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소지섭과 한지민, 그 눈빛이 말해주는 것

연기하는 배우의 눈빛은 때론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카인과 아벨’에서 이초인과 오영지 역할을 각각 하고있는 소지섭과 한지민은 그걸 알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 김서연(채정안) 앞에서는 천진난만함으로 그 행복을 드러내던 이초인의 눈빛은, 중국의 사막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 절박함에 광기로 돌변하고, 기억상실을 겪게되면서 반쯤 풀린 눈빛이 된다. 한편 탈북해 국내로 들어온 오영지의 눈빛은 자신이 중국에서 가이드했던 이초인이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떨리고,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오빠를 보며 풀렸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초인이 자신 앞에 서자 경악과 반가움과 슬픔 같은 복잡한 감정으로 떨린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눈은 실로 대사보다 더 깊은 감정을 드러낸다.

오영지와 이초인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면서 그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조금씩 전한다. 기억을 찾아 헤매는 이초인의 눈은 마구 자란 머리카락 속에 감춰지거나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말을 건네고, 익숙한 병원 풍경 앞에서 그리고 우연히 보게된 김서연 앞에서는 그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집을 나간 이초인을 기다리다 지친 오영지의 눈은 화를 내며 운다. “당신 찾아다니다 피 말라죽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라는 대사와 어우러지는 눈빛이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배는 안 고픕니까?”라는 따뜻한 질문에서 그 눈빛은 뾰로통해진다.

소지섭과 한지민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고 말하는 데는 바로 이 연기 속에 살아있는 눈빛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눈빛들을 우리는 톱스타에서 배우로 인정받은 연기자들에게서 발견한 적이 있다. ‘마이걸’과 ‘왕의 남자’로 예쁜 남자 신드롬을 일으키며 말 그대로 벼락스타가 된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과 ‘일지매’에서 광기 어린 눈빛으로 꽃미남의 이미지를 넘어섰다.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에 갇혀 성장을 멈췄던 문근영은 ‘바람의 화원’을 통해 슬픔과 회한이 가득한 눈빛을 보여주며 배우 문근영으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했다. 꽃미남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져 왔던 현빈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의 눈빛이 꽤 깊고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트콤에서 코믹연기로 묻혀져 있던 김범의 눈빛은 ‘에덴의 동쪽’을 통해 살아났다.

톱스타로서 가지는 눈빛이 단순한 것이라면 배우로서 가지는 그들의 눈빛은 복합적이고 미묘하게 벼려져 있다. 많은 톱스타들이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단지 대사를 잘 읊고 지문대로 행동을 보여준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보다 행동보다 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주는 눈빛으로 연기할 수 없을 때 캐릭터와 배우는 겉돌게 되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는 매개해주는 배우로 인해 캐릭터에 오히려 몰입할 수 없게 된다. 배우를 캐릭터와 시청자가 매개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로 볼 때, 캐릭터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톱스타의 눈빛을 고수하는 자는 배우가 아니다.

한지민이 ‘이산’에서보다 ‘카인과 아벨’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 북한 사투리를 써야하고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밝은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오영지라는 배역자체가 그녀의 배우로서의 눈빛을 더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톱스타가 배우가 되는 데는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배역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벼락스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가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인기는 배우 이민호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캐릭터 구준표에서 온 것이 맞다. 따라서 갑자기 톱스타가 된 이민호가 배우로서 자리하기 위해서는 그걸 뛰어넘은 수많은 연기자들의 그 살아있는 눈빛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톱스타의 눈빛은 단순하고 배우의 눈빛은 깊다. 생명력에 있어서 톱스타는 짧고 배우는 길다는 면에서, ‘톱스타보다 배우’의 눈빛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기를.

