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에서 하던 '런닝맨', 랜드마크를 만들다

'런닝맨'(사진출처:SBS)

'런닝맨'의 초기 버전은 랜드마크가 중심이었다. 대형쇼핑몰, 월드컵경기장, 과학관, 세종문화회관, 서울타워... '런닝맨'은 게임버라이어티답게 이 랜드마크 속으로 들어가 그 공간에 어울릴만한 게임들을 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물론 흥미로웠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어딘지 다람쥐 챗바퀴 돌듯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그것도 그 공간과 어울리는 게임을 억지 춘향식으로 맞추다 보니 '틀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런닝맨'은 이 틀을 과감하게 버렸다. 즉 랜드마크에 집착하지 않고 좀 더 게임에 집중했던 것. 이렇게 되자 게임은 좀 더 흥미진진해졌다. 런닝맨들은 이제 그 날의 목적지가 어딘지도 또 거기서 어떤 미션으로 게임을 할 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런닝맨'의 시작과 함께 부여된 미션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식이다.

'런닝맨'이 랜드마크를 버리면서 게임 공간이 확장되자, 랜드마크에 집착했다면 할 수 없었던 '횡단 레이스' 같은 게임이 가능해졌고, 밀폐된 공간을 벗어나자 홍대거리처럼 열린 공간에서의 게임이 시도될 수 있었다. 그만큼 게임이 다양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랜드마크와 억지로 꿰어 맞춘 게임이 가진 예측 가능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본래 게임이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수록 더 흥미로운 법, '런닝맨'의 게임은 멤버들이 그 날의 게임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이것은 제작진과 런닝맨들 사이에 묘한 심리전을 만드는데, 런닝맨들이 무언가를 의심하고 또 확신하게 되는 상황이 생길 때, 제작진은 그것을 거꾸로 역이용해 게임을 만드는 기민함을 보인다. 스파이는 '런닝맨'의 이런 심리전을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장치다. '트루개리쇼'는 스파이가 되고 싶어하는 개리를 먼저 세워두고 다른 런닝맨들이 개리를 속이는 몰래카메라를 게임으로 내세웠지만, 마지막에 가서 사실은 개리가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는 또 한 번의 반전을 만들었다. '런닝맨'이 보여준 일련의 진화과정을 되짚어보면 이런 심리전이 가능하게 된 것도 결국은 그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을 버린 데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반전이 생긴다. 즉 '런닝맨'이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이제 거꾸로 그들이 가서 한바탕 게임을 벌이는 공간이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런닝맨 힙합 특집'에서 그들이 갔던 홍대 놀이터나 대학로는 이제 본래 그 공간이 가진 이미지에 '런닝맨'의 힙합맨들이 게임을 했던 장소의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제주도에서 신세경과 함께 벌인 로드 레이스는 그들이 지나간 시장, 해수욕장, 식당 등에 '런닝맨'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심지어 그들이 간 파타야나 북경은 그 게임과 장소가 그대로 하나의 여행상품화 되기도 했다.

'런닝맨'이 애초에 하려던 게임은 기존 랜드마크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지만, 이제 '런닝맨'은 어떤 공간이든 그 공간에서 한 판 신나는 게임을 함으로써 그 공간을 랜드마크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이제 관광지나 여행지 같은 공간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과거에는 그 곳의 유적이나 특별한 자연경관이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이 그 역할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런닝맨'의 랜드마크에 대한 태도 변화는 실로 시의적절 했다고 여겨진다. 랜드마크를 찾아다니던 '런닝맨', 이제 그들이 가는 곳이 랜드마크가 되었다.

 


'1박2일'이 강호동의 공백을 느껴야 하는 이유

'1박2일'(사진출처:KBS)

그는 떠났어도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1박2일'이 강호동을 보낸 마음이 그렇다. 강호동 없이 5인 체제로 꾸려지는 '1박2일'로서는 그 커다란 공백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이상, 뒤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남은 5인들이 어떻게 '1박2일'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 어쩌면 이 위기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니까.

