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호, 군 복무의 좋은 예로 남은 까닭

 

“19개월 동안 군 생활 하면서 많이 배우고 추억도 쌓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생각을 정리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전역을 하며 다시 팬들 앞에 선 유승호는 그간의 군 생활에 대해 이렇게 짤막한 소감을 전했다. 거기에는 마치 모든 장병들이 다 하는 그 의무를 담담히 치러낸 건실한 청년의 의연함이 엿보였다.

 

'유승호(사진출처:대한민국육군SNS)'

하지만 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치러낸 유승호의 군 복무 소식은 대중들에게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연예인들의 군 복무와 관련된 소식들이 나올 때마다 나왔던 이야기들은 부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군 기피, 기강 해이 같은 이야기들이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작년에 터졌던 일련의 연예사병 특혜 의혹들과 제대로 된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논란은 연예사병이라는 제도 자체의 폐지로까지 이어졌다. 그만큼 연예사병을 바라보는 국민적인 정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이 터져 나왔던 작년 유승호는 그러나 너무나 조용히 입대를 했다. 늘상 연예인들의 입대가 거대한 이벤트나 되는 것처럼 떠들썩하게 치러지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유승호는 그저 팬 카페에 20초 남짓 입대 영상을 올렸다. 그 영상에서 유승호는 군대 다녀오겠다는 담담한 몇 마디만을 남겼다.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연예인들의 떠들썩한 입대가 다른 입대 장병들에게 줄 상대적 박탈감을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전역을 하고 팬들 앞에 다시 서게 된 유승호는 눈물을 흘렸다. 팬들의 응원이 이어지자 미소를 지으며 20133월 입대할 때 제대로 팬들에게 인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송함과 아쉬움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군 생활을 통해 얻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얘기했다.

 

유승호가 군 입대와 전역을 통해 보여준 이런 담담함은 그가 연예인으로서의 어떠한 특혜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의 이런 개념은 대학진학을 포기한 것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유승호 정도면 어떤 대학이든 특례입학이 가능했을 것지만, 그는 이를 포기했다. 그 이유 역시 그가 군 입대를 조용히 치른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유승호는 학교와 군대 문제를 이렇게 담대하게 치러냄으로써 이제 오롯이 연기자의 길에 정진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든 셈이다. “행복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뜻을 밝혔지만 그는 이미 군 복무의 과정을 통해 대중들에게 행복감을 주었다.

 

집밥이 먹고 싶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는 전역 후의 간단한 소감 역시 남다를 것 없는 군 복무를 마친 자의 소탈함이 묻어났다. 부모님이 해주시는 집밥. 유승호는 어쩌면 군 복무를 통해 보통의 젊은이들과 똑같은 그 소박한 마음을 깊이 공감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들은 앞으로 그의 연기에 생각보다 큰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는 연예인 군 복무의 대표적인 좋은 예로 남았다.

 

터키 유생 에네스 카야, 대표성에 대한 책임을 져야

 

사람들이 나 자체를 터키로 보기 때문에 뭐 하나 잘못하면 나라 이미지가 잘못될 수 있다. 칼날 위를 걸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 했던 에네스 카야의 발언이 새삼스럽게 들린다. 이런 식의 논란이 터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크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총각행세를 하며 불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한 여성이 그간 에네스와 카톡 했던 것을 캡쳐해 올렸다는 그 내용은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일관된 구애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캡쳐한 장면 속에 들어있는 유부남 에네스님. 결혼하신지 몰랐네요.”라는 말 한 마디는 이 모든 걸 연정이 아닌 불륜으로 바꿔버린다.

 

이 충격이 유독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비정상회담>을 통해 보여 왔던 터키 유생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람보다도 더 보수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서구인이지만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그의 반전매력이었다. 개방적인 것만이 옳고 보수적인 것은 그르다는 선입견을 그는 여지없이 깨주는 것으로 대중들의 마음에 자리했다.

 

하지만 그 터키 유생의 이미지와 공개된 카톡 내용은 너무나 정반대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유생인 척 하면서 뒤로는 불륜을 해온 듯한 그 뉘앙스는 에네스 카야에 대한 그간의 애정만큼 더 큰 실망감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 진위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게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미 사안이 터졌고 그가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의 뜻을 밝힌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는 이미 이런 논란이 터져 나온 것만으로도 방송 프로그램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정상회담>은 그 후폭풍이 가장 클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다. 결국은 각국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소신을 얘기하는 것이 내용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여기 출연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신뢰에서 생겨난다. 에네스 카야 논란은 바로 이 신뢰에 흠집을 낸 것이다. 가장 믿었던 인물이 정반대의 실체를 드러냈을 때 그 영향은 거기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른 외국인 출연자에게도 미칠 수밖에 없다.

