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으로 세우고, 선으로 무너뜨린다

'선덕여왕'은 이야기 구조가 흥미롭다. 제목이 '선덕여왕'이라면 응당 그 선덕여왕에 해당하는 덕만공주(이요원)가 먼저 등장하는 것이 정석. 대체로 이런 경우 성장한 덕만공주의 이야기를 도입부에 넣고, 플래쉬 백으로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부터 다시 거슬러오는 수순을 밟기 일쑤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그런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아예 첫 회에 덕만공주(아역이라도)를 등장시키지 않았고, 대신 미실(고현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즉 첫 회는 미실이 가진 막강한 권력과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권력욕, 그걸 채우기 위해 뭐든 하는 위악적이면서 섬뜩한 유혹으로서의 그녀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온전히 할애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목을 '미실'로 할 것이지 왜 '선덕여왕'으로 했을까.

이 부분에서 엿보이는 것은 이 드라마가 취한 고민의 흔적이다. 사실 미실이라는 인물은 최근 문화계에서 주목받는 여성이다. 김별아의 소설을 통해 재탄생된 미실은 그저 역사가 재단한 요부, 요녀의 틀을 넘어서는 인물로 현대적인 새로운 여성상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소설 속에서 미실은 운명의 틀 속에 사로잡혀 태어났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 인물이자, 욕망과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요녀로 전락하지 않은 자유영혼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 시대에 사극의 소재로서 적합한 인물로만 따진다면 그건 선덕여왕이 아니라 미실일 것이다. 그 파격적인 팜므파탈의 여성은 시대를 넘어 자유를 꿈꾸고 자기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 현대여성의 한 아이콘이 아닐 수 없다. 작가들이 밝힌 대로 그들이 미실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부딪치는 것이 사극이 갖는 보편적인 정서와의 대립이다. 아무리 식상하다고 해도 우리네 사극에서 선악구도는 빠질 수 없는 것이며, 그 주제가 여전히 권선징악에서 대중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이면서도 사극으로서의 보편성에서는 벗어나 있는 딜레마를 가지게 된다.

'선덕여왕'이 미실이 아닌 덕만(훗날 선덕여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이런 상반된 두 인물을 차례로 세움으로써 이 드라마는 두 가지의 재미를 모두 갖게 되었다. 그 첫째는 미실이라는 팜므파탈이 만들어가는 파격적인 욕망의 질주를 보는 재미이며, 둘째는 이 벽처럼 존재하는 욕망의 화신, 미실의 세상을 하나씩 허물어가면서 선의 세상을 구원해가는 덕만의 성장스토리가 주는 재미다.

먼저 미실을 세우고 그 다음 덕만을 등장시키는 '선덕여왕'의 선택은 여러모로 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파격적인 내용을 가지고도 전통적인 시청자들을 편안하게 끌어들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미실을 그저 악독한 요부로만 그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선악의 대결처럼 보이고 그것이 사극을 보는 보편적인 정서라도 말이다. 선악의 대결이 아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여성의 대결을 병치시키는 건 여전히 사극의 작법에서는 위험한 시도일까.

'휴먼다큐 사랑', 사랑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세상 그 어떤 부모가 그 작고 예쁜 손을 놓을 수 있을까. 세상 그 어떤 부모가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을 보고 싶지 않을까. 뇌종양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재희(12)의 엄마 정자경씨는 말을 할 수 없는 재희에게 계속 말을 건다. 눈을 뜨라고, 손을 올려보라고, 또 보드판을 내밀며 무언가를 써보라고. 그러면 고맙게도 아이는 엄마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그 작은 동작들을 힘겹지만 해준다. 어쩌면 아이는 엄마가 그 작은 동작 하나에도 기쁨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실로 아이와 함께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부모가 바라는 전부일 것이다. 서로 말을 걸고,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매만지고, 뺨을 맞대는 그것이 아마도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재희의 부모는 그 많지 않은 사람 중의 한 부모다. '우리가 사랑할 시간'을 문득 느끼게 되는 그 순간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옆에 함께 있는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존재들이 아닌가.

'휴먼다큐 사랑-우리가 사랑할 시간 편'은 뇌종양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중인 재희와 그 가족들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길어야 1년이라는 선고에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에서 가족들은 그제야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흔히들 '사랑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재희네 가족이 그 악몽같은 선고 이후 보낸 2년 남짓은 바로 그 말을 실증해보인 시간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얼굴에 크림을 찍어 바르는 엄마는 매일 매일이 이렇게 새로울 수가 없는 것이 모두 재희 덕분이라고 말한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하지만 어찌 고통이 없을까. 매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병수발은 눈앞에서 아파하는 딸을 바라보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고통이었을 것이다. 잘 움직일 수 없는 딸의 손과 발이 되어 거의 모든 것을 해주고 있지만, 딸의 아픔을 대신해줄 수는 없는 그 손과 발은 또한 얼마나 무력하게 느껴졌을까.

