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법

역사를 다루는 사극이 사료가 거의 없고 신화만 존재하는 시대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없는 사료를 상상력으로 메워나가는 이른바 퓨전 사극이 등장하면서 신화는 공공연히 사극의 소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신화를 사극이란 틀의 드라마로 보여준다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신화를 날 것 그대로 그려낸다면 자칫 무협지나 환타지가 될 소지가 있다. 물론 사극의 스타일이 무협지 같거나 환타지 같은 것은 이해될 수 있는 일이지만 신화를 소화해내서 보여주는 사극 자체가 무협지나 환타지가 되는 건 문제가 있다.

신화는 역사는 아니지만 사극으로 들어왔을 때 적어도 그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져야 한다. 퓨전사극 ‘주몽’은 주몽신화를 드라마로 끌어오면서 신화적 의미보다는 영웅적인 인간의 건국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신화를 통해 그려졌던 주몽은 물론이고 해모수나 금와 같은 인물들은 신의 옷을 벗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의 사랑으로 태어난다.

물론 거기에는 삼족오에 대한 이야기나, 다물활 같은 신물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들이 환타지적인 스타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은 주몽이란 인물의 신탁을 의미할 뿐, 그 자체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물리적인 힘을 주지는 못한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고구려 건국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 영웅적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반면 ‘태왕사신기’가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것과는 다르다. 광개토대왕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단군신화를 본격적으로 화면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 사극은 단군신화에서 환웅과 웅녀 그리고 호족의 이야기를 영웅 탄생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즉 환웅이 말한 신탁에 기대 그 예언으로서 태왕과 그를 보필할 사신이 탄생한다는 얘기다.

신화 속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웅족과 호족의 싸움으로 해석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지만 ‘태왕사신기’가 택한 것은 환타지다. 환웅(배용준)은 전지전능한 인물로 등장하고 웅족의 대표인 새오(이지아)와 호족의 대표인 가진(문소리) 역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란 상상의 동물 또한 실제로 등장한다. 사극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감행한 셈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두 가지다. 그 첫 번째는 CG의 힘이다. ‘태왕사신기’는 신화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CG를 통한 환타지를 선택했다. 애초에 단군신화를 끄집어내면서 두루뭉실 인간의 이야기로 신화를 훼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좀 낯선 면이 없잖아 있지만 ‘태왕사신기’가 CG를 활용해 신화 자체를 그려 내려한 점은 적절한 선택이었음에 분명하다.

여기에 ‘태왕사신기’는 안전장치를 하나 더 집어넣었다. 그것은 이 신화를 극중 인물의 이야기 속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현고(오광록)의 내레이션을 통한 접근은 사극 속에서 자칫 붕 뜰 수 있는 환타지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갖는다. 즉 ‘태왕사신기’가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나름대로의 효과를 거두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첫 회에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단군신화를 굳이 CG로 다 그려낼 필요가 있었나 싶은 것이다. 신화의 내용을 화려한 그래픽으로 보여준 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제 앞으로 진행될 담덕(배용준)과 사신의 이야기들이 단군신화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있을 때이다. 사극이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에 있어서 ‘주몽’이 했던 선택, 즉 신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환원한 사극이 아닌 지금의 과감한 CG를 동원한 신화를 바탕으로 깔고 가는 선택의 적절함은 전적으로 앞으로 진행될 전개에 달려있다. 기왕에 꺼낸 CG라는 카드가 그저 볼거리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환타지와 현실이 공존하는 ‘브라보 마이라이프’