 

에네스 카야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얘기한 것처럼, 이 문제는 방송 프로그램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칫 그가 대표성을 띄었던 형제의 나라 터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까지 확산될 위험성이 있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대표로 프로그램에 나온 것이지만 대중들에게 터키라는 나라에 대한 호감을 만든 것도 에네스 카야 본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네스 카야는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침묵하고 칩거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는 일이 될 수 있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간 그를 사랑했던 대중들 앞에 나와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며 모국인 터키의 대표성을 띤 행위는 아니라는 걸 명확히 해야 한다. ‘비정상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 정상에 서게 됐던 그가 비정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그간 해온 대표성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오만>, <미생>, <피노키오>가 꺼낸 칼끝이 향하는 곳은

 

멀리서 보면 그럭저럭 살만해 보인다. 아니 심지어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그건 본질이 아니다. 한 걸음만 다가가면 온갖 뒤틀어진 욕망과 부조리들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직업의 세계. 이런 의미로 보면 지금껏 대충 직장을 하나의 배경으로 다루고 그 위에 멜로 같은 이야기를 덧붙인 드라마들은 실수의 차원을 넘어서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누가 막연히 직장인의 로망을 말하는가.

 

'오만과 편견(사진출처:MBC)'

이제 전문직 드라마라는 표현은 구태의연해진 지 오래다. <오만과 편견>의 검찰, <미생>의 종합상사, <피노키오>의 언론사. 지금 현재 직업을 다루는 드라마들을 들여다보면 과거 전문직 드라마라고 불리던 드라마들의 호칭 자체가 무색해진다. 과거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은 직업의 세계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그 디테일을 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보면 직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만을 만들어냈던 것이 사실이니.

 

물론 의학드라마는 예외다. 무수히 반복되어오면서 디테일 역시 깊어진 게 의학드라마다. 하지만 검사나 기자 혹은 직장인을 다루던 전문직 드라마들의 디테일은 요즘 방영되고 있는 MBC <오만과 편견>이나 tvN <미생>, 혹은 SBS <피노키오>를 따라잡기는 어렵다. 이들 드라마들은 좀 더 심층적인 취재가 아니라면 도무지 나오기 어려운 직업의 디테일들을 다룬다.

 

과거라면 이런 디테일은 시청률을 가로막는 저해요소가 됐을 것이다. 적당한 디테일에 조미료처럼 처지는 멜로가 드라마의 흥행공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적당한 디테일은 이제 대중들에게는 리얼리티의 부족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러니 거꾸로 깊어진 디테일은 실감으로 공감을 만들어낸다. 디테일이 깊어진 이들 세 드라마가 시청률도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래서다.

 

<오만과 편견>이 다루는 검찰은 막연히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를 깨는 디테일들이 들어가 있다. 문희만(최민수)같은 부장검사를 보다보면 전형적인 비리 검사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가도 검찰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의 안간힘을 쓰는 현실적인 검사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검찰의 일원이 될 것인지 개인으로 남을 것인지를 구동치(최진혁) 수석 검사에게 묻는 문희만의 모습에는 시스템과 개인으로서 검사의 소신이 어떻게 부딪치는가를 잘 보여준다.

 

<미생>은 지금껏 우리가 종합상사라고 하면 해외에서 물건 떼다 파는 정도로 생각했던 그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버린다. 또 직장인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샐러리맨의 애환 같은 통상적인 이야기를 던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일중독자들처럼 보이는 <미생> 상사맨들의 깊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네들의 삶이 가진 아픔과 기쁨을 모두 함께 느껴볼 수 있다. 공감의 폭은 바로 이 디테일로 인해 커질 수밖에 없다.

 

<피노키오>는 그저 기레기로 치부되던 드라마 속 기자들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한다. ‘진실을 두고 고민하는 기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보도경쟁이 만들어내는 폭력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단독을 잡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하는 현장 이야기가 들어간다. 기자가 나오면 으레 등장하는 클리쉐들은 디테일 속에서 무색해진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디테일에 승부하는 이들 직업 드라마들 속에는 한 가지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 드라마들이 모두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춘이 주인공이라는 점이고, 그 사회 초년생에게 어떤 지침을 알려주는 직장의 멘토가 또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오만과 편견>의 한열무(백진희)라는 초년생을 이끌어주는 수석 구동치가 그렇고,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라는 계약직을 끌어주는 오차장(이성민)이 그렇다. <피노키오>의 신입 기자 최달포(이종석)에게는 YGN 사회부 시경캡인 황교동(이필모)이 있다.

