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위는 왜 시청률조사의 문제점을 숨겼을까

 

아마도 TV를 보는 젊은 시청자들은 왜 자신이 재밌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낮은 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드라마 <쓰리데이즈><신의 선물 14> 혹은 MBC 주말 예능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10% 정도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 모였다 하면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들이 아닌가. 2030 세대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됐다면 적어도 5%에서 10% 이상은 더 나올 시청률이 아니었을까.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이처럼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시청률은 현재의 시청률표만 들여다봐도 쉽게 발견된다. AGB닐슨의 25일자 시청률 상위 10위를 보면, 1KBS 일일연속극 <사랑은 노래를 타고(29.8%>, 2<기황후(26%)>, 3<KBS 9시뉴스(22.8%)>, 4KBS일일극 <천상여자(18.3%)>, 5MBC 아침드라마 <내 손을 잡아(15.8%)>, 6SBS일일극 <잘 키운 딸 하나(13.7%)>, 7KBS TV소설 <순금의 땅(11.9%)>, 8KBS <인간극장(11.7%)>, 9KBS <러브 인 아시아(11.6%)>, 동시 9<KBS 뉴스7(11.6%)> 순이다.

 

아마도 젊은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이 있기는 있었나 하는 의아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드라마나 아침 프로그램 그리고 저녁 시간대에 배치된 일일극 등이 상위 10위를 거의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30의 직장인들은 아예 배제된 시청률이다. 한 눈에 띄는 것은 시청률 톱 10위에 KBS의 비율이 단연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25일자만 봐도 <기황후>, <잘 키운 딸 하나>를 빼고는 모두가 KBS 프로그램이다. 이 표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KBS만 틀어놓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한 언론매체에 의해 입수되어 보도된 방통위 시청점유율 조사 검증 연구에는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시청률이 나오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가 밝혀져 있다. 2012년과 13년 두 해 동안의 시청률 조사의 문제점을 분석한 이 연구자료를 보면 시청률 조사에 있어서 2030 세대의 의견 반영 비율이 50세 이상의 의견 반영 비율에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료가 분석한 시청률 조사 연령별 비율을 보면 AGB닐슨은 203021%인데 반해 50세 이상은 41%였고, TNms 역시 203020%, 50세 이상이 39%였다.

 

100% 유선전화를 통해서 이뤄지는 기초조사 역시 국내 10가구 중 3가구가 유선전화가 없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전화를 받더라도 낮 시간대에 집에 머무르는 노년층이 주된 응답자가 된다는 점이다. 또 소득별로도 월 4백만 원 이상 고소득자가 기준보다 많고 2백만 원 미만 서민층이 적어 서민 의견 반영 역시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으며, 조사에 참여하는 패널 중 무효패널 비율도 조사회사가 발표한 5%의 두 배 이상인 것으로 보고됐다. 무효패널 비율은 닐슨이 10.4%였고 TNms는 무려 30.5%에 달했다. 이 정도면 신빙성 있는 시청률 조사라고 하기 어렵다.

 

시청률 조사는 단지 순위 매기기가 아니다. 시청률은 광고와 직접적인 영향이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방송 콘텐츠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처럼 세대 반영 비율이 엉터리인데다, 조사 방식의 허점도 너무 많은 시청률이 여전히 그 프로그램에 대한 잣대로 활용된다는 것은 실로 큰 문제다. 이른바 창조경제를 주창하는 시대에 그 평가지의 역할을 하는 시청률 같은 중대한 수치가 이렇게 제멋대로 만들어져 자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방통위와 조사기관이 이런 사실을 영업비밀 혹은 대외비라며 공개하지 않고 숨기려 했다는 점이다. 방통위는 조사기관이 민간회사라는 점을 들어 정부가 민간회사 조사방식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며 발을 빼고 있고, 조사회사들은 영업비밀이라며 집계방식을 숨기고 있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공무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민간회사에 업무를 위탁하는 방식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어찌 시청률 추산 같은 방송의 중차대한 일을 민간회사라는 이유로 방통위가 뒷짐 지고 있는 걸까.

