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를 울린 소박한 아날로그 감성

'놀러와'의 골방 브라더스, 이하늘과 길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진지한 모습이었다. 깨방정에 게스트들을 몰아세우기까지 하던 이들은 다소곳이 출연한 세시봉 전설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들려주는 추억어린 이야기와 아름다운 포크 선율에 빠져들었다. 이야기 중간 중간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이들의 음악은 '놀러와'를 과거 라디오 공개방송 같은 아날로그 감성으로 적셔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 감성 속에 빠져있던 악동 김하늘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혹자는 김하늘의 눈물이 지나친 감수성이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아날로그 음악의 끝단을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이 세시봉 전설들이 환기해낸 정서들이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제는 디지털에 화려한 무대와 댄스 속에 잊혀진 것처럼 여겨지던, 소박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아날로그 정서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기타 한 대와 이미 스스로 하나의 악기가 되어버린 그들이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서로의 눈빛만으로 척척 하모니를 이루는 장면은 작금의 음악세태로 보면 기적과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40년 가까운 교감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음악이라는 본연의 세계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 단지 음의 고저와 말장난에 가까운 가사들 그리고 자극적인 박자의 조합이 노래로 여겨지는 지금, 그들의 소박한 음악 속에는 아름다운 음과 시가 되어버린 가사가 어우러져 우리네 가슴을 파고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조영남이나 송창식이 가수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인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들의 입지전적인 삶과 거기서 만들어낸 음악들이 작금의 자본에 의해 생산되는 음악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웨딩케이크'나 '두 개의 작은 별'에 얽힌 포복절도의 에피소드를 전해준 윤형주는 놀라운 예능감으로 시청자들을 웃게 했지만, 그 아름다운 가사들은 그의 시적 감성을 잘 드러내주었다. 즉석에서 만난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라라라' 같은 곡이 단 40분 만에 그런 가사를 담아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들의 자리를 감동적으로 만든 것은 이 나이든 아저씨들이 여전히 개구쟁이들처럼 옥신각신하면서도 보여주는 선후배를 넘어서는 진한 형제애다. 조영남이 즉석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타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하모니를 넣는 모습은 백 마디 말보다 그 깊은 마음의 교감을 전해주었다. 누군가는 그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삶 전체를 살맛나게 할 그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

악동 김하늘의 눈물은 아마도 이들을 바라보다가 시청자들이 문득 느끼게 된 가슴 먹먹함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전자음과 디지털과 자극과 현란함에 어지러운 우리의 눈과 귀를 정화시키는 진짜 음악의 세계가 주는 날 것의 감동이다. 세월이 묻어난 그 음악은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남자의 자격'이 보여준 하모니의 매력

'남자의 자격' 합창단원들은 왜 대회에 참가한 할머니 할아버지로 구성된 실버합창단의 하모니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을까. 방송 자막에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눈물'이라고 그 감동의 실체를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눈물에는 합창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실버합창단을 통해 언뜻 보게 된 것은 하모니의 진짜 의미였기 때문이다.

대회에 참가하기까지 '남자의 자격' 합창단원들은 꽤 긴 시간 동안 연습을 해왔고, 그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안되는 성량과 훈련되지 못한 목소리, 게다가 몸치에 박치까지 있었지만 합창단원들은 차츰 노래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합창단으로 묶여지기까지 서로 잘 몰랐던 그들처럼, 각자 놀던 목소리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기 시작할 때 그들이,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들의 가슴이 먹먹해졌던 것은 그 마음들의 교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는 대회인지라, 그리고 너무나 높아진 기대감에 부담감도 큰데다, 그것도 첫 번째 대회출전 경험인지라 아마도 숨 가쁘게 달려온 그들은 바로 이 '합창의 본질'을 잠시 잊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객석의 자리에 앉아 거기 출전한 다른 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들은 다시 합창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다른 마음이 모여 노래 하나로 한 마음이 되는 그 순간의 감동.

