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패니메이션, J팝에 이젠 K콘텐츠와 협업까지 

이젠 <진격의 거인>인가. 영화로 개봉된 <진격의 거인 더 라스트 어택>이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23년 <더 퍼스트 슬램덩크> 신드롬과 최근 불고 있는 J팝 열풍에 한일간 콘텐츠 협업도 늘고 있는 현재, J콘텐츠의 진격은 무얼 말해주는 걸까. 

진격의 거인

<진격의 거인> 단독 상영작 흥행기록 경신

작년 메가박스에서 단독 개봉한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의 애니메이션 <룩백>은 30만 관객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였다. 57분짜리 중편인데다 다른 멀티플렉스에서는 방영하지 않고 오로지 메가박스에서만 방영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30만 관객 돌파는 이례적인 성공이라 봐야 한다. 그런데 재패니메이션 팬덤이 국내에 그만큼 탄탄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성공을 그저 기적이나 우연처럼 보게 만들지 않는다. 이 작품은 <체인소맨>을 그린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으로 그 내용 역시 만화가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하는가를 그렸다. 재패니메이션 혹은 일본 망가의 국내 팬들이라면 보는 것으로 일종의 ‘소장욕구’를 만족시키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이 흐름을 새롭게 이어가고 있는 작품이 바로 <진격의 거인 완결판 더 라스트 어택(이하 진격의 거인)>이다. 역시 메가박스 단독 개봉작인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이미 55만 관객을 돌파하며 작년 <룩백>이 썼던 단독 상영작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이 작품은 2009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1년 간 연재됐던 만화가 원작이다. TV시리즈로도 제작되어 2013년에 25화가, 시즌2는 2017년 12화가, 시즌3는 2018년 10화가, 파이널 시즌은 2020년 파트1 16화가 2021년 파트2 12화가 방영됐고 완결편은 2023년 전후편(총 7화)으로 방영됐다. <진격의 거인>은 국내에서도 방영되어 일찍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진격의 ○○’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만큼 팬덤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다시금 화제가 된 데는 OTT의 영향도 적지 않다. 티빙, 넷플릭스, 웨이브에서 전편을 볼 수 있어 영화가 개봉한 후 ‘복습’하듯 다시 본다는 팬들도 적지 않고, 이러한 화제성에 팬으로 유입되는 이들도 많아졌다. 물론 전체 회차 수로만 90회가 훌쩍 넘은 대작이지만, 매 회 20분 정도의 분량인지라 숏폼에 익숙한 현 영상 소비 세태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한 번 보면 끝없이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방대한 세계관 때문에 깊은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고, 그래서 더더욱 많은 떡밥들로 팬심을 자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재패니메이션에서 OST를 타고 넘어가는 J팝 열풍

재패니메이션의 인기는 OST의 인기로도 이어진다. 일찍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무려 490만 관객을 동원하며 신드롬을 일으켰을 때 일본 록 밴드 10-FEET가 부른 ‘제ZERO감’이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진격의 거인>의 인기는 링크드 호라이즌의 ‘홍련의 화살’, ‘심장을 바쳐라’ 그리고 히구치 아이의 ‘악마의 아이’ 같은 곡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이제 J팝 팬덤의 저변이 넓혀지는 일반적인 과정이 됐다.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가 국내에서 히트를 치면서 그 OST를 불러 화제가 됐던 요아소비는 대표적인 사례다. 독특한 음색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창력으로 ‘장송의 프리렌’, ‘주술회전’ 같은 일련의 애니메이션 OST를 부른 요아소비는 국내에도 두터한 팬층을 갖게 됐다. ‘은혼’의 OST ‘Some like it hot!’으로 유명한 스파이에어나, ‘스파이패밀리’,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OST로 큰 인기를 끈 오피셜히게단디즘, 또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그리고 ‘날씨의 아이’ 등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OST를 불러 국내 팬들의 주목을 받은 레드윔프스도 OST를 타고 J팝 열풍을 이끈 주역들이다. 물론 요네즈 켄시나 아이묭처럼 OST와 상관없이 유명한 J팝 아티스트들이 존재하지만, 재패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이런 유명 아티스트들을 OST에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그 시너지는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국내의 J팝 열풍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건 최근 이들의 내한 공연이 급증한데다 그 열기도 뜨겁다는 사실에서다. 작년 말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공연한 요아소비의 티켓은 1분만에 모두 팔려나갔다. 요네즈 켄시, 아이묭, 유우리의 단독공연도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J팝 팬덤의 공고함을 보여줬다. 이들은 몇 년 전만 해도 국내 공연에서 몇 백 명을 모으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올림픽 체조경기장, 인스파이어 아레나, 킨텍스 등 대형 공연장에 관객들을 꽉꽉 채워넣을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콘텐츠 한일 교류도 뜨거워졌다

