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결여>의 숨은 주인공, 한진희의 부성애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을까.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오병식(한진희)은 뭐 딱히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그다지 없어 보이는 아버지다. 그는 한때 택시기사였었고 중소기업 사장의 운전수였다가 지금은 건물의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딸 은수(이지아)가 중견기업 오너의 며느리라는 사실은 얼핏 이 오병식이라는 아버지가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늘 차분하고, 성실해 보이는 이 아버지는 그래서 이 드라마에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재혼한 은수의 딸, 슬기(김지영)를 챙겨주는 인물이거나 걱정이 태산인 아내 순심(오미연)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정도의 역할이랄까. 하지만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차츰 이 아버지라는 존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자식까지 전 남편에게 넘겨주고 재혼했지만 남편의 불륜 때문에 또 이혼을 준비하는 딸이 아버지에게 마뜩찮을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속이 상해도 그 흔한 술 한 번 마시고 주사라도 늘어놓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것은 과년한 첫째 현수(엄지원)가 결혼식도 안올리고 심지어 광모(조한선)와 동거를 하겠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버지는 그저 한 걸음 물러서 알아서 하겠지.”하며 딸의 선택에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걸핏 하면 소리를 지르고 손부터 올라가는 준구(하석진)의 아버지 김회장(김용건)과는 사뭇 다르다. 김회장이 어딘지 과거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를 닮았다면 오병식은 달라진 현재의 서민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이런 아버지들은 가족 내에서 권위를 상실한 지 오래다. 가장으로서 서 있긴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자식들 앞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던 시절은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딘지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이들 아버지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가족들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되었다.

 

오병식이라는 아버지는 그래서 이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가족들이 힘겨울 때마다 묵묵히 그 아픔을 들어주고 또 버텨내주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 남편의 불륜에 상심한 딸을 품어주는 것도 이 아버지고, 결혼 안 하고 살겠다는 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도 이 아버지다. 심지어 이혼해서 아버지를 따라간 딸의 자식까지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도 이 아버지의 몫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결혼을 몇 번을 하든, 아니면 아예 하지 않든 그들을 딸로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이 달라진 결혼 풍속도가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어쩌면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문제들을 자식을 보는 마음으로 품어주는 시선일 지도 모른다. 결국 결혼이란 자신들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 다만 부모로서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오병식이라는 아버지는 이 드라마의 숨겨진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그의 부성애는 이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이혼과 결혼, 동거, 불륜, 심지어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는 계모의 이야기까지를 모두 보듬어 안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존재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 언제든 가슴 열어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이것이 제 아무리 세태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가치가 아닐까. 그가 있어 참 다행이다.

<세결여>, 시청자 목소리 담은 임실댁의 촌철살인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확실히 초반부와는 다른 드라마의 색깔을 보이고 있다. 초반에는 이혼 후 결혼하면서 아이와는 떨어져 지내는 은수(이지아)를 보여주면서도 그 자극적인 설정보다는 오히려 결혼생활을 탐구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시청률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다. 제 아무리 김수현 작가라도 일단 시청자들이 봐야 그 안에 결혼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도 보이기 마련이니까.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그래서 생겨난 강한 캐릭터가 바로 채린(손여은)과 다미(장희진). 다미는 은수의 남편 준구(하석진)와의 불륜을 끝내지 못하는 캐릭터로 은수의 불행에 관여한다. 물론 다미보다 더 나쁜 캐릭터는 준구다. 그는 거의 부부강간에 가까운 짓을 저지르는 인물인데다, 이제 아빠가 될 인물이면서 여전히 불륜 행각을 저지르는 인물이고, 게다가 불륜의 대상인 다미에게조차 좋은 남자가 아니다. 그는 극도로 자기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인물로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담보해야 하는 결혼이라는 틀에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채린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하기에는 너무도 미성숙한 인물. 그녀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그런 그녀가 계모로서 의붓딸까지 거둔다는 것은 애초부터 글러먹었다. 채린이 그녀의 의붓딸 슬기(김지영)에게 독설을 퍼붓고 함께 우는 장면은 채린의 정신연령이 슬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잘 보여준다.

 

잘못한 게 뭐예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도대체 이집에서 나를 제대로 대접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어른들이 나를 우습게 아니까 애까지 나를 깔보는데. 깔보다 못해 깜찍하고 앙큼하게 나를 속이기까지 하는데. 분에 피가 거꾸로 도는데 그까짓 녹음기가 뭐라고. 상속 날아갔다니까 그 순간 얼굴 바꾸신 시어머니. 바로 몇 시간 전 자기가 한 말 뒤집고 여우같은 시누이 불러내 나를 부채질 아이까지 나를 조롱하는데 어떻게 참아.”

