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속에 더욱 빛난 ‘경숙이, 경숙아버지’

‘경숙이, 경숙아버지’에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기가 어려운 인물들의 관계들이 등장한다. 경숙아버지인 조재수(정보석)와 악연으로 얽힌 박남식(정성화)은 경숙(심은경)의 집에서 기거하며 경숙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둘 사이에 아이까지 갖게 된다.

가난보다는 그 속에 피어나는 정에 주목하다
그런데 이 상황을 알게된 경숙아버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쾌재를 부르며 아예 집밖으로 나와 이화자(채민희)와 함께 지낸다. 후에는 이 네 사람이 한 집에서 나란히 살기까지 하는데, 경숙이는 아버지가 둘인 이 상황 속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아버지보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남식을 더 따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경숙이네 가족들 모두의 정서이기도 하다.

친아버지보다 타인인 남식을 더 따르는 가족이라는 비범한(?) 관계에 깔려있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가난이나 전쟁 같은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배가 고파 먹을 걸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음이 가는 사람은 단지 피붙이라는 관계에는 있지만 타인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으로 주고 정을 주는 타인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이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저 가난이 파괴한 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드라마 말미에 경숙아버지가 빨갱이 누명을 쓰고 경찰서에 잡혀간 박남식을 구하기 위해 장구채를 들고 시위를 이끄는 장면은 이 이야기를 가난에서 정으로 위치 이동시킨다. 경숙아버지 조재수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난 박남식을 구하려 나서면서 이런 얘기를 남긴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싸우다가도 돕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 한 마디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압축한다. 전쟁통에서도 적군인 부상 인민군을 총탄이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죽은 후에는 땅에 묻어주기도 하는 박남식의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핵심적 재미를 만들어낸다. 착하고 순해 빠져 늘 당하는 캐릭터로서의 박남식은 늘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골탕먹이며 살아가는 경숙아버지와는 상반된다.

가난을 냉소가 아닌 따뜻한 웃음으로 바꾸다
자기 자식보다 자기 남편보다 자기 아버지보다 더 박남식을 따르는 가족들의 면면은 이 드라마의 경쾌한 리듬과 함께 폭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경숙네 집에 경숙아버지가 훔쳐간 돈을 받으러 찾아와 그들의 가난을 지나치지 못하고 투덜대면서도 그들을 돕는 그 모습에서 비롯되는 폭소는 따라서 냉소와는 다른 따뜻한 웃음을 선사한다.

이 가난을 다루면서 냉소와 풍자의 칼날을 들이대기보다는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은 이 드라마가 작금의 불황 상황에 대해 던지는 긍정론이기도 하다. 전쟁과 궁핍의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일상적 삶은 계속되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정은 남아있다는 전언이다.

 국가적으로 암울한 시기를 절망적인 비장감으로 그려내기보다는 동화적 시점을 끌어들여 새롭게 조명하는 것은 ‘웰컴 투 동막골’과 궤를 같이 한다. 아이의 눈으로 그려지는 이 경쾌한 시선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 발현되는 인지상정의 위대함이다.

작금의 불황 상황 속에서 이 드라마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이 차디찬 현실 위에 유쾌한 정의 세계를 복원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저마다 투덜대면서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도 투덜대는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려운 현실적 상황 자체를 관조하게 해준다.

이 대단한 주제의식의 드라마가 4부작이라는 것 또한 곱씹어 볼만한 점이다. 드라마 역시 불황을 맞아 상업적으로 취약할 수 있는 단편 혹은 중편이 설 자리를 점점 잃고 있는 상황. 그러나 이 짧은 가난한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작금의 장편 부유한 드라마들 틈바구니에서 전하는 감동은 그 여운을 더 깊게 만든다. 어려울수록 그 희망을 바로 사람들의 진정성에서 찾는 이 드라마의 태도는 작금의 불황상황이나 드라마 제작상황 모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동화(同化)를 버리고 이화(異化)를 선택한 책녀, 그 효과는?

‘돌아온 일지매’는 기존 사극과 달리 이른바 책녀라 불리는 내레이션이 극 중간에 끼여든다. 드라마에서 내레이션은 여러 기능을 갖고 있다. 등장인물의 내면적 독백을 드러내는 일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은 극에 대한 몰입을 더욱 강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책녀처럼 등장인물 밖에서 극을 설명하듯 개입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내레이션은 몰입을 통한 동화(同化)보다는 이화(異化)의 기능을 위한 것이다.

