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로 진화한 '런닝맨', 어디까지 갈까

'런닝맨'(사진출처:SBS)

'런닝맨', 그 시작은 미미했다. 그저 도시 공간에서 팀을 나눠 익숙한 게임을 벌이는 그런 버라이어티쇼라고 생각됐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이라는 것이 이미 스튜디오형 게임 버라이어티쇼나 '1박2일', '무한도전', '패밀리가 떴다' 등에서 시도됐던 야외형 게임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런닝맨'은 끊임없이 공간에 맞는 게임을 진화시켰고, '스파이'라는 개념을 넣어 제작진과 출연자들 간의 두뇌싸움을 시도하더니, 급기야 RPG(Role-playing game)로까지 발전시켰다. '런닝맨' 초능력자 특집은 그 결과물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하하, 공간을 재배치할 수 있는 유재석, 분신술(?)을 사용할 수 있는 개리, 육감으로 모든 감각을 확장할 수 있는 김종국,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지석진, 모든 이들의 능력을 꿰뚫어볼 수 있는 송지효 그리고 데스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이광수. SF, 판타지에서나 봤을 법한 캐릭터들이 총출동한 초능력자 특집은 이제 이 끝없이 진화하는 게임 버라이어티가 또 한 번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지금껏 게임 버리이어티쇼에서 캐릭터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캐릭터가 있기 때문에 게임은 그저 승패를 떠나 그 과정이 재미있게 된다. 즉 캐릭터들 사이에 관계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초능력자 특집은 RPG게임에서 우리가 캐릭터를 정하면 그 독특한 능력이 자신의 캐릭터가 되듯이, 이제 이 게임 버라이어티가 캐릭터 또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캐릭터의 시발점은 어찌 보면 런닝맨 출연자들의 등판에 붙인 이름표, 죽게 되면 나타나는 저승사자들(?), 그리고 게임에 활용됐던 통신수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이름표는 그저 출연자들의 존재를 알리고 승패를 위한(떼면 죽는) 도구로 활용되었지만, 차츰 그 이름표 뒤에 '스파이' 같은 비밀 캐릭터를 덧붙임으로써 RPG의 단계로 넘어오게 되었다. 초능력자 특집은 이 이름표를 활용한 캐릭터의 무한 확장 버전이다. 즉 개리가 갖고 있는 분신술은 사실 똑같은 '개리' 이름과 복장을 한 네 명의 캐릭터가 등장해 개리를 보호하는 콘셉트이고, 죽어도 다시 되살아나는 지석진은 이름표 안에 두 개의 이름이 더 붙어 있어 하나를 떼어도 두 개의 '생명'이 남는 콘셉트다.

여기에 시간을 되돌리는 하하나 공간을 되돌리는 유재석 캐릭터는 게임에서 죽게 되면 나타나는 저승사자들의 새로운 활용법이다. 중간에 게임을 하다가 시간을 되돌리면 저승사자들이 나타나 1시간 뒤의 상황으로 캐릭터들을 되돌려놓는 식이다. 또 육감을 활용하는 김종국은 그간 게임에 활용되었던 전화기와 무전기의 새로운 해석이다. 사실 통신수단이라는 것은 감각의 확장이 아닌가.

RPG 게임을 도입하자 스토리는 더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모두가 허무하게 죽게 된 상황에서 하하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사용하자 다시 모두 되살아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이 게임의 반전 요소 역시 이렇게 부여된 캐릭터를 통해 더 강화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만일 이 RPG 게임적인 요소가 앞으로 적절히 활용된다면 '런닝맨'은 좀 더 복잡하지만 훨씬 더 흥미로운 게임 버라이어티를 구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실 RPG 게임은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지만, 이것을 TV예능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실제 인물들이 하는 것은 어쩌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게임이 만일 '런닝맨' 초기에 시도되었다면 대중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대중들은 '런닝맨'의 게임은 물론이고 그 캐릭터 개념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초능력자 특집은 이제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시간을 겪은 후에 나온 결과물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도대체 이 놀라운 게임 버라이어티쇼는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가. 사실 게임 버라이어티에서 진화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게임은 한 번 진행되고 익숙해지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반복적인 느낌을 계속 상쇄시켜주기 위해서는 진화가 필요하다. 물론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을 도전하고 있는 '런닝맨'은 그래서 마치 '무한도전'이 취하고 있는 끝없는 형식 실험의 게임버전을 보는 것만 같다. '런닝맨'이 '무한게임도전'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KBS 연예대상' 유감

