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캐릭터들, 코드들이 지배하는 드라마 세상

불황기에 접어든 지금, 드라마 제작은 이제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졌다. 실험적인 시도는 사라져버렸고, 과거 익숙했던 코드들이 성공 방정식처럼 끼워진 드라마들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는 신데렐라들이 넘쳐나고, 신파극 속 운명에 처한 눈물겨운 주인공들이 우글거리며, 과거의 옛 영광을 끝없이 되돌아보기도 한다. 드라마 속의 익숙함은 새로움을 잡아먹고 있고, 현실의 고단함은 피로한 새로움보다는 중독적인 익숙함에 더 빠져들게 만든다.

월화극, 넘쳐나는 신데렐라들과 신파 속 주인공들
방송3사의 월화극을 이끌고 있는 '에덴의 동쪽'은 시대극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전형적인 신파극의 코드들을 모두 내장하고 있다. 거기에는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있고, 전형적인 복수극이 있으며, 절절한 가족극이 있다. 이 상황 속에 던져진 인물들은 운명이라는 말이 클리셰가 되어버린 시대에 운명을 남발하며 피눈물을 흘린다. 신파극의 틀 속에서 중독적인 시선으로 드라마에 빠져보면 그 운명의 질곡은 눈물을 쏙 뽑아내게 만들지만, 만일 그 밖에서 이 드라마의 지나치게 과장되고 거창한 대사들을 들어본다면 어쩌면 실소가 나올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중독적 상황을 제시하는 드라마는 불황을 타고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에덴의 동쪽'을 맹추격하고 있는 후발주자 '꽃보다 남자'는 그 안에 신데렐라의 극단을 코드로 탑재하고 있다. 서민들이 들어갈 수 없는 신화고등학교에 들어가 부유층에서도 초부유층의 자제들인 F4와 이러 저리 얽히는 멜로 이야기 속에는 강력한 신데렐라 판타지를 자극하는 코드들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이 리메이크 드라마는 수차례 드라마화되고 영화화된 작품으로 이미 중년층들에게까지 익숙한 드라마이다. 익숙한 스토리는 보는 이들에게 이미 판타지에 빠질 준비를 하고 보게 해주는 힘을 발휘한다. 한편 '떼루아'는 와인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 구조로서 씩씩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변주한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와인과 인생 같은 것이 아니라, 와인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우주(한혜진)가 어떻게 주인인 강태민(김주혁)과 가까워지고 또 성공하느냐에 맞춰져 있다.

수목극,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드라마들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화원'이 완성도를 갖고 각축을 벌이던 수목극의 풍경은 어느새 시들해져 버렸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후속으로 등장한 '종합병원2'는 의학드라마의 효시라는 '종합병원'을 후광으로 업었으나 그다지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하다. 그 문제는 정하윤(김정은)같은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가 떨어지는데다가, 에피소드 드라마의 형식 상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지는데서 오는 집중력 부재에서 비롯된다. 중간에 '종합병원'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독사 오욱철이 투입되기도 했으나 그다지 효과를 만들지는 못했다.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 사극의 부활을 외치며 나온 사극. 대박 고구려 사극이었던 '주몽'의 주인공인 송일국이 무휼 역으로 등장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주몽'과의 변별력을 만드는데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선택이 되었다. 김 진 원작의 '바람의 나라'가 사실 고구려 열풍의 진원지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너무 늦게 만들어진 '바람의 나라'의 어려움은 억울한 점이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스타의 연인'은 한류의 부활을 외치며 등장한 드라마다. 한류의 신호탄을 알렸던 '겨울연가'와 코드를 같이 하면서 동시에 그 연장선 위에서 새로운 한류를 세우려는 이 드라마는 그러나 잘 짜여진 대본과 뛰어난 영상 연출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류드라마(특히 멜로 코드의)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한 점이 클 것이다. 이처럼 현재 수목드라마는 모두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청률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지는 수목극의 상황은 '아 옛날이여'만 외치는 드라마들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주중드라마들은 모두 익숙한 코드들로 무장하고 시청자들의 중독적 시청을 유도하고 있다. 드라마 자체가 본래 중독적인지라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매번 똑같은 것에 중독되는 상황이 유쾌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최근 창궐하는 막장드라마의 탄생은 바로 이 중독적인 드라마들의 마지막 선택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양적인 것(시청률)에만 치중하여 익숙한 코드들만을 끄집어내는 작금의 드라마들. 그 질은 점점 하향평준화 되어가고 있다.

