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는 왜 주말의 몀화 더빙 도전을 했을까

 

<무한도전>은 왜 추석특집으로 주말의 명화더빙에 도전했을까. 물론 <무한도전>과 추석특집 영화의 콜라보레이션은 그 자체로 기발한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무한도전>이 추석특집 영화로 방영될 <비긴 어게인>을 더빙하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더빙된 영화가 방영된다는 것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하지만 그것만일까. 하필이면 성우들과 함께 그들이 3시간이면 뚝딱 해내는 영화 더빙을 무려 11시간에 걸쳐 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무한도전>이 그동안 해왔던 많은 도전들은 대부분 어딘지 소외되고 조명되지 않았던 어떤 것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성우 안지환의 말대로 주말의 명화같은 영화 더빙은 바로 그 사라져가는 것들 중 하나다. 이제 더빙보다는 원어 그대로에 자막을 붙이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건 영화가 점점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 영화를 영화관에서보다 TV ‘주말의 명화같은 영화 프로그램을 통해 더 많이 봤을 때만 해도 성우의 더빙은 영화를 전 세대가 즐길 수 있게 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지상파에서 영화를 방영하는 경우가 거의 명절에 국한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더빙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영화가 상시적으로 방영되고는 있지만 그건 거의 100% 자막이다.

 

하지만 안지환의 얘기처럼 영화 더빙은 단순히 편의적인 차원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언어라는 것은 결국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더빙을 통해 우리 정서에 맞게 표현해주고 전달해주는 건 문화의 우리 식의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필요한 일이다. 단적으로 욕설이 많이 나오는 영화라면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르면서 부지불식간에 그 영어식 욕의 표현에 둔감해질 수도 있다.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게 더빙된 욕의 최고치가 젠장”, “정말 못 말려”, “멍청이정도라는 건 언어 순화에도 더빙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사실 이번 <무한도전>에서는 그리 강조되지 않았지만 영화 더빙을 해오던 성우들 역시 점점 자신들의 일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더빙 같은 일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지금도 간간히 있지만 라디오 드라마 같은 일들도 사라져가고 있다. 게다가 다큐멘터리는 물론이고 애니메이션 더빙에 있어서도 요즘은 성우보다 스타들을 캐스팅하는 경향이 생겼다. 스타의 더빙 자체가 대중들의 이목을 더 잡아끌기 때문이다.

 

몇몇 잘 나가는 성우들이 건재하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성우들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라져가는 산업에는 그로 인해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는 직업군도 있는 셈이다. <무한도전>주말의 명화더빙으로 보여준 건 그 더빙이 의외로 재미있고 효용성도 있으며 그 일에 종사하는 성우들의 면면이 말 그대로 프로페셔널하다는 점이다. 목 졸리는 연기를 하기 위해 저 스스로 목을 조르며 더빙을 하는 열정이라니.

 

물론 <무한도전>의 성우 도전과 그들이 더빙한 영화를 주말의 명화에 방영한다는 그 콜라보레이션이 가진 기발함이 있지만, 그보다 더 뭉클하게 다가오는 건 영화 한 편을 더빙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성우들과 그들의 모습을 멤버들의 도전을 통해 담아내려한 <무한도전>의 마음이다. 과거 라디오스타특집을 통해 라디오의 이면을 봄으로써 라디오방송의 묘미를 새롭게 되새겼던 것처럼, 이번 방송이 성우들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디데이>, 김영광 같은 의사 어디 없나요

 

서울 한 복판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드라마 <디데이>가 보여준 서울의 지진 장면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맨홀 뚜껑이 마치 분수처럼 튕겨져 나가고 아스팔트가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지고 건물은 종잇장처럼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남산 타워가 꺾어져 버린 장면은 이 지진의 상징처럼 보이고, 흔들리는 건물 내부의 아비규환은 원경으로 바라볼 때 그저 스펙터클처럼 보이던 재난의 끔찍한 현실성을 살려낸다.