하지만 꼭 안아주는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재희는 가수의 꿈을 꿀 수 있었고 꿈을 이룰 수도 있었다. 그 품이 주었던 희망은 재희를 살게 해주는 힘이기도 했다. 그렇게 품으로 보듬어 희망을 준 엄마에게 재희는 자주 '미안하다, 고맙습니다'라고 보드판에 삐뚤빼뚤 어렵게 써놓는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재희가 안쓰럽다며 엄마는 "그 애는 나니까 자식은 나니까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건데 그런 얘기 들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이미 엄마는 그렇게 재희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사랑할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것은 재희의 엄마도 또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열두 살 재희와 그 가족은 우리에게 그 얼마나 남아있을 지 모르기에 바로 지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순간순간을 충분한 사랑의 시간으로 지내온 엄마의 가슴 속에서 이미 재희는 그 눈과 입을 닮아버린 별과 노래가 되어 영원히 살아가고 있었다.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로.

고현정과 김혜자, 끝없이 움직이는 그녀들

그녀들의 변신은 어디까지일까.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노화가의 젊은 아내로 능청스런 연기를 보여준 고현정과,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모성애의 전혀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는 소름 돋는 연기를 보여준 김혜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이미지 변신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고순 역할을 한 고현정은 이제 그 능청스런 모습이 자연스럽다. '모래시계'나 '봄날'의 청순한 이미지가 깊이 각인된 분들이라면 언제 고현정이 저렇게 변했는지가 놀라울 만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진 변신이 아니다.

2006년 홍상수 감독을 만난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을 통해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보여주었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말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는 말했던 그녀는 그 때부터 이미 자신을 코르셋처럼 옥죄이며 숨막히게 만드는 신비주의를 벗어버리려 작정한 바 있다.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 고현정은 젊은 남자의 사랑이 부담스러운 노처녀 역할을 자임하며 솔직한 성에 대한 이야기도 주저하지 않았고, '히트'에서의 여반장 역할은 그녀의 고정되어온 가녀린 이미지를 깨뜨렸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이제 다시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온 고현정은 이제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연기가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선덕여왕'에서 미실이라는 희대의 여걸로 돌아온다. 과거였다면 차라리 선덕여왕 역할이 어울렸을 그녀가 파격적인 카리스마와 권력욕에 불타는 미실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이제 그녀의 이미지 연착륙이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좌표가 될 것이다.

한편 봉준호 감독의 '마더'로 김혜자는 자신의 한 평생 연기의 공이자 또 한 편으로는 무거운 짐인 국민 엄마의 틀을 부숴버렸다. 김혜자를 푸근하고 정이 넘쳐 아무나 그 품에 안기고픈 엄마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주는 파격은 실로 충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김혜자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가 갖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서 모성애의 또 다른 측면 즉 광기어린 모습까지도 찾아냈다. 그러니 영화 '마더'의 파격은 김혜자의 파격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화의 도입 부분에서 들판을 걸어오던 김혜자가 갑자기 멈춰 서서 엉뚱하게도 어깨춤을 들썩이며 추는 그 장면에서부터 전율로 느껴진다. 그 춤사위는 흥에 겨운 듯 하면서도 슬프고, 천천히 움직이는 듯 하면서도 광기가 서려있다. 눈빛은 처연한데 그 깊은 눈 속에는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후회가 가득하다.

이 첫 장면이 모든 걸 예고하게 하는 것처럼,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통해 모성의 극한 부분까지 달려 나가는 것으로 국민엄마라는 틀을 깨고 또 다른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고현정과 김혜자, 이 두 연기자의 연기 변신에는 홍상수와 봉준호라는 거장의 손길이 닿아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갖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의 파격에 관심을 가졌던 감독들이다. 그로 인해 고현정이 갖고 있는 신비주의와 김혜자가 갖고 있는 국민엄마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신선함으로 변신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가능하게 된 것은 이 두 배우들의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려는 끝없는 노력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의 변신, 그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내조의 여왕'이 내조한 그들은?

