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던 김기덕, 이번엔 <도둑들>


김기덕 감독의 스크린 독점과의 싸움은 오래되었다.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1천만 관객을 단 21일 만에 돌파하는 괴력을 발휘했을 때, 그는 <100분 토론>에 토론자로 나와 이 성공 이면에 놓인 스크린 독점의 문제를 성토했다. 실제로 당시 전국 1400여 개의 상영관 중 <괴물>은 무려 620여개 상영관을 싹쓸이했었다.


사진출처: '피에타'

물론 영화는 완성도도 높고 작품성도 뛰어났지만(김기덕 감독 스스로도 <괴물>은 훌륭한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스크린 독과점은 반칙이라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괴물>과 김기덕 감독의 작품 <활>을 비교해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영화를 틀어주지 않는 현실에 통탄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괴물>이 620여개 상영관에서 1천만 관객의 기록을 깰 때, <활>은 고작 한 개의 상영관에서 1398명의 관객을 맞이했으니.


6년여가 흐른 지금 기막히게도 이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번에는 바로 그 <괴물>이 냈던 관객 수 최다기록인 1301만 명의 기록을 깨겠다고 나선 <도둑들>이다. 이미 몇 만 명만 넘기면 기록을 깨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한 차례 흥행의 파도가 지나간 시점이지만 여전히 이 영화는 일일 상영회수가 1000여회 이상이다.


김기덕 감독은 기자회견을 통해서 “<피에타>가 해외에서 대단한 일을 하고 돌아왔지만 막상 상영관이 없어 관객들이 영화를 못보고 있다. 스크린수가 많아 보이는데 교차상영이라 상영횟수가 적은 편”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 “<피에타>가 교차상영되고 있는 현실에 어떤 영화는 기록을 깨기 위해 여전히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그게 말 그대로 ‘도둑’이 아닌가”라며 현재 최고관객기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도둑들>의 스크린독과점을 꼬집기도 했다.


이런 비판과 여론 때문인지 <피에타>는 애초 100여개로 시작한 스크린 수가 12일 현재 288개까지 늘어난 상황이다. 좌석점유율도 40-60%에 달하고 있어 스크린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도둑들> 이후의 복병으로 <광해>가 스크린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개봉 첫날 17만 명에 달하는 관객몰이를 성공한 이 영화는 스크린 수가 무려 688개관이나 된다. 한동안 줄줄이 흥행에 실패했던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배급사로 흥행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 영화는 당연하게도 CJ계열인 멀티플렉스 체인 CGV의 물량공세가 예상된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는 다행스럽게도 누적 관객수 20만을 넘기면서 손익분기점을 넘은 상태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여전히 날이 서 있다. 그는 영진위 주최 축하연에 참석해 “다행히 저희 <피에타>는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개런티를 나눠줄 수 있게 됐지만 다른 소규모 저예산 영화들은 상영할 기회조차 없어 (불법) 다운로드로 넘어간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스크린 독과점의 문제는 단지 흥행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가 자본에 잠식됨으로써 결국 자본의 입맛에 맞는 영화만 제작될 수 있는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김기덕 감독은 여기에 대해 “투자자와 창작자 사이 균형이 깨지고 있다”며 “그 균형을 되찾지 못한다면 제2의 이창동, 박찬욱, 홍상수, 봉준호, 그리고 김기덕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는 예술을 담고 있지만 분명한 건 자본이 투입되는 상업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덩어리가 크건 작건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영화를 문화로 바라보면 전체 영화의 발전을 위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고 여겨진다. 즉 멀티플렉스에서도 저예산 영화나 독립 영화가 방영될 수 있는 공간 하나 정도는 내주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면 국가 산업적으로 이득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또한 대중들의 좀 더 다양한 영화 선택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때 최고 관객 기록을 깼던 <괴물>과 싸우던 김기덕 감독. 이제 그 기록을 깨려 하고 있는 <도둑들>과도 싸우는 상황이 되었다. 과연 이번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거대 투자배급사와 연계된 멀티플렉스 상영관이라는 ‘괴물’과 ‘도둑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왜 지금 <무신>이어야 했을까

 

이제 종영이 임박한 MBC 주말사극 <무신>은 애초 ‘대장경 천년 특별기획’이라는 기치로 제작되었다. 실제로 이 사극의 초반부에는 대장경을 염두에 둔 에피소드들이 매회 등장했다. 조금은 뜬금없어 보였지만, 대장경의 의미를 하나 하나 설명하는 장면들이 사족처럼 들어 있었다. 물론 이 사극의 주인공인 김준(김주혁)이 자라난 곳이 다름 아닌 절이고, 그 역시 최씨 가문의 노예로 끌려오기 전에는 스님이었다.

 

'무신'(사진출처:MBC)

하지만 <무신>은 김준이 노예 신분을 벗고 점점 고려 무신정권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대장경 에피소드하고는 멀어졌다. 드라마의 전체 흐름으로 보면 대장경 에피소드는 마치 명분을 위해 들어간 장면처럼 보인다. 실제 <무신>이 다루려고 하는 것은 고려말 무인들이 정권을 휘둘렀던 이른바 ‘무신정권’ 약 100년 간의 통치기간이다. 왕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은 군부에 있었던 시기. 그 시기에 김준이라는 노예에서 시작해 최고 권력자가 되는 인물을 조명한 것이 <무신>의 실체다.

