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 사적인 분노가 아닌 사회적 분노이길

 

KBS의 새 수목드라마 <아이언맨>은 그 제목에서부터 설정 자체가 파격적이다. 분노하면 등줄기에서 칼날이 솟아나는 캐릭터라니. 마블의 슈퍼히어로물에서나 나올 법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세운 것 자체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이언맨(사진출처:KBS)'

물론 드라마가 가진 한계인지는 모르나, <아이언맨>은 아직까지 그 캐릭터의 탄생을 설명하지도 않았고, 또 그 변화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영상으로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았다. 다만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등에 칼날이 나오는 것을 잠깐 보여줬을 뿐이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 싹뚝 잘려버린 나무둥치를 보여줬을 뿐이다.

 

드라마는 이런 비주얼 대신 엉뚱하게도 아이언맨 주홍빈(이동욱)이 가진 남다른 후각에 더 집중시킨다. 그의 후각은 군중들 속에서도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예민하다. 첫 회가 다소 밋밋하게 시청자들에게 느껴진 건 <아이언맨>이라는 캐릭터가 주는 비주얼적인 기대감을 채워주지 않고 대신 후각이라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특징으로 주홍빈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후각이 예민해지고 등줄기에 칼날이 솟아나는 그 모습은 그래서 주홍빈이라는 캐릭터를 야수처럼 보이게 만든다. 김규완 작가가 다른 작품들을 통해 늘 보여왔던 잔혹동화의 특징을 그래서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마치 미녀와 야수의 새로운 해석이랄까.

 

하지만 CG를 통해 그 캐릭터가 얼마나 잘 구현됐을까 하는 그런 비주얼적인 관심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이 주홍빈이라는 인물이 분노를 캐릭터화 하고 있다는 점이다. 헐크를 연상시키는 설정이지만 분노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 내포된 억압된 감정이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상대적 박탈감, 갑을정서, 무수한 논란들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 감정. 분노는 실로 지금 우리 현실이 갖고 있는 감정상태가 아니던가.

 

드라마가 사회적 현실을 외면할 리가 없다. 하다못해 미녀와 야수를 그려도 거기에는 사회적 편견과 선입견을 깨버리는 현실적 모티브가 발견되기 마련이다. 다만 어떤 식으로 그것을 표현해내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아이언맨>은 그 CG 작업이 얼마나 치밀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캐릭터 설정만으로는 나쁘지 않은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분노가 어디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는 점일 게다.

 

<아이언맨>은 아직까지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주홍빈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잃었다는 것이고 그 여자가 낳은 자신의 아이가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점이며,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냄새의 손세동(신세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는 것이다. 또 이 모든 그의 분노의 근원에는 도무지 소통이 될 것 같지 않은 아버지가 있다는 점 정도다.

 

사실 등줄기에 칼날이 나오는 비현실적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또 거기에 대한 그럴듯한 나름대로의 과학적 근거를 설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그렇게 변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이 상징적인 캐릭터와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싱징이라면 적어도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집단적인 감정 상태를 끌어안을 만큼의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이언맨>에서 기대되는 것은 그 캐릭터가 얼마나 멋진 이미지로 구현되는가 하는 그런 점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분노가 사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 작품은 의외로 꽤 흥미로운 시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 슈퍼 히어로물이 시도된 것은 처음은 아니다. 이미 <별에서 온 그대>가 도민준을 창조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 아닌 분노를 캐릭터화 했다는 건 <아이언맨>의 특별한 점이다. 그 분노의 칼날이 어디를 향할 지는 두고 봐야 될 문제지만.

 

'괜찮아 사랑이야', 조인성이 이렇게 연기를 잘 했나

 

조인성이 이렇게 연기를 잘 했었나? 역시 연기력은 좋은 작품을 만날 때 폭발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SBS 수목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는 보여주고 있다. 조인성은 잘 생긴데다 바람기마저 있어 보이는 거의 아이돌에 가까운 추리소설 작가로 등장하지만 어느 순간 한 여자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남자로, 또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로 정신분열을 겪는 극단적인 캐릭터로 변주되더니 결국 이를 극복하고 이 모든 캐릭터를 하나로 묶어내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괜찮아 사랑이야(사진출처:SBS)'

정신분열로 장재열(조인성)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고, 그 자신을 투영시켜 만든 한강우(디오)가 삼거리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은 그가 병을 극복해낼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던 장재열이 맨발이었다는 점과, 자신이 만든 환영인 한강우 역시 맨발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해낸 건 그가 이 두 존재를 하나로 끌어안을 수 있게 된 단서가 된다. 각각의 캐릭터로 존재하며 분열되어 있던 자아가 장재열이라는 한 사람으로 묶여지는 것.

