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봅슬레이 도전기’, ‘워낭소리’와 닮은 눈물의 이유

점점 각박해져만 가는 불황의 상황. 그 독해지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더 독한 것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작금의 드라마에 드리워진 ‘막장’과, 예능 프로그램에 드리워진 ‘막말’의 그림자는 그 불황의 여파를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 독해지면 독해질수록 그 반대급부로서 대중들은 더더욱 웃음과 감동에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은. 소외된 스포츠를 조명하기 위해 겁 없이 뛰어든 ‘무한도전’의 봅슬레이 도전기가 선사한 웃음과 감동은 독해진 세상 속에서 그것이 오히려 더 빛을 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또한 불황에 허덕이는 우리 영화계에 작은 영화로 다가와 관객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린 독립다큐 ‘워낭소리’가 전한 그 감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무도-봅슬레이 도전기’가 준 웃음과 감동, 그 실체
봅슬레이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간 ‘무한도전’팀. 잇따른 사고로 전진과 정형돈이 빠지고, 노홍철마저 스케줄 때문에 더 이상 봅슬레이를 탈 수 없게 되자 남은 건 ‘무한도전’팀의 고령자들(?)뿐이었다. 봅슬레이 자체에도 적응하기 힘든 상황에, 유재석과 박명수, 정준하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골인점에 들어온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걸 해낸 자신들에게서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감동이 솟구쳤고, 박명수는 “이거 울지 않을 수가 없네”라고 말했다. 그 순간 대중들은 그들이 가진 감동을 똑같이 전해 받았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가 최고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그 도전의 장면들은 불황에 지친 대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무도-봅슬레이 도전기’는 말 그대로 리얼 버라이어티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영화 ‘쿨러닝’을 연상시키는 봅슬레이라는 경기 자체가 주는 웃음의 요소가 바탕에 깔려있었고, 평균 이하의 실력을 가진 팀원들의 도전 자체가 폭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웃음과 함께 시시각각 다가오는 긴장된 시간들은 다큐멘터리 같은 리얼 그 자체였다. ‘무도-봅슬레이 도전기’가 웃음과 함께 진짜 감동을 전해준 것은 바로 이 리얼함이 가진 힘이었다. 그 누구도 연출할 수 없는 그 진정성의 눈물은 오히려 담담한 다큐적 영상이 전하는 더 깊은 울림을 남겨주었다.

‘워낭소리’와 닮은 ‘무도-봅슬레이 도전기’
바로 이 꾸미지 않은 감동은 또한 최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독립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워낭소리’의 소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는 어떤 짜여진 이야기 없이도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준다. ‘무도-봅슬레이 도전기’가 평균이하 멤버들이 봅슬레이를 타는 그 지극히 단순한 과정을 그저 보여주는 것처럼, ‘워낭소리’ 역시 소를 이용한 농사를 고집하는 할아버지와 소의 그 상황만을 단순히 반복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바로 이 단순함은 마치 육체노동이 가진 단순함이 어떤 지점에서는 숭고함으로 바뀌어지는 감동적인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이것은 또한 그토록 장난만 치던 ‘무한도전’의 팀원들이 57초 동안 봅슬레이를 타며 그 육체에 던져지는 중력의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는 그 지점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동의 실체와도 같다.

또한 ‘워낭소리’와 ‘무도-봅슬레이 도전기’가 전한 감동 속에는 모두 낮은 자들의 시선이 들어있다. ‘워낭소리’는 칠순을 넘긴 할아버지와 이제 죽을 날을 앞두고 있는 소가 그 낮은 위치에서 전하는 위대한 이야기가 감동을 주고, ‘무도-봅슬레이 도전기’에는 평균이하의 신체와 능력을 가진 이들의 무모할 정도로 열심히 하는 그 위대한 도전의 이야기가 감동을 준다.

눈만 돌리면 어디나 불황을 외쳐대는 지금, 우리는 더더욱 꾸며지지 않은 감동과 웃음을 원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워낭소리’의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그 워낭의 여운과, ‘무도-봅슬레이 도전기’가 보여준 개그맨들의 눈물이 가진 진정성의 여운은 쉬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절친노트’의 김구라 vs 토크쇼의 김구라

‘절친노트’에 출연하는 김구라는 한 때 자신의 독설로 소원해졌던 문희준과 함께 화해의 모습을 넘어 절친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김구라는 작년부터 자신의 독설로 피해를 보았던 연예인들에게 잇따라 사과를 해왔고, 그것은 ‘절친노트’의 기획의도 자체가 되었다. 독설과 화해의 당사자들인 김구라와 문희준은 함께 MC로 자리했고, 그들이 했던 절친을 위한 사과와 화해는 프로그램의 형식이 되었다.