 

그런데 왜 지금 군사통치를 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것은 그간 사극이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져왔다는 점 때문이다. 96년부터 98년까지 방영되었던 KBS 사극 <용의 눈물>은 97년 대선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며 형제들마저 내쳤던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는 당시 IMF 시절 대권후보들이 차용하고 싶은 이미지 그대로였다. 실제로 이방원(유동근)이 탄 말 앞다리에 'DJ'라는 글자가 새겨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0년 총선 때 KBS 사극 <태조 왕건>, 2007년 대선 때 MBC 사극 <주몽>과 <이산>인 인기를 끈 것도 사극에서 정치적인 리더십을 찾으려는 대중들의 욕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거철에 방영된 것은 아니지만 <선덕여왕>이나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극들은 모두 현실 정치의 염원이 묻어나는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무신>은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무신>은 대몽항쟁을 다루면서 무신들과 문신들을 극명한 대비로 그려 넣었다. 현재 몽고의 쿠빌라이칸에게 무릎을 꿇은 문신들을 대표하는 원종과 이를 극렬히 반대하는 김준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당시 외교에 있어서 누가 옳았는가 하는 점은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다. 또 외세에 자주를 내세운 당대 무신들의 기상은 물론 높이 살만한 일이다. 하지만 왜 이 이야기가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사극에서 다뤄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군사정권이니 군사통치니 하는 용어에서 먼저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는 실제로 <무신>이 다루고 있는 군사통치처럼,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출범하고 5월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꾼 뒤 1963년 12월16일까지 이를 통한 실질적인 통치를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실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신>의 역사적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물론 <무신>이 박정희를 그대로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사극이 그려내는 정치적 뉘앙스는 분명 존재한다. 외세에 대적하는 자주 국방이니, 강력한 중앙집권 같은 이 사극이 모토로 보여주는 정치의 세계는 자칫 대선의 특정 정당에 편향된 느낌을 줄 수 있다. 왜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무신>같은 소재를 다뤄야 했을까. 그것은 진정 대장경 천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정말?

'런닝맨', 그 게임도구의 진화과정

 

단순해보였던 <런닝맨>의 이름표는 끝없는 진화를 거치면서 이 실전게임에 엄청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처음에는 그저 떼어지면 죽음을 의미하는(?) 한 출연자의 생명을 의미했지만, 그 뒤에 스파이를 붙이자 게임은 복잡해졌다. 또 커다란 이름표와 작은 이름표로 둔갑하면서 생존가능성의 크고 작음을 나타내기도 했고, 떼도 떼도 또 이름표가 있는 식의 이른바 좀비 이름표도 생겼다. 때론 ‘반사’의 의미로 뗀 사람을 오히려 죽게 만드는 기능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이름표 하나가 보여주는 이런 무수한 변화들은 <런닝맨>이 달려온 길을 잘 말해준다. 게임의 진화. <런닝맨>이라는 놀라운 예능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 아닐까.

 

'런닝맨'(사진출처:SBS)

이런 도구의 진화는 물총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장전해서 쓸 수 있지만 노출되기 쉬운 커다란 물총이 있는 반면, 손아귀에 쏙 감춰져서 스파이 미션에 어울리는 물총도 있다. 물총에 들어가는 물약 또한 그저 물에서부터 시작해 색깔이 있는 물약으로 진화하더니, 한 단계 더 나아가 맞을 때는 표시가 났다가 조금 지나면 사라져서 자신이 물총에 맞은 것을 모르게 하는 용도의 물약도 나오게 되었다. 이름표과 물총, 그리고 추격전을 더 긴박하게 만드는 방울은 <런닝맨>의 기본 게임도구지만, 그 하나하나의 아이템이 이런 끝없는 진화과정이 들어있었기에 지루하지 않은 게임이 될 수 있었다.

 

초창기 조금은 단순했던 보물찾기 게임에서 보물의 기능을 했던 런닝볼은 최근에는 런닝맨 머니나 R스티커, 007가방 같은 새로운 아이템들이 등장하면서 좀 더 복잡한 게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즉 마치 블루마블 같은 머니 게임 형식처럼 경제 개념(?)을 놀이에 넣음으로써 얻은 돈으로 어떤 물품(공격기구나 방어기구 같은)을 구입하느냐에 따라 놀이의 성패가 달라지게 했던 것. 제주도에서 한지민을 게스트로 초대해 벌인 ‘휴가비 사수’ 게임에서는 돈을 모아서 추가 이름표(생명 연장)를 사기도 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R스티커, 007가방은 흔히 RPG게임에서 보는 이른바 ‘아이템’을 현물화한 것이다. 그 안에 혜택 혹은 불리한 조건을 적어 넣음으로써 그걸 열어보는 이의 캐릭터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게임 도구다. <런닝맨>의 조효진 PD는 R스티커의 흥미로운 탄생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해외에 촬영 갈 때마다 가방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공항에서 잃어버릴까봐 R스티커를 붙여놓았던 게 이렇게 프로그램에서 게임 도구로 활용되게 되었죠.” <런닝맨> 제작진들의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일상화되어 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초기에 사용되었던 무전기(이것은 최근 들어서는 잘 활용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스파이 미션처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지도나 내비게이션, 게임에 활용되는 딱지부터 제기, 주사위, 말판 등등 게임도구들은 사실 우리 주변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많은 것들을 <런닝맨>이 실제로 게임의 스토리 속에 잘 녹여내고 있다는 점일 게다.