그들도 한 때는 요란한 록 기타 반주에 맞춰 머리를 흔들어댔던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장성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들은 대신 노래방에서 주점에서 구슬픈 뽕짝을 부른다. 그들도 한 때는 자유, 열정, 꿈 같은 단어를 붙들고 술로 밤을 지샌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명예퇴직, 실업, 노후생활에 한숨짓는다. 그 때만 해도 그들은 제각각의 얼굴과 표정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사회라는 틀이 재단해 놓은 똑같은 얼굴들이 되어있다. 가장이란 현실, 그 무게 때문에 ‘내 삶(마이라이프)’에 한번도 ‘브라보’ 해본 적 없는 그들. ‘브라보 마이라이프’는 현실이란 이름으로 거세된 가장들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조민혁 부장(백윤식)의 로망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드러머를 꿈꾼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자리, 그가 앉아야 할 곳은 저 밥벌이의 전장으로 나가기 전, 꾸역꾸역 밥알을 밀어 넣어야 하는 아침 식사 자리다. 그 자리에서 아내는 곧 정년 퇴직할 조부장의 퇴직금으로 아들을 유학 보내자고 말한다. 즉 이 두 장면은 지금 현재 조부장이 처한 상황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그가 20대부터 버려 두었던 꿈과 지금 현재 정년 퇴직을 앞둔 50대가 되어 있는 자신의 현실만큼 먼 거리에 있다.

그가 그간 꿈을 버리고 어떻게 살아왔을 지는 박승재 과장(박준규)의 입을 빌려 말하는 조부장의 충고 속에 드러나 있다. ‘30대에는 눈치코치 보며 생활하고, 40대에는 들어도 못들은 척 50대에는 알아도 모르는 척’ 그렇게 버텨왔던 것. 하지만 그렇게 멀리 있다고 느껴왔던 드러머의 꿈이 늘 자신의 손아귀가 닿을 지점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조부장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데 한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한번쯤은... 그러면 사치일까...”

작년부터 불고 있는 이른바 ‘아버지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이 영화가 그들과 다른 점은 희생하는 아버지들의 환타지를 끄집어냈다는 점이다.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는 이 영화가 시종일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유는 샐러리맨이라는 현실과 이 환타지가 한 무대에서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부장의 손에 들린 드럼스틱에서 우리는 그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방을 떠올리고, 직장상사 앞에서 거래처 앞에서 손금이 없어져라 비벼대던 손바닥을, 그 처지를 잊고자 연실 술잔을 들어올리던 손을 떠올린다. 무엇보다 양복을 입고 드럼을 두드리는 조부장의 모습은 멀게만 느껴지던 꿈과 현실의 간극을 없애버린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샐러리맨들이 꿈꾸지만 이룰 수는 없는 환타지만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삶에서 나 자신의 삶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지금 아버지들이 접하고 있는 현실을 영화는 조부장의 자기 다짐으로서 말하고 있다. 조부장이 아들에게 말하는 “더 좋은 꿈을 찾지 못했다면 포기하지 마라”라든가, 선술집에서 만난 젊은 시절의  자신을 통해 하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습니다. (아들이)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말들은 지나온 후, 삶의 행복이 거창할 것 없는 자기 꿈에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아쉽게도 영화는 조부장 이외에 다른 인물들이 가진 다양한 꿈들을 조망해내지 못하면서, 풍부한 울림을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단 한 장면, 예를 들면 조부장의 손에 들려진 드럼 스틱이 허공을 가르면서 굉음을 쏟아내는 그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제 몫을 하고 있다 여겨진다. 적어도 그것은 지금의 가장들, 혹은 샐러리맨들의 좀처럼 뛰지 않을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을 테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그저 환타지가 아니라 실제 ‘갑근세 밴드’라는 직장인 밴드의 이야기를 다룬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꿈을 거세한 건 사회라는 틀이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영화는 환타지와 현실을 공존시켜 말하고 있다. 지금도 꿈꾸기에 당신은 늦지 않았다.

다큐 드라마 새 지평 연 ‘막돼먹은 영애씨’의 정환석 PD

‘막돼먹은 영애씨’는 겉보기엔 거친 화면을 가진 막돼먹은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가 영애씨의 외모만을 보고 그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는 다큐 드라마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케이블에서 저예산으로 시도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면서도, 그것을 통해 기존 관습에 머물러 있는 드라마들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국내에서 모든 드라마를 통틀어 거의 첫 번째로 시즌2가 생기는 것 역시 큰 의미가 있다. 시즌2가 어려운 많은 이유들 역시 이 드라마는 손쉽게 넘어서고 있다. 저비용이고, 에피소드별로 끊어지면서 연결고리를 갖는 시즌 드라마 성격을 갖고 가기 때문이다. 이제 더 까칠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영애씨의 면면을 들어보기 위해 정환석 PD를 만났다.