물론 K콘텐츠의 일본 열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따라서 J콘텐츠의 진격은 이제 한일 대중문화의 교류가 쌍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시계를 90년대 말로 되돌려 보면 이런 쌍방향 문화 교류는 ‘선언’적 의미만 있었을 뿐 그다지 가시적인 흐름은 잘 보이지 않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단행한 일본 문화 개방 조치는 4단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뤄져 2004년 전면 개방에 이르렀지만, 국내에서 J콘텐츠의 소비는 극히 미미했고 그것도 음성적인 흐름이 대부분이었다. ‘왜색 문화’가 들어온다며 우려의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사실상 일본 문화 개방 조치는 K콘텐츠의 체질을 강화시켜주는데 일조했다. 즉 개방 이전에는 한국 방송사들의 일본 콘텐츠 베끼기가 일상이었다. 대중들에게 원천적으로 차단된 일본 콘텐츠였기에 공공연했던 베끼기는, 개방된 이후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이 이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개방으로 보다 경쟁력을 요구받게 된 K콘텐츠는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2003년 <겨울연가>가 일본을 강타했고 2010년대에는 소녀시대, 카라가 일본 내의 K팝 열풍을 이끌며 급성장한 K콘텐츠들의 일본 팬덤들이 생겨났다. 그 사이 우리에게도 J콘텐츠의 팬덤이 생겨났는데 그 대표주자는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변되는 재패니메이션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2021년 <너의 이름은>으로 국내에서 흥행을 거둔 신카이 마코토 열풍으로 이어졌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부터 <진격의 거인>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앞서 말한대로 재패니메이션과 더불어 OST를 타고 J팝의 저변도 생겨났다. 여기에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는 <최애의 아이>, <은혼>, <장송의 프리랜>, <하이큐> 등등 다양한 재패니메이션 시리즈를 선보이며 보다 다양한 J콘텐츠를 일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해줬다. 정서적 차이 때문에 거리감이 있던 일본 드라마들도 다양성을 요구하는 OTT 구독자들에 의해 인기를 끌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나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같은 시리즈나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같은 영화가 그 대표적인 J콘텐츠들이다. 

 

K콘텐츠와 J콘텐츠의 양방향 성장과 교류가 이뤄지면서 양국 콘텐츠의 협업도 늘고 있다. 작년에 방영되어 양국에서 큰 인기를 끈 <아이 러브 유> 같은 시리즈나, 성시경과 <고독한 미식가> 고로상 마츠시게 유타카가 양국의 음식을 맛보는 콘셉트의 <미친 맛집>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최근 CJ ENM은 일본의 TBS와 함께 드라마, 영화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협업을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K콘텐츠나 J콘텐츠의 진격이 일방향적인 것이 아닌 쌍방향으로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과거사 문제 같은 외교적 사안들이 정서적 거리감을 주긴 하지만, 적어도 콘텐츠의 영역에 있어서는 협업이 가능해진 한일 문화 교류의 변화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글:시사저널, 사진: (주)애니플러스)

‘협상의 기술’로 전설의 협상가가 되어 돌아온 이제훈

협상의 기술

배우의 자질 중 목소리가 가진 지분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 보여지는 게 직업인 배우인지라 비주얼이 가장 중요할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우는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보는 이들을 그 역할에 몰입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설득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진짜 중요해지는 건 목소리다. 중저음의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은 똑같은 대사도 달리 들리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제훈은 바로 그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뭐든 설득될 것 같은 신뢰감이 느껴진다. 

 

최근 드라마 ‘협상의 기술’은 그래서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 신뢰감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M&A 전문가로서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윤주노라는 인물이 그가 맡은 역할이다. 그는 위기에 처한 산인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돌아온 M&A 팀장으로 ‘백사’라 불린다. 하얀 머리 때문에 붙은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행동하기 전에 ‘백 번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과거 함께 일했던 오순영(김대명) 변호사와 탁월한 암산 능력을 가진 곽민정(안현호) 그리고 신입 인턴이지만 학창시절 주식 투자 동아리 회장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의 능력을 갖춘 최진수(차강윤)로 팀을 꾸려 본격적인 M&A에 들어간다.