 


'디데이(사진출처:JTBC)'

드라마로서 이런 CG를 접한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다. 막연히 상상하기만 했지 이 같은 서울의 재난 장면을 실제로 구현한다는 건 그만한 투자도 투자지만 굉장한 도전정신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디데이>는 이러한 재난 장면의 CG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그려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성과를 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정작 중요한 건 CG로 구현된 재난 장면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밑그림인 셈이다. 그 밑그림 위에서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질까가 사실 더 중요하다. <디데이>는 그 포인트를 이해성(김영광)이나 정똘미(정소민) 같은 의사를 중심에 세우고 그들과 함께 할 최일섭(김상호) 같은 구조대원들의 고군분투에 두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 누가 의연할 수 있을까. 병원을 찾아 몰려드는 재난의 부상자들과 환자들은 부족한 수용시설과 의료물자 때문에 치료받을 이들이 선별되고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그 울분을 의사에게 쏟아내기도 한다. 치료받지 못하고 죽게 될 엄마 때문에 광분한 아들에게 그 분이 살 수 있다면 자신을 죽도록 때려도 좋다고 말하는 정똘미의 진심이나, 환자들에게 쓸 국소마취제가 별로 없어 제 생살을 꿰매면서도 아픔을 참아내는 이해성의 의연함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결국 재난이 터지자 문을 닫아걸고 눈앞에서 환자를 저버리는 미래병원의 행태와 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조악한 병원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해성과 정똘미, 간호사 박지나(윤주희), 김현숙(김재화) 같은 인물들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단 몇 분 간의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서울 거리를 피난길에 오른 난민들처럼 걸어 나가는 그들의 생명을 이제부터 위협하는 건 저 재난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제 살길만 우선 찾겠다는 사람들의 이기심이나 기득권을 쥔 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욕망 같은 것이 이제부터 이 이해성과 정똘미 같은 이들이 부딪치게 되는 문제들이다. 압도적인 재난 장면에 결코 적지 않은 투자가 들어갔다면 그것의 목적은 결국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다만 지나치게 재난 앞에 선 휴머니스트들의 고군분투로만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건 피해야할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압도적 재난 장면까지를 가져와 들여다보려는 건 천재지변으로서의 재난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재난 영화나 드라마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건 실제로 우리가 접했던 수많은 재난들이 우리 사회가 가진 병리적 현상을 응축한 사건들로 기억되기 때문이지 않은가.

 

따라서 <디데이>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 지진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아비규환에 빠지는 그 장면들로 언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지 모를 몰입감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해성과 정똘미 같은 의사들의 노력과 대비되는 박건(이경영)이나 한우진(하석진) 같은 인물들과의 팽팽한 갈등을 통해 재난 그 자체보다 더 중대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을 고발해내는 일은 그래서 저 압도적 CG가 가져야할 지향점이 아닐까. 드라마적 갈등은 재난 그 자체가 만드는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강용석과 장동민, 과연 자숙기간은 불필요한 일인가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부적절한 멘트 때문에 대중들의 질타를 받았던 장동민은 그 후 자숙의 기간을 갖지 않고 방송을 강행했다. 많은 논란 연예인들이 논란이 터지고 나서 그 진위와도 상관없이 자숙 기간을 가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여기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는 시청자들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장동민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자숙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털어놓았다.

 


사진출처:MBN

그는 자숙이라는 것은 방송을 쉬고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오히려 그렇게 칩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짐을 안고 계속해서 사죄를 하고 사과를 하면서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했다. 집안의 가장이고 생업으로 방송을 하는그로서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의 대가로 방송을 쉬어라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한 다른 연예인들이 방송을 그만두고 쉬는 것은 각자의 판단이며 그의 판단으로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잘못한 분들께 사과하고 웃음을 드리는 것이 사죄라고 얘기했다.

 

장동민의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대중들과 논란 연예인들 사이에 존재해오던 이른바 자숙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보여준다. 방송을 그저 잠시 접는 것이 자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이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숙이라는 것도 또 그 자숙기간이라고 하는 것도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사안에 따라 또 각자 연예인들의 판단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동민은 일하면서 자숙하겠다는 자신만의 자숙방법을 얘기한 것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것이 대중들에게는 달리 들릴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도 분명히 존재한다. 즉 결과적으로 보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별다른 조치 없이 똑같이 일을 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액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자숙으로 인한 징벌적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자숙을 자숙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진 대중들이라면 장동민의 말은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법적인 사안이 아니다. 그저 호불호의 문제일 뿐이다. 장동민은 이렇게 일하면서 자숙하기로 결정한 것이고 그것이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여 진심이 닿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로 역효과를 낼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라는 점이다. 장동민의 선택이 있었고, 이제 남은 건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자숙이나 자숙기간에 대한 이런 새로운 생각은 최근 강용석이 했다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 속에서도 들어가 있다. 그는 그 인터뷰에서 과거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 논란으로 “11개월을 그냥 놀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조용히 지낼 필요가 있었나 싶다자숙 기간이 1개월이든 1년이든 10년이든 비난할 사람은 비난한다. 그래서 이번엔 바로 일을 시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을 섣불리 들을 수 없는 게 강용석의 말이 그리 틀린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숙 기간을 갖고 어떤 인물은 몇 개월만에 쉽게 돌아오기도 하지만 어떤 인물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비난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자숙기간이 그만한 징벌적 의미를 갖고 있다면 그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전혀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러니 스스로 결정하는 자숙기간을 굳이 가질 필요가 있겠냐는 게 강용석이 얘기하는 요지다.

