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6>의 새로움, 곽진언이다

 

곽진언이 심상찮다. Mnet <슈퍼스타K6> 첫 회에 등장하면서부터 화제가 되었던 곽진언. 그가 만들어낸 콜라보레이션은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으며 그의 존재감을 한껏 알렸다.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임도혁, 김필과 함께 부른 벗님들의 당신만이, 김필과 부른 들국화의 걱정말아요는 지금 음원차트 상위권에 모두 랭크되어 있다.

 

'슈퍼스타K6(사진출처:Mnet)'

김동률과 서태지 그리고 윤하 같은 쟁쟁한 가수들의 음원이 발표된 시점에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콜라보레이션 곡이 이처럼 힘을 발휘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것은 임도혁이나 김필 같은 절정의 가창력을 보여주는 이들의 하모니가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김필이 갈고 닦여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시원스럽게 고음을 찍어준다면, 임도혁은 거기에 소울풀한 감성을 덧붙여준다. 결코 곽진언의 개성 강한 저음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 콜라보레이션의 핵심으로 칭찬받는 이는 단연 곽진언이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윤종신은 그것을 곽진언이 가진 프로듀싱 능력이라고 말했다. 노래를 재해석해내는 능력이 어떤 곡이든 곽진언화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필은 11 대결 미션에서도 자신이 승자가 되었으면서도 못내 곽진언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곽진언이 만들어 놓은 판이 있어 김필의 보컬이 더 돋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곽진언의 특별함은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마치 읊조리듯 이야기를 건네는 그 특유의 감성에 있다. 그가 처음 <슈퍼스타K6> 무대에 올라 부른 후회라는 곡은 단 몇 분만에 나르샤의 눈에 눈물을 맺게 할 정도로 강력한 곽진언만의 감성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되는 게 몇 가지 있지로 시작한 노래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룰 때 듣는 이들의 마음은 한없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마치 김민기나 정태춘을 듣는 듯한 감성이다. 노래란 듣기 좋은 소리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마음을 전하는 일종의 소통이자 교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곽진언의 노래는 마치 얘기를 전해주듯 상대방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 이런 힘은 콜라보레이션에서도 그대로 발휘된다. 김필과 부른 걱정말아요 그대에서는 시작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하나 둘 셋을 읊조리는 곽진언에 의해 그 노래의 감성이 먼저 만들어진다. 당신만이에서도 임도혁과 곽진언이 만들어낸 그 낮은 감성 위에 김필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날아가듯 얹어진다.

 

즉 겉으로 들려오는 화음 속에는 고음들이 먼저 들리기 마련이지만 그 고음을 어떤 울림으로 만들어내는 건 곽진언의 저음이라는 점이다. 마치 베이스가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음악 전체를 끌어안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곽진언의 목소리는 낮게 읊조려도 음악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만들어내는 매력이 있다.

 

존박처럼 중저음이 좋은 가수들이 나오긴 했지만 곽진언처럼 낮은 톤에도 고음 못지않은 감성 전달을 가진 출연자는 아마도 <슈퍼스타K>에서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만일 역대의 <슈퍼스타K>가 그 시즌마다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진화해왔다면 이번 시즌은 어쩌면 곽진언이나 김필 같은 싱어 송 라이터들의 제전이 그 특색이 되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곽진언 같은 싱어 송 라이터의 탄생은 그가 우승을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슈퍼스타K6>가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졌다는 성급한 판단마저 하게 만든다. <슈퍼스타K6>의 새로움은 단연 곽진언이다.

 

<슈퍼스타K6>, 프로와 아마추어 구분 무슨 의미 있나

 

임도혁은 <슈퍼스타K6>에서 단연 주목받는 참가자다. 그가 이 프로그램의 첫 문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이나 가능성은 이미 어느 정도 입증됐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 난데없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슈퍼스타K6(사진출처:Mnet)'

알고 보니 대형기획사 소속의 가이드보컬이었다.” “처음이라고 했지만 타 방송사의 오디션 출연 경험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슈퍼스타K6>제작진은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다.

 

그가 가이드 보컬을 한 적은 있지만 대형기획사에 소속되었거나 대형기획사에서 활동했었다는 건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 또 방송에서 처음이라고 말한 것은 오디션이 처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서 실력도 인정받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처음이라는 취지였다는 것.

 

제작진은 굳이 해명까지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사안이 해명까지 요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슈퍼스타K>는 지금껏 순전히 아마추어들의 무대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이미 가수로 데뷔했던 이들이나 음반을 내고 활동했던 이들에게도 그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언제든지 부여해왔다. 이번 <슈퍼스타K6>의 톱11에 들어있는 이해나도 키스 앤 크라이라는 그룹 활동을 했던 출연자다.