 

협상가의 첫 번째 덕목은 어떤 상황에서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윤주노는 거의 표정이 없고 말하는 톤도 거의 변화가 없다. 협상이 마무리되어 계약을 하는 당일에 갑자기 틀어진 계약 취소 상황에서도 그는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곰곰이 그 해결책부터 차근차근 찾아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일견 망한 것 같은 협상에서도 그는 막판에 상황을 뒤집는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협상가의 두 번째 덕목은 냉철하면서도 담대한 대응이다. 제 아무리 아픈 제 살이라고 해도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도려내는 차분하고도 대담한 선택이 요구된다. 그는 산인그룹의 중심이 건설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로 그 건설을 먼저 M&A 하겠다고 선언한다. 파는 물건은 사는 이들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다. 그리고 이 윤주노가 보여주는 협상가의 세 번째 덕목은 비즈니스 그 이면에 사람을 본다는 점이다. 윤주노는 이커머스에 진출하기 위해 택배왕을 만든 차차게임즈라는 게임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 자질을 발휘한다. 모두가 비즈니스에 집중할 때 그는 그 게임 개발자가 왜 그런 게임을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그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끝끝내 그 회사를 인수하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이제훈은 이 윤주노라는 협상가의 캐릭터를 구축해내기 위해 이 세 가지 덕목을 드러내는 연기요소들을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과,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하게 나서서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해가는 모습 그리고 차가운 모습 이면에 슬쩍 슬쩍 드러나는 따뜻한 인간미가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이제훈이 지금껏 해왔던 연기 필모를 들여다 보면 그 다양한 얼굴들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영화 ‘건축학 개론’의 그 순하고 순수한 청년의 미소나, 드라마 ‘시그널’에서의 절박한 모습, 영화 ‘박열’의 무정부주의자가 보여주는 자유로움, ‘아이캔스피크’의 공무원 역할로 보여준 반듯함, 그리고 드라마 ‘모범택시’의 장르화된 액션 히어로의 모습과 ‘무브 투 헤븐’의 따뜻한 인간애, 게다가 ‘수사반장 1958’에서의 활극 히어로 같은 다채로운 역할들 속의 얼굴들이 그것이다. 앳된 얼굴이지만 벌써 마흔의 나이에 연기경력만 20년에 육박하는 이 배우는 그간 참 다양한 역할들을 통해 성장해오면서 이제는 여러 면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쓸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하나로 꿰어주는 데는 앞서 말했던 이제훈의 차분하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중요한 몫을 했다. 물론 거기에는 매 역할을 분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습과 노력이 전제된 것이지만, 이제훈의 목소리는 그 노력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시그널’처럼 무전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판타지 설정이 들어있는데, 이제훈의 진실된 느낌의 목소리는 어찌 보면 믿기 힘들어지는 이 판타지조차 믿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했다. 또 ‘모범택시’처럼 판타지적 인물을 장르적으로 해석한 캐릭터에 특유의 현실감이 부여된 것 역시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이 큰 역할을 했다. 

 

‘협상의 기술’은 냉정함과 따뜻함의 양면을 담은 드라마다. 즉 냉정함이란 협상으로 대변되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말한다. 실로 ‘협상의 기술’에서는 같은 회사의 동료들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을 저지르는 정치싸움 같은 것들이 펼쳐지는 냉정 그 이상의 비정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협상에 이르는 힘은 그 속내를 먼저 들키면 안되는 냉정한 세계 속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애써 읽어내려는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마음들은 그의 협상력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연기도 일종의 협상이지 않을까 싶다. 믿고 싶어하지 않는 관객과 시청자들을 앞에 두고 믿고 싶게 만드는 협상의 과정이 그것이다. 무표정할 때는 일견 차갑게 보이는 이제훈의 얼굴은 그 무표정을 거두고 살짝 미소 지을 때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고, 숨겼던 감정을 드러낼 때 더 강력한 폭발력을 갖는다. 특히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 역할이 무엇이든 우리는 이 배우에게 설득된다. 이것이 이제 20년에 다다른 연기 경력을 통해 이제훈이 갖게 된 연기 협상력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네 덕에 나도 많이 배운다.” 김형주 ‘승부’

승부

늘 이기기만 하던 세계 최고의 국수 조훈현(이병헌). 그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기재를 보이는 이창호(김강훈, 유아인)를 거둬 제자로 키운 것. 문제는 너무나 뛰어난 기재를 갖고 있어 제자의 성장이 순식간에 이뤄졌다는 것이고, 그래서 제자를 키운 스승이 도전을 받는 상황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영화 ‘승부’는 바로 이 조훈현과 이창호의 드라마틱한 사제대결을 통해 진정한 승부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그린 작품이다. 

