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을 잘라 사람을 포착하는 ‘다큐 3일’

지난 11월, 양천구 신월 5동에 있는 고물상 세 곳에서의 3일을 포착한 ‘다큐 3일-인생만물상편’에서는 다큐로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한 끼 식사를 위해 엄동설한에도 파지를 주우러 다니는 한 할머니를 쫓아다니며 촬영을 하던 한 여자 VJ가 카메라를 든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단 한 끼를 챙겨먹기 위해 그 고된 일을 하는 할머니를 취재하는 입장이지만, 그 안타까움에 눈물을 감추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VJ의 의도되지 않은 틈입이 주는 감동
엄정한 카메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하는 다큐멘터리에서, VJ의 의도되지 않은 틈입(예를 들면 질문 같은 것이 아닌)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큐 3일’에는 이러한 VJ의 존재가 문득 문득 영상을 통해 느껴질 때가 많다. 그 고물상에서 3일 동안 할머니를 쫓아다닌 한 VJ에게 그 할머니는 고생한 것에 대한 선물이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며 꼭 놀러오라고 말했고, VJ는 그러겠다고 화답했다.

지난 24일 방영된 탑골공원 주변의 3일을 다룬 ‘아버지의 얼굴 편’에서도 이런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매일 출근하듯 탑골공원 인근의 1천5백 원짜리 국밥집을 찾는다는 한 노신사는 공원의 명물인 백 원 짜리 커피 자판기에서 굳이 커피를 빼주겠다며 VJ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31일 방영된 ‘고향 가는 길’에서는 버스에 동행 취재하는 VJ에게 한 아주머니가 가래떡을 건넸다. 촬영 중이라 먹지를 못하자, 아주머니는 “촬영 좀 그만하고 좀 먹어”하고 말해 기어이 VJ에게 정을 전했다.

이러한 VJ의 틈입은 자칫 다큐멘터리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다. 하지만 ‘다큐 3일’에서의 틈입은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감동까지 준다. 그것은 VJ와 그가 찍는 사람들 간의 친밀감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친밀감을 만들어내는 걸까. 여기에는 단지 VJ의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다큐 3일’만의 독특한 형식에서 비롯된다.

시간과 공간의 축에서 사람을 발견하다
‘다큐 3일’은 말 그대로 특정한 장소를 3일 간 관찰하고 기록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즉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이 그 핵심이다. 이렇게 제한적으로 시공을 압축해놓으면 그 안에 벌어지는 일들은 마치 돋보기를 댄 것처럼 자세해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쳐지나갔던 공간과 시간이 새롭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간의 축과 공간의 축 위에서 잡아내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곳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이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즉 ‘다큐 3일’은 시공을 단지 제한해 압축해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자세하게 그려내기 위한 장치다. 바로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는 이 형식은 VJ를 그 한정적 시공간 속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시청자를 대신해 VJ라는 외부적 시선이 그 특정 공간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또 점점 동화되고 공감하게 되는 그 3일간의 경험이 바로 ‘다큐 3일’인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VJ는 어느 순간 그 시공간과 교감을 나누게 된다. VJ의 눈물, 틈입은 이 순간에는 몰입의 방해가 아니라 감동이 된다.

최근 개그 콘서트에서 ‘난...뿐이고’로 뜬 안상태 기자는 사건현장 속에서 그 현장이 자신까지도 삼켜버리는 현실을 목도한 후, 기자의 본분까지 잊어버리고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다. 시청자들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이 웃음의 포인트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기자라는 껍데기가 뭐가 중요해 나도 똑같은 인간이다.’ ‘다큐 3일’에는 웃음이 아닌 감동을 발견한 VJ의 틈입이 있다. 그들은 그 틈입의 장면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자세히 바라보면 감동인 저들과 나는 다 같은 사람이다.’ 이것은 시청자에게도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전달된다. 난... 감동했을 뿐이고!

개그맨 신인발굴시스템, 문제는 없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있다. 동명의 책을 통해 경제학자 우석훈이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88만원에서 119만원 사이의 임금을 받는 20대가 지금보다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측’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화려하게만 보이는 대중문화 속이라고 해서 이 ‘88만원 세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개그맨 지망생들, 또 개그맨이 되어서도 끝없이 경쟁적인 시스템 속에 노출되어야 하는 공채 개그맨들이 그들이다.