위기를 기회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강호동이라는 큰 산이 '1박2일'에 미친 영향만큼 그 산의 그림자에 가려서 못한 것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즉 강호동이 있기 때문에 제작진과 멤버들 사이에 팽팽한 대결구도가 만들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 대결구도는 물론 '1박2일'을 재밌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스텝들과 멤버들이 야외취침이나 전원 입수를 놓고 경기를 벌이는 장관은 이 대결에서 나온 것이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제작진과 멤버들 간의 대결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매력적인 구도지만 반복되다 보면 이것도 언젠가는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호동이 없는 상황은 이 흐름을 자연스럽게 바꿔줄 수 있다. 즉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고 제작진이 멤버들을 압박할 수도 있다. 나영석 PD는 이미 '1박2일'의 한 멤버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권력의 이동(?)은 의외의 재미로 만들어질 수 있다.

사실 더 기대되는 부분은 강호동 없는 팀에 누가 리더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나이 순으로 보면 엄태웅이 가장 연장자지만, 어디 사회생활(?)의 위아래가 나이 순으로 정해질까. 군대도 짬밥(?) 순이라지 않은가. '1박2일'의 야전경험이 많은 은지원이나 이수근, 이승기 그 누구도 이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이는 없다. 따라서 강호동이 빠지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1박2일'에서 멤버들 간의 미묘한 헤게모니 싸움은 그 자체로 예능의 웃음 코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서열 싸움만큼 예능에서 재미있는 건 없다.

어쩌면 서로 리더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리더 자리의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올 수도 있다. 그 리더라는 것이 제 맘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부담 있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피하려는 모습이나 서로 가지려는 모습 그 어느 것이든 강호동의 공백으로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의도되고 기획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1박2일'은 억지로 캐릭터를 만들어내서 이야기를 만드는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이수근이 제 캐릭터를 찾기까지 1년이 걸렸던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저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다 보면 당연히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어쩌면 강호동이 작별인사조차 없이 떠나가며 '1박2일'에 남겨놓은 선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빈자리마저 또 하나의 재미로 전화될 수 있게 한 그 묵직했던 존재감 말이다.

또 이것은 '1박2일'이 강호동을 떠나보내고도 강호동과 함께 하는 법이기도 하다. 빈 자리를 놓고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거나 혹은 그 자리의 무게감을 책임으로 느끼는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강호동을 계속 추억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떠났어도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하이킥3', 모자이크에 가려진 절묘한 풍자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은 왜 굳이 노출 장면에 모자이크를 썼을까. 이런 식의 질문에는 함정이 있다. 질문 자체가 결국 모자이크와 노출에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든 노출이든 둘 다 자극적이긴 마찬가지다. 즉 백진희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드러난 팬티를 끄집어내려 엉덩이를 보여주는 노출 자체도 자극적이지만(물론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니라 레깅스를 입고 찍은 장면이다), 그것을 모자이크 처리한 점은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는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하지만 노출과 모자이크만 자꾸 떼어내 벌어지는 논란은 어쩌면 방송된 장면 그 자체보다 더 자극적일 수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가리고 국소적인 부분에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왜 청년백수 백진희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사실은 더 중요하다. 그녀가 그런 일을 당한 공간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다. 고시원에서 쫓겨나 박하선의 집에 얹혀사는 그녀는 스스로 투명인간을 자처한다. 살게만 해주면 "없는 것처럼" 살겠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화장실은 거의 유일한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 누구에게나 최소한 허용되는 사적인 프라이버시의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현실. 백진희의 빵꾸똥꾸(?) 상황은 그런 현실을 화장실 코미디로 풀어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 기발한 것은 백진희를 그렇게 만드는 인물이 또 다른 현실의 피해자인 안내상이라는 점이다. 빚쟁이에 쫓겨 도망치던 안내상이 우연히 발견한 땅굴로 유사시의 비상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옆집 화장실을 뚫게 되었고 마침 거기에 청년 백수 백진희가 있었다는 이 기막힌 설정은 화장실 유머로만 보게 되면 상황이 주는 맥락을 놓치기 쉽다.

집도 절도 없는 안내상 가족이 청년 백수 백진희를 설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그 자체로는 우습지만 그 상황 자체가 우스운 건 아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승자 독식 구조의 사회에서 패자가 되어버린 이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려는 의도는 없지만, 구조 자체가 힘겨운 이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부딪치게 되어있는 이 웃을 수 없는 현실.