 

도구의 진화는 그걸 활용하는 이들의 진화를 뜻한다. 즉 게임 속에서 게임도구가 진화하면 캐릭터들도 진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수히 많은 도구들이 활용되었고, 그 도구들이 또한 계속해서 진화하면서 다양한 쓰임새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런닝맨>이라는 게임 버라이어티를 진화시킨 동력이면서도, 동시에 <런닝맨>만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런닝맨>의 진화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무수한 진화된 도구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진화된 도구들 속에 숨겨진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니.

김기덕의 <피에타>가 보여주려는 것

 

“돈 받아오라고 했지. 병신 만들라고 했어? 인간백정 같은 놈...”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피에타>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강도(이정진)에게 그의 고용주(?)는 이렇게 말한다. 고용주의 말대로 강도는 빌려간 돈을 받아내기 위해(이자가 무려 열배에 가깝지만) 청계천 공장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을 보험에 들게 하고는 손목을 절단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식으로 돈을 갚게 한다. 말 그대로 인간백정 저리 가라 하는 인물이다.

 

'피에타'(사진출처:김기덕필름)

<피에타>가 이 인간백정을 내세운 것은 돈이라는 기괴한 장치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폭력과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용주는 강도에게 돈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자기 알 바가 아니다. 돈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강도를 시켜서 자신이 저지른 죄는 숨겨지고 체감되지 않는다. 즉 돈을 받아내기 위해 병신을 만든 건 강도의 짓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

 

이 짧은 장면은 자본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의 끔찍한 풍경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자본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치환시켜주는 돈이란 괴물은 모든 단면들을 말끔하게 만들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영화 속 자살을 결심한 한 사내가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계단에서 이제 사라져버릴 청계천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그저 죽기 직전의 넋두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었던 그 공장들은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밀어내지고 저 멀리 세워진 빌딩들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것이다. 마치 한 노동자의 손목이 말끔하게 잘려져 버리는 것처럼.

 

그 땅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한 때 과도하고도 조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제 손목을 자본의 제물로 바치곤 했다. 지금의 자본의 풍경이 세워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 무덤들이 세워졌던가. 하지만 이 풍경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제 누군가는 돈을 갚지 못해 손목을 대신 저당 잡히고, 또 어떤 누군가는 태어나는 자식 앞에서 해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손목을 자른다. 그것으로 받아낼 수 있는 보험금으로나마 자식에게 이 손 무덤의 노동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결국 이 말도 안되는 폭력을 가능하게 하고, 심지어 죄의식조차 없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저 강도의 고용주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돈 뒤에 숨어서 “그저 돈을 받아오라고 한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것도 자신이 빌려준 돈을. 이것은 강도가 그 잔혹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으려고 한 그들이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돈이 모든 것의 가치척도가 되는 세상의 풍경이다. 돈을 빌려준 자는 받는 것이 정당하고 빌린 자는 갚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든 게 정당화된다.

 

돈의 논리가 지상가치가 된 세상에서는 죽음이 만연하지만 그 죽음은 돈 뒤에 가려진다. 자본이 자연을 인공으로 채울 때, 생명은 죽어나가기 마련이 아닌가. 나무들이 뽑혀져 나간 후에야 그 위에 건물이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 살아가던 생명들은.

 

<피에타>는 원경에서 보면 스카이라인과 랜드마크로 웅장하게 보이는 그 말끔한 도시의 빌딩이 주는 안온함을 들춰내고, 근경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폭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다. 말끔한 도심의 이면에 놓여진 쓰레기더미와 비닐하우스촌, 방치되고 버려지는 공장의 기계들, 그 기계에 기대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 그 기계에 제 살을 집어넣어야 살 수 있고, 급기야 그 기계에 몸을 걸어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영화다.

 

<피에타>는 바로 이 자본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또 한 축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구원처럼 다가오는 모성은 과연 이 폭력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폭력으로 대변되는 남자와 모성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대결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끝단이 만들어낸 자본의 살풍경이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폭력과 모성의 대결로 다뤄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피에타>는 우리 모두가 돈이라는 자본의 장치에 얽매여 살아가면서 보지 못했던(어쩌면 보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 저편의 세계를 불편한 진실로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저예산 영화가 자본 앞에 처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채워지는 멀티플렉스들 그 이면에 놓여진 작은 영화들의 절규. 영화 속에서 자살을 택한 한 젊은 청년이 일기장에 마구 거칠게 적어놓은 것처럼, 김기덕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돈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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