퓨전사극 ‘돌아온 일지매’의 실험성과 한계

“빅뉴스입니다. 빅뉴스!” ‘돌아온 일지매’에서 소문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배선달(강남길)에게 차돌이(이현우)가 달려와 이렇게 외쳤을 때, 순간적으로 이 퓨전사극은 현대극과 사극 사이의 경계를 넘어섰다. 하긴 시작부터 도심 속의 일지매를 보여주었으니, 이 조선시대에 등장한 영어는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가 넘어서는 경계는 단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사극이라고 지칭하기가 애매해진) 장르적으로는 액션과 멜로의 경계를 허물고 있고, 시청 소구층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매체적으로는 만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퓨전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돌아온 일지매’. 그 실험성과 한계를 되짚어보자.

만화 혹은 드라마, 액션 혹은 멜로
드라마 읽어주는 캐릭터로서 책녀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굉장히 낯설어 보였다. 보통의 사극이라면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극의 진행이 전개되는데 반해, 책녀의 존재는 사실상 ‘책녀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녀가 청나라로 가자고 하면 청나라로 가고, 일본으로 가라고 하면 일본으로 가는 식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진행은 지금껏 드라마 속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고우영 화백이 만화의 칸 밖에 깨알같은 글자로 집어넣었던 화백 특유의 목소리의 드라마화였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드라마가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 얼마나 충실하려 하는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는 만화책을 넘기듯 등장인물들의 소개 장면에서 시작하여, “일지매여 비상하라!”같은 만화적 문구로 끝을 맺게 되었다. 만화를 영상으로 그대로 가져오는 연출은 영화라면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드라마라면 꽤 참신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실험적 연출 위에서 사극과 현대극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되었다. 만화적 공간 위에는 시간적 조건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만화적 조건 위에 서 있는 주인공 일지매(정일우)는 중성적이다. 일단 외모부터가 그렇다. 산 속에서 그를 처음 본 달이(윤진서)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자식. 너 예쁘게 생겼다. 계집애 같애...” 그래서인지 일지매는 극중에서 여러 번 여장을 한 채 등장한다. 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하는 짓도 그렇다. 일지매의 상징으로 매화 가지를 남기는 것은 미적이며 여성적인 취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여성적인 자태를 가진 일지매는 천하무적의 무공을 연마한 살인무기이기도 하다. 조선의 무술과 청나라의 무술 그리고 일본의 닌자술까지 배운 그는 한 명의 무술인으로서 국적의 경계 또한 허물고 있다. 따라서 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갖춘 중성적인 일지매는 그 두 가지 모습을 드라마 속에서 드러내게 된다. 그 하나가 양반들과 벌이게 되는 액션이며, 다른 하나가 월희와 벌이는 멜로다. 구자명이 도적들을 좇으면서 동시에 백매(정혜영)를 좇는 것도 이 드라마가 서 있는 액션과 멜로의 중간지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돌아온 일지매’, 그 퓨전의 실험성과 한계
‘돌아온 일지매’는 이처럼 경계를 해체하고 그 중간 어느 지점에 서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극과 현대극의 중간지점이며, 만화와 드라마의 중간지점이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중간지점이자, 액션과 멜로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퓨전은 그 실험적인 시도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있는 실험성이 드라마의 성공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다.

사극의 전통적인 문법이라 할 수 있는 대결구도를 이 드라마는 좀체 세워두지 않는다. 대신 조금은 지루할 정도로 일지매의 탄생과정을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드라마는 조명해 보여준다.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버려졌으며 청국을 돌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그 지리한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병렬적이다. 사건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고 그 사건에서 대척점에 있는 적이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그런 전형적인 과정은 이 속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일지매가 그토록 먼 길을 돌아 세 나라의 무술을 익혔음에도 그다지 초절정의 무공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 무예를 익히는 과정의 지난함이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병렬적 연결에 일조한 것은 바로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갖게 만든 책녀다. 사극과 현대극, 만화와 드라마를 공존시킨 책녀의 존재가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지매가 가진 중성적 느낌 역시 그 남성성과 여성성이 긴밀히 연관되지 못함으로 해서 오히려 드라마를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돌아온 일지매’의 멜로적 상황과 액션은 대체로 병렬적으로 흘러왔다. 일지매는 밖으로 나가서 액션상황을 연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멜로상황을 만들어냈을 뿐, 이 안팎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달이의 죽음이 체제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른 리액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떤 슬픈 정조로 어른거리는 것은 새로운 슈퍼히어로라는 일지매의 캐릭터를 자꾸만 맥빠지게 만든다.

