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 사이, 이준기

참 지독한 배역을 맡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를 오가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이준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연기자들과 캐릭터는 적어도 드라마를 찍는 동안에는 동일인물이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캐릭터가 살 수 없기 때문.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기억과 관련해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은 비단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수현만이 아니다. 그 연기를 하고 있는 이준기 역시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이준기라는 배우를 발굴해낸 멘토의 김우진 이사는 “이준기의 인기는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중성적 매력에 있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중성적 매력이란 여성적이란 뜻이 아니다. 여성적인 꽃미남의 외모를 갖추고 있지만 또한 남성적인 날카로움 혹은 터프함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려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금의 이준기를 있게 만들어준 캐릭터는 ‘왕의 남자’의 공길이다.

공길이란 캐릭터는 말 그대로 중성적이다. 겉으로 표현된 것은 여성적인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배역을 두고 게이라던가, 동성애 같은 말들이 나오지 않았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연기한 공길은 기본적으로 남성이지만, 모성애 같은 여성성이 극대화된 캐릭터였던 것.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연산군이나 장생을 보듬는 모성애로서의 여성성은 이준기의 여장남자 연기에 사회적 편견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게 했다.

문제는 공길이란 캐릭터를 벗고 스크린 밖으로 나온 중성적 이미지의 이준기가 공길을 통해 얻게된 이미지, 즉 여성성이 강조된 꽃미남, 예쁜 남자 같은 크로스 섹슈얼로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후 이준기가 토로했듯이 ‘벼락스타가 짊어질 운명’ 같은 것이었다. 이미지 자체가 자산인 연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로 굳어진 이미지는 양날의 칼이다. 연기자의 본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로의 변신’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따라서 연기자 이준기에게도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살해당한 부모의 아픔을 갖고 자라온 이수현이 강중호(이기영)의 보살핌 속에서 국정원 요원이 되고, 상처가 지워질만할 때 원수인 마오(최재성)를 만나는 장면에서 이준기는 첫 번째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었다. 평범한, 어찌 보면 ‘마이걸’의 서정우 같은 이미지의 이준기는 돌연 눈에 핏발을 잡아가며 총을 들이대는 거친 남자로 돌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호탄이었을 뿐. 언더커버로 들어간 청방에서 갑작스런 사고로 당한 기억상실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원수 밑에서 충실한 개가 되어 비열한 썩소를 날리는 이준기는 복수심과 따스함의 이중성을 갖고 있던 이수현에서 어두운 그림자로서의 케이라는 인물을 끌어낸다. 그리고 결국 정해진 대로 케이가 자신이 이수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캐릭터는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려 할 때,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처럼 청방에서 언더커버로 활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기억의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수현이란 한 인물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지만, 거기에 기억이 덧붙여지면서 이 캐릭터는 다양한 프리즘의 빛깔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준기가 연기하는 이수현의 이런 다양한 모습들은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복수심은 때론 훌륭한 동기부여가 된다”거나, “기억을 잃었다는 건 완벽한 언더커버 요원이 됐다는 걸 뜻한다”는 식의 대사들은 이 드라마가 한 가지 현상에 부여된 양면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드라마를 죽 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저 이수현이란 친구를 저렇게 힘들게 만드는 걸까. 물론 그것은 정보를 쥐고 있는 자들인 정학수(김갑수)나 마오(최재성) 같은 인물들이, 정보가 없는 자들을 이용해 벌이는 권력게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파껍질 같은 기억을 갖게 된 인간이란 존재의 문제다.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억이란 장치 하나로 숨가쁘게 변신하는 감정을 가진 존재. 따라서 이준기에게 이런 양면을 보여주는 이수현이란 캐릭터는 넘어야할 산이면서도 그 자체로 이미지 변신의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한 드라마에서 두 이미지가 다 보인다)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세계가 한국인의 몸에 열광하는 이유

그의 개그에는 말이 필요 없다. ‘뭔가 보여달라’는 신호에 무대를 내려가려 할 때, 관객들의 박수가 터지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뒤뚱뒤뚱 걷기 시작하고, 객석은 순식간에 뒤집어진다. 정말 뭔가 보여주고 떠난 고 이주일 선생의 퍼포먼스다. 비실이 배삼룡 선생은 오뉴월 개가 다리 떠는 모양으로 추는 개다리 춤 한 방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고, 비슷한 시기 남철, 남성남 콤비는 일명 왔다리 갔다리 춤으로 전국 짝꿍들의 18번 춤을 만들어놓았다.

