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 시대극 ‘에덴의 동쪽’, 역사왜곡보다 위험하다

‘에덴의 동쪽’의 기획의도에는 아무런 시대극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질 않는다. 거기에는 대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음과 사랑, 심지어 영혼(정말?)까지를 되찾는 휴머니즘의 이야기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들이 들어가 있다. 물론 드라마가 어떤 현실에 부재한 것을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타지가 어떤 시대를 그릴 때는 신중해져야 한다. 드라마로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은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재해석이 시대정신 자체까지 변형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60년대 사북 탄광촌에서부터 시작된 두 가족의 애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역사는 탄광업주인 신태환(조민기)과 노조위원장인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신태환의 사주로 이기철이 죽게되면서 양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의 아들이 뒤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복수극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의 한 동력이 신태환의 이기철 살해에서 비롯된다면, 그 복수극과 동시에 진행되는 화해극은 이미 시청자들이 이 철천지 원수들의 두 아들이 바뀐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 복수와 화해가 교차하는 그 운명의 쌍곡선은 이 드라마에 극적인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기획의도에도 없는 시대극에 대한 징후들이 이 두 가족의 역사 속에 무차별로 끼여든다는 점이다. 탄광촌의 노사분규와 건설회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 학생운동과 고문통치, 전투기 도입과 로비스트 이야기 등등. 그것은 풍경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무작위로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시대풍경의 꼭지점 위에는 신태환 혹은 신명훈(박해진)이 한 축을, 그리고 나머지 꼭지점 위에는 이동욱의 아들 이동철(송승헌)과 이동욱(연정훈)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대립은 마치 그 시대에 벌어졌던 대립을 표징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이 밑그림 위에 얹어진 인물들의 관계가 심상치가 않다. 먼저 이 뒤바뀌어진 아들들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는 그것이 지속되고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파국(즉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회한)을 예고하게 만든다. 이미 그 엇갈린 운명을 알고 있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대립은 안타까운 운명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등장인물들의 대립이 결국은 오해로 인한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식의 이런 스토리 구조는 그 밑그림에 깔려있는 시대의 문제 또한 너무나 간단하게 화해의 장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거기에는 시대의 아픔을 양산했던 자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혹은 법적인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적인 핏줄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 두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다. 유난히 많은 이 드라마 속 원수지간의 사랑은 이동욱과 언론재벌 대한일보 민회장의 딸인 혜린으로 이어지고, 신명훈에게 겁탈 당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그와 결혼하는 지현(한지혜)으로도 이어진다. 심지어 이동철의 여동생인 기순(전소민)은 자신을 납치한 왕건(김형민)을 오히려 살려주고 점점 가까워진다. 이들에게도 보이는 것은 원수가 저지른 사회적인 문제들(범법행위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사랑으로 그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가 연거푸 외쳐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호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 혹은 상투적인 종교적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이상한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이동철의 아버지 이기철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사나이”라고 남긴 그 애매한 말에서부터 드러난 바 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자식이나 아버지라도 응당 그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마치 그 지점에서 “그래도 핏줄인데...”하고 우리네 혈연 중심적 사고방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신태환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한다”는 그 논리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생존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시대의 아픔을 조장하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심정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때론 역사왜곡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그들을 보면 세상이 보인다

개그가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세상의 모습이 들어있기 마련. 지금 ‘개그콘서트’가 담고 있는 세상은 어떨까.

어려운 경기? 한민관이 주목받는 이유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체적으로 경기 침체에 따른 힘겨움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대포동 예술극단’은 북한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거꾸로 남한 상황을 패러디 하는 코너. ‘파리의 연인’을 패러디한 ‘공복의 연인’에서 박지선이 꼬르륵하는 소리를 내자, 남자친구로 등장하는 비쩍 마른 한민관이 “배고프면 배고프다 왜 말을 못하네?”하고 호통을 친다. 그러자 박지선이 한민관의 얼굴을 가리키며 하는 말. “어떻게 말을 합니까? 이따구 얼굴 앞에서.” 왜 북한 상황을 굳이 설정하는가 하는데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좀더 절실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제대로 다루는 코너는 단연 새롭게 등장한 ‘로열 패밀리’다.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장미희)를 패러디한 듯한 이 코너는 모두 교양 있고 어딘지 귀티가 나는 듯 행동하지만 실상은 거지인 가족을 그려내며 큰 웃음을 준다. 구걸을 하다 들어온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수박껍데기를 주며 “알맹이가 많이 붙었더라”고 하거나, 아들이 돌아와 “이제 사천식당하고는 거래를 끊어야겠습니다. 개를 키운다고 합니다”하자 아버지가 “개도 안 먹는 음식이 있을거야”라고 되받는 식이다.