초심으로 끝까지 갈 것이다
- 굳이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을 취한 이유는?
▲ 케이블에서 드라마를 한다는 것이 공중파와 같을 수 없다. 스타시스템을 가져올 수도 없는 문제고. 드라마를 어떻게 차별화 할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 형식적인 면을 고민했다. 여기에 다큐 드라마가 갖는 외형적인 포맷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목적에 잘 맞아 떨어졌다. 리얼한 존재들의 숨기고 싶고 가리고 싶어하는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고자 6mm라는 좀 다소 거칠지만 리얼함이 돋보이는 시각을 구사했다. 그러다 보니 다큐 드라마라는 게 나오게 되었다.

- 다큐 드라마라는 포맷이 참신하다. 다큐멘터리의 속성과 드라마의 속성이 다르게 느껴지는데 다큐는 굉장히 현실적인 걸 잡아내는 반면 드라마는 환타지를 갖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을 붙인 이유가 혹시 우리나라 드라마 속의 환타지를 만족시켜주는 멜로 같은 형식을 파괴해보자는 목적도 있지 않았나.
▲ 드라마적인 복선이나 환타지 같은 것이 배제되고 그걸 따라가지 않더라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다큐적인 기법을 통해 보여준다면 어떨까. 드라마로는 완성도가 좀 떨어진다 해도 다큐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리얼함을 더 높게 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시트콤 냄새가 많이 나는데 시트콤이 많이 하는 게 장르 파괴다. 예를 들면 익숙한 장면들에서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올 것이다 하고 기대하는데 전혀 엉뚱한 것이 나올 때 웃음이 터진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 아무래도 시트콤을 계속 해오던 사람이라 시트콤적인 요소가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트콤하고 다른 방법이 뭘까를 작가팀하고 자주 얘기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어떤 소재가 나올 때도 시트콤이면 이렇게 풀 텐데 하면서,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는 경우가 많다. 정반대의 발상으로 늘 생각을 하고 있다.

- 캐스팅이 굉장히 파격적이었는데.
▲ 처음 제의를 받았던 연기자분들은 다큐 드라마라는 것에 대해 재미있겠다고 생각을 해주었다. 면면을 보면 다 A급으로 빛을 발했던 분들은 아니지만 다 연기내공과 느낌이 있는 분들이라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해보지 않겠냐는 그런 제안에 굉장히 공감을 해주었다. 따라서 오히려 설득하기가 쉬웠다.

- 영애역의 김현숙씨나 영채역의 정다혜씨 둘 다 연기라기보다는 그냥 생활 느낌이 많이 든다. 이 드라마가 주는 캐릭터의 느낌이라는 게 환타지쪽은 전혀 아니고 리얼함이 주는 정감 같은 것이다. 캐릭터로만 봤을 때는 ‘어글리 베티’나 ‘김삼순’같은 캐릭터와 유사한데 그런 드라마들은 환타지로 갔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경우에도 환타지가 깨졌다곤 해도 어느 정도는 가미가 된 걸로 보이는데.
▲ 처음에 생각했던 ‘막돼먹은 영애씨’는 세상에 대해서 꼬인 게 많고 그런 것 때문에 울분이 많은 여자였다. 그런 부분을 여과 없이 보여주자는 게 의도였다. 한편으로 환타지 혹은 미화되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시청자분들이 받아들여 주실까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오히려 점점 더 리얼해서 좋다는 느낌, 환타지가 없어도 재미요소가 있구나 하는 공감을 해주셨다. 그래서 자신감을 많이 가졌는데 현실적으로 나이 서른의 솔로 여자가 직장생활 하면서 어떤 남자라도 관계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애씨가 연하남과 연애를 하게 됐다. 애초에는 되지 않는 사랑, 짝사랑의 개념이었는데 하다보니 그래도 어느 정도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해서 살짝 로맨스가 들어갔다. 그런데 영애씨의 눈에 하트가 그려지다 보니까 까칠함이 없어지게 되고 보통 드라마류와 비슷하게 빠지게 되는 것 같았다. 외려 로맨스로 가면 대본 만들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가는 게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대 노처녀를 넘어 폭넓게 사회문제를 다룰 것이다
- 시즌 2에서 시즌 1과 비교해 달라지는 것은?
▲ 환타지가 없어도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신감을 더 얻었다. 오히려 더 리얼하게 나갈 것이다. 좀더 까칠해진 영애가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줄 것이다. 어차피 로맨스도 벗어나지 않았나. 이것이 달라지는 하나이다. 또 하나는 이게 어느 정도 반향이 되고 했으니 이제 변죽만 올리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폭넓게 얘기해보려고 한다. 30대 노처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에는 시트콤이 가진 다양한 세대들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사회적인 이야기를 같이 할 것이다.