개그 지망생들은 도대체 얼마를 벌까
개그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할까.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통해 경력을 쌓으면서, 공채 개그맨 시험에 도전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대학로 소극장에서 일하는 개그 지망생들은 얼마를 받을까. 공채로 뽑힌 개그맨들의 얘기를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딱히 정해진 금액이 없다고 한다. 배우는 입장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대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용돈을 주는 식이라고 한다. 대학로의 무대에 서는 신인 연극배우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분명한 노동에 대해 용돈이라도 주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그 상황이 정당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 노동자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일했던 개그 지망생들은 바늘구멍 뚫기만큼 어렵다는 공채 개그맨에 합격하는 순간, 숨통이 그나마 트인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를 받기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 ‘개그 콘서트’의 경우 등급표라는 것이 있어서 회당 30만원에서 150만원까지를 받는데, 처음 시작하는 신인 개그맨은 30만원씩을 받는다. 이 프로그램에서 최고액인 150만원을 받는 개그맨은 세 명이라고 하며, 전체 평균은 중간 선인 70만원 선이라고 한다. 한 달에 네 번 출연한다면 회당 70만원을 받는 개그맨은 280만원 정도를 매달 버는 셈이니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하는 신인 개그맨은 월 120만원 정도로 상황은 여전히 조악한 편이다. 그런데 이것조차 숨통이 트일 정도라고 하니 공채가 되기 전, 이들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힘겨운 안정적인 시스템으로의 안착
잘나간다는 ‘개콘’이 이 정도니 타 방송사의 경우는 오죽할까. 이 신인 개그맨들은 조악한 벌이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꿈을 위해 아이디어 회의에 대본 연습으로 밤을 꼬박 세우기 일쑤다. 게다가 이들은 2년 계약직이다. 물론 계약이 끝나고도 특채의 형태로 남아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인지도를 확보한 경우에 한할 것이다. 이 불안하기 그지없는 신인 개그맨들의 상황의 문제는 이 살얼음판에서 적응한다고 해도, 그 생명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점이다. 무대 개그 속에 몇 년 정도만 있다보면 새로운 젊은 개그맨들에게 밀리게 된다. 즉 타 분야로 나가야 하는데, 매니지먼트사와의 계약은 따라서 개그맨들로서는 무대 개그의 틀을 벗어나 안정적인 시스템(토크쇼나 버라이어티쇼 같은)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하지만 작금의 토크쇼나 버라이어티쇼는 개그맨들보다는 가수나 배우들을 더 중용하는 추세다. 현재 무대개그를 통해 안정적인 시스템에 적응한 개그맨들은 이수근, 신봉선, 유세윤, 황현희 정도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무대 개그의 틀을 벗어나 현재 쇼의 대세로 일컬어지는 토크쇼나 버라이어티쇼로 들어갔을 때, 얼마나 잘 적응해내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대 개그에서 적응된 콩트 형태의 대본 개그는, 순발력을 강조하는 토크쇼나 버라이어티쇼에서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의 잘 나가는 이수근을 만든 것은, 그가 버라이어티쇼에 적응하는 1년 동안을 묵묵히 기다려준 ‘1박2일’의 공이 크다. 그만큼 새로운 적응기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과연 ‘무대개그’가 현재 유일한 신인 개그맨 발굴시스템으로 적합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88만원 세대의 문제는 그 용어적인 88만원이라는 실제적인 수치가 갖는 절박함보다, 그 젊은 새 일꾼들의 사회 적응 시스템이 가진 불안정함에 있다. 조악한 대우에도 기회는 없고, 기회를 얻는다 해도 안정적인 시스템에 안착하지 못하는 이 상황은 여러 모로 신인보다는 기성인을 기용해 좀더 안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려는 추세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불황의 상황에 그 이유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더 미래를 생각한다면 많은 장점을 가진 ‘무대개그’ 신인발굴시스템을 보완해줄 또 다른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팽창과 융합의 빅쇼, 빅뱅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다

아이돌 그룹의 공연으로 이처럼 다채로운 무대가 또 있을까. 지난 30일부터 2월1일까지 진행되는 빅뱅의 단독콘서트, ‘빅쇼’는 빅뱅이라는 이름 값을 제대로 한 콘서트였다. 그것은 아이돌 그룹의 구성원들이 빅뱅하여 각각의 별로서 빛을 발한 쇼였고, 스타일이 살아있는 댄스와 노래에서부터 정겹기 그지없는 트로트, 그리고 흥겨운 음악에서부터 코믹한 패러디 영상까지 다채로운 스타일이 빅뱅하는 쇼였으며, 무대라는 한정적인 장소를 종횡무진 확장시킨 공간의 빅뱅을 보여준 쇼였다.