김병만(사진출처:BM엔터테인먼트)

사실 연말 시상식을 두고 누가 대상을 탔네, 누구는 상을 못 탔네 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연말 시상식이 결국은 방송사들의 자축연 같은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이제 대중들은 매번 연말마다 논란이 되는 시상결과를 통해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사의 잔치라고는 해도 그것이 TV를 통해 방영될 때는 어느 정도 공감 가는 시상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해 'KBS연예대상'은 유독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가 많은 시상식으로 남게 됐다.

가장 대중들의 관심이 높았던 대상의 수상자가 애초 후보에도 없던 '1박2일' 팀 전원에게 돌아간 것은 거기 같이 후보에 오른 이들이나, 그들을 지지했던 시청자들에게도 모두 상식 이하의 결과라고밖에 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은 대상 후보에 오른 그 누구 한 명을 지목하기가 곤란했던 상황을 반증하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특히 강력한 대상 후보였던 김병만이 대상은커녕, 그 흔한 특별상 하나 받지 못한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는 올해 KBS 예능의 대표주자가 된 '개그콘서트'에 최장수 프로그램인 '달인'을 통해 끊임없는 도전을 보여줬던 인물이 아닌가.

매년 KBS 예능을 장악한 것은 '해피선데이'였지만 올해 대중적인 지지도는 '개그콘서트'가 훨씬 높았다. 그것은 시청자가 참여한 투표를 통해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개그콘서트'가 상을 받게 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개그콘서트'에 가장 큰 기여를 했거나 존재감을 보인 인물에게 상이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그 장기 프로젝트를 끝낸 김병만에게 아무런 상이 돌아가지 못했을까.

결국 이것은 김병만이 '개그콘서트'를 그만 두고 타 방송사 프로그램에 투입된 것에 대한 KBS의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가 없다. 즉 김병만은 SBS의 '김연아의 키스 앤 크라이', '정글의 법칙'을 통해 확고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JTBC에서 '상류사회', '개구쟁이' 등에도 출연하고 있다. KBS로서는 '개그콘서트'를 통해 키워낸 달인이라는 캐릭터가 결국은 타 방송사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이 달가울 리가 없다. 이것은 만일 김병만이 타방송사 활동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개그콘서트'에 남아있었다면 연예대상 결과가 어땠을까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방송사 입장에서 시상식이란 올해의 결과도 결과지만 내년의 약속(?)도 포함된 것이다. 따라서 김병만이 대상을 받는다는 것 역시 방송사로서 허용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생겨난 김병만의 가치는 결국 타방송사에서 이득을 취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노력에 대해 대상은 아니라도 무언가 KBS에서의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것은 김병만이 굳이 타방송사의 프로그램에 들어간 것이 KBS를 배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사실 김병만 정도의 캐릭터를 구축한 인물이라면 애초부터 KBS가 그를 위한 어떤 프로그램을 기획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KBS는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점점 몸집이 커진 김병만이 '개그콘서트'의 달인으로 영원히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타 방송사의 제안을 뿌리치기도 어려웠다는 얘기다. 이러한 김병만의 선택은 또한 그의 다른 도전을 보고 싶은 시청자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올해 'KBS 연예대상'은 강호동의 잠정은퇴 선언으로 그 어느 때보다 대상자를 뽑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대상이 후보에도 없던 '1박2일' 팀 전체에게 돌아간 점과, 김병만이 아무런 상 하나 받지 못하게 된 점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 흔한 공동수상도 어려웠던 것일까. '개그콘서트'에 그토록 많은 상을 주면서 동시에 김병만에게 상을 주지 않은 것은 그래서 어찌 보면 KBS의 입장을 전한 것처럼 여겨진다. '개그콘서트'는 결국 개그맨들을 발굴하는 산실이지만, 그들이 커서 타 방송사의 방송을 하게 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전언.


