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가수들, ‘미녀는 괴로워’, ‘라디오 스타’

가요계는 올해도 역시 장기불황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연초부터 립싱크니 표절이니, 퍼포먼스니 하는 단어들이 부쩍 많이 들렸고, 급기야 우리네 음악계의 거장이라는 전영혁, 신중현씨의 쓴소리가 떨어졌다. 전영혁씨는 “가수는 노래하고, 댄서는 춤추고, DJ는 음반을 틀면 된다”고 했고, 신중현씨는 “무대에 노래하러 나온 거냐 뛰어다니러 나온거냐”고 했다. ‘라디오 스타’의 최곤 같은 노래하는 가수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중심에는 노래가 아닌, 외모, 춤, 재담으로 기획된 ‘비디오 스타’들이 날치는 데 대한 쓴 소리다.

얼굴 없는 가수들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우리네 외모지상주의의 한 단면을 건드린 영화. 그런데 그 언저리에서 함께 걸려드는 논란거리가 있으니 바로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판치는 가요계의 문제들이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보여주는 음반계 립싱크와 대리가수는 종종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과거 사이버가수들의 립싱크는 때론 실제 가수들에게도 코러스라는 형태로 행해지곤 했다. 이로써 ‘노래하는 가수’보다 ‘춤을 추거나 개그를 하는’ 가수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일단 시제품이 나와 히트를 치면, 대량생산되는 것이 시장의 논리. 가창력이나, 좋은 노래를 가진 가수들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던 가요계에 기획사들의 바람이 일었다. 기획사들은 모든 것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상품을 고르듯, 가수를 골라내고(어떨 때는 조합을 하기도 한다), 노래를 붙이고, 댄스를 붙여서 음반을 찍어냈다. 가수의 노래도 중요했지만 거기에 곁들여진 댄스와 무엇보다도 잘 생긴 외모가 더 중요했다. 그러자 기획사들은 얼굴과 춤을 먼저 보았다. 노래는 점점 그 다음 문제가 되었다. 노래는 몇 달간의 합숙과 연습, 그것도 안되면 녹음 과정에서 코러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됐다.

얼굴만 있는 가수들의 딜레마
얼굴만 있는 가수들 뒤에는 당연히 얼굴 없는 가수들이 있게 마련. 그들은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가 그랬던 것 같은 심적인 괴로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가수로서의 상품성이 떨어지는 경우, 선택해야 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가수들은 음반이 팔리지 않는다고 해서 음반작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 상품이었던 가수들은 음반이 팔리진 않는다는 건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가 잠적한 사이, 얼굴만 있는 가수, 아미가 음반작업 대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모습은 우리네 가요계를 보는 것만 같다. 가수들이 무대가 아닌 각종 예능프로그램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음반시장이 불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토요일, 일요일 저녁만 되면 수많은 이름 모를 가수들이 시청자들을 웃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장기자랑 하듯이 노래와 춤을 홍보한다. 가끔씩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탤런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지경이니 노래는 더더욱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가수로서 얻은 이미지를 그나마 살리기 위해 가수 이외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 아니면 그렇게라도 홍보를 해야한다는 것. 이것이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처한 딜레마다.

위기의 기요계, 라디오 스타들은 어디 있나
간단한 이야기지만 가수들은 노래를 할 때 가수다. 가수들이 노래를 하지 않고 연기를 하고, 개그를 할 때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러나 요즘은 이 간단한 이야기가 간단치만은 않은 상황이다. MBC 생방송 100분 토론에서 제기된 ‘위기의 가요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디지털 음원이 그 문제의 바탕을 제공했고, 여기에 가수들의 엔터테이너화는 노래의 쇠퇴, 음악영역의 획일화 등으로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런 총체적인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대중음악의 질적 하락, 그로 인한 시장 침체가 반복되었다.