특히 두 번째 참가자였던 60세 이상으로만 구성된 '한사랑 실버 합창단'은 합창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소박할수록 아름다운' 마음들이 거대한 하모니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회라는 경쟁적 의미는 사라지고, 그저 그렇게 마음들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합창 본연의 힘을 느끼며 어찌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눈물을 참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남자의 자격' 합창단 스스로 합창을 하면서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감동의 실체이기도 하니까.

멋 내지 않은 수수한 곡들과, 나이 같은 것은 마음을 나누는 데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하모니의 어우러짐,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보여준 진지함에서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진 것은, 그것이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하나가 되기를 희구한다. 그 하나됨의 기쁨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남자의 자격'이 알려준 하모니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생면부지였던 그들이 이제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들로 서로에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모니를 통해 그 각자 존재들의 소중한 삶을 우리가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달라도 모두 서로가 하나 되길 원하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노래를 조금 못 불러도, 나이가 들어도 그것은 바꿀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핏줄 의식의 힘, 그 힘을 넘어서

내세울만한 톱스타도 없고, 눈을 잡아끄는 스펙터클도 없다. 중견연기자들이 보여주는 탄탄한 연기가 드라마의 허리를 지탱해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빵왕 김탁구'가 보여준 괴력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연출이 실험적이거나 빼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스토리에 답이 있다는 것인데, 완성도로만 놓고 보면 '제빵왕 김탁구'는 과장이 많고 개연성도 많이 떨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제빵왕 김탁구'의 그 무엇이 대중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한 것일까.

스토리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이 드라마는 이른바 시청률이 된다는 검증된(?) 소재들이 넘쳐난다. 출생의 비밀, 불륜, 부모와 자식 간의 상봉, 복수, 경합, 가족애, 미션이 주어지는 성장드라마, 형제애, 자식을 두고 벌이는 부모 간의 대결, 비밀, 엇갈린 사랑.... 아마도 우리네 드라마들이 가졌던 성공 코드들을 이 드라마 속에서 거의 다 발견할 수 있을 정도.

이 드라마의 세대적인 폭이 넓은 것은 시대극의 틀 속에 성장 드라마적 요소를 집어넣은 공적이지만, 또한 이를 받쳐주는 다양한 성공 코드들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코드들을 김탁구(윤시윤)라는 실전적인 인물의 성장 스토리 속에 녹여낸 것이 드라마가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코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가족드라마들이 늘상 강조하는 '핏줄의식'이다. 수많은 세월을 수많은 이야기들과 함께 걸어왔지만, 이 드라마가 결국 보여주는 것은 '핏줄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다.

구일중(전광렬)의 김탁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 오로지 자식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삶을 마다하지 않는 김탁구의 모친 김미순(전미선)의 절절한 자식 사랑,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엄마를 찾아 헤매는 김탁구의 효심이 이 드라마의 긍정적인 힘을 만들어낸다면, 자기 핏줄에 대한 지나친 편애로 비뚤어져 버린 서인숙(전인화), 불륜으로 갖게 된 자식을 거성식품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친아버지임을 숨기면서까지 모든 악행을 떠안는 한승재(정성모), 그리고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비뚤어져 버리는 구마준(주원)은 핏줄의식으로 보여지는 이 드라마의 부정적인 힘이다.

모든 것을 경쟁으로 바라보며, 누군가가 이기면 누군가는 질 수밖에 없다 여기는 한승재는 그래서 잘못된 가족 이기주의의 표상처럼 보인다. 반면 모두가 다 행복해질 수 있다 여기는 김탁구는 만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을 가족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는 가족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시대에 따라 가족에 대한 의식도 달라져 왔다는 점에서 이 가족에 대한 서로 다른 의식은 이 시대극 속에서 서로 대결을 벌인다. 시대극으로 보면 한승재는 '경쟁'을 가치로 삼던 구시대의 인물이고, 김탁구는 '행복'을 가치로 삼는 현 시대의 인물이다.