절친과 독설의 김구라
김구라는 작금의 쇼들이 가진 직설어법의 살아있는 캐릭터다. 작년 한 해 김구라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김구라 자신이 말했듯이 지금 예능이 자신 같은 캐릭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직설어법을 김구라와 예능 프로그램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김구라화되었고, 김구라는 예능 프로그램화되었다.

그런데 리얼리티와 진정성을 앞세운 ‘절친노트’에서 김구라가 화해의 따뜻한 면면을 드러내려 노력할 때, 다른 한편에서 ‘라디오스타’나 ‘명랑히어로’에 출연한 김구라는 잇따른 막말로 파문을 일으켰다. 홍석천 관련 멘트는 성 소수자 비하라는 논란을 낳았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언급하며 끄집어낸 이대근, 마흥식 관련 발언도 부적절했다는 여론을 만들었다. 모두 리얼을 강조하는 이들 프로그램들 속에서 김구라는 절친과 독설의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김구라의 진짜 얼굴일까. 그것은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리얼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그것 역시 캐릭터라는 이름으로 연기되어지는 작금의 예능 프로그램 상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특유의 독설 캐릭터를 가진 김구라를 예능 프로그램들이 소비하는 방식의 두 얼굴이다. 그렇다면 이 독설과 화해의 프로그램들은 과연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는 있는 걸까.

김구라의 홍석천 언급이 말해주는 것
인터넷 매체의 진짜 독설의 김구라가 지상파로 나왔을 때 그는 그 상업적 속성 때문에 본연의 아우라(?)를 상당부분 휘발시켰다. 왕비호(윤형빈)가 독설을 통해 오히려 호명된 연예인의 가치를 높이듯이, 김구라의 독설도 자기 스스로가 주장하듯(그가 아니면 누가 한물 간 연예인을 탑 프로그램에서 다시 거론하겠는가!) 조금씩 호명의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이 부분에서 쇼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독설과 절친은 어쩌면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얼굴처럼 보인다. 김구라가 홍석천을 언급했을 때, 성 소수자에 대한 비하의식이 그 말 속에 숨겨져 있다고 여론이 들끓었지만, 그가 홍석천을 언급하기 전까지 홍석천은 철저히 대중들로부터 커밍 아웃한 성 소수자로서 외면 받아왔다. 이것은 홍석천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김구라는 홍석천과 절친한 사이라고 했고, 그래서 스스럼없이 농담을 던졌을 수도 있다. 김구라의 발언은 물론 부적절한 것이지만(사실은 편집을 하지 않은 제작진의 문제가 더 크다), 홍석천에게 진짜 형벌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호명조차 되지 않는 자신의 상황이지 않을까.

‘절친노트’의 두 얼굴
“우리는 절친입니다.” 처음 만난 연예인들이 서로 질문과 답변을 하다가 서로 어색해지면 부르는 ‘절친노트’의 절친송. 이 노래는 이중적이다. 처음 만난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꽤 직설적이다. 김국진은 늘 그렇듯이 이혼한 사실에 대한 질문으로 공격을 받는다. 어떤 논란이나 궁금증을 갖게 했던 연예인이라면 바로 거기에 대한 질문이 날아가고 한 번으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집요하게 그 질문은 계속 반복된다.

이 절친송의 형식은 그 질문-답변 구조만을 보면 여느 직설적인 토크쇼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분위기만은 정반대다. 그것은 이 노래의 후렴구로 달라붙어 있는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선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노래의 취지에 ‘친해지기 위한’이라는 전제가 붙기 때문이다. 탤런트 김동현이 나왔을 때, 김국진은 막말에 가까운 말들로 그와 절친하지 않는 관계 설정을 만들었다(이 절친하지 않은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그램의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이 과감하고 지나치게 솔직한(?) 질문과 답변의 자극성은 바로 그 절친이라는 태도로 인해 상쇄된다.