지금 ‘돌아온 일지매’의 책녀에 대해 쏟아지는 논란의 실체는 바로 이 동화와 이화의 부딪침이다. 드라마를 몰입으로 보는 시청자들에게(사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동화를 방해하는 책녀의 틈입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책녀의 존재는 시청자들의 위치를 드라마 속이 아니라, 드라마 밖으로 늘 끄집어내게 만든다. “당신은 지금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습니다”하고 책녀의 존재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일지매’는 왜 책녀라는 이화의 장치를 사용한 것일까. 그 첫 번째는 고우영 원작에 충실하고자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고우영 원작 만화의 특징으로 작자의 목소리 개입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상황을 그리면서 작자는 그 상황을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에 빗대 설명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이 길을 찾는 대목에 갑자기 내레이션으로서의 지문이 ‘네비게이션’운운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바로 이 과거를 현대와 연결시키는 내레이션은 실로 작품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되는 지점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찾아지는 현재적 역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단순히 재미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기능한다. 즉 해설이 주는 기능적 목적에 재미 또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녀의 또 다른 기능은 그 존재 자체가 이 사극을 역사적 사실과 별개로 구분 짓게 해준다는 데 있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책녀가 설명해주는 과정에서 이것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뉘앙스를 시청자들에게 전해준다. 책녀는 이 드라마의 재미가 역사적 사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작자의 끝간데 없이 뻗어나가는 상상력에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고 시청자는 바로 그 부분은 어느 순간부터 기대하게 된다.

당연한 것이지만 책녀의 개입을 통해 이야기의 사실성을 통한 몰입을 포기하고 나면 오히려 그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상상력을 얻게 된다. ‘돌아온 일지매’의 이야기 구조가 아주 소소한 엉뚱한 이야기에서 일지매 같은 중심인물로 위치이동하며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바로 이 시공을 넘나드는 책녀의 존재로 갖게된 무한상상의 가능함 때문이다. 왕횡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는 이런 과정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돌아온 일지매’의 책녀는 몰입을 방해하지만, 거꾸로 무한한 상상력의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책녀의 내레이션이 얼마만큼 적절하고 촌철살인의 힘을 가졌느냐는 점일 것이다. 그저 책녀의 존재가 설명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몰입만을 방해하는 방해꾼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선다면 이만큼 독특하고 재미있는 사극의 내레이션을 가져온 책녀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의 유혹’, 과정보다는 효과에 천착하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막장드라마라고까지 부르는 이유가 뭘까. 막장이라면 도대체 뭐가 막장이라는 것일까. 이런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막장드라마라는 호칭은 시청률이 지상과제가 된 작금의 드라마 시장 속에서는 발전적인 비판이 아닌 면죄부만을 제공할 뿐이다. 앞으로 막장드라마가 하나의 통속적인 장르로서 굳어져 쏟아져 나오지 않으면서도, 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막장드라마라는 하나의 용액으로 뒤범벅되어있는 막장의 요소와 성공 포인트를 깔때기에 대고 걸러내는 것이다. ‘아내의 유혹’의 막장은 무엇이고, 또 성공 포인트는 무엇일까.

‘아내의 유혹’, 막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어찌 보면 ‘아내의 유혹’이 막장인 이유는 너무나 쉽게 찾아지는 것만 같다. 그 첫 번째는 가족들이 모여 볼 가능성이 높은 저녁시간대에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계가 막장이다. 이 드라마의 관계설정을 드러내는 제목부터가 그렇다. 친구와 남편이 공조해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럼에도 간신히 살아남은 아내가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남편에게 접근해 그를 유혹한다는 이야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 만큼 돌려주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시간대에 어울리지 않는 소재에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것이 드라마 내적인 비판으로 불려지는 막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만일 늦은 밤에 했다면 이런 소재도 그럭저럭 괜찮은 드라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형태에서 막장의 혐의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막장이란 말일까.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끌어온 소재와 지향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소재와 주제를 다루어가는 과정에 있다.

‘아내의 유혹’은 이미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다 알면서 보는 드라마다. 은재(장서희)는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내몬 교빈(변우민)과 애리(김서형)에게 당한 것과 똑같이 복수를 할 것이다. 하지만 파국적으로 치닫는 드라마 진행 끝에 그 복수의 궁극적인 결과가 해피엔딩으로 간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이처럼 결과를 다 알면서 보는 드라마는 그 결과를 향해 가는 과정이 중요해진다.