 

사실 영화는 실화 자체가 가진 힘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 조훈현에게 배웠지만 결국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내 스승을 이겨버린 이창호의 등장은 당시 바둑계에 충격 그 자체였다. 1990년 벌어진 최고위전을 시작으로 이창호는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하나 빼앗았고 조훈현의 시대는 저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절치부심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조훈현 9단은 91년 이창호와 치러진 대국에서 명승부를 펼치며 이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둑에 대한 영화지만, 바둑을 몰라도 될 정도로, 사제지간이라 남다를 수밖에 없는 승부에 집중한다. 이긴 제자는 마음껏 즐거워하지 못하고, 진 스승은 좌절하면서도 그런 제자를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네 덕에 나도 많이 배운다”며 자신 역시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조훈현은 제자에게조차 배울 수 있다는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다. 그는 “창호가 그랬듯이 이제 제가 창호한테 도전하겠다”고 말하는 스승이자 패자다. ‘제자는 스승을 이기는 것만이 참된 보답’이라고 조훈현은 늘 말했다고 한다. 조훈현은 승자도 언젠가는 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패자가 됐을 때 보여주는 품격이다. 불복을 모르는 우리의 현 정치가 한 수 배워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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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의 가족 시대극은 KBS의 가족극과 뭐가 다를까

폭싹 속았수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넷플릭스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가 KBS에서 방영됐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시청률과 화제성이 폭발했을 결과들이 떠오른다. 물론 방송의 결과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상상으로 이런 예상을 해보는 일이 별 의미 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상상까지 동원해 보는 건, 그간 KBS가 유일하게 지속해온 가족드라마가 갈수록 고꾸라지고 시청층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폭싹 속았수다>를 써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임상춘 작가는 사실상 KBS가 낳은 작가다. MBC 단막극 <내 인생의 혹>과 SBS 단막극 <도도하라>를 쓰며 2014년에 데뷔했지만 본격 데뷔작이라 여겨지는 건 차영훈 감독과 함께했던 KBS 4부작 <백희가 돌아왔다>다. 그 후 <쌈, 마이웨이>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임상춘 작가는 차영훈 감독과 함께 <동백꽃 필 무렵>으로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2019년 시청률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도 <동백꽃 필 무렵>은 무려 23.8% 최고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에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제 KBS가 끌어안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커진 임상춘 작가가 올해 새로 가져온 <폭싹 속았수다>는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방영됐다. 600억짜리 대작이고 스타 드라마 감독인 김원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캐스팅도 아이유에 박보검은 물론이고 문소리, 박해준에 나문희, 김용림, 염혜란, 정해균, 오정세, 엄지원, 백지원 등등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 아닌 연기자들이 없다. 사이즈가 커졌다는 말이 딱 실감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임상춘 작가의 세계가 얼마나 가족 서사를 깊이있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게다가 <폭싹 속았수다>는 그 가족 서사에 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대의 흐름을 애순의 어머니 광례(염혜란), 애순(아이유, 문소리), 그리고 애순의 딸 금명(아이유)으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로 풀었다. 시대극의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시대극과 가족드라마는 사실 과거 지상파 드라마의 대표적인 장르들이었다. 하지만 가족에서 개인 서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시대의 변화와, 미디어의 변화, 지상파의 제작환경 변화 등과 맞물려 이들 장르들은 서서히 힘을 잃었던 게 사실이다. 여전히 KBS만 가족드라마(주말드라마)와 시대극(<오아시스>나 <오월의 청춘> 같은)을 시도하고 있지만 반향만 예전만 못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바뀐 시대에 맞는 시대극과 가족서사가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 우리 시대에 맞는 가족서사와 시대극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고, 또 그 힘 또한 강력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중장년 구독자층의 시청 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제 구독료만이 아니라 광고 수익을 목표로도 하고 있는 넷플릭스로서는 이러한 시청 세대의 폭이 늘고 있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KBS 같은 지상파가 가족서사와 시대극 같은 어찌 보면 공영방송에 어울리면서도 지금의 트렌드에 맞는 서사들을 발굴해내는 일이 OTT를 흉내내 장르물에 뛰어든다거나 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들이 가족드라마를 점점 외면하는 건, 가족서사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가족서사만을 적당한 클리셰로 범벅해 보여주는 가족드라마들에 질렸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새롭고 참신하며 감동도 주는 가족서사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폭싹 속았수다>의 임상춘 작가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가와 서사를 발굴하려는 노력, 어쩌면 여기에 현 지상파들이 가진 딜레마를 풀 열쇠가 있지 않을까.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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