오지로 가는 TV, 무엇을 찾았나

'남극의 눈물'(사진출처:MBC)

'정글의 법칙'과 '남극의 눈물'. 금요일 밤 TV는 오지로 향한다. '정글의 법칙'은 쫄쫄 굶어 허기진 배를 이끌고 한 발 떼기도 힘들 정도의 진창을 걷고, 위험천만한 강을 건너서 파푸아 정글의 코로와이족을 찾아가는 김병만족의 여정을 보여주었다. 같은 시각, '남극의 눈물'에서는 무려 300일 동안 극한의 오지 남극에서 목숨을 걸고 찍어온 영상들의 프롤로그가 방영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펭귄들과 해표, 물개, 혹등고래 등의 극지에서의 생태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걸 찍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촬영팀의 전체적인 이야기가 기대감을 자아내게 했다. '정글'과 '남극'.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찾아서 그 먼 오지까지 달려간 것일까.

'정글의 법칙'은 김병만족의 생존기를 다루는 '생존 리얼리티쇼'. 험난한 정글 속에서 맨몸으로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자리를 마련하며 생존하는 과정을 그린다. 다큐멘터리적인 리얼 영상이 심지어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의 생생한 정글의 느낌을 전해주지만, 또한 그 와중에도 예능적인 웃음을 포기하지 않는 퓨전적인 프로그램이다. 사실 리얼리티쇼가 전 세계적인 방송 트렌드로 자리하면서 이러한 '생존기'를 담은 프로그램은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은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글의 법칙'은 이러한 서구의 '생존 리얼리티쇼'와는 확연히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혼자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김병만을 위시한 리키김, 노우진, 광희, 태미가 하나의 가족을 이뤄 이 극한 지대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생존능력이 뛰어난 김병만과 리키김은 그래서 때로는 이 나머지 가족들(?)을 위해 목숨을 건 강물 건너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생존능력을 발휘하는 그 원동력은 거기 다른 구성원들이 함께 한다는 것 때문이다. 이 가족적인 분위기는 '정글의 법칙'만이 가진 '생존 리얼리티쇼'의 특별함이다. 즉 정글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주는 건 생존만이 아닌 점점 형제처럼 가까워지는 그들의 가족애다.

이것은 '남극의 눈물'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남극의 눈물'을 여느 생태 다큐멘터리와 차별화시키는 것은 그 안에서도 인간과 동물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끈끈한 가족애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황제펭귄이 혹한 속에서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발 위에 올려놓고 몸으로 덮어주는 장면이나, 새의 공격으로부터 자식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버리는 어미 펭귄, 종족 번식을 위해 온 몸이 찢겨지는 싸움을 벌이는 해표, 거대한 체구에서도 모성을 느끼게 하는 혹등고래의 생태는 그것이 동물이라는 하나의 테두리로 포괄하는 우리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혹한 속의 생태 풍경들 속에 또한 한 풍경으로 자리한 남극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어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남극의 모습은 그 이야기를 지구촌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정글의 법칙'과 '남극의 눈물'. 어찌 보면 달라 보이지만 또 달리 보면 비슷해 보이는 이 프로그램이 결국 오지에서 발견한 건 신기한 풍경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애나 가족애 같은 말은 이제 이 편안한 세상에서는 너무 흔해빠진 말이 되어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굳이 오지로까지 달려가는 TV를 통해서 비로소 그 말이 가진 절절함을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그 곳에서의 '법칙'과 '눈물'은 어쩌면 그간 무뎌진 우리의 인간애에 대한 감각을 벼려줄 지도 모르겠다.


