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성훈 가족이 보여준 <슈퍼맨>이 강한 이유

 

링 위에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추성훈. 그 광경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내 야노 시호. 그리고 그 시간에 꿈나라로 간 귀여운 딸 추사랑. 이 세 사람이 보여준 단 몇 분의 장면들은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사진출처:KBS)'

아마도 지금껏 이 프로그램에 나왔던 장면들 중 가장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제목에 걸맞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힘겹게 싸우고 집으로 돌아온 추성훈에게 존경사랑을 표하는 아내와 딸. 딸을 꼬옥 껴안는 추성훈에게서, 또 부끄러운 듯 살짝 아내를 안아주는 추성훈에게서 전해지는 뭉클함은 모든 이 땅의 아빠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았을까.

 

입안이 다 헐어서 조금 신 과일을 먹어도 쓰라려 하면서도 딸이 준 것이라 받아먹고 허허 웃는 추성훈의 마음은 모든 아빠들의 마음 그대로였을 것이다. 묵묵히 남편을 지지해준 야노 시호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자신은 한 게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 한없이 따뜻해지는 건 그것이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지금껏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춰 보여줬던 육아예능의 틀을 살짝 벗어나 아빠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아빠들이 어떻게 슈퍼맨이 되고 그 슈퍼맨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가를 보여줬다. 추성훈의 귀환은 바로 이 이야기를 완벽하게 상징하고 있었다. 편안하게 잠든 딸을 위해 링 위에 오르는 아빠와 그 아빠를 껴안아주는 딸의 모습, 이 얼마나 이 프로그램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모습인가.

 

이것은 육아예능의 후발주자인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여타의 프로그램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어린 아이들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솔직함과 순수함으로 보여주고, 그 놀라운 성장으로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부모들의 진정성 또한 진솔하게 보여준다.

 

<아빠 어디가>의 아빠들이 여행이라는 상황 속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설렘과 흥분을 보여준다면,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빠들은 일상 속에서 가족들을 위한 실제 고민과 고통과 행복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것이 더 리얼한가가 최근 관찰 예능의 새로운 화두라면 단연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리얼함을 여타의 육아예능들이 따라잡기 힘들 수밖에 없다.

 

삼둥이를 앞으로 뒤로 옆으로 둘러매고 성화봉송을 하는 송일국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저절로 뚝뚝 떨어진다. 혼자 걷기도 힘든 푹푹 빠져드는 뻘밭에서 타블로는 하루를 등에 업은 채 뻘을 빠져나온다. 퉁퉁 부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반기는 가족들의 품에 안기는 추성훈의 얼굴에서는 하루를 살아낸 가장의 행복이 깃든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슈퍼맨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이것은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강한 이유다. 거기에는 아빠와 아이와 가족의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특별한 노력과 진심이 들어 있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 그저 지나쳐버렸던 것들을 유심히 관찰해 봄으로써 가능한 발견이다. 추성훈의 귀환은 밤마다 녹초가 되어도 가족들 앞에서 허허 웃는 우리 시대 가장들의 진심을 다시금 발견하게 만들었다.

 

능력 잃은 <런닝맨>, 게스트 없으니 펄펄 나네

 

간만에 느껴보는 <런닝맨>만의 묘미. 아마도 SBS <런닝맨> 히어로 특집을 접한 시청자라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마치 슈퍼히어로 만화에 들어간 듯한 설정은 <런닝맨>이 반짝반짝 빛나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런닝맨>이 그저 단순한 게임 버라이어티가 되지 않았던 것은 적극적으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기존 콘텐츠들을 끌어와 게임으로 패러디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런닝맨(사진출처:SBS)'

그 과정에서 <런닝맨>유임스본드같은 캐릭터를 얻을 수 있었고, ‘배신자 클럽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초능력자 특집에서는 예능 사상 초능력을 아이템으로 사용하는 획기적인 기획을 보여주었고, ‘셜록 홈즈 특집에서는 추리 형식의 스토리텔링을 차용해 흥미진진한 추리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게 게임이야 아니면 한편의 영화야 하고 묻는 그 지점(물론 패러디의 웃음으로 만들어진)에서 <런닝맨>만의 독특한 재미가 만들어졌다.

 

히어로 특집은 정말 오랜만에 이러한 캐릭터 플레이와 콘텐츠 패러디가 어우러져 스토리도 미션도 흥미로울 수 있었다. 100년 간 냉동상태로 있다가 깨어나 능력을 잃어버린 히어로들이라는 설정 자체가 기발했다. 유퍼맨(슈퍼맨 유재석), 지트맨(배트맨 지석진), 꾹버린(울버린 김종국), 원더우멍(원더우먼 송지효), 하길동(홍길동 하하), 개오공(손오공 개리), 광바타(아바타 광수). 이 능력을 잃어버린 캐릭터는 그래서 슈퍼히어로에 걸맞지 않은 미션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큰 웃음을 만들었다.

