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전성시대’의 웃음과 ‘황금신부’의 눈물

주말 저녁 TV 속의 가족들은 계층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며느리 전성시대’는 장충동 족발집 아들 이복수(김지훈)와 프랑스 식당 베네치아의 딸 조미진(이수경)의 결혼을 다루면서 그 서로 다른 계층의 부딪침을 다양한 각으로 그려낸다. ‘황금신부’는 국내굴지의 식품회사, 웰빙푸드의 사장인 김성일(임채무)과, 영세한 식품업체인 소망식품의 아들 강준우(송창의)와 결혼하고 베트남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진주(이영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계층의 갈등을 잡아낸다.

서로 다른 배경의 가족이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부딪치는 것이지만 ‘며느리 전성시대’와 ‘황금신부’는 그걸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상이하다. ‘며느리 전성시대’가 다분히 시트콤적인 방식으로 코믹하게 이질적인 가족의 결합을 그리고 있다면, ‘황금신부’는 좀더 전통적인 대결 방식으로 계층 간의 갈등을 그린다. 전자의 코드가 웃음이라면 후자의 코드는 눈물이다. 전자의 방식이 로맨틱 코미디의 가족드라마로의 변용을 쓰고 있다면, 후자의 방식은 전통적인 신파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며느리 전성시대’, 빈부가 아닌 사고방식의 차이
‘며느리 전성시대’의 장충동 족발집과 프랑스 식당 베네치아는 드라마 속에서 가치관의 차이로서 부딪친다. 결혼이라는 틀을 통해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긴장은 전통적인 사고 방식과 현대적인 사고 방식의 차이에 의한 것이지 단순한 빈부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온 환경과 방식이 상이한 두 가족의 부딪침이 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는 것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캐릭터들이 주는 발랄함 때문이지만 그 기저에는 보다 근본적인 빈부격차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지 않는 갈등 양상 때문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특이하게도 조미진과 이복수의 코믹한 결혼이야기 옆에 보다 심각한 차수현(송선미)의 결혼문제를 끼워 넣는다. 주말드라마에 있어서 불륜코드까지를 끼워 넣는 건 작가의 다양한 시청층을 잡기 위한 안전한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좀더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확연한 대비효과를 주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시어머니 이명희(김혜옥)가 “추석 상에는 가격흥정 하는 것조차 예가 아니다”라면서 종종 부를 과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은 같은 상류사회에서 자라온 며느리, 차수현이 빈부의 차이를 대하는 방식과 다르다. 차수현이 서민적인 김기하(이종원)의 틈입을 허락하는 건, 빈부 차이가 존재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특권의식이 별로 없는 요즘 세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작가가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고방식의 차이이며, 그것은 역지사지하는 상황 속에서 넘어설 수 있는 계층 간의 다름일 뿐라는 것이다. 그것을 넘지 못하는 것은 이명희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지듯 빈부격차를 특권의식과 신분의 차이로 이해하는 구시대적인 가치관 때문이다. 앞으로 조미진의 오빠인 조인우(이필모)와 엮어지게 될 이복수의 동생 이복남(서영희)의 결혼이야기는 현재의 상황을 뒤집어보는 계기를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조미진이라는 상큼 발랄한 캐릭터를 며느리로 얻게되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되는 서미순(윤여정)이 양자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과도 연결된다. 이것이 역지사지의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가 가족드라마의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재미의 이유다.

전통적인 대결의 방식, ‘황금신부’
반면 ‘황금신부’가 그리는 대결의 양상은 심각하다. 그것은 전통적인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빈부의 차이, 신분의 차이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베트남 신부라는 사회적인 코드를 가지면서도 사회극이 아닌 가족드라마가 되는 이유는 라이따이한 설정의 활용이 전통적인 가족드라마의 틀 안에서 효용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신부’는 초반부에 베트남 신부라는 설정을 활용해 순애보와 신파라는 전통적인 드라마 코드를 한껏 활용한 바 있다. 시골집 처자를 서울로 상경시킨다 하더라도 지금 시대라면 용인되기 어려운 이 코드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드라마는 베트남에서 신부를 데려온다.