- 이 드라마에는 여성들의 연대의식, 동지애 같은 게 있는데 심지어는 회사동료도 자매로 느껴진다. 물론 남자 시청자가 재밌게 보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샐러리맨들로서의 동지의식, 애환 같은 것이다. 시즌 2에서는 그런 측면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인가.
▲ 새로운 인물도 보강됐고 직장이나 그런 데서 공감 갈 수 있는 얘기들을 더 많이 포진하려 한다. 사실 사회에서 막돼먹은 행동을 전혀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하고 착하다고 해도 사람은 이기적이기에 누구에겐가는 부지불식간에 막돼먹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 하나로 악인으로 규정될 수 없듯이 인간은 다면성을 갖고 있다.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사장도 기러기 아빠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자기 자식에 대한 정이 있다. 그런 양면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들 리얼하게, 정제되지 않은 알 것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 새로운 캐릭터인 정대리(정지순)가 곰과 여우를 합쳐 놓았다던데 그 캐릭터가 갖는 의미는 뭔가.
▲ 대다수 남성들을 대변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출세 지향적이고 적당히 아부 떨 줄 알면서 자기 손해보는 일 하지 않는 그런 인물이다. 또 인물 설정 자체가 위에 윤과장 같은 선배도 있지만 무서운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자신이 헤게모니를 잡으려 한다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능력도 있고 노하우도 있고. 그런데 영애는 그걸 한눈에 알아보는 거다. 동류가 동류를 알아채듯. 막돼먹은 그림자를 보게 되는 거다. 둘이 티격태격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대놓고 성차별 하는 그런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 더 까칠해진다는 말은 풍자와 직설에서 직설쪽으로 더 간다는 말인가
▲ 내 자체가 직설적으로 무언갈 잘 표현 못하는 사람이다. 직설적으로 까대는 건 쉬운 일이지만 풍자는 기술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그걸 지향하고 있다.

- 노출 신이 많은 영채는 이 드라마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직장내 성희롱도 많이 나오는데 그것조차 시청자들에게는 소비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면서 그걸 비판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며 자아비판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는데이를 테면 영채를 성적환상으로 보다가 영애가 그걸 사정없이 부서버리는 그런 거다.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 내 딸아이가 프로그램 시즌 2 제작발표회 때 남성들은 반성해야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런 문자를 보냈다. ‘아빠, 여자들은 정말 반성할 게 없나?’ 보는 남자들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사실은 반성해라 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에 이 드라마의 목적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오히려 여자들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제 딸이 얘기한 것처럼 여자들은 반성할 게 없나 하는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싶다
- 드라마를 찍으며 제일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 저예산 드라마를 표방하기 때문에 제작에 있어서 굉장히 어렵다. 60분 짜리를 단 이틀만에 아침7시부터 새벽1시까지 강행군한다. 이틀 동안 40신 42신을 찍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건 어떻게 하면 좀더 우리가 하고 싶은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거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이런 걸 공감시키고 싶은데 그 공감시킬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걸까 하는 고민. 또 늘 똑같은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게 아니고 어떤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뭘까하는 그런 게 늘 고민이다.