‘개콘’의 두 직업 기자와 PD, 그 의미

‘개그콘서트’의 두 직업으로 기자와 PD가 떴다. 황당한 현실을 전달하는 안상태 기자와 소비자를 우롱(?)하는 과장 과대 광고를 가차없이 고발하는 황현희 PD가 그들이다. 물론 이건 개그일 뿐이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것이 그저 개그에 머물지만은 않는 모양이다. 황현희가 실제 소비자들을 위해 잘못된 상흔을 고발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소비자 고발’에 고정출연하고, 안상태가 케이블 경제 전문 뉴스 채널 mbn에서 ‘안상태의 거꾸로 뉴스’ 진행을 맡게 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개그 코너에서 실제상황으로 까지 끌어오게 한 것일까.

일단 제일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이들이 코너에서 갖고 있는 기자와 PD라는 직업이다. 현재처럼 다변화된 복잡한 사회 속에서 매체가 갖는 힘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선택한 직업군의 무게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있는 현 상황 속에서 이 직업군이 갖는 의미는 신뢰와 불신을 동반한다. 복잡한 상황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신뢰하지 않으면 아무런 정보도 얻기가 어려워지는 직업군인 반면, 그 실망감, 즉 불신에 대한 배반감도 큰 직업군이다. 같은 경제상황을 가지고 서로 다른 입장차가 난무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어쩌면 기자와 PD는 믿음과 불신을 동반하는 가장 핫한 직업인지도 모른다.

‘개콘’의 코너들은 이 직업군이 갖는 상황을 뒤집으며 웃음을 주었다. 안상태 기자는 기자로서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감정 섞인 말투로 자신의 처지와 신세를 한탄한다. 세상을 바라보고 그 사건을 전달해줘야 할 기자가 오히려 그 세상의 황당함에 포로가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웃음을 주는 식이다. 한편 황현희 PD는 믿지 못할 세상에 대한 조금은 병적인 집착을 드러낸다. 이것은 흔히들 예술작품에서 활용되는 ‘미친 자의 목소리’다. 조금은 엇나간 지적들을 하는 미친 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오히려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내는 식이다. 황현희 PD가 하는 지적은 병적이지만, 그 지적하게 되는 상황(믿지 못할 세상)은 현실이다.

하지만 안상태 기자와 황현희 PD라는 조금은 엇나간 캐릭터가 가진 의미는 단지 잘못된 세상에 대한 대응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매체에 대한 불신 또한 들어가 있다. 기자와 PD가 전달하는 세상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 하는 의문 제기. 물론 모든 뉴스와 고발 프로그램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이제 TV가 전달하는 뉴스나 정보란 이제 하나의 진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해석으로 읽힌다. 진실 자체가 쉽게 왜곡되는 매체적 상황 속에서 기자와 PD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개그라는 테두리를 안전장치로 가진 안상태 기자와 황현희 PD는 오히려 더 쉽게 진실에 접근하는 힘을 보인다. 즉 내용(거기서 하는 말)보다는 형식(토로하는 형식과 다그치는 형식)이 오히려 진실에 쉽게 접근시킨다는 말이다.

안상태 기자와 황현희 PD가 개그 코너를 넘어서 실제 뉴스나 시사교양 프로그램까지 나오는 이 상황은 물론 이 캐릭터들이 가진 재미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말해주는 것은 뉴스나 시사교양 같은 정보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가진 말에 대한 신뢰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말 그 자체보다는 그 말이 가진 형식이 때론 더 신뢰가 가고, 또 공감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개콘’의 이 두 직업을 캐릭터로 가진 개그맨들은 보여준다. 말이 아닌 온 몸으로.