소통에 더 갈급한 세상, '뿌리'의 선택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지랄하고 자빠졌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지랄'이라는 대사는 극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화두다.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죽은 아버지 앞에 오열하며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하고 소리칠 때, 그 '지랄'은 이도의 뒤통수를 때렸다. 복잡한 말 장난 같은 이념과 철학의 대결구도 속에서 고뇌하고 힘들어할 때, 이 어린 백성의 한 마디 '지랄'은 오히려 이도에게 속 시원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뭐가 그리 복잡한가. 저리 힘들어하는 백성이 있는데.

'지랄'. '마구 어수선하게 떠들거나 함부로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 사극의 대사 속에서 사용되는 '지랄'은 이런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럴 듯한 논리가 아닌 직관적으로 사태를 사정없이 드러내는 장치다. '지랄' 앞에 논리란 필요 없다. 그저 그런 속된 말이 나오는 현실만이 던져질 뿐이다. 논리가 가진 자들의 무기라면, 욕은 없는 자들의 무기다.

성장한 세종(한석규)이 등장해 처음 던지는 대사가 '지랄'에서 시작되어 진화된(?) '염병', '우라질'이라는 사실은 이 캐릭터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준다. 탁상공론처럼 양반행세하며 입바른 소리하는 권력자들과 집현전에서 토론하는 장면에서 세종은 하나하나 논리로서 대응하지만, 그런 그의 입매에는 묘한 조소가 달려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던 그 한 백성의 소회를 입바른 소리하는 신하들에게서 똑같이 느끼기 때문일 게다. 세종은 '지랄'을 통해 처음 백성과 소통했고, 그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백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위한 글자 창제에 투신하게 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금껏 세종을 다룬 사극들이 한글의 창제 과정과 그 위대함에 대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창제된 한글을 배포하고 유포하는 과정에 더 방점을 찍었다. 이미 백성들과 소통할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소통체계를 반대하는 무리들과의 한 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밀본의 본원 정기준(윤제문)은 세종과의 독대를 통해 그가 하려 했던 한글 반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종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 한글 하나 던져주고 알아서 살라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직무유기라는 것. 이 뱀의 혀를 가진 정기준의 말은 세종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자신 때문에 죽어나가는 백성이 더 이상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래서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 오로지 임금의 고단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었던 세종에게 정기준은 그것이 '백성이 아닌 너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요사스런 말의 논리를 깨부수는 건 역시 '지랄'이었다. 그 말에 내상을 입은 세종이 고뇌하고 있을 때, 처음 '지랄'을 알려준 채윤(장혁)이 또다시 일갈한다. "지랄을 하고 계십니다." '백성을 사랑한 적이 없고 대신 미워했다'는 정기준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채윤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백성들의 욕망이 생겨나고 그 욕망으로 인해 지옥이 생길 거라고 비관한 정기준의 논리에 채윤은 "소이가 꿈이 생겼다"는 말로 반박한다. 사상과 이념의 논리 앞에 채윤이 던지는 '지랄'은 이처럼 백성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세종에게 전해준다. 한글 반포와 유포를 막는 자들 앞에 목숨을 던져 넣으면서 죽어가는 세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멈추지 마십시오." 무엇을? 소통에 대한 노력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창제보다는 반포와 유포 과정에 천착하고, 그 유포 과정에서 현대적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SNS나 '사랑의 편지' 같은 방법들이 제시되는 것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소통에 대한 갈급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성들의 언어, '지랄'을 화두로 시작된 '뿌리 깊은 나무'는 그래서 왕과 백성 간의 한글을 매개로 하는 소통을 그려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지랄'로 표현되는 직설적이지만 정직한 대중들의 정서와 그 소통이 아닌가. '지랄'이라는 속된 말이 이토록 가슴을 울렸던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절절한 소통의 욕구가 드라마에 묻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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