학생 백진희와 안내상 가족이 이 시트콤 전반에 병치된 것은 이 두 상황이 거의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루 아침에 빚더미에 올라 길바닥을 전전하는 홈리스가 된 상황. 그리고 각각 윤계상의 집과 박하선의 집에 얹혀사는 상황. 화장실을 뚫고 나와 부딪치게 되는 안내상과 백진희는 이 절박한 패자들이 만나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들은 함께 공존하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안간힘을 쓸 것인가.

시트콤은 물론 웃음을 주는 코미디 장르지만, 또 한편으로 시추에이션(상황)이 환기하는 현실적인 코드들이 중요한 장르이기도 하다.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이 독특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 상황들을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슬랩스틱이나 화장실 유머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연출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사회적 맥락을 이해 못하는 아이들조차 쉽게 웃을 수 있으며, 동시에 어른들은 그 맥락이 주는 풍자적인 쾌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시청층이 폭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킥3'의 백진희 장면에 등장한 모자이크 논란은 충분히 예고된 것이다. 그만큼 자극적인 연출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자이크로 인한 논란이 자칫 '하이킥3'가 본래 의도했던 다른 맥락들까지 모두 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모자이크와 노출이라는 나무가 아니라, 그런 장면이 왜 나왔는가 하는 숲을 볼 수는 없는 걸까.

침묵과 공포의 '도가니'가 아프게 전하는 말

'도가니'(사진출처: 삼거리 픽쳐스)

침묵의 대가는 크다. 이 말은 듣는 이에 따라서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혹자는 침묵함으로써 얻게 되는 현실적인 이득을 떠올릴 수도 있고, 혹자는 잃게 되는 양심을 떠올릴 수도 있다. '도가니'는 바로 이 침묵이 가진 이중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묻는 영화다. 당신은 과연 이 진저리처질 정도의 참혹한 사건 앞에서 현실이라는 이유로 침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침묵이 가져오는 양심의 가책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도가니'. 사전적 의미로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을 뜻하지만 우리는 흔히 '침묵의 도가니' 혹은 '공포의 도가니' 같은 표현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애초에 제목을 거기서 가져왔기 때문일까. 이 영화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역시 '침묵의 도가니'와 '공포의 도가니' 이 두 표현이다.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무려 5년 간 교장과 교사들이 청각장애아들을 대상으로 벌인 성폭력과 학대는 '침묵'과 '공포'를 그대로 영화 속에 담는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장애를 가진 피해자들이 침묵을 강요받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인들조차 침묵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없는 짓을 버젓이 저지르는 상황도 그렇지만, 그걸 그 누구도 나서서 막지 않는 상황은 더 큰 공포다. 즉 '도가니'는 '침묵의 도가니' 같은 표현이 그런 것처럼 이 정의니 진리니 하는 추상적인 상황을 지극히 즉물적인 눈앞의 상황으로 낱낱이 보여주는 영화다. 그래서 추상으로 덧씌워져 가려져 있는, 몇몇 글자들로는 도무지 표현하기 어려운 이 짐승 같은 상황을 고스란히 발가벗겨 보여준다. 게다가 법 역시 돈과 권력의 힘에 휘둘리며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공포가 저 어느 지방학교에서 벌어진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영화가 어떤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니'는 참혹할 정도로 보는 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역시 침묵하고 있었던 우리들의 눈과 귀를 아프게도 찌른다. 그럼으로써 가슴으로 담으려 하지 않았던 우리들을 분노하고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끝끝내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영화 속 무진이라는 도시를 뒤덮고 있는 안개처럼 답답하게 가려진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라고만 한다.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고 여전히 그 때의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교편을 잡고 있는 현실에서 영화가 어찌 감히 비전을 보여주겠는가.

하지만 이 비전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 영화가 주는 비전이다. 모두가 침묵하고 덮으려고 했던(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아픈 현실을 영화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법이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그 현실을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 이 영화의 비전이다. 모든 것이 은폐되는 상황 속에서는 그것을 직시하고 잊지 않는 것이 때로는 그 어떠한 행동보다도 더 적극적인 참여가 되기도 한다. '도가니'는 그런 점에서 보는 것이 그 자체로 인권을 향한 한 걸음이 되는 영화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바라보고 우리 기억의 감옥 속에 그들을 가둬두는 것으로, 법이 풀어준 그들을 영원히 봉인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침묵'과 '공포'의 도가니를 느꼈다면 그 아픈 고통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도가니'가 그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우리에게 아프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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