시청자들이 목말라하는 스펙타클, 그 의미

주말 밤,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놓던 대하사극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대왕세종’의 부진을 떨쳐버린 ‘천추태후’의 초반 상승세는 이 질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왕세종’은 여러모로 실험적인 사극이었다. 스펙타클보다는 심리사극에 가까웠고, 따라서 드라마는 영상보다는 대사가 중심이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인물들이 변화하는 과정은, 그 심리를 드러내는 대사를 주의 깊게 듣지 못하면 따라잡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 마디로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천추태후’는 초반부터 사극의 진면모라 할 수 있는 전투 장면을 내세워 시청자들이 목말라하던 볼거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만일 이 전투 장면이 늘 사극 속에서 보아왔던 그런 것이었다면 시청자들은 첫 회에서부터 식상해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장면들(예를 들어 곰이 전장에 나오는 것)과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생각되었던 전장을 누비는 여걸들의 모습들이 들어가면서 신선함을 던져주었다. 특히 훗날 천추태후가 되는 황보수(채시라)의, 활을 무기로 하는 전투장면은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흥미진진함을 던져주었다.

전투장면의 연출에 있어서도 저 ‘추격자’가 보여주었던 리얼 액션의 긴박감을 부여해주는데 성공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투장면의 연속은 보는 이의 심장박동을 캐릭터들의 그것에 맞춰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빠져서 보다보면 어느새 끝날 시간이 다 되어버리는 이 스펙타클의 시간은 드라마에 있어서 사극만이 가진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사극은 일단 그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우리는 현대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을 보면서 그들의 다른 삶이 주는 재미에 빠져든다. 사실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우는 세상에 말을 타고 달리고, 기관총에 미사일이 날아가는 시대에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백병전의 묘미는 그 색다름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체계의 모습이 존재한다. 왕이 있고 신하가 있고 백성들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적이 있다. 이 단순화되어 보이는 사회체계 속에서 그들이 부딪치고 싸우고 생존해 살아남는 과정 자체는 조금은 유아적이지만 분명 재미있는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다른 시간과 공간대에서 벌어지는 사극이 바로 현대의 상황들과 조우하는 순간이다. ‘대왕 세종’이 세종이라는 성군을 통해 현대와 접목하려 했던 메시지는 백성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려는 왕과, 그 중간 지점에 서서 소통을 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을 움직이려는 신하들의 대결구도를 통해 보여주려는 진정한 정치의 길이었다. 현대인들의 성군을 희구하는 마음을 세종이라는 영웅을 통해 끌어내려던 의도였다. 실제로 이 작품은 놀라울 만큼 치밀한 대사와 심리묘사로 그 주제에 근접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치적 주제의식을 정치적인 방법, 즉 말로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이 사극이 대중성을 얻지 못한 이유가 된다.

‘천추태후’가 잡아내려는 것은 현대여성들의 달라진 사회적 위치와 그럼에도 여전한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도발이다. 거기에는 전쟁에서 화친을 먼저 생각하는 왕이 있고, 그 왕 앞에 비겁하다 소리치는 여걸, 황보수가 있다. 많은 사극들이 지금껏 영웅적인 여성들을 그려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장금’의 장금이(이영애)가 그렇고, ‘이산’의 성송연(한지민)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들과 본질적으로 황보수가 다른 것은 말이 아닌 행동하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황보수는 저 남성이었던 '대왕 세종'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여성 영웅인 셈이다.

‘천추태후’의 선전은 바로 그 사극만이 가진 볼거리와 거기에 버무려지는 현대적인 코드들에 충실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KBS 대하사극의 오랜 역사가 가진 경험은 이러한 스펙타클의 구현을 용이하게 만든다. ‘대왕 세종’의 부진과 ‘천추태후’를 통한 주말 대하사극의 부활이 한편으로 말해주는 것은 대중들의 말, 정치에 대한 식상함과 볼거리에 대한 목마름이다. ‘천추태후’는 그 영웅이 여성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현재적인 뉘앙스를 의미로 포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히려 말보다는 행동하는 여걸 그 자체가 현재적 의미를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천추태후’가 가진 위험성도 존재한다. 현재의 사회에서 말의 홍수가 지긋지긋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것 또한 칼이 아닌 그 말의 힘이라는 것을 자칫, 행동하는 여걸의 판타지를 통해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과 스펙타클에 대한 환호는 늘 그 탄탄한 공조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지금의 ‘천추태후’가 정치적 무관심을 추구할 것이라는 걸 예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정치적인 사건들은 스펙타클과 함께 이 사극이 굴러가는 두 바퀴가 되고 있다. 대하사극이 처한 딜레마는 정치적으로 진지해지면 깊이를 얻지만 한편으로 어려워지고, 스펙타클로 흐르면 자극적이지만 대중성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말의 힘만을 믿었던 '대왕 세종'이 안 되고, 사극이 가진 본태적인 스펙타클의 힘을 동시에 가져가는 ‘천추태후’가 되는 이유다.

