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천’의 고전이 시사하는 것

‘중천’이 제작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여된 데다, 아시아급 스타인 정우성, 김태희가 주연을 맡은 점, 게다가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했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배급망까지 확보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살짝 공개된 CG를 통해 우리는 또 한번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이건 ‘반지의 제왕’급 CG가 붙었으니 이제 이 ‘중천’이란 호랑이는 날개를 단 격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국내는 물론이고 아시아 시장을 노려볼 만 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고 몇 주가 지난 상황에서 ‘중천’의 성적표는 참담하다. 현재 약 150만∼170만 관객정도를 확보한 상태고 최종관객수가 200만을 전후할 거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400만 정도가 들어야 맞출 수 있는 손익분기도 넘기기 어렵다는 결과가 나온다. 무엇이 이 완벽한 조건의 영화를 고전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을까. 그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면 한류의 바람을 타고 만들어지는 우리네 블록버스터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영화는 CG가 아니다
우리네 CG기술은 이제 더 이상 헐리우드의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그 증거물은 다름 아닌 ‘중천’이다. CG기술의 핵심인 캐릭터 모델링에서부터 동작을 연출하는 애니메이션 기술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CG를 실사와 합성하는 기술이 진일보함으로써 이제는 너무 CG기술에 매달릴 필요가 없게되었다. 과거에는 CG 자체의 성공이 작품 성공의 관건이 되었다면, 그것은 이제 영화나 게임 등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CG가 멋지다고 해서 흥행이 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상황이 아니다. 최근의 헐리우드 액션은 와이어 액션보다 리얼 액션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 최근 개봉된 ‘007 카지노로얄’이 007 본연의 캐릭터인 신종무기를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몸 하나로 액션을 보여주는 것은 최근의 트렌드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만들어진 액션보다는 이제 실제 액션을 봐야 리얼하게 다가오는 세상이다. 아무리 정우성이 저 하늘 꼭대기에서 내동댕이쳐져 바닥에 착지하는 장면이 실사에서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CG로 만든 정우성이 그걸 대역한다 하더라도 이제 영화의 관건은 그런 CG가 아니다. CG는 이제 영화의 한 기술일 뿐,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상업영화에서는 내러티브의 힘이 관건이다
영화의 성공 여부는 오히려 고전적인 조건들로 돌아가게 된다. 내러티브의 힘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중천’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내러티브를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스토리 구축에 있어서 저 CG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았던 데 있다. ‘반지의 제왕’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CG를 통해 고작 하고자 하는 스토리가 멜로라면 이건 기획의 실패일 수도 있다. CG에 열광하는 층이 어쩌면 가장 흥미를 느끼지 못할 스토리가 바로 구태의연한 멜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트릭스적인 상상력을 스토리 속에 더 쏟아 넣었다면 ‘중천’은 동양적 혹은 불교적인 철학관을 매트릭스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불교가 말하는 연기설과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이야기가 맞물렸다면 이 이야기는 좀더 보편적인 공감의 틀을 만들어 아시아만이 아닌 전 세계를 시장으로 구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단지 눈물을 쏟아내는 ‘은행나무 침대’식의 이야기들은 캐릭터들이 가질 수 있었던 매력을 없애버린 결과를 낳았다. 스토리는 단지 이야기의 재미만이 아니라 캐릭터들의 힘까지도 만들어준다. 따라서 캐릭터의 실패는 제 아무리 훌륭한 연기자가 끼어 든다고 해도 복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타마케팅만으론 안 된다
‘한류 위기설’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스타마케팅이 갖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누가 봐도 간판급 한류스타인 정우성과 김태희의 출연은 아시아 전체에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놓았겠지만, 영화를 본 실망감이 주는 부메랑 효과는 너무나 가혹하다. 기대감만큼의 무게로 그 타격은 한류 전체가 입게 되는 것이다. 몇몇 스타를 캐스팅하면 무조건 된다는 사고방식은 우리네 ‘묻지마 투자’를 닮아 있지만 이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먹히지 않는 방식이다.