 

이것은 마치 2030세대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것을 의도적으로 묵인하고 있는 듯한 인상까지 준다. 누구나 알다시피 방송은 저널리즘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다. 지난 대선의 표가 203050대 이상으로 명확하게 갈라졌던 점을 생각해보라.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시청률에 반영된 프로그램(뉴스, 시사 프로그램을 포함해 드라마, 예능 전 분야에 걸쳐)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시청률이 정치적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판단은 성급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지 않고 방관하는 것은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행위다. 실제로 시청자들은 점점 시청률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광고주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이 연구의 검증팀이 방송사와 광고대행사 등 78개 기관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54개 기관의 무려 94%시청률이 납득이 안돼 조사기관에 문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시청률 조사를 왜 하는 걸까.

<밀회>, 유아인과 김희애의 멜로가 절절한 까닭

 

퀵 배달 하다 보니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거든요... 근데 선생님께서는 제 연주를 더 듣겠다고 하셨고... 어떻게 사는지도 물어보시고, 저와 함께 연주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전 그 날 다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제 영혼이 거듭난 거죠.” <밀회>에서 선재(유아인)라는 가난한 청춘의 이 한 마디에는 자신을 알아봐준 혜원(김희애)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영혼운운하는 것에 대해 혜원이 과하다. 말하고 나니까 너도 오글거리지?”하고 묻자 선재는 정색하며 아닌데요. 진심인데요.”라고 말한다.

 

'밀회(사진출처:JTBC)'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운명적으로혜원이 선생님으로 정해졌다는 선재의 말은 이 불쌍한 청춘이 얼마나 타인의 관심에 목말랐던가를 말해준다. 그는 황송하게도 가난한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와 준 혜원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쥐를 잡기 위에 놓았던 끈끈이가 혜원의 발에 붙어버리자 콩기름으로 직접 닦아주려 하고, 그녀의 신발을 가지런히 해 입구쪽으로 돌려놓는다. 거기에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고마움과 가녀리고 순수한 청춘의 떨림이 느껴진다.

 

인터넷 메신저로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막귀형과 나천재로 대화하는 혜원과 선재는 서로에 대한 끌림과 설렘을 몇 줄의 글귀로 드러낸다. 선재는 혜원에 대해 심지어 발도 예쁘다고 말한다. 그러자 혜원은 괜스레 자신의 발을 확인한다. ‘뻑이 간 거지?’하고 막귀의 목소리로 선재의 속내를 묻는 혜원에게 선재는 몸과 마음, 영혼을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슈베르트 환타지아를 쳤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절정 그 자체. 나 아직 동정이라 그 딴 거 모르지만. 실제로 한다 해도 그 이상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타인의 관심에 목마른 선재와 그런 선재의 관심에 괜스레 자신의 발톱에 페티큐어를 바르고는 지워버리는 혜원의 마음과는 달리, 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선재를 이용해 이미지를 격상시키려는 아트센터의 검은 속내다. 재능 있고 스토리 좋은(?) 선재는 돈을 받고 상류층 자제를 입학시키는 학교의 비리를 덮어버리고 대신 인재를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내세워진다. 이들의 표현대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시험 당일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선재는 절망한다. 선재를 입학시키지 못한 재단측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선재의 절망을 목도한 혜원은 차마 그의 앞에 나서지도 못한다. 피아노를 칠 때는 흑심, 잡심, 사심을 버리라고 했지만 자신 또한 바로 그 흑심, 잡심, 사심을 갖고 선재에게 접근했던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혜원은 그렇게 사심과 진심 사이, 현실과 꿈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 선재는 잊고 있던 진심과 꿈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일에만 빠져 사는 선재에게 혜원이 보낸 리흐테르의 전기는 실로 엄청난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피아노 밑에서 잤다.’ 혜원이 밑줄을 쳐 놓은 불우했던 리흐테르의 삶의 이야기는 선재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며 하염없이 흘리는 선재의 눈물은 그래서 재능은 있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못해 날개도 펼쳐보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을 떠올리게 한다.

