연기하던 광대 하선(이병헌)은 그 얼굴이 똑같다는 이유로 광해(이병헌)에게 불려가게 되고 왕을 연기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광해가 중독으로 쓰러지게 되자 허균(류승룡)은 하선을 당분간 왕의 자리에 앉히게 된다. 흥미로운 건 하선이 그 왕의 자리에 앉게 되면서 점점 왕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사진출처:영화 <광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은 아마도 <광해>가 가진 뭉클한 정치적 지점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광해는 왕의 자리에 앉아 그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폭군의 면모를 보이지만, 그저 저잣거리에서 살아가던 민초 하선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그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외척세력을 문제 삼아 중전을 폐하려는 신하들의 청 앞에 그는 조강지처를 내치는 남편이 어디 있느냐며 호통을 치고, 대동법 시행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땅 더 가진 자가 더 세금을 내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말한다.

 

이것은 왕이 백성을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민초인 자가 왕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다. 이것은 <광해>라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대선을 앞두고 있는 2012년에도 울림을 갖는 이유다. 국민을 호명하는 정치인들은 많아도, 진짜 국민이 무엇을 바라는 지 그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은 보기 힘든 현실. 이것이 어쩌면 <광해>에서 광해를 연기하는 하선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영화라는 장막을 통해 기꺼이 현실적으로 믿게 되는(믿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왕이 타고난 왕이 아니라, 왕을 연기하는 하선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병헌은 왕을 연기하는 하선을 연기한 셈이다. 연기론으로 보면 연기는 연기를 흉내 내는 게 아니고 그 캐릭터 자체가 되는 일이다. 하선이 왕 연기를 하다가 점차 광해와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바로 이 진정한 연기가 구현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게다가 하선은 직업이 광대다). <광해>는 따라서 한 연기자(하선이라는 광대)의 연기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병헌으로서는 이 지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연기라는 것이 흉내 내기가 아니고,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 그 캐릭터에 동화시키는 것이라는 걸 이 영화 속 인물인 하선과 그를 연기하는 이병헌이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진짜로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광대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순간은 중요해진다. 이것은 연기자가 캐릭터에 몰입되어 있다가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그래야 연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 광인이 아니라)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병헌은 아마도 <광해>를 연기하면서 어느 순간에는 진짜 왕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다시 광대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지만.

 

<광해>에서의 이병헌이 그 어떤 다른 작품에서의 이병헌보다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세를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왕이 된 독한 카리스마의 이병헌을 볼 수도 있고, 그 왕을 연기하는 연기자로서의 이병헌을 볼 수도 있다. 거기에는 진지함과 코믹함이 뒤섞이고,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한다. 이 이질적인 면들이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구현되었다는 것은 이병헌이라는 한 연기자의 이 작품을 통한 성취라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광해>는 마치 이병헌의 연기학 개론 같은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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