스타에 너무 주력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스타의 몸값을 높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여타 제작비의 여력이 줄어든다. 이것은 결국 영화의 부실을 낳게 된다. 부실한 영화를 스타 몇 명이 채워줄 수 있다는 건 이제 환상이다. 스타보다는 작품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감독, 작가와 스토리 발굴, 영화 스텝들의 처우개선 등이 결과적으로는 더 성공에 가깝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배급, 마케팅도 작품이 있고 나서 얘기다
‘괴물’이 괴물 같은 관객수를 갱신하며 성공가도를 달릴 때 비판으로 제기된 것이 배급과 마케팅의 문제다. 영화적 질보다는 전국 영화관을 장악한 배급망과 수치를 갖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케팅이 그 성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것도 결국 ‘괴물’이라는 작품이 있고 나서의 얘기다. ‘괴물’은 그만한 흥행력을 담지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CJ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한 ‘중천’이 전국망의 배급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원인은 바로 그 작품에 있다. CG에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영화로서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를 아무리 밥상 위에 자꾸 올린다고 해도 쉬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블록버스터급 배급이 가능하다 해도 결국 작품이 없다면 성공은 요원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 마케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중천’의 고전이 시사하는 것은 이제 영화의 외형적인 것들(스타, CG, 배급, 마케팅 등등)에 대한 투자보다는 좀더 영화 자체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런 식으로도 읽힌다. 영화의 외형은 이제 충분히 성숙되어 있어서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잠시 외형에 들떠 잔뜩 폼을 잡고 있던 우리네 영화가 이제 좀더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를 저 ‘중천’은 말해주고 있다.

90일간, 사랑과 욕망의 사중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하는 그녀를 가슴에만 묻어놓고 멀쩡히 결혼해 살다가 갑자기 살 수 있는 날이 90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는다면. 그녀와 함께 해야 행복할 것 같은 남은 마지막 날들을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찾아와 이제 90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뒤늦게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나 헌신적인 남편이 옆에서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진짜 사랑을 찾아갈 것인가.

어느 날 자신과 함께 살아온 아내 혹은 남편의 사랑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그 혹은 그녀를 보내줄 것인가. ‘90일 사랑할 시간(이하 구사시)’은 사랑하며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행복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드라마다.

현지석, 90일 남은 남자의 선택
현지석(강지환 분)은 췌장암 말기 판정에 즈음해 고미연(김하늘 분)을 떠올린다. 죽음 앞에 당당할 인간이 어디 있을까. 그는 90일을 고미연과 함께욕망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그 90일의 삶 속에 끌어들인다. 죽음 앞에서 현지석은 세상의 모든 윤리와 금기를 넘어선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달려가는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해준 현실들(아내와 아이는 물론이고 고미연과 그녀의 남편)이 모두 흔들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마치 불나방이 불을 찾아들 듯 사랑 속으로 몸을 던진다.

만일 그의 선택이 그저 멀리서 고미연을 쳐다보고 그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저 혼자만 태우는 것이었다면 ‘구사시’의 드라마는 이처럼 강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의 극적 구성상 현지석의 선택은 당연한 것.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 과정과 끝을 목도한다. 결국 죽어 없어지는 그 끝을 보면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욕망은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저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남은 사람들을 모두 거친 격랑 속으로 끌어들인 자신의 선택은 옳았던 것일까.

고미연,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의 선택
고미연은 너무나 ‘착하고 헌신적인’ 남편, 김태훈(윤희석 분)의 모습에 화가 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자꾸만 이 남편이 아닌 90일 남은 남자, 현지석에게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90일 후면 사라질 그’라는 절박감과 애절함이 그녀를 자꾸 그에게로 욕망하게 만든다. 그런데 모든 걸 이해해주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남편 김태훈은 그녀의 선택을 힘들게 만드는 존재다. 심지어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그 남자에게 보내주는 김태훈에게서 고미연은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만일 그녀의 선택이 죽어가는 그에 대한 연정이 아닌, 현실적인 사랑이었다면 어땠을까. 운명적인 사랑이란 나이가 들면서 차차 현실적인 사랑으로 변모하기 마련. 멀어서 환타지가 되고 마는 운명보다는, 차곡차곡 삶의 관계들을 쌓아 가는 사랑을 선택했다면 그를 보내고 자신도 차로 뛰어드는 그런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욕망이 다 타고나서 결국 제 자리로 온 것이 아닌가. 그녀는 왜 그다지도 어려운 선택을 했던 것일까. 혹시 그건 사랑이 아닌 연민이나 욕망 같은 건 아니었을까.