 

실제로 최근 들어 자숙기간은 그다지 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경향이 만들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중들에게 자숙의 의미란 사실상 한 번 엇나가면 영영 보기 불편한 사람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이것은 자숙을 선택하는 연예인들 입장과는 사뭇 상반되는 일이 된다. 연예인들이 자숙을 선택하는 건 다시 연예계로 돌아오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숙기간은 불필요한 일일까. 여기에 대한 열쇠도 결국은 이제 대중들이 쥐게 되었다. 자숙기간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 남다른 자숙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너무 뻔뻔한 태도가 아니냐는 식으로 또 다른 논란을 만들 수도 있다. 논란과 자숙. 연예계에 불변의 룰처럼 여겨져 왔던 그 공식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이들에 의해 파기될 것인가.



<용팔이> 김태희, 산전수전이 일깨운 가능성들

 

여전히 김태희가 연기를 잘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캐릭터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 정도의 연기가 부족하다 여겨진다는 얘기다.

 


'용팔이(사진출처:SBS)'

하지만 적어도 <용팔이>를 통해서 김태희가 얻어간 것은 분명히 있다. 이 드라마는 지금껏 그녀가 해온 많은 드라마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새로운 면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드라마가 시작한 지 거의 몇 주 동안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걸 갖고 누워서 돈 번다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지만 누워서 연기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고, 눈을 뜬 상태에서도 몸을 쉬 움직이지 못하니 눈빛 하나, 손가락 움직임 하나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그으려 안간힘을 쓰는 장면도 그렇고, 그녀를 죽이러 들어온 이과장(정웅인)에게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독기어린 눈빛으로 그를 쓰러뜨리는 장면도 그렇다.

 

병상에서 일어나서도 김태희는 한동안 얼굴을 전면에 드러내놓지 않았다. 캐릭터가 얼굴을 붕대로 가리고 다른 사람인 척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는 그녀를 구원해준 김태현(주원)과 달달한 멜로 연기를 해야 했다. 물론 이 멜로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급전개된 것도 원인이지만 그것이 어쩌면 김태희가 늘 배우로서 소비되던 이미지 그대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곧바로 이 한여진이란 캐릭터가 한신그룹의 왕좌에 오르면서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김태희는 표독스러울 정도의 악녀 이미지를 드러냈다. 김태현 앞에서는 연인의 모습이지만 그간 자신을 그렇게 VIP 병동에 가둬뒀던 사람들 앞에서는 말 한 마디로 복수를 행하는 사신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나마 김태희가 이 드라마의 후반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이 악어들의 세상으로 들어온 그녀의 생존을 위한 악녀 캐릭터가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용팔이>의 전반부를 주원이 연기하는 김태현이라는 휴머니스트가 이끌었다면 후반부는 김태희가 연기하는 한여진이란 악녀 본색이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의 드라마에서 배우가 이처럼 다양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는 건 김태희로서는 소중한 기회가 됐을 것이다. 사실 김태희가 그토록 오랜 연기생활을 하면서도 연기가 별로 늘지 않았다고 여기게 된 건 늘 비슷한 방식, 즉 멜로의 대상으로서만 주로 그녀가 소비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인의 연인이미지로만 묶어둔 나이 들어도 여전히 여신처럼 예쁜 얼굴은 그래서 연기자 김태희에게는 크나큰 족쇄 역할을 했던 셈이다.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그래도 <용팔이>를 통해 김태희는 좀 더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실험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눕혀지고 가려지고 멜로연기에서부터 악녀까지 다이내믹한 한여진이라는 인물의 변화 속에서 어쩌면 김태희라는 연기자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김태희에게 남은 숙제는 이렇게 펼쳐놓은 가능성들을 비록 작은 역할이라도 버리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시도해나가는 일이다. 그래야만 그토록 공고한 연기력 논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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