‘돌아온 일지매’는 여러 모로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꽤 많은 실험적인 시도들이 덜컥대지 않고 하나로 묶여져 있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어느 정도의 성취를 했다고까지 보여진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실험성이 대중들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한계로 지적된다. 낯설음을 재미로 변모시키는 것은 실험성 속에서도 대중적인 정서(익숙함 같은)를 의식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친절한 컨셉트, 사투리 앞세운 ‘상상플러스’

‘상상플러스’가 새 단장을 했다. 초창기 포스트잇이 잔뜩 붙은 댓글방으로 화제가 되었고, 노현정 아나운서를 중심에 세우고 탁재훈과 신정환 콤비의 활약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올드 앤 뉴’ 이후에 ‘상상플러스’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책 읽어주기’, ‘놀이의 탄생’, ‘상상 우리말 더하기’같은 코너들을 새롭게 선보였지만 그다지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금번 ‘상상플러스’가 들고 나온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친절한 4형제’와 ‘전국 사투리 자랑’. 이 두 코너는 어떤 강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친절한 4형제’, 친절한 컨셉트로도 웃길 수 있다?
‘친절한 4형제’는 기존 ‘대박대담’의 변형 코너다. ‘대박대담’이 MC의 질문과 진행을 통해 대박이냐 쪽박이냐를 가리는 구성으로, 게스트의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쪽으로 접근했다면, ‘친절한 4형제’는 일단 ‘친절한 토크’를 표방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불친절한 느낌을 받았을 때 게스트가 버튼을 눌러 MC를 제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정환이 소녀시대의 수영에게 농담으로 던진 “혹성탈출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은 당사자는 물론 시청자까지 불쾌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곧 이어 그에게 가해지는 벌칙으로 인해 이러한 불쾌감은 상당부분 상쇄될 수 있다.

굳이 ‘친절함’을 컨셉트로 삼은 것은 저 ‘박중훈쇼’가 말하는 작금의 ‘불친절한’ 토크쇼를 떠올리게 한다. 상대방을 몰아세우고, 누군가의 비밀을 공개하게 만드는 식으로 이어지는 작금의 토크쇼들에게 불친절함은 하나의 대세이기도 하다. 이것은 게스트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보다 시청자들의 알고 싶은 욕구를 더 우선시하는 토크쇼의 리얼리티 경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박중훈쇼’가 말하듯 ‘친절함’이 곧 ‘재미없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친절한 4형제’는 친절하면서도 재밌는 토크쇼를 상상하는 것 같다. 따라서 게스트를 공격하기보다는 스스로 무너지는 선택을 하는 ‘친절한 4형제’의 컨셉트를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은 박재정이다. 그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어색함을 내세워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그것으로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국 사투리 자랑’, 사투리 그 자체로만도 충분하다?
‘전국 사투리 자랑’은 ‘전국 노래 자랑’의 형식에 사투리라는 강력한 웃음폭탄을 장착하고 있다. 이지애 아나운서는 ‘전국 노래 자랑’의 트레이드 마크인 실로폰 소리로 코너를 시작한다. 워밍업으로 하는 퀴즈에서는 특정한 상황을 전국 사투리 버전으로 보여준다. 특징적인 것은 그것이 대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리얼한 현지 주민들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은 이 코너에 리얼 버라이어티적인 재미를 부가시킨다. 그저 사투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상황에, 촌철살인의 순발력 넘치는 말들은 퀴즈 형식으로 엮어져 더욱 폭발력을 갖게 된다.