 

자판기 밑에 굴러 들어간 기념주화를 꺼내달라는 시민의 요청을 받고 동전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광바타나, 마치 주차 게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차들 속에서 신혼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들의 차를 꺼내주는 미션을 수행하는 꾹버린, 지나는 행인의 근육을 풀어주는 유퍼맨, 60층짜리 호텔을 지으려 하는데 밭에 숨겨둔 땅문서를 찾아달라는 미션을 부여받고 삽질을 하는 워더우멍, 어린이집에서 동화 읽어주고 화장실 가고 싶다는 아이 챙겨주는 지트맨, 생크림 케이크 만드는 개오공 등등.

 

슈퍼히어로 설정이지만 현실은 능력 없어 이상한 복장이나 하고 다니는 이들은 마치 벌칙 수행을 하는 듯한 우스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 미션 상황을 통해 <런닝맨>은 자연스럽게 일반인들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함께 참여한 시민들은 의외로 열심히 이 어딘지 어수룩한 히어로들을 도와주기도 했고, 돌발적인 웃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두 번째 미션인 담력 테스트는 제작진의 영민함이 돋보인 미션이었다. 하늘을 날던 슈퍼히어로들이 눈에 안대를 하고 건물 옥상에 연결된 사다리 하나를 건너지 못해 벌벌 떠는 모습은 반전 웃음을 주었고, 그들이 건넌 사다리가 건물과 건물 사이가 아니라 그냥 옥상에 있는 것이란 사실은 또 한 번의 반전웃음을 만들었다. 게다가 당한 만큼 다른 히어로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듯 속이기 위해 열연을 펼치는 모습은 마치 몰래카메라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버스와 벌인 이어달리기 대결은 이제는 향수로 느껴지는 <무모한 도전>의 한 대목을 보는 듯 했다. 도심을 달리는 이상한 분장의 히어로들은 이름표 떼기라는 늘 해오던 게임이 아니라도 충분히 긴박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무엇보다 게스트 없이 이런 충분한 재미가 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드라마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출연한 게스트들과의 마치 야외에서 벌이는 <명랑운동회> 같은 단순한 게임으로는 이런 <런닝맨>만의 묘미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

 

이번 히어로 특집은 <런닝맨>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고, 또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도 보여준 한 회였다. <런닝맨>이 그동안 대중들을 열광하게 했던 그 좋은 능력들은 왜 점점 사라지게 되었을까. ‘100년 간의 냉동상태란 그래서 특별한 아이디어 없이 무감하게 기획되어 방영된 그간의 게스트 초청 단순 게임을 해온 <런닝맨>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대체 왜 이 좋은 웃음의 능력들을 그들은 봉인한 채 보여주지 않았던 걸까.

 

히어로 특집은 그런 점에서 그간 봉인되어 왔던 <런닝맨> 본연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보다 적극적인 스토리텔링과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기획. 이것이 아니라면 <런닝맨>은 다시 ‘100년 간의 냉동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만에 부활한 <런닝맨>이 누워있지 말고 앞으로도 이렇게 달려 나가기를.

 

<맨홀>이 끔찍한 건 그것이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맨홀>의 배경은 강북의 한 마을이다. 어둑한 밤길 마치 공무원들처럼 복지부동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공권력 속에서 그나마 행인들을 지켜주는 것이라면 가로등과 CCTV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맨홀>의 연쇄실종사건이 벌어지는 강북의 그 마을에는 그 가로등과 CCTV를 공권력이 아니라 살인자가 쥐고 있다.

 

'맨홀(사진출처:화인웍스)'

가로등을 마음대로 꺼버리고 그 어둠 속에서 살인자는 일종의 인간사냥을 벌인다. CCTV? 그것은 범죄자들을 찍는 사회적 안전장치가 아니라 사냥감이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범죄자의 천리안이다. <맨홀>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적인 위치를 만들어낸다. 살인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공권력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한 치 알 수 없는 어두운 지하의 그 미로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건 우리에게 끔찍한 경험을 선사한다.