이밖에도 구두닦이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담은 “그려 안 그려”, 그리고 ‘베토벤 바이러스’를 패러디한 ‘악성 바이러스’에서 강마에를 흉내낸 싼마에(김준호)가 프랑스 혁명당시 국민들의 배고픔을 표현한 곡이라며 연주 끝에 갑자기 “밥 주세요!”로 마무리하는 대목 역시 간접적으로 경기상황을 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가장 배고픔을 느낄 개그맨들이 그것을 소재로 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특기할만한 점은 이 상황에서 한민관 같은 부실한 몸의 개그맨이 이 코너들(대포동 예술극단, 로열 패밀리)에 집중 배치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허위의식 가득한 세상, 황현희가 주목받는 이유
‘개그콘서트’가 보여주는 또 하나는 허위의식이 가득한 세상이다. 물론 ‘달인’의 김병만은 일찍이 이 허위의식 가득한 세상을 몸으로 직접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주목받는 코너는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이다. 물론 여기서 황현희 PD가 딴지 거는 것들은 사실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지만, 그 형식 자체는 실제로 과장광고가 판을 치는 세태를 정면에서 꼬집는 것이다. “아무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하지만 전화하자 이름부터 물어보는 이 어처구니없는...” 황현희 PD의 황당한 진술 속에는 그러나 “실제로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묻어난다.

상조전문CF를 패러디한 ‘도움상회’는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의 한 분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 방향성이 다르다. 그것은 ‘소비자 고발’이 광고 문구 그 자체를 시비 걸고 있는 반면, ‘도움상회’는 사회의 잘못된 환부를 이 패러디된 상조CF 속으로 끌어들여 보내버리는(?) 것이 주요 컨셉트이기 때문이다. 학력위조자를 보여준 후, 등장한 박성호, 김대범은 “학력 위조하시느라 정신 없으시죠? 큰 학교 가서 별 다시는 일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부실공사를 한 사람을 보여준 후, “편안하게 때려주겠습니다. 맞은 자국 푸르게 푸르게. 집단 구타 서비스. 아무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후려 쳐드립니다.”라고 하는 식이다.

이밖에도 ‘개그콘서트’의 개그가 보여주는 현실은 소통부재로 파편화된 관계다. ‘대화가 필요해’는 대화부재의 가족을, ‘할매가 뿔났다’에서는 약자로서의 노인들이 겪는 소통부재의 상황을, ‘춘배야’와 ‘박대박’에서는 말은 많지만 소통은 되지 않는 현실을 개그로 담아낸다. ‘개그콘서트’에 유난히 패러디가 많은 것은 그만큼 세태 풍자를 이 프로그램이 많이 다루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세태는 어려운 경제상황, 허위의식 가득한 세상, 그리고 소통부재의 사회다. 이 답답한 세상을 ‘개그콘서트’처럼 진짜 한 바탕 웃음으로 날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짝귀, 드라마 ‘타짜’가 가진 선악구도를 깰 수 있을까

‘타짜’에 새롭게 투여된 짝귀(조상구)는 드라마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짝귀가 적어도 지금까지 들고있던 ‘타짜’의 패 중 가장 좋은 패라는 것은 분명하다. 먼저 드라마 ‘타짜’가 지금까지 들었던 나쁜 패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진원지는 분명한 선악구도다. 본래 ‘타짜’ 원작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선악구도를 뛰어넘는 인간욕망의 집합체로 도박을 그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도박’이 아니고 ‘타짜(도박판에서 기술로 남을 속이는 자)’인 것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그 상황을 영화는 잘 그려냈다. 주인공인 고니 못지 않게 아귀와 정 마담 같은 욕망의 화신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타짜’는 선악 자체가 불분명한 타짜의 세계에 그 선악구도를 끼워 넣는다. 그것이 드라마라는 한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은 패착이다. 평경장(임현식)과 고광열(손현주), 그리고 작두 대호(이기영)는 착한(?) 타짜이고, 아귀(김갑수)와 정마담(강성연) 그리고 영민(김민준)은 나쁜(?) 타짜다. 나쁜 타짜들이 돈에 대한 욕망으로 도박에 손을 댔다면, 평경장과 대호는 은퇴한 자이며, 고광열은 생계형 타짜이고, 고니는 복수의 방법으로서 도박에 손을 대게 되는 타짜로 그려진다.

‘타짜’가 도박의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선악 구도를 세워두면 그 결과가 뻔해진다. 결국은 선이 이기고 악은 지게 된다는 스토리가 그 구도 속에서 미리 읽혀지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에게 너무 쉽게 패가 읽히게 되는 이 구도는 긴장감을 앗아가 버리는 동시에 리얼리티마저 손상시킨다. 도박이라는 강력한 욕망 앞에는 적도 없고 아군도 없는 그런 상황이 진짜 리얼한 상황이다.