공황장애를 겪는 강준우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는 진주의 모습은 지금 현실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50대 이상의 전통적인 드라마 시청층에게는 여전히 통용되는 향수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 신부가 타국에 시집와 병 수발을 하는 결혼생활 속에서 베트남이라는 이문화에 대한 접근은 배제된다. 빈부라는 틀 안에서 이해가 아닌 수용의 차원으로 진주라는 캐릭터가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베트남 신부에 대한 우리네 편견이 투영된 결과다.

후반부에 와서 베트남 신부라는 코드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신파의 코드로 활용된다. 여기에도 빈부 격차는 그 기저에서 힘을 발휘한다. 강준우를 공황장애로 밀어 넣은 옥지영(최여진)과 대결양상을 갖고 떡 기술을 배우려는 진주의 이야기는 출생의 비밀이 겹쳐지면서 전통적인 빈부의 코드를 끌어낸다. 이 드라마는 이처럼 이해하고 소통하는 가족을 다룬다기보다는 용서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가족이라도 포용하고 용서를 구하면 본래의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이것은 예측이지만)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으로의 회귀를 그려낸다.

파편화된 가족들이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가족은 어떤 식으로든 화두가 되지만 그것을 드라마가 그리는 방식은 이다지도 다르다. 그것은 이해와 소통을 향한 진화의 방식이 되기도 하고 그저 지지고 볶더라도 한 사람의 희생과 용서를 통해 유지되던 과거적 가족 형태로의 회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희생과 소통, 이 두 코드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가족들이 가진 과거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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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사랑 사이, 당신은 행복한가

고단한 도시생활에 지쳐 며칠 쉬러 내려간 시골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나. 시간이 멈춰버린 듯 늘 그 자리에 앉아 언젠가는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묵묵히 한 때의 밥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에게서 당신은 무엇을 느꼈나.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은 바로 그 때 느꼈던 포근함, 피폐해진 몸을 다시 되살려놓던 창조적인 힘, 잔뜩 중독된 생활 속에서 날카로워진 신경을 보듬는 해독의 손길, 그런 것들로 인해 충만해지는 생명감 같은 걸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클럽이 망하고, 술 담배에 몸도 망가진(간경변이다) 영수(황정민)는 도시생활에 지쳐 시골 요양원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을 닮은 은희(임수정)를 만난다. 그녀는 폐 질환 환자로 8년 째 요양원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사랑을 한다. 허진호 감독이 캐릭터들의 몸을 병으로 망가뜨리고 이토록 먼 길을 떠나 시골 한적한 곳에서 둘을 만나게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 직전에 가서야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욕망이 아닌 사랑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어 두려우면서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 하루 하루가 소중해지는 시간, 영수는 도시에서는 잊고 있었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종종 도시적 삶의 재미로서의 쾌락과 혼동되어 왔던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은희가 주는 자연의 사랑 속에서 영수는 회복된다. 그리고 회복된 몸은 제멋대로 소비적이고 중독적이며 파괴적인 도시의 삶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다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욕망의 존재가 가진 얄궂은 운명으로 제시된다.

시골에 눌러앉아 이제는 시골 일도 하면서 살아가던 영수(황정민)는 어느 날 아저씨가 일당을 주면서 권하는 맥주를 단번에 비워내고는 말한다. “술 담배 어렵게 끊었는데.” 그러자 아저씨가 담배까지 권하며 말한다. “건강에는 좋은데 재미가 없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영수는 그 순간 자신이란 존재의 가벼움에 픽 웃어버린다. 도시에서 찾아온 친구 동준(류승수)은 사랑과 행복감이 깃든 영수와 은희의 보금자리를 “한 평에 얼마냐”고 재단해 놓는다. 함께 온 옛 애인 수연(공효진)은 은희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예쁘시네요”라며 “오빠는 복도 많다”고 함부로 말한다. 그래도 영수는 그들에게 뭐라 대들지 않는다. 그저 함께 웃으며 유희적 삶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시골집 자연처럼 질박하지만 정성스런 사랑을 담아 낸 어머니의 밥 한 끼에 원기를 회복한 철부지 아들들이 다시금 뒤편에 자연을 두고 무정하게 도시로 떠나가듯 영수도 은희를 떠난다. 그리고 비로소 시골집과 자연과 사랑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것은 파괴된 몸에서 욕망의 끝을 보았을 때이다. 도시에서 옛 애인인 수연(공효진)과 동거하면서 방탕하게 살던 어느 날, 영수는 수연에게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게 넌 재밌냐?” 재미를 좇던 삶이 파탄날 즈음, 영수는 그때서야 저 시골집이 주었던 진정한 행복감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영화 ‘행복’은 도시적 삶을 살아온 남자, 영수와 자연적 삶을 살아가는 여자, 은희의 사랑을 통해 단순한 남녀간의 멜로의 틀을 넘어선다. 영수와 은희는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욕망으로서의 술, 담배와 그것을 회복시키는 약초처럼, 도시와 자연, 소비와 생산, 중독과 해독, 욕망과 사랑,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쾌락과 행복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된다. 영화는 이로써 욕망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의 전형적 멜로드라마를 통해 “당신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한가”하고 묻는다.