숭구리당당 김정렬은 부실한 하체를 문어처럼 흐느적대는 것만으로 시청자들을 배꼽 빠지게 했고, ‘영구 없다’의 심형래는 언발란스한 얼굴로 눈을 끔뻑대는 모습이면 충분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맹구와 달룡이라는 엄청난 캐릭터를 만들고 사라진, 이창훈은 최근까지도 봉숭아 학당의 그림자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네 몸 개그는 사실상 우리가 가진 웃음의 핵심이 분명하다. 몸 개그와 대척점에 있던 스탠딩 개그, 토크쇼의 본좌격인 전유성이 아이디어를 냈던 ‘개그콘서트’ 역시 초기에는 말 중심의 개그에서 시작했지만 점차적으로 몸 개그로 변화해왔다.

몸 개그가 저질인가
이제 ‘우격다짐’이나 ‘수다맨’ 같은 1인 스탠딩 개그는 찾아보기 어렵게 된 반면, 그저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주로 비교대상이 필요하기에 여럿이 출연한다) 우스운 몸 개그는 이제 모든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시커먼스 노래에 맞춰 숏다리라는 몸의 콤플렉스를 드러내면서 웃기는 ‘키컸으면’, 아예 언어를 옹알이로 지워버리고 서커스적인 동작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옹알스’, 국내 최초 실시간 몸짱 프로젝트를 주창하며 찐 살을 빼는 모습 자체로 웃기는 ‘헬스보이’ 같은 것들은 모두 몸을 희화화하는 몸 개그다.

그런데 한때 저질 개그라 손가락질 받기까지 했던 이 몸 개그를 보는 시선이 이율배반적이다. 재미있다고 깔깔대며 웃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유치하고 작위적이며 너무 원색적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것. 그 기저심리에는 아무래도 ‘말이 아닌 몸으로 웃긴다’는 점이 가장 많이 작용했을 터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몸이 갖는 문화를 하위로 생각하는 태도가 남아있다.

몸 개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무한도전’을 보는 시각은 정확히 이 지점에 위치한다. 노홍철이 하체를 벌떡벌떡 튕기며 춤을 추는 순간, 모두 자지러지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바로 자막을 통해 ‘저질 댄스 작렬!’하며 스스로를 저질이라 칭하는 것.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걸듯이 ‘몸을 고생시키는’ 개그맨들을 보면서 웃다가 ‘도대체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하고 생각하게 되는 그 지점 말이다. 물론 어떤 건 정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단지 몸으로 웃겼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몸은 그렇게 저질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몸은 우리의 경쟁력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 ‘몸은 경쟁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타’, ‘점프’ 같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공연이 말이 아닌 몸과 소리를 극대화시킨 ‘논버벌 퍼포먼스(아무런 대사 없이 리듬과 비트로만 구성된 장르)’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금처럼 다문화 지구 공동체 사회에서 몸이 어떠한 말보다 더 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된다는 걸 말해준다. 모든 퍼포먼스가 인간 공통이 가진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으로 봤을 때, 몸은 말보다 더 앞서있다.

하지만 단지 커뮤니케이션의 이점 때문일까. 여기에는 우리가 가진 몸을 통한 표현의 잠재력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난타’의 성공은 그저 타악을 부엌의 요리도구를 통해 한다는 아이디어의 성공이 아니라, 사물놀이 등으로 이미 입증된 우리네 타악이 가진 잠재력을 세계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몸짓과 소리로 표현해냈던 데 있다. ‘점프’의 성공은 우리가 가진 전통무술의 역동성을 희극적인 장치와 잘 엮어낸 데 있다.

‘흥한민국’의 저자인 심광현 영상원 교수는 프랙탈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를 흥과 한의 배접으로 풀어내면서 “한류의 성공요인에는 한국인들의 몸놀림과 육성에 내재된 다른 민족에는 없는 프랙탈한 역동성과 변주능력, 즉 ‘끼’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치 초상집을 축제 같은 분위기로 풀어내는, 울면서 웃거나 웃으면서 우는 한과 흥의 문화가 몸이 가진 다채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본산지도 아닌 브레이크 댄스를 가지고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 우리네 비보이들의 몸짓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몸 개그가 가진 가능성
혹자는 논버벌 퍼포먼스 같은 예술적인 장르와 저질 개그라 칭하는 몸 개그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성공적인 논버벌 퍼포먼스에서 보여지는 몸의 행위는 기본적으로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 주는 긴장감에 더해지는 희극성에 있다는 점에서 몸 개그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만 거기에는 우리 전통적인 문화가 가진 예술적 가치가 덧붙여진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우리가 몸 개그를 보는 시선은 우리 사회가 비보이를 보는 시선을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선은, 세계가 주목하기 전까지 경박한 춤꾼에머물러 있었다. 춤을 춘다는 몸의 행위에 대한 비하적인 관점을 뒤집은 것은, 그런 편견에도(어쩌면 그 편견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춤을 춘 우리네 비보이들의 노력과, 그것을 사심 없이 인정한 외국의 시선들 때문이었다. 우리가 가진 편견들은 종종 이렇게 우리가 찾아내야 할 가치를 외국이 먼저 찾는 아이러니 속에서 깨지곤 한다.