영화 ‘타짜’에서는 정 마담이 그 중간 역할을 잘 해줬다. 즉 아귀와 고니의 대결이 박빙일 때, 그 결정적인 승부의 패를 정 마담이라는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인물에게 던짐으로써 그 결과를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타짜’에서 정 마담(강성연)은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하지 못하고 있다. 영민을 사랑하는 그런 모습은, 사랑마저도 도박 설계의 한 무기로 사용하던 정 마담의 캐릭터를 약화시킨다.

반면 새롭게 등장한 짝귀는 저 스스로 고니에게 밝히듯 “적이 같은 아귀일 뿐, 절대로 자신을 믿지 말라”고 할 정도로 어떤 중간지대를 밟고 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양자 구도는 새롭게 삼자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을 만들게 된다. 마치 삼국지의 조조와 맞서기 위해 유비와 손권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그런 형국이 되는 셈이다.

짝귀가 진짜 좋은 패라는 것은 그 캐릭터가 ‘타짜’의 재미 그 이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도박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자칫 선악구도는 그 도박의 위험성 자체를 상쇄시킬 수 있다. ‘타짜’가 도박을 내세워 그 위의 욕망에 굴절된 인간군상이 가진 다양함을 그려내고 또 그를 통해 어떤 관조적인 입장까지를 담을 수 있으려면 적어도 욕망 앞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 리얼한 상황을 그려내야 한다. 선악구도가 만들어내는 영웅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다.

물론 짝귀라는 좋은 패를 가졌다고 해서 ‘타짜’가 그 판을 따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고니의 귀환을 위한 한 때의 캐릭터로 다뤄지다가 은근슬쩍 사라져버리거나 해버린다면 짝귀는 아무 것도 아닌 패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짜’는 분명 짝귀라는 좋은 패를 잡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레이스(게임진행)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버려지는 패만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토크쇼에서 퇴조한 독설, 무대개그로 옮겨가는 이유

한때 토크쇼의 대세처럼 보였던 독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경규의 버럭이 사라진 지는 오래고 박명수의 호통은 기력 빠진 아버지의 지청구처럼 힘이 빠진 지 오래다. 독설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았던 김구라는 잇단 사과방송을 통해 유한 이미지를 또한 획득했다. ‘라디오스타’같은 프로그램에서 김구라는 번번이 신정환에게 당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이른바 독설에 균형을 잡아갔다. 그의 독설은 과거의 그것처럼 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독설은 토크쇼가 아닌 무대개그에서 번창(?)하고 있다. 무대개그에서 왕비호(윤형빈)는 자타가 공인하는 현재의 독설가로 자리잡았다. 비슷한 유형으로 세 명이 나와 번갈아 가며 서로가 독하다고 과시하는 ‘독한 놈들’은 왕비호의 그 성공전략에 영향을 받은 코너다. 한편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은 이 독설을 연예계가 아닌 타 분야로 넓힌 사례다.

이처럼 독설이 토크쇼에서 점차 사라지고 무대개그 속으로 편입되는 이유는 무얼까. 그 해답은 왕비호의 그 특유한 의상에서 찾아질 수 있다. 딱 붙는 반팔 쫄티에 핫팬츠를 입고 등장하는 왕비호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연기하는 캐릭터다. 즉 왕비호의 독설은 일상의 리얼한 토크 속에서 우연히 던져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짜여진 틀 속에서 준비되어진 독설이다.

대본으로 준비된 독설에 사적인 감정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물론 다른 토크쇼 속에서도 김구라 같은 독설가가 사적인 감정을 실어 독설을 퍼부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리얼 토크쇼의 형식상 그의 독설은 사적인 감정까지도 리얼로 포장되곤 한다. 반면 무대개그 속에서의 왕비호는 이 사적 감정을 배제할 수 있는 안전막을 여러 겹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무대, 비일상적인 의상, 분장 같은 것이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독설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웃음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권위적인 것이 독설로 인해 유쾌하게 해체됐을 때, 그 이완감 속에서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 독설이 웃음의 목적을 넘어서서 실제로 타인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게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무대를 넘어서서 현실까지 영향을 주는 개그 프로그램의 독설은 웃음이 아닌 불쾌감을 주게 된다.

방송에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독설은 토크쇼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는 그 독설을 받아들일 만큼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경기침체로 인해(이것은 연예계도 마찬가지다) 그런 여유는 사라져버렸다. 여유 있는 자에게 날리는 독설은 그 자체가 관심의 표현으로 변모할 수 있지만, 여유조차 없는 자에게 던져지는 독설은 그 자체가 칼날이 된다. 왕비호가 톱스타들만 그 독설의 도마 위에 올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왕비호의 독설에는 정해진 룰이 있다. 그 독설은 그 틀 속에서 대중들과 웃음을 나누기 위한 어떤 게임일 뿐,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 독설은 아니다. 한번 웃고 나면 그뿐, 앙금이 남지 않는 독설. 그것은 어쩌면 이제 더 이상 독설이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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