 

즉 프로냐 아마추어냐는 구분은 <슈퍼스타K>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슈퍼스타K>는 실력은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이들에게 모두 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즉 심지어 가수 데뷔를 했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거나, 과거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가수들에게도 <슈퍼스타K>의 무대는 열려 있다.

 

이승철이 가끔씩 아마추어 같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표현적인 의미일 뿐이지 실제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직 정제가 되지 않았다거나, 실력이 부족하다거나 할 때 쓰는 하나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사실 최근 들어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분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디션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이다. 심지어 아마추어리즘이 프로보다 더 각광받고 그걸 통해 성공하는 모습도 이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악동뮤지션은 프로 같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그렇다면 악동뮤지션은 아마추어일까 프로일까.

 

프로를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해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면 악동뮤지션은 분명 프로다. 하지만 악동뮤지션이 갖고 있는 음악적 자산이 프로의 규정된 틀에서는 좀체 나오기 힘든 아마추어리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이것은 또한 아마추어리즘이 프로에 열등하다는 통념을 깨버린다.

 

이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미션을 통해 나온 콜라보레이션 같은 곡들은 다음날 음원차트에 올라가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분은 이미 사라져가고 있고 그 의미도 퇴색되고 있다. 임도혁이 아르바이트로 가이드 보컬을 했거나 타 오디션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시대라는 점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것이다. 과연 우리는 <슈퍼스타K6>가 아니었다면 임도혁이라는 괴물 보컬을 만날 수 있었을까 하는 것. 임도혁처럼 실력은 있는데 알려지지 않은 친구를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건 그래서 어쩌면 <슈퍼스타K>라는 오디션의 본분이 아닐까.

 

<아이언맨>의 끝없는 추락, 동화에 머문 멜로의 한계

 

도대체 이건 무슨 얘기일까. KBS <아이언맨>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이 드라마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우화나 동화처럼 상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하면 등에 칼이 돋는 캐릭터. 주인공 주홍빈(이동욱)은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차라리 분노를 상징화한 캐릭터다.

 

'아이언맨(사진출처:KBS)'

이러한 상징의 캐릭터화는 과장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이언맨>의 초반부는 주홍빈이라는 캐릭터의 분노를 심지어 보는 이들마저 불편할 정도로 시종일관 보여주었다. 그는 까칠함과 까탈스러움과 신경질적임이 무엇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아무런 설명 없이 까칠함의 대명사처럼 남자 주인공을 세운다는 건 모험일 수 있다. 어쨌든 멜로의 관계를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처럼 시종일관 신경질적인 모습만을 드러내고, 때로는 동물처럼 코를 킁킁대며 여자의 냄새를 맡는 모습은 과장됐다 하더라도 보는 이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쨌든 하나의 장치다. 이미 이 남자의 등줄기에서 칼이 돋는다는 캐릭터 설정은 좀체 이 남자가 여성에게 마음을 열기도 또 여성이 이 남자에게 쉽게 다가가기도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 마치 <미녀와 야수>처럼, 혹은 <헐크>처럼 그는 내재한 분노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또 그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일정부분 불편함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과장된 또 한 명의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그녀가 바로 손세동(신세경)이다. 그녀는 시골 마을버스를 타고 가며 창밖의 풍경에 깜짝 놀라 야아-”하며 과장된 목소리를 내 버스에 탄 할머니들을 모두 웃게 만드는 소유자고, 할머니 한 명 한 명 내릴 때마다 짐을 내려주는 친절의 소유자다.

 

주홍빈이 찾은 옛 사랑의 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다 정신을 놓아버린 노모가 그녀에게 왜 이제 왔냐고 말하며 딸로 착각할 때,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딸처럼 울어줄 줄 아는 그녀다. 그녀는 분명 주홍빈처럼 과장되어 있다. 주홍빈이 분노를 표징하는 인물이라면 그녀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표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면 이 <아이언맨>이라는 등에 칼이 돋는 캐릭터까지 등장해서 하려는 이야기가 분명해진다. ‘분노공감’. 즉 관념적으로 얘기하면 분노가 어떻게 공감을 통해 풀어져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주홍빈의 칼이 돋는 등을 안아주거나 그 등을 토닥여주는 손세동의 모습은 그래서 이 관념적이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형상화해주는 장면처럼 보인다.