- 6mm를 쓰는데 그걸 들고 가면 확실히 연기자들의 거부감이 덜하고 솔직해진다는데.
▲ 그렇다. 거부감이 덜해 여러 면에서 자연스런 장면들이 나오는 것 같다. 일부러 풀 샷 카메라 같은 것도 가구 밑에다 숨겨서 놓는다. 어디서 나를 잡는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 거다. 카메라 한 대면 아 저기 카메라가 있구나 할텐데 그래서 난 어깨만 나오는 구나 이럴 수 있는데 카메라 세 대가 동시에 도니까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모든 테이크를 끊지 않고 한번에 가는 위주로 하니까 최선을 다하게 된다. 끊어서 가는 것 즉 한번 더 간다는 건 연기가 된다. 연기자들 중에는 이런 방식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편안하게 가는 편이다.

- 어떻게 보면 이 드라마는 그 기존 형식을 깬다는 자체가 포인트일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형식을 고민할 때 고민 끝에 나오는 순수 창작인가 아니면 다른 것들을 참고하나.
▲ 캐릭터는 아무래도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 참고를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있어서 거기서 조금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형식에 있어서 물론 ‘블레어 위치’ 같은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의 형식이 어느 정도 영향을 안 줬다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거 비슷한 건 어디에도 없다. 그런 것들이 다 모여서 된 거다.

- 시즌 2 이후에도 형식 고민을 계속 할 것인지. 대부분 자기 형식을 고집하는 분들이 많은데 다큐드라마란 형식을 계속 가져갈 것인지.
▲ 다큐드라마란 장르는 독특한 스타일로 계속 갔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분들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속 이걸로 갈 거냐면 그건 아닌 거 같다. 늘 새로운 걸 고민하는 게 내 취향인 거 같다.

- 케이블에서 할 수 있는 모범답안 같은 드라마다.
▲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다. 제작비만 봐도 시즌 1은 회당 3500이다. 참고로 키드갱 같은 건 회당 2억이 들었다고 한다.

- 환경이 그러게 만든 건 사실인데 케이블에서 하는 이런 시도들이 공중파에서 하지 않는 시도를 해서 결국 드라마 전체 발전에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 늘 듣는 말이 자극 받게 만들어라. 뒤통수를 쳐라. 이런 말이다. 그게 존재가치가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기존 딱딱하게 굳어있는 여타의 드라마들이 주는 답답함을 깨뜨리는 통쾌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만날 똑같이 흘러가는 드라마들의 공식들에서 벗어나 어떤 반향을 일으켰을 때 주는 통쾌함이다. 그것은 이 드라마 속의 영애씨가 순간순간 주는 통쾌함과 맞닿으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하다. 매번 새로운 시도, 새로운 형식, 새로운 내러티브를 고민하는 PD가 있다는 건, 우리네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고군분투 자체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만든다.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느와르

부모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 적의 심장부에 잠입해 스파이로 활동하는 언더커버,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어버리는 기억상실. 누가 봐도 ‘개와 늑대의 시간(이하 개늑시)’이 가져온 장치들은 액션 느와르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여기에 원수지간인 부모를 가진 연인, 한 여자를 두고 우정과 사랑을 저울질하게 되는 형제 같은 캐릭터의 설정은 물론이고, 장르적인 허용을 한껏 활용하는 액션과 느와르의 관습적인 장면들까지를 각각 뜯어내서 보면 이 드라마는 기존 장르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각각의 장치들의 총합이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등가의 결과물이 아니다. ‘개늑시’는 이 장르가 가진 다양한 관습적 장치들을 모으는 반면, 보다 복잡한 인간관계의 거미줄을 연결해놓는다. 적과 아군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그저 단순한 싸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적과 아군이 관계, 이를테면 부자관계, 친구관계, 형제관계, 연인관계로 얽힌다면 말이 달라진다. 총구를 겨냥하는 적이 관계라는 무기로 총 든 자를 오히려 얽어맬 때, 그 총구의 총알은 적을 관통해서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날아온다. ‘개늑시’는 바로 이 상황 속에서 도무지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느와르다.