 

결국 장재열이 정신분열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그 트라우마 속에 비틀어진 자기 자신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서 상처투성이 한강우의 맨발을 장재열이 씻겨주는 장면은 자기가 자신의 아픔을 다독이는 장면이 된다. 물론 드라마는 장재열과 한강우의 캐릭터를 나누어놓지만 결국은 그것이 장재열의 내면이 확장된 장면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연기해내는 조인성은 사실상 자신 속에 있는 여러 캐릭터들을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하는 연기를 해야만 한다.

 

장재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조인성이라는 연기자가 꽤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갖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그는 더 이상 외모가 수려한 조각미남의 틀에 갇히지 않는 배우가 됐다. 그 틀 속에 꿈틀대는 아픔과 상처가 조금씩 밖으로 비어져 나올 때 조인성의 또 다른 모습들이 발견되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운명적 멜로의 남자 주인공 역할에 딱이지만, 이 작품을 통해 다분히 날카롭고 강하며, 때로는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가녀린 인물을 그 속에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연기자는 어쩌면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여러 자아를 갖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조절되지 않고 그를 지배할 때 정신분열이 되겠지만, 완전히 캐릭터에 빙의된 연기자를 보며 소름이 돋는 것은 거의 그 정신분열의 단계를 보듯 전혀 다른 모습들이 연기를 통해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정신분열이 아니라 연기가 되는 것은 연기자가 그 많은 자신 속의 다른 모습 역시 또 다른 나라는 걸 인정하고 다독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조인성과 장재열은 닮았다. 조인성은 장재열이라는 역할을 통해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끌어내 연기라는 영역을 확장시켰고, 장재열은 분열된 자아를 또 다른 나로 인정함으로써 그 병을 이겨내고 있다. 우리네 삶의 어려움이란 어쩌면 한 사람 속에도 이처럼 많은 자아들이 서로 부딪치고 갈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잘 화해시키고 하나로 껴안아주었을 때 상처는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장재열을 정신분열의 늪에서 꺼내주는 구원의 손길은 다름 아닌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다. 그들의 끝없는 관심과 애정 어린 조언들이 있었기 때문에 장재열은 조금씩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도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이처럼 깊어진 연기의 맛을 보여준 것 역시 작가와 PD 그리고 동료 연기자들은 물론이고 그를 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대중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는 그래서 조인성에게 남다른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많은 모습들을 하나로 묶어내며 괜찮은연기자 조인성을 발견하게 만든.

 

<루시>의 최민식, 진화론적 보고서를 액션으로 만들다

 

만일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루시>에 최민식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 영화는 그저 진화론적 가설의 보고서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예고편을 통해 또 뤽 베송 감독이 만들어냈던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루시>가 스칼렛 요한슨이 나오는 그저 그런 신나는 액션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발길이 허무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루시>는 그런 액션 영화가 아니다.

 

'사진출처: 영화 <루시>'

<루시>는 흥미로운 진화론적 보고서에 가깝다. 이제 겨우 뇌의 10%를 사용하는 인류가 20%를 넘겨 궁극적으로 100%를 사용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가설들이 한편의 영화 속에 담겨져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과학적 편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생물학적이고 우주적인 철학적 논제이기도 하다.

 

<루시>라는 제목이 최초의 인류에게 붙여진 이름에서 따왔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얼마나 시공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가설의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마치 인류학적인 근원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처럼 영화가 동물의 세계를 탐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노먼 박사(모건 프리먼)의 강연 설명을 통해 구구절절 들려주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이처럼 진지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영화도 뤽 베송이 하면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 <루시>이기도 하다. 이토록 지적일 수밖에 없는 영화를 뤽 베송 감독은 특유의 느와르적인 액션 감성으로 풀어냈다. 스칼렛 요한슨이 가진 섹시하면서도 시크한 액션은 이 영화의 예고편만으로도 유혹적인 느낌을 줄만큼 강렬하다. 여기에 최민식이 보여주는 악역으로서의 존재감은 <레옹>에서의 게리 올드만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바로 이 점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아낸 이 특별한 영화를 추석 명절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될 것이다. 추석 명절에 어딘지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부수고 터트리는 액션 블록버스터를 꿈꾸기 마련이다. <루시>는 실제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그 외형적인 모습은 영락없이 그 기대감을 만들어내는 영화가 분명하다.

 

이런 기대감을 만드는데 있어서 최민식은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한 듯 총을 쏘는 장면 하나만 봐도 영화가 궁금해지는 그런 연기를 그는 보여주고 있다. 다소 무거운 이야기도 그의 액션으로 들어가면 마치 도대체 뭔 소리야?”하고 일갈하는 듯한 시원스러움으로 변모한다. 주인공인 스칼렛 요한슨이 그만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이 만만찮은 악역 최민식이 거기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처럼 보인다.