 

사회 초년병들과, 현실을 알지만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은 멘토들은 함께 힘을 합쳐 부조리한 현실과 맞선다. 그 현실은 다름 아닌 조직 시스템이다. 그래서 <오만과 편견>의 적은 검찰시스템이 되고, <미생>은 샐러리맨들의 직장 시스템이며, <피노키오>는 보도 경쟁에 내몰려진 방송 시스템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직업을 다루는 세 편의 드라마는 다른 것 같아도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직업이 갖는 부조리한 시스템과 대항하는 청춘과 멘토의 공조체계가 그것이다. 어째서 서로 다른 직업을 다루면서도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 구조가 나오게 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접하는 직업의 세계가 갖고 있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취업도 어렵지만, 막상 들어가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시스템의 현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비극들이 어떤 직업 속에서도 상존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들 드라마들의 디테일들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런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꾼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궁금해진다. 주마간산으로 대충 덮어버리고 갔을 때는 좀체 정체가 드러나지 않던 막막하고 먹먹한 현실이다.

 

'개콘-젊은이의 양지’, 웃긴데 슬픈 건...

 

그깟 떨어지는 면접은 안 보면 되고, 직장은 안 가면 되며, 돈은 안 벌면 된다?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 젊은이의 양지의 백수 김원효가 면접에서 떨어진 후배 취업준비생 이찬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행복을 묻는 이찬에게 김원효는 취직해 대기업 들어간다고 뭐가 행복하냐며 잘 돼봤자 빌 게이츠라고 말한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뭐가 좋은데? 빌 게이츠가 친구랑 피시방을 가봤겠나. 지 이름 넉자를 한자로 적을 줄 아나. 물냉 비냉을 구분할 줄 아나.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마을버스 타고 환승을 해봤겠나. 인생의 낙이 없다. 그렇게 살라 해도 그렇게 못살겠다.”

 

기막힌 역설이다. 김원효라는 백수의 역설은 그 아무 것도 없는 처지에 빌 게이츠의 삶을 불쌍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빵 터진다. 하지만 그 가진 것 없이 살아가는 것이 체화되어 이제는 나름의 행복의 논리(?)’로 가진 자들의 불행을 논하는 모습에서는 마음 한 구석이 짠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꿈꾸는 좋은 집에서 살아가는 그런 꿈조차 그는 좋은 집 살아봤자 펜트하우스라며 줄줄이 펜트하우스의 안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잠 좀 잘만하면 햇빛 엄청나게 들어오지. 환기 시키려고 문 열어놓으면 새 지나다니지. 혼자 전 층을 다 쓰니까 이웃 없지. 외롭지. 우울하지. 병 오지. 병 오면 죽지. 펜트하우스 살면 죽는다. 나는 그렇게 살라 해도 못살겠다. 인생에 낙이 없어요.”

 

하지만 이 말 뒤에는 햇빛 안 들어오는 반 지하에서 살아가며, 환기 시킬 창문조차 없는 방에 다닥다닥 붙은 이웃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갈 법한 이 백수의 삶이 느껴진다. 백수의 허세. 게다가 그건 고착화되어 나름의 논리까지 세워져 있다. 소소한 행복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안 바뀌는 현실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포기한 자의 넋두리처럼 들린다.

 

반면 재벌 2세 이문재는 면접에서 떨어진 취업준비생 친구 이찬에게 야 너는 이 회사 저 회사 면접 볼 자유라도 있지. 나는 그런 선택의 자유도 없어. ? 아빠 회사 물려받아야 하니까. 나 들어가자마자 사장이야.”라고 말한다.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재벌2세가 취업준비생을 부러워하는 듯한 이 역설에 또 웃음이 터져 나온다.

 

회사 가면 오십 줄 넘은 직원들이 90도로 인사를 한다며 어른을 공경하려야 공경할 수가 없는그 상황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 줄 아냐고 되묻는다. 가진 자의 엄살이다. 그의 논리는 너는 뭐든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백수지만 난 기껏해야 미래가 정해진 불쌍한 재벌2라는 데서 나온다.

 

젊은이의 양지라는 코너는 이처럼 자기 상황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청춘들의 군상을 통해 반전의 웃음을 만들어낸다. 백수는 자신의 삶이 빌 게이츠보다 낫다는 식으로 말하고, 재벌2세는 취업준비생의 삶이 자신보다 낫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 말들에 관객들이 빵빵 터지는 건, 그 말이 냉혹한 현실에서는 얼마나 공허한 이야기인가를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행복을 이야기하고 태생적으로 정해지는 삶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개척해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 말이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태생적으로 정해지는 삶을 바꿔나갈 수 없는 냉혹한 현실에서는 그 자족적인 행복에 대한 이야기나 개척하는 삶의 이야기가 패배의식이나 위선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젊은이의 양지는 그 아픈 현실의 이야기를 웃음의 코드 속에 녹여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웃다 보면 어딘지 슬퍼지는 건 그네들이 그토록 말로써 빌 게이츠를 불쌍히 여기고 재벌2세의 불행을 논해도 달라지는 현실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일 게다. 그들은 여전히 취업준비생이고 백수이고 재벌2세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삶이 세워질 수 있는 세상. 우리네 청춘들에게는 사치인걸까.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과연 양지는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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