쇼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독설과 절친의 얼굴은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 그 속내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는 않다. 단지 쇼가 직설어법을 어떤 식으로 소비하느냐는 태도에 따라 달라 보일 뿐이다. 김구라는 바로 그 달라진 쇼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서 제대로 소비되는 프로로서의 캐릭터일 뿐이다. 따라서 김구라로 대변되는 독설과 절친의 얼굴은, 김구라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현재 쇼 프로그램들이 가진 직설어법 성향을 드러내주는 얼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쇼 프로그램들은 지금 절친송을 부르고 있는 중이다. 자극적인 질문과 답변을 직설어법으로 풀어낸 후,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후렴구를 붙여서.

부재한 만화적 상상력, 사회극으로 연출된 ‘꽃남’

고교생이 함께 호텔에 들어가고 바에서 술을 마시고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춘다. 단지 서민이라는 이유로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고, 사생활이 찍혀 공개되는 등 자극적인 왕따 문화가 그려진다. 돈 앞에 지나치게 고개를 숙이는 금전만능주의를 그려 서민들의 삶을 왜곡한다. ‘꽃보다 남자’에 쏟아진 논란들은 그 끝을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도대체 왜 그럴까.

원작만화가 그렇다면 끝?
가장 큰 이유는 연출력 부재에서 비롯된다. ‘꽃보다 남자’의 스토리는 대부분 일본 원작만화에서 그려진 그대로다. 하지만 같은 스토리라도 만화 속에서와 드라마 속에서는 전혀 느낌이 다르게 그려진다. 금잔디(구혜선)네 집의 아이 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아이 설정은 만화에서라면 당연히 가벼운 웃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이 아이 같은 부모들이 구준표 앞에서 보여준 비굴함은 웃음보다는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구준표의 거만한 태도 역시 만화 속이라면 이해되고 심지어 그 기성사회에 대한 도발이 통쾌할 수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멸치를 보며 “이게 무슨 벌레냐”고 묻는 구준표를 보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고교생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금잔디네 부모의 모습이나, 고교생들이 한 학생을 두고 벌이는 집단따돌림은 초창기부터 원작만화가 가진 왜색문화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리메이크 과정에 있어서 원작을 수용하기만 했지 우리 식의 해석이 들어가지 않았던 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런 비판들에 대해 제작사측은 시종일관 원작만화가 그렇다는 식으로만 말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원작만화로 돌리는 핑계가 납득될 수 있는 일일까. 이것은 오히려 이 드라마의 연출력 부재를 스스로 자인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 불거져 나온 드라마 내내 깔리는 OST의 논란은 이제 이 드라마의 연출력 부재가 총체적인 부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후로 보여진다.

‘꽃보다 남자’는 원작만화를 잘 그려내지 못했다
만화가(그것도 외국의)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려면 연출에 있어서 재해석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물론 재해석에 있어서 원작만화에 충실하려 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꽃보다 남자’가 원작만화를 잘 그려냈다고 볼 수 있을까. 만화의 스토리를 살리려 했다면 단순히 스토리의 재연이 아니라 스토리를 만화적으로 연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미 ‘메리대구 공방전’이나 ‘환상의 커플’, ‘경성스캔들’을 통해 드라마의 만화적 연출 가능성을 목도한 적이 있다. ‘메리대구 공방전’은 광각 카메라를 통해 앵글 자체를 만화적으로 활용하고, 컷을 만화의 단 나누듯이 연출해 그 만화적 스토리의 경쾌함을 만들어냈다. ‘환상의 커플’은 안나조(한예슬)라는 독특한 말투와 대사의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그 만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경성스캔들’은 일제시대라는 무거움을 과감하게도 만화적 연출을 통해 가볍게 그려내는 실험성을 돋보였다.

이들 일련의 수작들과 비교해보면 ‘꽃보다 남자’의 연출은 만화적이라기보다는 사회극의 분위기를 자아낼 정도로 무겁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드라마의 자극적인 전개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즉 사회극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현실적인 연출들, 예를 들면 심각할 정도의 집단따돌림 장면이나,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기 위해 강간 같은 장면을 연상시키는 연출은 거꾸로 이 드라마의 만화적 존재들인 F4와 극명한 대비를 통해 그 일차적인 자극을 높이려는 의도다.