 

돈 주고 사는 애인이 뭐가 그리 좋다고.” 혜원이 그녀의 친구이자 상사인 영우(김혜은)가 호스트바를 전전하는 삶에 대해 질책하자 영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좋지 않아. 근데 위로는 돼.” 혜원도 영우도 이미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며 예전의 꿈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자포자기 하고 있는 영우와 달리 혜원은 이 지친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원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그녀의 귀에 선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책을 읽고 한 걸음에 달려온 그에게 혜원이 묻는다. “책은 읽어봤니?” 그러자 선재는 흔들리더라구요. 끊었었는데.”라고 말한다. 재주가 아까워 보냈다는 혜원에게 선재는 짐짓 자신은 너무 잘 지내니 그런 거 보내지 말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걸 알아차린 혜원이 거짓말 하면 못쓰지라고 질책하자, 선재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거짓말예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다 지옥이니까.”

 

선재의 절망과 혜원의 공감. 두 사람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 장면 속에는 그래서 그저 남녀 간의 사랑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가 담겨진다. 피아노를 함께 연주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개인적 설렘과 동시에 사회적 공감을 드러냈던 것처럼. 이들의 허락되지 않는 멜로가 더 절절한 까닭이다.

<세결여>의 선택, 공감 받지 못하는 이유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에서 왜 태원(송창의)은 모든 짐을 지고 가게 되었을까. 자신의 딸에게 폭력까지 휘두른 계모 채린(손여은)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던 태원이 갑자기 돌변한 것은 엄청난 반전이었다. 채린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연민을 느낀 태원이 마음을 바꾸게 되는 것.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태원이 채린에게 이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부친의 폭력으로부터도 지켜주겠다고 하자 채린은 아이처럼 태원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개과천선한 채린은 슬기(김지영)와도 가까워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태원네 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도 순식간에 풀어버렸다. 또한 태원은 전처인 은수(이지아)를 만나 자신이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내겠다는 이야기로 둘 사이를 마무리 지었다.

 

태원의 용서라는 선택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김수현 작가가 생각하는 결혼관을 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남과 남으로 만나 한 가족을 꾸려나가는 결혼이라는 일에서 누군가의 희생과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 고치기 위해 파국으로 상황을 몰고 가기보다는 한 때의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주는 자세가 보다 성숙한 선택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청자들은 이 태원의 용서라는 선택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까. 그것은 이 선택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뤄지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답지 않게 그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딘지 우유부단하고 미성숙하게 보였던 태원이 드라마 막바지에 이르러 거의 성인같은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결국 채린이라는 막장 계모라는 카드와 성인으로 돌변한 태원의 선택은 이 드라마가 가진 완성도의 흠결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드라마 중반에 채린을 다루던 이 드라마의 방식을 떠올려 보라. 거의 미저리에 가까운 막장 캐릭터로 채린은 일방적으로 몰아세워졌다. 친엄마의 육성동화를 듣는다고 녹음기를 발로 밟아 부숴버리는 장면이나 심지어 아이를 때리고도 그깟 한 대 때린 걸 갖고...” 운운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극성을 한껏 높여놓은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채린이란 캐릭터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한 이유나 근거는 애초에는 보여주지 않았다. ? 그것이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작 2회 분량을 통해 갑자기 채린의 부친이 저질러온 상습적인 폭행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때문에 태원이 마음을 바꿔먹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로써 채린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뀐다. 그리고 태원은 갑자기 피해자에서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또한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물론 손보살(강부자)의 말처럼 부처님 말씀 같은 결론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갑자기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하다가 성인군자의 말씀처럼 끝을 맺는 건 너무 허무한 느낌마저 준다.