도시로 친구와 애인을 만나러 왔을 때 영수에게 친구가 말한다. “우리 나이에 노후자금이 얼마가 필요한 지 알아? 4억 7천만 원이래.” 그 이야기를 은희에게 전하자 그녀가 말한다. “난 내일 없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안돼?” 감독은 아마도 이 대사를 통해 행복이 어디 있는가를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일이란 이름으로 경박한 수치의 돈 액수만큼의 두려움과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 속에서, 하루 하루를 그 자체로 행복하게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달고 살기에 본질에 가까워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은희 같은 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결국 대지모(大地母)에 한 점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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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와 ‘이산’, 같은 구도 다른 시점

‘왕과 나’와 ‘이산’은 여러 모로 닮은 점들이 많다. 먼저 이 두 사극은 과거의 왕조사극들이 다루던 정치와 전쟁이란 소재에서 벗어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의 구도를 보면 이 두 사극의 유사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왕과 나’는 성종(고주원)이 있고, 왕을 사모하는 윤소화(구혜선)가 있으며, 그 윤소화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김처선(오만석)이 있다. ‘이산’에는 이산(이서진)이 있고, 이산을 사모하는 성송연(한지민)이 있으며, 그 성송연을 남모르게 애모하는 박대수(이종수)가 있다.

이들이 서로 만나고 얽히는 과정 또한 유사하다. 어린 시절 우연히 세 사람은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왕이 될 세손은 여인에게 정표를 남기고 궁으로 돌아간다. 그 정표를 가진 여인은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또 한 사내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세손과의 약속에 따라 어떻게든 궁으로 들어가 왕을 만나려 한다. ‘왕과 나’와 ‘이산’의 인물설정과 이야기 구조는 이렇게 같다. 이유는 두 사극이 모두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과, 그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신분의식이 약한 어린 시절이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사한 구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극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무얼까. 사극을 이끌어 가는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과 나’의 시점은 전적으로 ‘나’인 김처선의 시점을 따라간다. 신분의 벽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충성해야할 왕 사이에 선 김처선은 한 보 떨어진 곳에서 더 멀리 가지도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반면 ‘이산’의 시점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궁에 들어가 정적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어린 시절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여인을 그리워하는 이산의 시점이 하나이고, 궁 밖에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이산과의 약조를 기억하면서 도화서를 통해 어떻게든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성송연의 시점이 또 하나다.

이렇게 다른 시점은 사극의 분위기를 확연하게 갈라놓는다. ‘왕과 나’의 시점이 되는 김처선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다. ‘삼능삼무의 운명’은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나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캐릭터를 대변한다. 따라서 이 사극은 비극을 그린다. 드라마 속에 잠시 쉬어갈 만한 코믹 캐릭터조차 허락하지 않는 처절한 비극이다.

하지만 ‘이산’은 이산과 성송연의 두 시점을 가져가기 때문에 비극이 되지 않는다. 사흘에 한 번씩 암살기도를 받아야 했던 이산이 가진 시점은 비극적이지만, 성송연이라는 상승하는 캐릭터는 이산마저도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산’에서 비극적인 캐릭터는 구도로 보면 ‘왕과 나’에서 김처선에 해당하는 박대수가 될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초점을 그에게 맞추지는 않는다. 드라마 속에 박달호(이희도)나 이천(지상렬) 같은 코믹한 캐릭터가 감초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점이 주는 발랄함 때문이다.