따로 또 같이, 폭발하다
‘빅쇼’만이 가진 첫 번째 특징은 ‘따로 또 같이’. 빅뱅의 멤버들은 그룹의 단체무대가 주는 단조로움과 기계적인 연출을 벗어나, 각각의 멤버들의 단독무대를 경합하듯 연결 구성했다. 자칫 개성이 함몰될 수 있는 단체무대에서 벗어난 멤버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끼를 맘껏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멤버들은 건강한 경쟁을 통한 긴장감을 잃지 않는 쇼를 보여줄 수 있었다.

먼저 ‘하루하루’로 문을 연 빅뱅은 승리의 ‘strong baby’를 통해 그 화려한 쇼의 팽창을 알렸다. 파워 풀한 랩과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인 탑의 무대와, 레이브 파티 같은 몽환적 DJ쇼에 이어 경쾌한 힙합의 세계를 보여준 G-드래곤의 무대, ‘나만 바라봐’의 태양이 보여준 느린 듯 강렬한 춤과 노래의 무대, 트로트 신동(?) 대성이 선보인 ‘대박이야’의 대박무대까지, 쇼는 각 개인 멤버들의 개성을 폭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각각의 쇼들은 또한 단체로 함께 노래를 부를 땐 그 살아난 개성들이 화음에 사라지기보다는 저마다 피어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치 각각의 악기가 저 혼자로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빅뱅의 ‘빅쇼’는 무대 위에서 시연해 보였다.

장르와 스타일을 넘나들다
‘빅쇼’의 두 번째 특징은 때론 간지나는 멋진 무대에서부터 때론 구성진 트로트 무대까지
빅뱅 멤버들이 보여준 다채로운 음악 스타일과 함께,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활용해 무대와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빅뱅의 화려한 공연에 환호성을 지르다가 영상 콘텐츠가 보여주는 코믹함에 자지러지기도 했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패러디한 ‘빅뱅 바이러스’는 강마에를 흉내낸 탑의 이른바 ‘탑마에’를 통해 웃음 폭탄을 날렸다. ‘탑마에’는 아줌마로 변신한 대성과, 두루미로 변신한 승리, 그리고 헛기침을 날리는 아저씨로 변신한 태양 앞에서 “똥덩어리!”를 날리며 유쾌한 웃음을 주었고, G-드래곤은 강건우로 변신해 두루미 승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을 연출했으며, 탑을 사랑하게 된 승리의 뽀뽀 신은 객석에 웃음 결정타를 날렸다.

한편 빅뱅이 놀이공원을 찾아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은 마치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보는 듯한 재미를 선사했다. 얼굴을 모자로 가리고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얻어먹고, 들키지 않게 얼굴을 공개하고, 일반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세 가지 미션을 두고 멤버들이 경쟁을 벌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보다 친숙한 빅뱅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었다.

무대의 빅뱅, 빅뱅하는 무대
마지막으로 빅뱅이 이름 값을 제대로 한 이유는 그 스펙타클한 무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대라는 한정적인 공간을 의도적으로 깨기 위해 객석 사이사이로 무대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빅뱅은 그 위를 뛰어다니며 관객들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호흡할 수 있었다. 무대 위로 내려진 다섯 개의 와이어 위에 오른 다섯 멤버가 공중으로 부양(?)하여 객석 위로 날아다니는 무대 연출은, 무대 위의 빅뱅에 맞게 빅뱅하는 무대 그 자체였다.

다섯 명의 멤버들을 빅뱅(?)시키는 그 장면은 이 쇼의 주 컨셉트이자 이 아이돌 그룹의 컨셉트인 ‘따로 또 같이’를 무대 위에서 실연해주는 장면이었고, 이것은 또한 좀더 개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질 이 그룹이 올 한 해 어떻게 활동해 나갈 것인가를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활동공간과 활동장르 같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멤버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종횡무진 넘어보겠다는 야심이 그 장면 하나에 농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실제로 1만3천여 명이 넘게 꽉 메운 관객들로 인해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 무대 위에 빅뱅이 오히려 더 관객 가까이 다가가는 효과를 만들기도 했다. 무대 밑에서 갑자기 멤버가 등장하기도 하고, 관객들 중에 한 여성을 무대 위로 올린 후 그 여성을 통해 “마음에 드는 멤버를 껴 안으라”고 하는 식의 연출은 빅뱅을 관객에게 좀더 다가가게 만들었다.