박정란과 김태훈, 반려자의 행복을 위한 선택
이 마지막 90일의 시간 속에서 갑작스레 불타올라 타오르는 남녀의 뒤안길에 남은 박정란(정혜영 분)과 김태훈의 욕망은 애증에서부터 비롯된다. 자신의 사랑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됐을 때, 그들은 미움과 함께 더 활활 타오르는 욕망을 갖게 된다. 보내줘야 할 것인가, 잡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잔인한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들도 보내줘야 할, 혹은 잡아야할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내주자니 욕망이 그걸 막고, 잡자니 반려자의 행복을 꺾는다는 죄책감이 그걸 막는다. 그래서 보내줬다가도 다시 잡고, 잡다가도 다시 보내주는 그들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끝에서 다시 질문을 던지는 ‘구사시’
90일 이라는 시간의 용광로 속에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을 덩어리째 집어넣고 시종일관 불을 지핀 ‘구사시’는 바로 이 ‘선택’에 대한 드라마다. 불륜과 불치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구사시’가 신파가 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선택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 때문이다. 마지막에 가서 현지석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드라마를 이어가는 장면들은, 죽음을 끝으로 눈물바다를 만들며 끝나는 그런 드라마와 ‘구사시’가 다르다는 점을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이 욕망의 사중주의 핵심에 있던 현지석이 죽음으로써 그 욕망은 끝을 보게되지만, 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그 욕망을 이어보려고 한다. 이미 죽은 현지석이 그들에게 하나하나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장면은 물론 남은 자들 스스로가 만든 욕망과의 화해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장면들을 보면서 시청자들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그 사랑과 슬픔과 고통과 행복이 하나의 삶의 과정이라는 관조적 시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가 끝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욕망하는가, 사랑하는가.

사극의 그림자 악역, 그들에게 박수를

드라마의 반은 그 몫이 악역이다. 드라마라는 갈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악독한 인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적을 두고 무슨 재미로 드라마를 볼까. 특히 대결구도가 관건이 되는 사극엔 화끈하게 욕먹고 확실하게 힘을 만들어주는 악역이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주인공만큼 사극을 장악해나가는 소문난 악역이 있으니, KBS ‘대조영’에서 신홍 역할을 맡고 있는 김규철과, MBC ‘주몽’에서 금와왕의 부인, 원후 역할을 맡고 있는 견미리다. 이 관록의 연기파 배우들은 공교롭게도 과거 ‘불멸의 이순신’과 ‘대장금’에서 확실한 악역을 소화해낸 바 있다.

몸을 아끼지 않는 명연기, 김규철
연극무대를 고집했던 그의 연기는 애초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서편제’에서 오정해와 공동주연을 했던 것 이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4년부터 드디어 ‘불멸의 이순신’과 ‘부활’로 악역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악역 연기는 음모에 능한 모사꾼. 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배신을 일삼는 그의 연기에 걸려들면 제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욕이 나올 정도로 뿜어내는 카리스마가 강하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임천수 역할로 분한 그는 청소년기를 이순신과 함께 보내던 선량한 역할에서부터 아비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결국 이순신을 배신하는 역할까지 소화해낸다. ‘대조영’의 신홍 역할 역시 희대의 간웅이자 매국노. 신홍은 부모가 적진에 잡혀있는 부지광을 회유해 요동성의 문을 열게 하는 인물로 시작해, 지금은 연남생의 책사로 역시 당나라와 연남생을 손잡게 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향후에는 부씨 집안의 장자인 이해고를 도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대조영을 괴롭힐 작정이다.

그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2005년 KBS 수목 드라마 ‘부활’에서 악역, 최동찬 역을 소화해내며 악역도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사고로 골절 수술을 받았지만 끝까지 휠체어 연기 투혼을 펼치며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킨 그에게 시청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표독 연기 물오른 견미리
견미리의 악역 이미지는 대개가 ‘대장금’ 최상궁에서 나온 것. 수랏간 최고상궁을 두고 한상궁, 대장금과 벌이는 대결구도에서 확실한 악역을 선사했다. ‘대장금’의 힘은 온전히 견미리가 펼친 표독스런 악역이 반이라 할 정도로, 그녀는 출세에 대한 무서운 집념을 가진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최상궁 역을 확실하게 소화해냈다.

최근 ‘주몽’에서 활약하고 있는 견미리는 궁궐 내에서 자식을 앞에 둔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주몽’이 좀체 부여를 벗어나 나라 건국에 일찍이 앞장서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식들을 앞세운 원후 역의 견미리와 유화부인 역의 오연수의 대결이 볼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악역은 대개가 ‘자기 사람’을 성공시키려는 욕망에서부터 비롯된다. ‘대장금’에서 금영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면 ‘주몽’에서는 자식 대소와 영포를 앞세운다. ‘주몽’에서 다른 점은 금와의 유화부인에 대한 사랑을 보며 살아온 질투심과 자식에 대한 모성애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스타’가 아닌 ‘연기자’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제 중견 탤런트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는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녀의 연기 결은 폭이 넓다. 하지만 이 어쩔 수 없는 악역의 매력은 그 중 백미가 아닐까.