김재형 PD와 이병훈 PD는 제작발표회를 통해 이번 자신들이 연출할 사극이 과거의 자기 스타일과는 다를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의 이야기를 다루던 김재형 PD가 내시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과, 평범한 인물들의 성장기를 그리던 이병훈 PD가 왕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일 뿐,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연출스타일이 다르다는 건 아니었다. 김재형 PD는 특유의 클로즈업을 통해 비극적인 인물들의 감정선을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이병훈 PD는 단계마다 꽉 짜인 에피소드와 절제된 화면미학을 통해 시청자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어느 쪽이든 제대로 작품을 만난 셈이다.

이처럼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사극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해졌다는 반증이다. 과거의 사극이 역사 자체를 드라마화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면, 지금의 사극은 드라마가 역사를 입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만큼 사극은 재미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왕과 나’와 ‘이산’이 보여주는 비슷한 구도, 그러나 다른 시점이 주는 사극의 다른 맛은 우리에게 다양한 시각을 즐길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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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만이 가진 재미, 생존의 드라마

“저는 절대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갓 11살인 세손(박지빈)이 어미인 혜경궁 홍씨(견미리)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사극에서라면 모두들 들어가고 싶어하는 궁이며, 되고 싶어하는 왕이지만 세손은 왕이 되지 않겠단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혜경궁 홍씨의 답변은 더 충격적이다. “왕이 되어 권세를 누리라는 게 아닙니다. 세손께서는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산’은 궁이라는 세상의 감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어야 하는 한 남자, 이산의 이야기다.

세손이 성송연(이한나)을 만나 “이름을 불러다오”라고 말하고, 성송연이 거기에 맞춰 어색하게 “산아!”라고 부르며, 장차 왕이 될 세손이 천한 성송연과 박대수(권오민)에게 동무라 부르는 것처럼, 이 사극은 정조라는 왕을 그리기보다는 이산이라는 한 사내의 고달픈 삶을 그려낸다. 따라서 이 사극을 부르는데 있어서 흔히 ‘이산 정조’라 칭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굳이 사극의 제목을 ‘이산’이라 한 뜻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세손이라는 상징적인 위치로서 겪는 일로 치부하기엔 11살짜리 아이가 겪는 온갖 시험들은 너무나 가혹해 보인다. 성송연, 박대수 같은 동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의젓함이 어엿한 왕의 씨임을 증명하지만, 혜경궁 홍씨 앞에서 “어마마마 궁이 무섭습니다. 할바마마도 무섭습니다.”라고 흐느끼는 세손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이런 시련 속으로 빠뜨렸을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인 사도세자(이창훈)의 죽음 때문이다. 드라마는 영조(이순재)가 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저 영조가 꿈을 꾼 장면이 등장할 뿐이고 누군가의 모함(아마도 노론의)을 받은 것으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도세자가 왜 죽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죽음으로 해서 남겨진 불씨, 즉 세손 이산마저도 제거될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게 하고 권세를 얻은 이들이 장악한 궁은 이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거처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 죽음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장이 된다. 이산은 그들 앞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해 살아남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는 위기상황에 몰린 한 주인공이 그 단계를 헤쳐나가는 롤 플레잉 게임을 닮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단지 이산 단독의 게임이 아닌, 성송연과 박대수 같은 지체 낮은 자들이 함께 하는 게임이란 점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궁 밖에서 저자거리로 도망쳤다가 왈자패들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나, 세손이 거처하는 궁 앞마당에서 조총이 발견되어 위기상황에 몰렸을 때도 결정적인 힘을 주는 이는 성송연이다. 그것은 먼 거리에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상관없이 사건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니 이들 간에 피어하는 사랑은 애틋함 이상의 애절함을 담는다. 함께 서로를 생존하게 하면서 생겨난 애정이기 때문이다.

‘이산’은 궁에 갇혀 저자거리 보통사람들보다도 불행한 삶을 살아야했던 이산이란 이름의 정조를 다룬다. 무소불위의 왕이 중심에 되어 흘러가던 과거의 사극들과 비교한다면 ‘이산’이 그리는 왕은 이다지도 다르다. 왕이 싫고 궁이 싫은, 하지만 생존을 위해 왕이 되어야만 하는 한 사내가 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사투의 시간들. 그리고 기서 피어나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 이것이 ‘이산’이란 사극만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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