가수 탓, 디지털 음원을 갖고 있는 이동통신사, 유통사 탓, 상업적으로만 무장한 제작자 탓하며 ‘누구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저 ‘라디오 스타’의 최곤이 TV에서 밀려나고, 중심에서 밀려나, 저 변방의 라디오 진행자로 생활해야 하는 환경이다. 아무리 음반계가 불황이라고 해도 가수들이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너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순위 프로그램은 공정성과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라 가수 홍보 프로그램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노래보다는 볼거리에 더 집중되는 것도 문제다. 가수들은 오히려 연예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가 아닌 입담으로 승부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라이브 형식의 가요 프로그램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순위 프로그램과 달리 이 프로그램들은 철저히 ‘노래하는 가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성공작으로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KBS2 TV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될 것이다. 가수들의 열창과 거기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관객들이 만들어가는 이러한 라이브 프로그램들은 실제로 음악을 음악으로 온전히 돌려주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가요계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순위 프로그램이 아닌 순수 라이브형 가요 프로그램이다. 문제는 시간대. 대부분의 이들 라이브 무대는 새벽에 열린다. 이 시간대를 저녁시간대 정도로 당길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시간대라도 변방에서 노래 하나 붙잡고 살아가는 ‘라디오 스타들’이 대거 귀환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강안남자, 마시멜로 논란 그리고 ‘음란서생’

올해 출판계에도 여전히 선정성 논란이 일었다. 그 바람은 바로 저 문화일보에 연재되었던 이원호 작 ‘강안남자’다. ‘밤의 대통령’, ‘황제의 꿈’으로 대표적인 주먹작가(주먹 세계를 그려낸 활극 소설 작가)로 유명한 이원호라는 대중작가는 이 작품 하나로 ‘음란서생’의 반열에 올랐다. 무려 3백만 부가 팔린 ‘밤의 대통령’으로 이 작가는 삶이 권태로웠던 것일까. ‘음란서생’의 윤서(한석규 분)처럼 어느 날 문득 저잣거리 유기전에서 일생 처음 보는 난잡한 책을 접했던 것일까. 그가 쓴 ‘강안남자’는 순식간에 음란물 논란으로 전국을 강타한다. 급기야는 청와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음란성을 빌미로 구독신문 80여부를 절독한 것이다.

음란도 정치를 만나면 살아난다
추월색이란 필명으로 이름을 떨친 윤서가 구중궁궐 속, 왕의 총애를 받는 정빈을 움직이게 하고 대노한 왕이 윤서를 잡아들여 물고를 내는 것과 너무나 유사한 풍경이다. 하지만 ‘강안남자’ 이원호는 강한 남자였으니, 오히려 ‘청와대가 너무 소심한 거 아니냐’고 말한다. 정치공방으로 비화한 이 문제의 틈바구니에서 이원호는 원하든 원치 않든 결과적으로 보수언론들의 지원을 받게되었다. 그의 당당함 뒤에는 ‘언론탄압’이라는 방패막이 있었던 것. 같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아무런 방패막이 없는 마광수 교수가 틈만 나면 동네북으로 거론되는 것과는 사뭇 상반된 이야기다.

그런데 올해 출판계의 진짜 음란한 이야기는 ‘강안남자’보다는 ‘마시멜로 이야기’로 촉발된 대리번역, 대필 문제일 것이다. 정지영 아나운서는 이 문제로 거의 현업을 포기해야 했다. 장안 아녀자들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 추월색의 ‘흑곡비사’에 방방 뜨는 황가(오달수 분)는 저 베스트셀러에 목매다는 출판계를 닮았다. 올해는 유난히 음란한 정보들(짜깁기한 정보)을 음란한 방법(대필 혹은 대리번역)으로 만들어 음란한 유통(사재기 전문 알바생 동원)을 해온 출판계에 대한 비판이 많았던 해였다.

베스트셀러에 올인하는 출판계
이것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 방송인 겸 화가인 한젬마씨가 현재 도마 위에 올라있다. 베스트셀러 10위 권에 진입한 작품들 중 6∼7권은 대필기획 작품들이란 말이 나올 정도니 출판된 책들의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 저 흑곡비사에 매료되어 추월색이 누구일까 상상하는 아낙네들처럼 궁금하기만 하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의 영향으로 글쓰기의 변화가 초래되었다는 점이다. 저 ‘흑곡비사’에 달라붙는 댓글들처럼 이제 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들이 바로바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인터넷을 통해 검증이된 아이템을 책으로 묶는 이른바 ‘블로그 출판’이라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모든 문제들이 결국 ‘책=상품’이란 인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책의 주체가 사라지게 되고 상품처럼 유통되는 책에는 저자개념이 희미해지게 된다. 출판계의 침몰은 당연한 결과로 예상될 수 있다. 저 베스트셀러에 몸달아 결국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는 윤서처럼 말이다.