지난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2회 한류 코미디잔치는 우리의 몸 개그가 가진 가능성을 재확인한 자리였다. 관객들에게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몸 개그. 박준형의 ‘무 갈기’와 정종철의 비트박스, 특히 거의 서커스 수준의 몸 개그인 ‘옹알스’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이것은 모 방송에 출연해 “개그 중에서도 몸 개그가 먹히더라”고 말한 조혜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최근 일본 방송에 출연해 뜨거운 물을 마시고 “아뜨~”하는 포즈와, “스미마셍”을 외치며 무릎을 뒤로 튕겨내는 몸 개그를 선보여 좌중을 쓰러지게 했다.

최근 들어 몸을 활용한 몸 개그는 꾸준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몸 개그에 우리가 저질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쩌면 천편일률적인 식상한 몸 개그에 대한 비판이 아닐는지. 이제 몸 개그도 무조건 저질이라 치부하지말고 그 질적 수준을 따져봐야 할 때다. 혹시 누가 알까. 우리의 몸 개그에 세계가 배꼽을 잡는 그 날이 올지. 어쩌면 이미 그런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뮤지컬 점프 http://www.hijump.co.kr>

드라마 속 이 시대의 며느리,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1972년도 시청자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렸던 드라마, ‘여로’의 시어머니(박주아)는 며느리(태현실)를 박해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각인됐다. 바보 아들인 영구(장욱제)를 극진히 돌보는 천사표 며느리를 구박하면서, 심지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모함하는 시어머니는 전국의 며느리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드라마 속 고부관계는 달라지고 있다. 심지어 시집살이에 대응한 ‘며느리살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 말은 직장 생활하는 젊은 며느리의 뒷바라지를 시어머니가 해야하는 상황에서 생긴 신조어이다. 이것은 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잘 나가는 며느리 박해미에게 구박받는 시어머니 나문희를 통해 충분히 봐왔던 상황이다. 이런 변화를 본격적으로 포착한 드라마가 KBS 주말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다.

시집살이 끝나는가 했더니 며느리살이?
이 드라마는 장충동 원조 뚱땡이 할머니집 맏며느리로 거의 소처럼 취급받아온 서미순(윤여정)이 신세대 며느리, 미진(이수경)을 맞으면서 생기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고부 갈등이라는 케케묵은 소재가 주는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초점이 톡톡 튀는 발랄한 신세대 며느리 미진에 맞춰지면서 드라마는 경쾌함을 얻는다. 그간 시집살이를 톡톡히 겪어온 세대라면 이 당찬 며느리의 당돌한 행동에 묘한 쾌감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중간에 끼어있는 서미순의 상황은(물론 드라마에서는 충분히 코믹으로 명랑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이 시대의 예비 시어머니들에게는 좀 심각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서미순은 여전히 며느리로서 시어머니 오향심 여사(김을동)에게 박해받는 순교자지만, 또한 새롭게 들어오는 신세대 며느리 앞에서 어쩌면 ‘며느리살이’를 해야될지도 모르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 평생을 시집살이로 살아온 그녀가 나머지 삶을 며느리살이로 산다는 건 어찌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집살이가 끝나자 며느리살이가 시작되었다는 이 상황은 지금의 시어머니들이 실제 겪고 있는 일. 시집살이와 며느리살이가 이 족발집이란 공간에서 동시대적으로 발생한다는 것, 그것이 제대로 현실을 포착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시댁에서 벌어지는 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이 불을 보듯 뻔한 현실에서 그 둘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건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 최근 SBS 심리극장 ‘천인야화-신 고부갈등편’에서 한 설문조사에서는 며느리의 60%가 “시어머니가 원치 않아서” 같이 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며느리 대신 해야할 가사와 육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이 양측이 바라는 건 이렇다. 친정엄마 같은 시어머니 그리고 친딸 같은 며느리.

시어머니보다 더 어려운 공주엄마 모시기
그런데 드라마가 포착하는 친정엄마와 딸의 관계는 나을까. 이들 엄마들의 모습은 툭하면 시집간 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거나, 딸의 비뚤어진 행동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다. ‘황금신부’에 등장하는 지영 모(김청)는 이미 결혼한 옥지영(최여진)의 눈앞에 나타나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지영의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보다 더 어려운 존재가 친정엄마인 셈이다.‘칼잡이 오수정’의 수정 모(유지인) 역시 궁할 때면 찾아와 수정을 괴롭히는 존재이며, ‘내 남자의 여자’의 화영 모(김영애) 역시 딸 앞에서 결혼을 두고 ‘한 몫을 챙기려는’ 비정한 친정엄마로 등장한다.