'제빵왕 김탁구'의 힘은 바로 이 우리네 정서를 끌어당기는 핏줄의식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시대에 여전한 것이 바로 이 핏줄의식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 핏줄의식이 가진 힘으로 추동력을 얻은 후에 차츰 그 핏줄 이상의 판타지로 나아간다. 구마준이 친형제임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김탁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자칫 가족주의에 매몰될 수 있는 드라마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김탁구라는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탁구와 구마준이 서로 자신들의 지분을 합쳐서 큰 누나인 구자경(최자혜)에게 거성식품의 대표이사 자리를 내주는 장면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여성이 CEO가 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고, 팔봉선생의 마지막 경합주제였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가족이라는 틀 그 이상을 넘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삶이라는 것을 '제빵왕 김탁구'는 말하고 있다.

사생활을 소비하는 방송, 인기라면 심지어 발가벗는 세태

그녀는 자신이 '명품녀'라고 불리게 될지 알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대중이 한때 '개똥녀'를 부를 때 가졌던 공분의 뉘앙스를 갖게 될 것을 알았을까. 아마도.

그렇다면 문제가 된 방송 프로그램은 어땠을까. 그녀가 나간 방송이 이토록 큰 파장을 가져올 줄 알았을까. 분명.

명품녀라 불리며 사회적 파장까지 일으킨 당사자와, 그녀를 한껏 스토리텔링해 결국에는 명품녀라 불리게 만든 방송. 이것은 안타깝게도 작금의 우리네 방송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한쪽에서는 인기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 사생활을 팔겠다 나서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렇게 내놓은 사생활을 '상품화'시킨다. 물론 그 '상품화'의 성패는 얼마나 논란이 되느냐다.

한때 '루저 논란'을 일으켰던 '미녀들의 수다'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방송사고'였다면, 명품녀의 탄생은 의도적인 방송이었다는 점에서 실로 '독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나가 실수(?)였다면, 다른 하나는 의도지만, 이 두 방송은 내용적으로 보면 그다지 차이가 없다.

명품녀는 자신이 한 얘기가 10배쯤 부풀려졌다고 주장하고, 제작진들은 오히려 명품녀가 한 얘기를 오히려 순화해서 편집했다고 한다. 지금 이 공방은 '거짓말을 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 '누구'인가가 과연 중요할까. 한쪽은 너무 부풀려졌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축소된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크고 작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왜 명품녀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이런 소재가 버젓이 방송을 탔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른바 아이템이 되기 위해 스토리화되어서.

이 스토리화되는 과정에서 명품녀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삭제되고 오로지 명품, 사치 같은 특정 부분들만 취사선택되어 보여진다. 그것이 과장됐든 아니든 이미 스토리화 과정에서 논란은 의도된 것이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지만, 명품을 좋아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삶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이다. 물론 정치인 같은 공인이 이런 행동을 버젓이 내놓고 하고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성이 아무리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공인처럼 치명타를 입지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사생활의 노출이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반인이 방송을 타는 조건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사생활이 거래되는 방송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이 등장하는 케이블 채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우리는 늘 이 사생활이 사고 팔리는 장면들을 당연한 듯 바라보고 있다. 토크쇼는 대표적이다. 연예인들은 이제 심지어 푯말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자랑이라도 되는 듯 써놓고 그 내밀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한다. 연예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있지만, 사생활을 거래하는 방식은 '명품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방송이 점점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경향에서도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발견된다. 즉 개인의 훼손불가능한 몸은 사적 영역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그 몸을 전시하는 TV의 선정성은 프라이버시의 대표적인 침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지극히 사적인 내밀한 몸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사생활 침해'에 더더욱 둔감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품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는 문제의 핵심을 흐린다. 문제는 그런 사생활을 거래하는 방송이 상호거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이 점점 더 자극적으로 흐르면서 거기에 제작자나 대중들 모두 둔감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연예인들이 공공연히 사생활을 소비하면서 인기를 유지하고, 방송은 그들을 끌어들여 시청률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명품녀 논란을 통해 알게된 것처럼, 이러한 사생활 소비는 이제 연예인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논란이든 인기든 또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화제가 된다면 무엇이든 끄집어내지고 발가벗겨지는 방송 프로그램과, 주목받고 싶다면 서슴없이 그런 방송에 알몸으로 자신을 세우는 세태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제2, 제3의 명품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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