특정한 사투리의 의미를 맞추는 코너는 저 ‘올드 앤 뉴’에서부터 지금껏 변함 없이 내려온 ‘상상플러스’의 전통이 되었다. 다만 소재적으로 사투리를 선택했다는 점이 이전에 ‘상상 우리말 더하기’에서 외래어 선택보다는 더 친화적이라는 점이 이번 코너의 특징이 된다. 표준어에 경도된 우리네 언어습관보다 좀더 다양한 사투리들을 발굴함으로써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겠다는 기획의도 역시 의미와 재미를 찾겠다는 이 코너의 취지를 잘 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상플러스’는 인터넷 매체 등의 변화 속에서 급변하는 우리말을 민감하게 프로그램 속으로 끌어들인 몇 안 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새롭게 구성된 코너들이 옛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애초의 기획의도에 가까워지려는 노력만큼은 쉽게 읽어낼 수 있으며 그것이 전망을 밝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식채널e’, TV의 법칙을 모두 뒤집다

‘지식채널e’의 ‘가비오따스’편은 “발전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1970년 콜롬비아 열대 우림에 운하건설을 위해 파견된 파올로 루가리는 인디언 정착지를 둘러보며 ‘개발로 인해 정작 행복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찾아 코카나무조차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 가비오따스로 들어가고 거기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시도한다. 자생력 강한 소나무를 심고, 수경 재배법을 퍼뜨리고, 버려진 잡동사니로 풍차를 만들고, 심지어 시소놀이를 하면서 물탱크를 채우는 슬리브 시소 펌프를 만든다. 결국 수천 년 만에 사막이 열대우림으로 되살아나고 그는 말한다. 진정한 위기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이 감동적인 가비오따스의 기적을 보여주는 5분 짜리 영상은 그대로 ‘지식채널e’의 기적을 증명하듯 보여준다. ‘지식채널e’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프로그램의 자원으로서는 가비오따스의 사막만큼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파올로 루가리가 이 사막이라는 조건을 상상력으로 뛰어넘었듯이, 5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은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압축된 시간은 영상의 군더더기를 없앴고 단일한 주제에의 집중을 요구했다.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가는 영상의 시대에, 5분 압축 속의 집중이 선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지화면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영상의 메시지들은 정지화면 속에서 좀더 사색의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세련된 영상 대신 자리한 것이 낡은 사진(혹은 옛 동영상)이었다. 그 흑백으로 자리한 낡은 사진들은 색마저 지워버림으로써 온전히 사진 속 이미지가 주는 의미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위로 ‘지식채널e’는 문자를 부활시켰다. 음성이 지워진 자리에 선 글자 하나하나는 마치 머릿속에 각인되듯 의미들을 피워내고는 사라졌다. 정지된 영상과 사라진 음성 속에서 문자만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이 풍경은 마치 TV가 한 권의 책으로 변신하는 마력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5분이라는 한계 상황은 좀더 집약적인 영상을 만들어내면서 심지어는 누군가의 일생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된다. 5분이라는 열악한 시간자원을 가진 프로그램이, 몇 시간의 다큐멘터리가 포착할 수 없는 메시지를 잡아내는 기적 같은 순간이다.

‘지식채널e’는 영상시대가 문자시대에 보내는 헌사다. 이 프로그램은 시간을 압축하고, 동영상을 정지시키며, 음성 대신 문자를 채워 넣음으로써, TV의 영상법칙을 모두 뒤집어 문자시대가 주었던 지식들의 향수를 일깨운다. ‘지식채널e’가 말하는 역설의 미학은 속도의 미학에 경도된 TV영상들이 주는 그 숨가쁨에 숨쉴 공간이 되어주고, 현란한 동영상 세상의 산만함에 잠깐 멈춰 사색할 공간을 내어주며, 내레이션들이 강권하는 메시지들이 넘쳐나는 TV 공간에 강권없는 화두로서의 문자를 던져준다. ‘지식채널e’는 풍요 속에 사막이 되어가는 상상력 없는 TV세상에 가비오따스의 기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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