하지만 만화가 사회극의 뉘앙스를 가져와 논란을 만들어내고, 또 논란이 불거졌을 때 원작만화라는 핑계로 숨는 것은 당당하지 못한 태도일뿐더러 이 드라마의 연출력 부재를 드러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만화적 대사, 스토리를 그대로 끌어오고도 그것이 만화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연출은 그 만화적 속성과 드라마적 속성의 괴리로 인해 논란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지금 불거져 나온‘대사보다 OST’라는 비판은 이 부재한 연출력을 OST(사실 OST라고 할만한 다채로움도 별로 없다. 단 한 곡이 거의 반복될 뿐이다.)로 보완해보려는 안일한 연출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현실을 잊고픈 판타지 vs 현실 속에서도 꿈꾸게 하는 판타지

지금 캐릭터로 가장 화제를 누리고 있는 것은 단연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다. 이 캐릭터를 통해 이민호는 ‘벼락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여성들은 자기 여자친구를 위해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 옷을 사주고, 전용비행기를 태워 뉴칼레도니아까지 날아가 주말을 보내며, 그러면서도 여자친구의 서민적 삶(?)까지 끌어 안아주는 이 만화 속에서 막 나온 듯한 꽃미남 캐릭터에 빠져들고 있다. 

구준표에 대한 반응, 왜 여성과 남성이 다를까
이상한 것은 이 구준표라는 캐릭터에 대한 남녀 간의 반응이 상반된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열광하는 반면, 남성들은 그다지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여기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을 꿈꾸게 만드는 그 만화 속의 캐릭터와,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이 지금 현실 앞에 잔뜩 주눅 들어가는 남성들에게는 여러 모로 억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구준표는 집이나 학교에서나 일상 생활 자체가 귀족들의 그것이다. 무도회를 즐기고 휴양지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고 하녀들이 시중드는 식사를 하는 그 모습은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중세 귀족의 모습이다. 무엇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귀족생활을 즐기는 구준표는 그다지 착한 캐릭터도 아니다.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서민들의 힘겨운 일상을 찌질함으로 바라보기까지 하는 전형적인 무개념 캐릭터다.

중요한 것은 이 전형적인 귀족주의에 빠진 나쁜 남자가 평범한 서민 금잔디(구혜선)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나쁜 캐릭터를 오히려 매력적으로 만든다. 능력 있는(뭐든 다해줄 수 있는) 나쁜 남자(다른 사람에겐 나쁘지만 나에게만은 잘해주는)가 한 사람만을(시청자 입장에서는 나만을!) 사랑하는 모습은 늘 드라마 속 버럭 캐릭터의 형태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버럭범수,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처럼 구준표도 그 버럭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구준표가 다른 버럭 캐릭터들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이 어떤 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바로 이 주어진 능력이 그의 유년시절을 불행하게 했다는 식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정일 뿐이다. 만일 그가 똑같은 서민에서 시작해 귀족의 반열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아마도 남성들 또한 이 캐릭터에 열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능력은 일반 서민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도달지점이다. 구준표라는 만화적 캐릭터에 여성들이 열광하는 그 모습을 보는 보통의 남성들이 씁쓸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 현실에서도 꿈꾸게 하는 판타지
하지만 똑같이 까탈스럽고 늘 귀족주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능력 있는 남성이었던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는 구준표와는 다릅니다. 강마에라는 캐릭터는 극심한 가난을 겪고 그 속에서 음악의 꿈을 이뤄온 입지전적인 인물이기에, 남성들은 그를 통해 꿈을 꿀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남성들뿐이 아니다. 강마에가 ‘베바’를 통해 우리에게 던져준 것은 서민들이라도, 따라서 꿈을 이루기에는 버거운 현실이라도 꿈이라도 꿔보라는 그 희망이었다. 똑같이 판타지를 그리고 있지만 ‘베바’의 판타지는 ‘꽃남’의 판타지와는 이렇게 다르다. ‘베바’의 판타지는 드라마 밖으로 나와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을 여전히 꿈꾸게 하는 반면, ‘꽃남’의 판타지는 현실 자체를 잊고싶게 만든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따라서 그 잠깐 동안의 일탈적인 판타지가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라마를 보는 기본적인 욕망 속에 잠시 현실을 잊고픈 욕구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똑같은 판타지 속에서라도 구준표보다는 강마에를 더 꿈꾸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꿈 속에서 꿈꾸는 것보다는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고 싶은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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