스크린쿼터, ‘흡혈형사 나도열’ 그리고 ‘괴물’

올초 영화계를 뒤흔들었던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스크린쿼터 축소. 그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미국산 수퍼 히어로들이 극장가를 공격했다. 그 장본인은 ‘미션 임파서블3’, ‘다빈치 코드’, ‘엑스맨3’, ‘수퍼맨 리턴즈’다. 그 틈바구니에 우리네 왜소한 히어로, ‘흡혈형사 나도열’이 끼어 있었다. 이 상징적인 장면은 저 박민규의 소설, ‘지구영웅전설’에서 수퍼히어로들 사이에서 ‘시다바리’ 역이라도 하며 히어로를 꿈꾸는 우리네 주인공을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팠다. 그것은 또한 스크린쿼터 축소에 즈음하여 저 덩치 큰 헐리우드 영화 틈바구니에서 가냘프게 서 있는 우리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열 받아야 변신하는 나도열처럼
‘흡혈형사 나도열’은 열 받아야 비로소 변신한다. 우스꽝스럽지만 심지어 PMP에 저장된 포르노를 봐야만 하는 히어로란 처절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결과물이야 좀 떨어지더라도 나도열의 본래 원대한 전략은 스스로 무너져 헐리우드를 대변하는 수퍼히어로라는 허상을 깨는 데 있었다. 홀홀 단신으로 사실 저 세계와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크린 쿼터 일수가 축소되고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일제히 융단폭격을 준비하던 시기, 나도열이 그 영화판에 알몸으로 서 있었듯이, 거리에는 영화인들의 1인 시위가 잇따랐다.

하지만 1인 시위는 ‘흡혈형사 나도열’이 그랬던 것처럼, 온몸으로 비판에 나섰지만 정작 관객은 별로 없었다. ‘열 받아야 그제서야 힘을 쓰는’ 나도열처럼, 우리네 정서는 아직 열을 받지 않았다. 올 초부터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 기록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의 제 밥 그릇 찾기라는 오명이 씌워지면서 그나마 스크린 쿼터 축소발표로 받은 열은 쉬 식어버렸다. 그 서서히 사라지는 열기 속에서 미8군에 의해 무단 방류된 포름알데히드를 먹고 ‘괴물’은 조금씩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영화계 재난에 대응하는 자세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알레고리를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수많은 해석이 가능해졌다. 대체로 재난에 해당하는 키워드를 괴물에 대입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를 보면 영화는 그렇게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 그럼 괴물에 우리네 영화계의 재난으로서 스크린 쿼터라는 키워드를 대입해보자. 갑자기 백주 대낮에 나타난 이 스크린 쿼터라는 괴물에 대해 정부는 무관심하다. 오히려 그걸 보고 그 위험을 실감한 사람들은 격리된다. 여기에 우리네 강두 가족이 괴물과 맞선다. 다행스럽게도(?) 괴물을 죽이지만 우리도 현서를 잃는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올 한해 우리네 영화가 가졌던 위기감과 그걸 헤치고 나올 수 있는 방법론을 모두 제시한다. 괴물 같은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하지만 분명히 있는) 우리네 영화의 위기감을 향해 저 나도열처럼 1인 시위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것. 대신 우리 식의 전략을 가지고 우리 식의 블록버스터(?)를 하나하나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결국 저 수퍼히어로들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올 한 해 우리 영화의 성적표는 위기감이 무색할 정도로 좋다. 하지만 11월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다. 우리 영화의 해외수출량이 떨어진 건 상반기에서부터 드러난 징후지만, 지금은 우리 영화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이미 괴물은 죽었는데 뭐가 걱정이냐 하겠지만, 저 영화 속 강두가 야밤에 어둠을 향해 긴장하듯, 여전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괴물에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찾아낸 현대적인 여성상, 황진이라는 시의적절한 소재, 칼 없이도 빛나는 카리스마, 가장 한국적인 풍경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영상미,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잔뜩 잡아끌었던 치열한 대결구도와 멜로라인. ‘황진이’, 종방에 즈음해 떠오르는 문구들이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과했던 탓일까. 아쉬움 또한 많이 남는 것이 사실. 마지막 주 방영된 2회분에 이르러 무언가 허전함이 남는 건 왜일까.