‘아내의 유혹’은 그러나 이 과정이 온통 클리셰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오밀조밀한 심리적인 관계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기보다는 익숙한 설정을 숨쉴 틈 없이 빠르게 나열시킨다. 드라마의 과정은 이 클리셰들의 남발로 인해 휘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무수히 쏟아지는 익숙한 과정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갈등의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정은 어떻든,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 대결장면을 재빠르게 구성해내고 그 지점에 집중시킨다.

애리가 마침 구해야만 하는 돈만큼의 금괴가 시댁 소파 밑에 숨겨져 있는 상황이나, 애리가 그걸 도둑질하는 상황에 마침 은재의 오빠가 그 집에 하늘(오영실)을 데려다줌으로써 누명을 쓰게 되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빈 모(금보라)가 은재네 집을 찾아와 쑥대밭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일련의 그럴 듯한 이야기 과정으로 보이지만 잘 뜯어보면 그 과정은 개연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유는 과정을 재빠르게 처리한 점과 그 과정의 결과가 시청자들을 중독적인 분노의 감정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그 분노를 터뜨려 카타르시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유혹’, 그 성공의 요인은?
이처럼 과정보다는 효과에 집중함으로써 자극적인 대결구도가 매번 등장한다고 해서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할 가능성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그래도 말하려는 가족 내에서의 아내가 가진 두 가지 얼굴에 대한 천착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아이러니가 있다. 흔히 정상적인 가정 속에서 아내와 유혹은 그다지 내놓고 얘기할 만큼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이 도발적인 제목의 목적은 “아내가 남편을 유혹한다구? 왜?”하는 그 궁금증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이 아내에 맞춰져 있다는 점은 비슷한 시댁의 경험을 해본 이 땅의 아내들에게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드라마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다. 즉 요조숙녀인 아내로 있던 은재는 요부 같은 애리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기고 다시 그 아내의 자리를 되찾으려 하며, 아내의 자리를 빼앗은 애리 역시 은재로 인해 그 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아내라는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두 여자의 쟁탈전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아내의 자리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그다지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혹시 아내라는 한 자리에서 동시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두 얼굴로서의 은재와 애리의 모습 그 자체가 중요해지는 건 아닐까. 요조숙녀와 요부는 은재와 애리가 상황이 바뀌면서 서로 얼굴을 바꿔가며 취하게 되는 입장이다.

조금은 자학적인 시청이 되겠지만 요조숙녀로서 겪는 시댁에서의 구박은 시청자들에게 어떤 막연한 공감을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또 요부는 바로 그런 상황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해체시키는 역할이 된다. 즉 구박받는 요조숙녀와 그걸 깨뜨려버리는 요부는 남성중심사회에 의해 강요된 아내라는 입장의 삶 속에서 그녀들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도 마음 한 구석에 트라우마처럼 남겨진 아픔이다. ‘아내의 유혹’은 바로 이 두 얼굴을 은재와 애리라는 인물로 캐릭터화시켜 분노와 해소의 두 코드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아내라는 자리가 갖는 비극적 상황을 전제하면서도, 심각하게 그 상황에 가라앉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휘발되듯 달려나가는 어설픈 과정에서 비롯된다. 과정이 치밀해지면 이 드라마는 마치 ‘에덴의 동쪽’처럼 그 무거움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과정에 멈추지 않는다. 끝없이 부딪치는 그 효과적인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이 모든 상황을 게임처럼 만들어버린다.

상대적으로 부부라는 관계경험을 해보지 못한 젊은 층들까지 이 드라마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대전게임처럼 반복되는 장면들의 재미에서 비롯된다. 악다구니를 쓰며 머리채를 휘어잡는 인물들의 막가는 게임 같은 드라마 진행은 또한 나이든 시청층들을 적절한 거리를 두게 만들어 심각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극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아내의 유혹’이 막장드라마로 떴다고 해서, 모든 막장드라마가 뜬다는 보장은 없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이것은 “시청자들이 막장을 좋아한다”는 섣부른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 ‘아내의 유혹’은 드라마 과정이 막장이지만, 그 효과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게임적인 드라마 진행으로 인해 적절한 거리감을 갖게 만들면서 동시에 공감을 일으키는 성공 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다. ‘아내의 유혹’은 막장으로 뜬 것이 아니라, 그 막장으로 보일 정도로 과정보다 효과에 집중한 데서 뜬 것이다.