사극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보다 칼에 맞고 쓰러지는 사람이 더 잘해야 한다고 한다. 늘 빛만 보다 보면 그 빛이 사실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깜박 잊는 경우가 많다. 김규철이나 견미리 같은 드라마 깊숙이 그림자를 만들어 빛을 강조해 주는 악역들이 없다면 사극은 결코 빛날 수 없다. 그들에게 박수를.

공개개그삼국지, 마빡이, ‘왕의 남자’

‘왕의 남자’의 장생과 공길이 가진 것이라고는 멀쩡한 사지와 세 치 혀였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사람들에게 그 몸을 놀려 즐거움을 주고, 세 치 혀를 놀려 웃기는 일이었다. 이 시대의 개그맨들은 장생과 공길이 그랬던 것 같은 다양한 기예와 놀라운 순발력을 가져야만 살아남는다. 그들이 저 살 판과 죽을 판을 가르는 줄 위에서 한 판 걸판지게 놀았다면, 이 시대 개그맨들은 공개무대라는 칼날 위에서 편집과 벌이는 ‘몇 분 간의 승부’를 벌인다.

공개개그삼국지
KBS ‘개그콘서트’에 이어,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MBC의 ‘개그야’가 등장하면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은 안정적인 ‘공개개그삼국지’의 형세로 들어간다. 그 바탕은 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재인들이 웃지 않는 왕(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 왕의 마당에서 벌이는 연희처럼, 끝없는 경쟁과 아이디어의 결과였다. 이른바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하는 이 시스템 속에서 당연히 시청률은 상승했다.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개그맨의 단명. 캐릭터라는 탈을 만들어야 하는 개그맨들에게 있어 그 탈의 유통기간이 줄어들었다는 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어쨌거나 장생과 공길처럼 ‘라스트 맨 스탠딩’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사람에게는 갈채가 집중된다. 대중이라는 지엄한 왕 앞에서 개그맨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마빡이다.

마빡이가 말해주는 개그현실
요즘의 개그가 점점 기예의 모습을 띈다는 점에서 그것은 저 조선시대 남사당패들의 연희를 닮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죽을 판에도 뛰어드는 것이다. 개그 무대 위에서는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무인들처럼 몸을 날리는 액션은 물론이고, 온 몸에 물을 끼얹고 크림에 범벅을 하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기도 한다. 마빡이는 가장 단순하게 현재 개그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여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보는 듯하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이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줄 위라는 죽을 수도 있는 현실의 무거움 위에 올라선 장생과 공길이(현대인들) 오히려 그 줄의 탄성을 이용해 하늘로 치고 오르는 것. 마빡이는 개그맨의 현실을 오히려 이용해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얻고 있었다.

무대개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들
아무리 그 정점에 오른 장생과 공길이라 하더라도, 결국 연희가 끝나면 무대 밑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 이것이 무대개그가 가진 한계이다. 몇 분 간의 승부가 끝나면 그 힘으로 한 주를 이어가고, 이것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쉬 사라져버리는 것 말이다. 따라서 무대 밖으로 개그를 옮기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웃음충전소’는 스튜디오와 현장을 오가며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웃음을 잡아낸다. 패러디에 기반한 이 프로그램은 일상을 패러디하고(막무가내중창단), 전원드라마를 패러디하며(지친다 지쳐), 고발프로그램을 패러디하고(진실이 알고싶다), 오락프로그램을 패러디한다(계층공감 올드&형님).

하지만 여전히 무대개그의 경쟁형식에 시청자들은 익숙한 것 같다. 웃음충전소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타짱’은 영화 ‘타짜’의 형식을 빌어 몸 개그 대전을 벌이는 코너로 기반은 바로 이 대결구도에 있다. 또한 그 대전 형식의 밑바탕에는 여전히 마빡이의 유령이 떠다닌다. ‘웃기면 이기고 웃으면 진다’는 이 개그맨의 숙명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순위 1위를 꼽는 ‘타짱’이지만, 실제 ‘웃음충전소’의 시청률이 많이 오르지 않는 것은 역시나 무대개그의 경쟁형식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골라보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장생과 공길’이 저 몸뚱어리 하나로 왕의 눈과 귀를 먹게 했듯이 우리네 개그맨들 역시 올 한해 열심히 몸을 놀려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몸 개그가 대세인 세상, 어찌 그 몸짓이 슬프지 않을까. 각종 시상식에서 그제야 눈물을 흘리는 개그맨들을 보면서 그들의 슬픈 몸짓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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