 

태원은 이로써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희생하는 인물이 된다. 물론 인물의 성장은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인물의 변신은 그 선택의 이유를 의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모든 갈등과 대립이 태원의 희생 하나로 급히 봉합되는 결말은 그래서 그 선택의 의미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공감 받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다 이런 결과가 만들어진 걸까. 의도는 이해되지만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KBS까탈레나방송부적격 판정 도대체 왜?

 

인명경시가 이유란다. 오렌지 캬라멜의 신곡 까탈레나의 뮤직비디오가 KBS의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MBCSBS가 심지어 전체 관람가판정을 냈던 뮤직비디오였다. 그런데 왜 KBS는 유독 심의에서 이런 판정을 내리게 된 걸까.

 

사진출처:카탈레나 뮤직비디오

인명경시라고 굳이 판정한 이유는 뮤직비디오가 오렌지 캬라멜이 초밥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과정을 콘셉트로 삼았기 때문이란다. 뮤직비디오는 오렌지 캬라멜의 세 멤버들이 인어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들은 첫 장면부터 도마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 도마 위와 아래에는 젓가락이 놓여져 있다. 익숙한 생선초밥집의 광경이다.

 

뮤직비디오는 이들이 초밥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랩으로 싸여진 포장지에 담겨져 팔딱이는 인어들은 각각 가격표가 매겨져 있다. 못생겼지만 자연산인 문어로 분장한 개그맨의 가격은 78천원. 그런데 예쁘게 생긴 이들 인어들은 가격이 4천 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어 옆에는 가로치고 양식이라는 문구도 들어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는지 세일을 한다며 가격이 반값으로 매겨지는 과정도 보여준다.

 

노래는 까탈레나의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거의 의미 없는 가사들의 나열로 표현한다. 기막힌 건 맥락이 없어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경쾌한 리듬과 이들의 깜찍한 춤동작이 매력적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런 노래에 맞춰 뮤직비디오는 이들이 생선초밥으로 탄생해 회전초밥집 진열대 접시 위에 올려져 팔려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 나아가 초장에 찍히는 모습까지.

 

인명경시? 파격적인 콘셉트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인명경시라기보단 위트 있는 풍자에 가깝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인명경시되고 있는 세상에 대한 풍자랄까. 초밥집의 인어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 그대로가 아닌가. 우리는 그 사회의 도마 위에 올려지고 적당히 가공되어 상품 진열대에 전시되는 존재들이다. 가격이 매겨진 채로.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소비되기 마련이다.

 

까탈레나의 뮤직비디오는 따라서 이러한 스펙과 상품사회의 단면을 초밥집의 인어라는 설정을 통해 살짝 뒤틀어 보여준 것이다. 누군가의 젓가락이 우리를 소비하기 위해 저 편에서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진열대 위에서 심지어 소비되지 않는 것조차 불행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 이토록 명쾌한 현실인식을 담아낸 뮤직비디오가 있을까.

 

KBS는 도대체 이 뮤직비디오의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 설마. 실상은 이 뮤직비디오가 통렬하게 드러내고 있는 우리네 현실의 진면목이 두려웠던 건 아닐까. 젓가락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이 뮤직비디오가 그간 목구멍에 밀어 넣었던 것들을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 불편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인명경시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뮤직비디오에 인명경시라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판정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까탈레나뮤직비디오의 후반부에 가면 초밥을 소비하는 일단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개그맨 정태호는 조폭 두목처럼 앉아서 졸개들이 입에 넣어주는 초밥을 즐긴다. 서열사회의 일단이다. 마지막에는 오렌지 캬라멜 멤버들도 그 자리에 앉아 초밥을 입에 넣는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굉장히 발랄하고 귀여움에 매료되는 음악과 뮤직비디오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아련한 페이소스 같은 것이 느껴진다. 겉모습은 대단히 화려하고 발랄해보이지만 그 이면은 끔찍함을 드러내는 인명경시사회가 주는 우울. ‘까탈레나는 그런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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