팀의 빅뱅, 스타일과 장르의 빅뱅, 무대의 빅뱅. 빅뱅의 ‘빅쇼’는 이 세 가지 점에서 제대로 이름 값을 한 콘서트였다. 화려하면서도 정겹고, 멋지면서도 웃기는 이 쇼는 또한 올 한 해 빅뱅의 행보를 가늠하게 해줬다는 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 실종의 시대, 노동의 가치를 말하다

개봉 15일만에 5만 명의 관객을 넘어선 ‘워낭소리’. 독립다큐영화로서 단 7개관 개봉으로 시작한 이 영화가 32개관으로 극장을 늘려가며 관객들의 폭발적인 찬사를 받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간에는 2007년 10개관 개봉에서 시작해 점점 개봉관을 늘려가며 22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은 ‘원스’ 성공과 비교하며, 그 흥행속도가 오히려 ‘원스’보다 빠르다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극영화가 아닌 다큐영화로서 ‘워낭소리’가 거두고 있는 이 놀라운 성적은 ‘원스’의 기염을 넘어서는 면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영화에 이다지도 폭발적인 반응을 만드는 것일까.

사라져 버린 부리는 소, 달라진 소의 실존
‘워낭소리’에서 최원균 할아버지(80)는 이미 노쇠해버린 소를 대체할 젊은 소를 찾기 위해 소 시장을 찾아간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부리는 소 있어?”하고 묻지만 그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부리는 소’, 즉 일하는 목적으로 기르는 소는 이제 거의 없기 때문이다. 후에 소가 일을 할 수 없게 된 소를 팔기 위해 소 시장에 나온 할아버지가 5백만 원 정도로 소의 가치를 매기자, 모두가 껄껄 웃으며 “그런 가격으론 못 팔아요. 일만 한 소는 고기가 질겨서 못 먹어요.”라고 말한다.

시장에서 소의 가치는 ‘일’이 아니라 고기가 되는 ‘중량’으로 판단되는 이 상황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보여주려는 노동 실종 시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의 달라진 실존이 드러나는 이 대목과 함께 영화는 시종일관 할아버지와 소가 함께 농사짓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남들이 기계로 모를 심고 농약으로 해충을 잡고, 기계로 수확할 때 할아버지는 무모하리 만큼 그 모든 일을 소와 자신의 손으로 해나간다. 말 그대로 ‘소처럼 일하는’ 이들을 보며 이삼순 할머니(77)는 연실 혀를 끌끌 차며 달라진 세상 속에서 여전히 소를 고집하는 농사를 짓는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소를 안타까워한다.

최원균 할아버지의 ‘소를 이용한 농사’는 단지 ‘소’라는 자리에 ‘트랙터’나 ‘농약’ 같은 단어를 단순히 대치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소를 이용한 농사’란 그 소와 함께 밭을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함을 뜻하고, 그 소가 먹을 꼴을 유지하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 농사를 지어야 함을 의미한다. 소와 함께 지내야할 우사가 있어야 하고, 병이 들면 수의사를 불러 고쳐주기도 해야 하는 그런 농사를 말한다. ‘일하는 소’는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사라진 소, 사라진 노동, 사라진 아버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옆을 할아버지를 태운 수레를 끌고 위태롭게 걸어가는 소, 트랙터가 질주하며 순식간에 일을 해버리는 논 한 옆에서 힘겹게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와 소. 이 풍경을 찾는 일은 의도적으로 그 대상을 찾아 헤맨 이충렬 감독에게도 그다지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전국을 거의 뒤지다시피 해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을 찾아냈다는 이 일화는 작금의 사라져버린 일하는 소의 달라진 실존을 증언해준다.

사라진 소가 의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라진 노동이다. 이제 노동이라고 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대부분이 되어버린 시대에, 이 일하는 소가 전하는 사라진 노동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 일하는 소의 죽음과 그 소가 죽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선물처럼 남겨놓은 엄청난 양의 노동 앞에 현대인들의 무장해제되는 것은, 약삭빠르고 영리해진 세상 속에서 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소가 전하는 노동의 신성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신성한 사라진 노동의 끝자락에서 어렴풋이 고개를 드는 얼굴이 바로 우리네 아버지들의 얼굴이다. 그 노동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해왔으나 이제는 시대에 의해 거세되어 폄하되어버린 과거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소와 할아버지의 실존을 다룬 이 영화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실존이기도 하다. ‘워낭소리’에 쏟아지는 폭발적인 찬사는 불황의 된서리를 맞아 점점 더 영악해지기만 해가는 사회 속에서 바로 이 오래 전 사라져버린 아버지들이 해온 정직한 노동이 전하는 감동에 현대인들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죽어 사라진 소를 바람이 흔드는 워낭소리를 통해 할아버지가 추억하듯이, 영화관을 나서면서도 귓가에 끊임없이 울리는 ‘워낭소리’가 대중들의 입을 타고 귀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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