물론 이것은 극화된 것이고 과장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캐릭터들이 말해주는 현실은 또한 분명 존재한다. 요즘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 “공주엄마 모시는 것이 시어머니 모시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다. 결혼하면 육아문제로 이제는 친정어머니를 찾게될 딸에게 아이를 돌봐주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네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아야겠으니 결혼하지 말라”는 공주엄마들은 더 이상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시어머니가 됐든 친정어머니가 됐든 시집살이, 며느리살이, 혹은 딸이 찾아와 겪는 이른바 친정살이(?)를 피하는 것은 그만큼 그간 가사활동으로 억눌려온 이 시대 어머니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집살이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걸 환호할만한 처지가 못된다. 며느리, 시어머니, 친정어머니들이 얽히고 설킨 관계는 풀리기 어려운 실타래 마냥 더 꼬인 상황이니까.

하지만 ‘며느리 전성시대’의 서미순은 어쩌면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 수 있을 지도 모를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한 인간이 아닌 관계가 만들어내는 입장 차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그 관계를 벗어나거나 그 모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며느리,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이렇게 제각각의 인물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그 모든 위치가 한 여성에게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서미순은 보여준다. 그것이 며느리이자 시어머니이자 친정어머니인 그녀가 못내 안됐으면서 거기서 어떤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우리 사회 전반에 충격을 주고 있는 학력논란이 ‘또 연예인 카드인가’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위조 사건 이후 불거져 나온 학력논란은 문화계, 종교계, 교육계, 연예계 등등 사회 전반에 걸쳐 터져 나왔다. 기자들에게 이것은 때아닌 특종 어장으로 인식되면서, 경쟁적인 검증이 시작됐고 하루 자고 일어나면 ‘누구누구 학력파문’하는 기사들이 일상처럼 보도되고 있다.

누구보다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연예인들이다. 직업이 얼굴을 늘상 대중들 앞에 내미는 것이기에 그렇다. 게다가 연예인들은 사실상 이미지를 통해 먹고사는 직업인지라, 거짓이 밝혀지는 순간 그 반향도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타 직업 종사자들보다 충격이 크다는 얘기다. 거짓이 밝혀졌을 때 조금이라도 변명을 했다손 치면, 더 많은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게 연예인들이다.

거짓을 거짓이라 밝힌 기자들이나, 그것이 미필적고의라 하더라도 거짓에 대해 당사자인 연예인이 사과하고 응당의 처분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이 충격적이어서 주목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왜 매맞는 연예인이 희생양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학력논란의 핵심은 정부나 교육기관 같은 기관들의 교육인증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부분은 슬쩍 넘어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걸까.

학력논란은 실력이 아닌 학력이 잣대가 되는 사회가 양산한 기형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 원인제공자들은 왜 얼굴을 숨기고 있을까. 사실 대학은 연예인들의 얼굴을 활용해 자신들의 학교를 홍보한 전력이 있다. 실상 대학들에게 유명 연예인의 입학이 일반인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허용되었는가를 묻는다면 여기에 당당할 곳이 있을까. 그런 면에서 대학과 연예인들은 상당부분 학력사회에 공조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연예인들의 얼굴에 학력이란 이미지를 부가시켜 대학의 얼굴로서 활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학이 가진 교육인증시스템의 문제는 이들 연예인 혹은 연예인에 가까운 유명인사들을 자신들의 대학에 검증 없이 세웠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들 중에는 물론 학력은 거짓일망정 충분한 실력을 갖춘 이들도 있었지만, 대학이 그들을 강단에 세운 이유는 명백하게 그 얼굴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학기에 적게는 4백만 원에서 많게는 6백만 원까지 등록금을 받아 가는 대학은 학력사회와 맞물려 이제 가난한 자들이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 혹자들은 대학이 학력 장사하는 곳이 되었다 개탄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사회의 얼굴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연예인들이 거짓을 말한 그 도덕적 해이는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드러나자 그 얼굴만을 내세우고 뒷전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투로 일관하는 교육기관들 역시 거짓 변명하는 연예인만큼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차피 문제가 된 이상, 이 문제를 학력사회에서 실력사회로 넘어가는 계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이에 대한 많은 논의들과 대안들이 사회 각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한 때 마녀사냥식의 몰아치기, 그것도 연예인들에게만 집중되는 논란은 자칫 본질을 흐릴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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