 

우리말을 고집하는 최민식은 이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들에게 특별한 느낌을 선사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처럼 우리말이 많이 또 정확히 나오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최민식이 우리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는 욕지거리 하나까지도 우리네 관객들은 반색할 만하다. 그건 애국주의적인 관점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치 그가 우리관객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실로 <루시>를 지루한 보고서가 아니라 흥미로운 액션 영화로 만든 건 배우들이다.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적인 액션과 그와 대적하는 최민식의 악역 존재감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자의식 강한 진화론적 상상력을 늘어놓은 범작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명량>에서도 그랬듯이 최민식은 <루시>에서도 그 영화적 재미의 중심을 제대로 잡아내고 있다.

 

<나가수>, 가능성 있지만 보완해야할 것들

 

MBC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정작 이 프로그램이 국내에서는 고개를 숙였지만 중국에서 그네들 버전으로 만들어져 계속 화제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같은 외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는 가수다>를 떠올리면 여전히 생각나는 무대와 가수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첫 무대에 올랐던 이소라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앉아 조용히 바람이 분다를 불렀을 때의 그 감동, 백지영의 마음을 건드리는 그 절절한 목소리, 김건모의 애절하면서도 엉뚱하고 그러면서도 파워풀 했던 무대. 돌아온 임재범이 마치 짐승처럼 불러댄 남진의 빈 잔은 물론이고 비주얼 가수로 자리매김한 김범수의 님과 함께’, <나는 가수다>의 요정으로 등극했던 박정현이 부른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등등. 우리는 여전히 한때 <나는 가수다>가 만들어냈던 그 무대들을 하나의 추억처럼 얘기한다.

 

추석특집 <나는 가수다>에서 시청자들이 기대한 것도 바로 그런 무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감도 큰 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추석특집 <나는 가수다>는 별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무대도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효린이 애절하게 불러낸 박선주의 귀로<나는 가수다> 무대에 최적화된 더 원이 부른 백지영의 잊지말아요가 약간의 감흥을 만들었을 뿐, 다른 무대들은 그다지 임팩트가 보이지 않았다.

 

혹자들은 이렇게 된 이유를 가수에서 찾는다. <나는 가수다>를 부활시키려면 임재범, 김범수, 박정현, 이소라 같은 가수들을 섭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분명 이 프로그램의 당장의 가능성은 보여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임시처방이 될 것이다. <나는 가수다>가 특정 가수들의 전유물이 된다는 건 특정한 무대에 묶인다는 뜻이다. 이것은 좀 더 많은 가수들이 이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의 바람과는 어긋나는 일이다.

 

추석특집 <나는 가수다>가 예전만큼의 감흥을 주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출 구성이 너무 밋밋했던 탓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갖는 가수들의 긴장감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고 그들의 이야기 또한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무대 역시 그만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저 무대에 올라가 노래하고 내려오는 것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여타의 추석특집 음악방송과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된 것은 편성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데다 보여주려는 무대는 너무 많았던 것에서 비롯된 일이다. 7명의 가수가 한 곡씩 부르는 시간도 빡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추석특집 <나는 가수다>는 먼저 자신들의 곡을 부르고 그 순위에 따라 메인 무대의 순서를 정하는 것으로 경연방식을 구성했다. 이렇게 되자 두 곡씩 그 짧은 시간에 담아내느라 보다 압축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즉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앞부분은 마치 사족처럼 보였고 오히려 긴장감을 흩트리는 시간이 되었던 것.

 

또한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경연은 노래에 대한 집중력을 그만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라이브 무대의 공연은 현장에서 봤을 때 훨씬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집에서 TV로 볼 때는 그 감흥이 그만큼 느껴지기가 어렵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는 야외에서 리액션이 중요한 <나는 가수다>의 무대가 살아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실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면 좀 더 음 하나하나의 묘미를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추석특집 <나는 가수다>는 정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회적인 이벤트다. 그러니 그저 추석에 하는 쇼의 하나거니 하면서 넘겨도 될 문제다. 하지만 아쉬움이 더 깊게 남게 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은 분명히 다시 정규화해도 될 만한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번 MBC 추석특집 <나는 가수다>8.2%(닐슨 코리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동시간대 타 방송사 프로그램들을 압도하는 수치다. 그만큼 대중들에게는 그 기대감이 남아있다는 반증이다.

 

최근 <비긴 어게인>이라는 영화는 다양성 영화로 100만 관객을 넘기는 기적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기적이 가능했던 건 거기 음악이 있었고 그 음악의 묘미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는 그렇게 음악이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다변화할 수는 없는 일일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 프로그램은 정규화해도 충분히 <비긴 어게인>이 보여준 음악의 기적을 다시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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