‘너는 내 운명’종영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막장드라마라고까지 불렸던 ‘너는 내 운명’이 종영했다. 종영에 즈음에 이 막장드라마의 성공방정식을 분석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개중에는 욕을 먹었어도 성공은 성공이라는 생각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저에는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불황에 즈음한 관대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너는 내 운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TV의 시청률 지상주의는 늘 있어왔던 것이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시청률만을 겨냥한 막장드라마들이 창궐한 적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설정과 캐릭터들을 극단적인 감정대립으로 몰고 가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중독시키는 이 막장드라마들은 이제 창피해하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는 실정이다. 이유는? 40%에 육박하는 시청률 때문이다. 시청률에서 성공했으니 욕을 먹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실 TV는 불황을 외친다. 불황이니까 이런 극단적인 상업적인 선택을 이해하라는 듯이.

그런데 과연 시청률이 되기에 욕먹어도 그만이고, 또 불황이어서 이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까. 시청률이란 양적인 잣대로서 TV가 시청자를 호명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즉 시청률에는 대중들 개개인의 성향이나 그 프로그램을 보는 각각의 이유 같은 질적인 판단기준은 빠져있고 그저 뭉뚱그린 수치만이 존재한다. 시청률 40%라고 얘기할 때 그것은 실로 애매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많이 봤다”는 그 수치의 의미는 “어떻게 봤다”는 의미 따위는 상쇄되어 있다.

그러니 가치판단이 빠진 이 시청률의 세계에 들어가면 욕을 먹든, 중독적이든, 자극적이든, 상관이 없다. 수치만 높으면 그만인 것이다. 수치를 높이는 방법은 간단할 수도 있고 꽤 어려울 수도 있다. 만일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가 프로그램의 질을 생각하면서 수치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오로지 양적인 수치만 높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의외로 쉽다. 욕먹는 것까지 감수한다면 사실 못할 게 없어진다.

드라마는 꽤 오랜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는 장르다. 따라서 과거 시청률에 영향을 미쳤던 공식적인 설정들을 그저 끌어오는 것만으로 일단 기본을 만들 수 있다. 그 기본 위에 좀더 극단적인 인물들 간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낸다면 시청률은 더 치솟아 오른다. 막장드라마의 기본 구조가 가족극에 복수극을 끼워 넣는 것은 이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가족극 만큼 오랜 노하우를 갖고 있는 분야는 없다. 이미 신파극에서부터 우리는 그 가족극의 성공 코드들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가족극의 ‘기본’을 만들어준다.

가족극에 붙여지는 복수극은 가족극의 상황을 극단으로 만들어내는 장치가 된다. 유치하게 보일지 몰라도 권선징악의 이야기 속에는 늘 가족과 복수가 근간을 이룬다. 가족극의 틀 속에서 남녀 간의 사랑과 배신 혹은 가족 간의 대립구도가 점차 발전해나가서 끝장까지 이르게 되면 복수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가족극과 복수극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핏줄의식이다. 따라서 이 극단적인 대립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가족 이기주의의 극단에 불과하다. 주제의식 같은 것은 애초에 없고, 오로지 시청률을 끌어 모으기 위한 클리셰들의 반복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그런데 왜 보냐구? 그게 거기 있으니까 보는 것이다. TV는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한 구석에서 틀어져 보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매체가 되었다. 그러니 왜 보냐고 묻지 말고, 왜 그게 거기 있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왜 꼭 그렇게 노골적이고 막장으로 가는 드라마가 거기 자리하고 있어 무심코 바라보던 시청자의 눈을 중독시키는가를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막장드라마가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욕하면서도 본다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그 시청률이라는 잣대가 자꾸만 아무 상관없는 시청자들까지 호명하기 때문이다. 시청률 40%를 내세워 마치 시청자들 대부분이 그것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순간, 그 시청률에 포함되는 시청자들이라는 익명의 덩어리들 속에 자신까지 갑자기 불려지는 그 불쾌한 기분. 불황이라는 말을 마치 주문처럼 읊어대며 막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그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막장드라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장차 미래의 TV를 책임질 많은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불황이니까 막장드라마도 된다고? 아니다. 막장드라마가 가진 당장의 달콤함은 계속 되어질 더 큰 불황을 가져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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