취업의 벽을 간신히 통과해 겨우겨우 조직에 적응해나가고 있는 신입사원 달수씨(오지호),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결국 팽 당한 부장님 준혁씨(최철호), 모든 걸 다 가진 줄 알았지만 정작 자기 행복 한 자락 쥐지 못하고 살아온 사장님 태봉씨(윤상현). 드라마 '내조의 여왕'이 내조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 시대 남성들의 한 전형을 만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안을 들여다보면 조직사회 속에서 받은 상처들로 가득하다. 어딘지 부족해보여서일까.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내조하고픈 마음이 소록소록 돋는 이들의 진짜 매력은 무엇일까. 그들이 표상하는 우리 시대 남성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사회성 부족 신입사원 달수씨, 그 순수함의 양면성
온달수라는 이름은 온달과 백수의 합성어처럼 읽힌다. 취직을 못해 방구석을 전전하지만 좋은 아내를 얻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그는 순진하게도 가난해도 사랑 하나만 가지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다. 또 직장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아양 다 떨어가며, 손금이 없어져라 손바닥 비벼대지 않아도 실력 하나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웬걸? 세상은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능력 없어도 줄만 잘 서고 아부 잘 떨면 승진하고, 행복도 돈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게 세상이다.

'내조의 여왕'의 온달수는 바로 이 갓 사회에 나와 아직 때가 덜 묻은 새내기 샐러리맨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순수함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사회는 조금씩 그 순수함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사회적응이라는 이름으로 때를 묻힌다. 어딘지 가볍고 비굴해 보이는 선배사원들의 패배주의적인 적응기를 영웅담처럼 들어가며, 자신의 직장 내에서의 롤 모델을 찾게 된다. 그 모델은 당장의 눈앞에 가장 높은 존재인 한준혁 부장이다. 자신이 성공하면 앞으로 서 있게 될 그 모습. 하지만 온달수의 눈에도 아니 시청자의 눈에도 그 한준혁의 모습은 어딘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직에만 몰두하는 준혁씨, 그 치열함의 양면성
조직에서 초고속승진의 신화로 불리는 한준혁은 성공하기 위해 가정도 뒤로 접어 둔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자신의 성공 줄을 쥐고 있는 직장 상사를 위해 헌신해온 그는 상사의 정치적인 선택을 위해 동료를 짓밟고 회사의 이익을 저버리는 행위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키워주는 건 회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상사이기 때문.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 성공이 손아귀에 들어올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그토록 믿었던 직장상사는 어느 순간 쓸모없어진 자신을 가차 없이 내버린다. 뒤돌아보니 남은 건 피폐해진 가정뿐이다.

'내조의 여왕'의 한준혁은 치열하게 성공을 향해 달려왔지만 그 끝자락에서 IMF를 맞고 어이없게 퇴출당한 우리네 중년들을 닮았다. 그를 그 자리까지 이끌어준 것이 자신의 능력과 김홍식 이사(김창완)같은 회사에서의 줄 때문이라 생각했던 것은 이즈음 깨져버린다. 그리고 돌아보면 거기 자기 한 사람을 위해 똑같이 치열한 삶을 산 아내 양봉순(이혜영)이 있다. 지독히도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았고, 그토록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 믿어왔던 조직은 그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아준 것은 가족들뿐이다.

다 가진 것 같던 태봉씨, 그 물질적 풍요로움의 양면성
반면 조직 내에서 사실 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틀어쥐고 있는 허태준 사장(일명 태봉씨)은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인물이다. 경제적 원칙(?)에 따라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회사 바깥으로만 나돌았다. 무식해보이고 어딘지 허점이 많아 보이는 천지애(김남주)가 보여주는 가식 없는 모습에 마음이 끌린 건 아마도 그 모든 것이 가짜 같은 물질적 풍요로움의 세계 속에서 그것이 진짜 사람 냄새라고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판타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내조 받지 못하면서도 숨어서 천지애의 수호천사가 되는 허태준 사장은 어찌 보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외로운 인물처럼 보인다. 게다가 감상에 빠져있을 때, 사장이라는 자리는 늘 그 자리를 노리는 자들로 인해 위태로워지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위기 앞에서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사람 냄새는 취하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할 때 얻어지는 것이란 걸 이제야 그는 알아챈 듯하다.

달수씨, 준혁씨, 태봉씨.(그리고 이들과 정확히 짝패를 이루는 나머지 반쪽인 천지애, 양봉순, 은소현(선우선).) 그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그려내는 풍경에는 현재 우리네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아마도 이 수직적인 체계 속에 놓여있는 이들이 점차 경쟁자에서 동지로 바뀌어가는 것을 목격했다면 이 드라마가 보내는 우리네 사회의 남성들(여성들)에 대한 내조의 마음을 본 때문일 것이다. '내조의 여왕'이 내조한 그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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