‘꽃남’과 ‘돌아온 일지매’, 원작만화에 가까워진 드라마

물론 원작이 만화이지만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캐릭터들 역시 순정만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인물들이다. 초부유층 자제들인 F4의 일상은 무대회, 별장, 파티 같은 순정만화 속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분명 고등학생이지만, 신화고등학교가 재학생들에게 주는 파격적인 특혜로 인해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모습 따위는 발견할 수 없다. 왜? 만화 속에서 그런 이야기는 재미가 없으니까.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멋진 꽃미남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비일상적인 모습들이다. F4의 리더인 구준표(이민호)와 스포츠카를 타고, 분위기 있는 꽃미남 윤지후(김현중)와 함께 말을 타고, 식사를 할 때도 하녀들의 시중을 받거나 주방장의 특별 서비스를 당연한 듯 받는다. 쇼핑을 할 때면, 한 백화점을 통째로 빌리기도 한다. 물론 그 백화점도 그 주인공의 것이다.

드라마로 보면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만화로 보면 당연한 이 판타지의 세계는 따라서 드라마 속으로 틈입한 만화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만화의 흐름과 드라마의 흐름은 호흡이 다르지만, 판타지라는 접점을 공유하는 순간, 시청자들의 시선 자체를 돌려놓는다. 젊은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만화적 감성에 익숙하지만, 나이든 세대라도 ‘꽃보다 남자’를 보며 그 판타지에 푹 빠질 수 있는 시청자라면, 적어도 소싯적 ‘캔디’나 ‘베르사이유의 장미’같은 순정만화 한두 편쯤은 빠져서 본 적이 있는 분일 것이다.

‘꽃보다 남자’가 순정만화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였다면, 최근 방영되며 그 독특한 연출이 화제가 된 ‘돌아온 일지매’는 고 고우영 화백의 그 독자적인 만화 세계를 사극 속으로 들어들였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작자의 개입이 들어가는 내레이션의 활용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저들끼리 만나고 부딪치며 대사를 주고받지만, 그 위에 그들을 내려다보는 작자의 해설이 고우영 만화의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것은 ‘삼국지’나 ‘수호지’, ‘초한지’같은 원전들이 있는 작품들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면서 만화화해온 고우영 화백 나름의 노하우가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사극 ‘돌아온 일지매’에서 작품 몰입을 방해한다는 논란을 일으킨 책녀의 존재는 바로 그 내레이션을 드라마화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 책녀라는 내레이션은 조금 낯선 존재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고우영 만화의 진짜 재미에 접근하게 해준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우영 화백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이야기를 중심인물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주변인물에서부터 서서히 중심인물 쪽으로 끌어간다는 점이다. 발차기의 고수로 옆으로 걷게 된 왕횡보(박철민)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이야기의 화두로서 등장하고 그 인물이 주인공과 얽히면서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가는 구조가 고우영 만화의 또다른 재미이다. 이러한 주변에서부터 중심으로 가는 이야기 구조는 ‘일지매’같은 서민들의 영웅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특히 빛을 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일지매를 다루지만 주변부 인물들 예를 들면 구자명(김민종) 같은 인물 또한 빛나게 됨으로써 한 영웅만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 각각이 자신만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가진 인물로 조명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지매라는 원전 해석이 아닌 고우영 화백 자신만의 작품이 특별히 빛나고 여러 차례 타 장르에서 재해석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꽃보다 남자’나 ‘돌아온 일지매’는 모두 원전 만화를 드라마화한 것이 아니라, 만화 그 자체를 보는 재미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인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그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순정만화 그 자체인 드라마와, 책장을 넘기듯 몇 편으로 제목 지어진 고전이 되어버린 일지매라는 고우영 만화를 드라마를 통해 보는 새로운 재미를 경험하고 있다.

혹자는 만화 같아서 유치하고, 몰입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드라마가 만화와 동거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드라마를 꼭 리얼리티만으로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만화에서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과 판타지 그 세계 자체를 여행하는 것이 자유롭게 공존하듯이 이제는 드라마도 여러 형태들을 껴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해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화 같은 ‘꽃보다 남자’와 ‘돌아온 일지매’. 진짜 만화의 묘미를 아는 시청자라면 그것이 오히려 만화 같아서 더 재미있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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