 

<아이언맨>의 동화적인 상징은 그 자체로는 흥미롭다. 마치 이야기의 원형을 그려내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언맨>은 동화가 아니라 드라마다. 드라마는 좀 더 현실적인 장르다. ‘분노공감으로 바꾸는 이야기를 캐릭터화해서 보여준다면, 드라마는 여기에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배경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즉 지금의 시청자들이 왜 분노공감을 표징하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봐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드라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분노의 이유가 너무 단순하고 사적이다. 사랑하던 옛 연인이 죽었고, 그 죽음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막연한 상황이 그 분노의 이유다. 만일 동화라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드라마라면 너무 소소해진다.

 

물론 분노라는 감정은 지금 시대의 정서임에는 분명하다. 경제적인 불평등, 몰염치한 사회, 툭하면 터지는 사건사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제 살길만 찾는 특권층들... 이 현실적인 분노들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떠다닌다. 그러니 이러한 사회적인 분노의 시대에 지극히 사적인 홍빈의 분노가 대중들의 눈에 들어올 까닭이 없다. 또한 이런 분노는 <아이언맨>이 세동을 통해 동화적으로 보여주는 밝음공감으로 끌어안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아이언맨>이 괜찮은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그저 소소한 이야기가 된 것은 그 이야기의 내적 완결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가 지금 현재 어떤 울림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서다. 그 분노에 조금은 사회적인 의미를 담아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 이토록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걸까

 

진실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걸까. SBS <비밀의 문>이 영조와 사도세자의 역사를 가져와 다루는 것이 하필이면 진실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역사라는 것이 본래 그렇지만, 사극은 그 가져온 과거가 그저 옛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 어떤 의미를 가질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즉 지금의 어떤 갈증이 역사적 사건을 끌어와 되새겨지는 것이다.

 

'비밀의 문(사진출처:SBS)'

<비밀의 문>맹의라는 영조(한석규)와 노론의 결탁을 증거 하는 비밀을 다룬다. 사도세자(이제훈)와 소론은 그 비밀의 문을 열려고 하고 영조와 노론은 그 문을 애써 닫으려한다.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사도세자는 그 애꿎은 백성의 죽음과 누명을 그저 지나치지 않으려 한다. 한 백성의 목숨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마땅한 일이라는 것.

 

이 말은 최근의 세월호 정국을 떠올리게 한다. 한쪽에서는 그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수사를 통해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덮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비밀의 문>이 이러한 정국을 의도하고 만들어진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진실을 파헤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특별한 울림을 만드는 건 지금의 정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제보자> 역시 진실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황우석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한 이 작품은 모든 국민이 믿고 싶었던 이야기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걸 밝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집단적인 광기의 양상마저 보이는 맹신의 늪에서 진실 하나만을 쥐고 버텨내는 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가녀리게 느껴진다.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경력을 걸거나, 아니면 가진 걸 모두 버려서야 겨우 그 진실 하나를 지켜낼 수 있다는 이야기는 뭉클하면서도 씁쓸함을 남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진실의 무게를 다루는 작품들이 나왔고, 또 그 작품들이 모두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해서 재구성혹은 재해석되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의 대중정서는 어쩌면 진실에 목말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숨겨진 비밀의 문을 열고자 하는 열망 혹은 진실을 밝히는 제보자를 지켜내고픈 마음에 시선이 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게다가 작품을 통한 재구성재해석에는 현실이 이뤄내지 못하는 것을 허구 속에서나마 실현해내려는 욕망 또한 들어가 있다. <비밀의 문>은 도발적이기는 하지만 지금껏 역사와 사극이 다루던 방식을 벗어나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새롭게 진실의 문제로 재해석을 시도했다. 역사에 나온 뒤주에 가둬져 죽음을 맞이하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 진실의 문제로 접근하면, 마치 진실을 알게 된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봉인하는 듯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끌어와 재해석했다는 점은 그만큼 이 사극이 가진 진실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보자>는 훨씬 더 사실적이다. 거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황우석 사건을 마치 기록하듯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워낙 이 사건이 언론 등을 통해 가려지고 믿고 싶은 대중들의 열망에 의해 뒤틀려진 사실들이 많은 터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 별다른 해석 없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래서 그 자체로 더 큰 진실의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세상이 얼마나 많은 의문들과 의혹들을 있어 이처럼 진실을 갈구하게 된 것일까. 신문을 펴면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사건 사고들이 제대로 대중들에게 의혹 없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그런 갈증들은 <비밀의 문>이나 <제보자> 같은 허구 속에서 꿈틀댄다.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자들의 그 간절한 마음. 그것이 지금 대중들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갖는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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