 

<맨홀>은 스릴러 장르지만 그래서 공포에 가깝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단지 자극적인 장면들 때문에만 생겨나는 건 아니다. 이 맨홀로 상징되는 어두운 지하세계가 현실의 무언가를 자꾸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밑에서는 끌려 들어간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건 우리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맨홀>의 피해자들을 보면(당연히 그 배경이 강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서민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택시기사가 아버지인 딸이 있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가진 동생과 부모를 여의고 그 동생을 돌보는 착한 언니가 있다. 만일 피해자가 기득권층이었다면 이 영화를 통해 그나마 어떤 사회적 분노를 발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피해자들을 그저 선량한 서민들로 보여준다. 심지어 가해자마저 폭력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즉 이 <맨홀>이라는 세계에는 지워져 있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한쪽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데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기득권층의 세계다. <맨홀>은 그래서 피해자들끼리 벌이는 약육강식 같은 느낌을 보여준다. 강북이라는 맨홀 위의 공간과 그 맨홀 밑의 공간은 또 그 안에서도 어떤 위계를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맨홀 위와 아래가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를 다룬다. ? 살아남기 위해서.

 

<맨홀>은 그래서 영화적인 통쾌함을 선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네 현실이 그러하듯이 없는 자들이 없는 자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풍경을 거칠게 담아낸다. 영화는 어두울 수밖에 없고, 때로는 그 공포의 시간이 차마 쳐다보기 힘든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나마 그 안에서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서로간의 끈끈한 가족애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조차 처절한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맨홀>이라는 영화 속에서 정유미, 정경호, 김새론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사실 이 영화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건 이들의 호연 덕분이다. 정유미는 단단한 연기로 영화에 추진력을 만들어낸다. 동생 역할을 하는 김새론은 아마도 괴물을 다루는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만들어낸 배우가 아닐까 싶다. 정경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독특한 비주얼의 살인마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이 세 명이 만들어내는 연기의 합은 이 지하세계에서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바라보는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마지막 맨홀 바깥으로 카메라가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세상이 낯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토록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는 지하에 비해 너무나 평온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마치 맨홀 속 같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 살아가면서도 문을 꼭꼭 닫아걸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그 삶의 무시무시함을 이 영화는 맨홀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이건 <왔다 장보리>가 아니라 왔다 연민정이네

 

MBC <왔다 장보리>에서 정작 주인공인 장보리(오연서)는 주목되지 않을까. 마지막회에서 연민정(이유리)은 결국 모든 걸 잃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악역 중의 악역인 연민정에 대한 말 그대로의 연민이 생겨나고 있다. 왜 하필 이름이 연민정인지 끝에 와서야 알게 됐다는 시청자의 반응까지 나온다. 항간에는 연말 시상식에 <왔다 장보리>에 상을 준다면 오연서보다는 이유리에게 줘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왔다 장보리(사진출처:MBC)'

그 첫 번째는 <왔다 장보리>라는 드라마에 대한 열광이 주인공인 장보리 때문에 생겼다기보다는 악역 연민정에게서 나왔다는 걸 시청자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힘은 결국 악역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연민정은 살인 미수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간의 천륜마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는 인물이다. 시청자들은 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 연민정을 욕하며 보았다. 과거라면 악역보다 선한 주인공인 장보리에 그래도 더 집중했을 것이지만, 지금의 시청자들은 안다.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오히려 연민정에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처럼 연민정이 마치 주인공처럼 느껴지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두 번째다. 그것은 연민정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연민과 동정에서 나온다. 갖가지 악행을 저지른 그 사실은 치가 떨리도록 그녀에 대한 당연한 비난과 분노를 하게 만들지만, 그렇게 그녀가 왜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상 연민정의 처지란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악착같이 살아내야 하는 서민들의 상황과 별 다를 것이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장보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다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중간에 고난을 겪게 되지만 이 드라마가 후반부에 하게 된 이야기는 태생적으로 운명이 정해지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즉 태생적인 정통성을 갖고 태어난 장보리가 모든 걸 가져간다는 것이고, 연민정처럼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권선징악을 바탕에 깔고 있어서 선한 장보리가 악한 연민정을 이겨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렇게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선과 악이란 공존하는 것이고 다만 상황이 그 어느 한쪽을 더 드러내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즉 선악의 관점으로 보면 이 드라마는 착한 자들의 승리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애초에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실패한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이처럼 하나의 캐릭터가 이토록 죽도록 밉다가도 마지막에는 심지어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던가. 연민정은 그래서 단순한 악역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한없이 비뚤어지고 끝없이 거짓말에 협박에 부모 자식 관계마저 부정하는 그 안간힘 뒤에는 그녀가 어떻게든 서 있으려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디작은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연민정이란 캐릭터를 이처럼 극악하게 끝까지 밀어 부친 이유리라는 배우의 발견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거둔 최대의 성과가 아닐까 싶다. 막장드라마적인 요소들이 연기에 있어서 몰입을 쉽지 않게 만들었을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혼신을 다하는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연기자라면 작품이 어떻고를 떠나 그 열심히 자신을 내던지는 이유리에게 배울 점을 발견할 것이다. 연말 시상식 대상? 막장드라마라고 불렸기 때문에, 혹은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상이 안 된다면 그것은 진정 연기에 주는 시상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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