사랑의 길vs인간의 길 - 멜로vs성장
24부작.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황진이’의 애초 기획의도를 보면 최종적인 목표로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사랑할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고통받았으며, 잠시 사랑을 얻어 지리한 장마 끝에 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듯 삶의 희열을 맛보았을 황진이. 오늘 그녀의 삶과 만나 ‘사랑의 길’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길’을 보고자 한다. ”

여기서 ‘사랑의 길’이란 다름 아닌 드라마 내내 지속된 멜로라인이다. 은호도령, 김정한, 벽계수 그리고 호위무사 이생까지 이 드라마의 골격을 이룬 것은 이들의 밀고당기는 사랑에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녀 황진이가 예인 황진이를 거쳐 인간 황진이가 되는 성장드라마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황진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인 것은 이 멜로드라마와 성장드라마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있다. 기녀로서의 멜로가 예인의 예술로 승화되고 그러면서 황진이를 성장시킨다는 그 구조가 매력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드라마 속 황진이에서 인간 황진이를 발견한 것은 후반부 몇 회분에 있어서였다. 그것은 마지막 2회분에서 드디어 서화담을 만나며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다. 사실 황진이가 걸어갈 ‘인간의 길’은 마지막회에서 그녀가 서화담 앞에 앉아 나레이션으로 읊조리듯이,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황진이’의 아쉬움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멜로에 너무 많은 힘을 배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쟁사극보다 더 많은 사상자들(?)
드라마 ‘황진이’의 정서는 눈물이다. 그녀의 삶 자체가 기구한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은호도령의 죽음부터 비롯된 눈물바다는 동기 기녀인 섬섬이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황진이의 스승인 백무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혼절지경에 달했다. 게다가 김정한은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려서야 살아났고, 마지막회에서는 황진이의 어

머니인 현금의 죽음으로 눈물을 이어갔다. 중요한 인물들의 죽음으로 치면 전쟁사극보다 더 많은 인물들이 죽은 셈이다. 그 죽음은 모두 황진이의 눈물로 이어졌다. 그녀는 꽤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 셈.

그러나 그렇다고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게 눈물만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사실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해도, 겉으로는 예술의 힘으로 그걸 깨치고 일어난 한 예인, 큰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황진이’는 분명 ‘웰 메이드 사극’의 가능성을 가졌지만, 너무 멜로드라마의 눈물쪽으로 흐르면서 그 힘이 약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황진이’에 힘을 부여한 것은 눈물보다는 경연장에서 보여준 그녀의 카리스마가 아니었을까.

너무 울어서 더 이상 울 수만은 없다
끝나기 마지막 몇 개의 시퀀스들은 이 드라마가 보여준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현금의 죽음은 사실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그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다만 경연장의 팽팽한 대결이 무난하게 해결되면서 자칫 벌어질 수 있는 허전한 결말(박수치며 끝나는)을 막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현금의 죽음은 예인으로서의 성공으로 끝나버릴 ‘황진이’가 다시 슬픔에 젖어 서경덕을 찾게 하려 의도했다는 혐의가 짙다. 그리고 황진이는 ‘울기 위해’ 찾아간 서경덕 앞에서 ‘울 수만은 없다’는 그 마지막 대사를 읊게된다.

‘황진이’ 스스로도 이 드라마의 정조를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울지 않는 황진이’의 모습이 아쉽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저자거리에서 활짝 웃으며 서민들과 춤을 추는 황진이의 모습이다. 마지막 한 장면에서야 겨우 기녀에서 예인을 거쳐 성장한 인간 황진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현금의 죽음이 울던 그녀를 웃게 한 사건이 되었을까. 그건 분명 아니다. 사실은 어머니의 죽음과 저자거리의 ‘황진이’ 사이에는 엄청난 축약이 들어있다. 멜로에 들어갔던 많은 시퀀스들을 줄였다면 그 축약 속에서 비로소 저 물을 먹고 활짝 피어나는 찻잔 속의 꽃처럼, 웃는 인간 황진이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멜로 때문에 축약되어버린 많은 이야기들의 가능성들이 못내 아쉬운 것은 그만큼 이드라마가 많은 기대를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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