관계를 복수극과 엮어낸 느와르
이 드라마에 수많은 아버지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수현(이준기)과 서지우(남상미)는 모두 아버지가 둘이다. 이수현은 언더커버로 청방에서 활동하다 살해당한 친아버지와 그를 길러준 강중호(이기영)가, 서지우는 친아버지인 마오와 그녀를 길러준 서영길(정성모)이 그들이다. 여기에 기억상실로 케이가 된 이수현이 마오와 갖는 유사부자 관계를 포함시키면 아버지는 더 늘어난다.

이렇게 아버지가 많은 것은 이수현, 서지우, 강민기의 존재가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립하게 되지만 차마 그를 어쩌지 못하는 말 그대로의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게 만들기 위해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수많은 종류의 관계의 그물을 씌워놓는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은 그 관계의 핵심축인 셈이다.

“넌 누구냐? 내 아들이냐? 배신자냐? 케이.”, “내 이름은 케이가 아냐.”, “뭐든 상관없다. 넌 내 아들 케이였으니까.”이 대사들는 이 드라마가 가진 관계의 느와르를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케이가 기억상실에서 이수현으로 돌아와 자살을 시도하려는 장면은 이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행위든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그 고통스런 상황, 개와 늑대의 시간을 고스란히 잡아낸다.

연기자들에 의해 살아난 장르
이 정체성이 유발하는 관계의 느와르는 복잡해 보이지만 이런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마치 게임처럼 장르적으로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다. 마치 장기나 체스를 두듯이 어떤 기능을 하는 말을 하나 움직이면 그것이 판세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 혹은 규칙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장르 드라마들은 바로 이런 규칙에 충실한 드라마다. 이런 드라마들은 말의 움직임 즉 스토리 구성만큼 중요해지는 것이, 말이 제대로 움직여주는가에 해당하는 연기자들의 연기력이다.

‘개늑시’는 어찌 보면 연기자들에 의해 살아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장르 드라마 자체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가 가진 급변하는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을 얼마나 연기자들이 실감나게 연기하느냐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양 끝단에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한껏 현실감에서 벗어나 가벼워질 수 있었던 드라마를 시종일관 무겁게 눌러 앉힌 김갑수와 최재성. 특히 최재성의 강한 카리스마는 드라마가 끝까지 달려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제공했다. 이렇게 무게감이 제공되자 그 위에서 이준기, 정경호, 남상미는 한바탕 신명나는 연기력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이준기는 부모가 눈앞에서 살해당한 상처를 가진 이수현, 평범한 가정 속에서 성장한 이수현, 어느 날 잊었다 생각했던 원수를 만나 복수심에 불타는 이수현,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청방에 언더커버로 들어가는 케이, 거기서 기억을 상실하고 이수현을 버린 완전한 케이, 다시 기억이 되돌아온 이수현,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케이 때의 습관(껌을 씹는)을 보이는 이수현… 등등. 끝없는 정체성의 혼동을 겪는 인물을 잘 소화해냈다. 게다가 부드러움에서 순식간에 광기로까지 변화시키는 연기력을 보여준 정경호와 사실상 한참 약화시켜버린 멜로 라인을 연기력으로 끄집어낸 남상미는 이준기의 연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개늑시’는 그간 시청자들이 목말라 했던 장르 자체에 충실한 드라마로 어느 정도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 장르 드라마가 그저 장르들이 가진 법칙들을 풀어놓기만 했다면 그다지 주목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그렇다고 갑작스레 너무 낯선 장르의 과도한 실험을 했다면 그 역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장르 공식에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계의 드라마를 덧붙여 반보 정도 앞선 장르 드라마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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