 

그녀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이에게 게임만 하다가 바보 될래? 너 바보 돼. 바보 될 거야.”라고 말한다거나 내가 니 엄마야 잊어버리지 마 너도 나도 팔자니까 어쩔 수 없어. 또 한 번만 싹수없는 짓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발가벗겨 내쫓을 거야.” 같은 말은 단순히 계모 본색이라 말하기에는 너무 심한 그녀의 무개념을 보여준다. 그녀는 거의 투정부리는 어린아이에 가깝다.

 

친엄마가 녹음해준 동화를 몰래 듣는다고 그걸 빼앗아 아이가 보는 앞에서 발로 밟아 부숴버리는 그런 행동을 하는 채린은 그래서 조금 밋밋했던 이 드라마에 강한 조미료 역할을 해준다. 마치 아침드라마에서나 봤을 법한 캐릭터. 하지만 이런 자극이 들어가면서도 이 드라마가 어떤 균형을 맞춰주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그녀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임실댁(허진)이다.

 

아이가 울면서 채린이 저지른 일들을 토로하자 채린은 거짓말이라며 극구부인하지만 그 옆에서 감초처럼 한 마디를 집어넣는 인물이 바로 임실댁. “야가 없는 말을 하는 아이는 아녀 응?” 이런 대사는 다분히 이 모든 채린의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시청자의 답답한 마음이 임실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속 시원히 터지고 있는 것.

 

남편 정태원(송창의)조차 질책을 당하고 집을 나가버린 채린을 찾아나서는 임실댁에게 최여사(김용림)찾아 나설 것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임실댁의 대사가 기가 막히다. “그래도 한 솥밥 먹고사는 디 그러면 인심 어디 쓰겄쓰라우... 이웃에서 알고 지들끼리 소곤거리면 뭣이 좋겄소. 저 집 며느리 또 내쫓을라구 그러는갑다 그럴 거 아니요.” 이것은 채린의 행동에 덧붙여 최여사가 그간 은수에게 했던 행동들을 꼬집는 말이다.

 

지금 인터넷에는 임실댁 어록이 흘러나올 정도다. “사람 무시하지 마소잉. 내가 나이를 갑절은 더 먹은 사람이요.”하고 가사도우미로 있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며, “새 사람 들어와두 줄어드는 일은 없구...나도 염색 장갑끼구 안 태났소.”하며 은근히 채린을 다그치기도 하고, 때로는 밥이 체한 게 아니라 욕심이 체했지잉. 욕심이 욕심. 그란디 김치국물이 욕심도 삭힐랑가는 모르겄네잉.”하며 바른 소리를 해대는 인물.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달라지고 있는 결혼 세태에 대해 탐구하듯 접근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드라마다. 이제 남편의 불륜행각을 사진으로 확인하고 두 번째 이혼을 생각하기 시작한 은수가 그렇고,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미성숙한 채린 때문에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는 태원이 그렇다. 그렇다고 결혼이라는 틀에 얽매이기 싫다며 동거를 선언한 은수의 언니 현수(엄지원)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니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깨치고 나오는 인물이 다름 아닌 임실댁이다. 그녀는 특유의 혼자 중얼거리는 짧은 논평(?)으로 답답함을 느끼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고 있다. 물론 많이 배우지는 못한 인물로 또 가사도우미로 살아가는 서민적인 인물이지만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많이 배웠다는 인물들과 그럴 듯한 화려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부자들보다 그녀는 훨씬 인간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드라마가 어떤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최고 캐릭터로 등극했다.

<왕가네>를 통해 보는 가족주의의 해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시작부터 나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를 외치며 온갖 민폐를 끼치던 왕수박(오현경)이 집을 나와 식당에 취직했다가 쫓겨나고 노숙자처럼 길거리를 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많은 시청자들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왕가네 식구들>이 이제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왕가네 가족들에게 패악질 하던 캐릭터들이 이제 권선징악, 개과천선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것 또한 시청자들이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왕가네 식구들(사진출처:KBS)'

수박이 동생 호박(이태란)을 만나 오늘이 아부지 생신이라며 돈 봉투를 전하는 장면이나 호박아, 너하고 광박이한테 정말 고맙다. 집도 얻어주고. 난 맏이 노릇도 못하고 못난 짓만 하는데라는 대사를 던지는 것도 그래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왕가네 식구들>의 등장인물들이 수박과 호박이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순간부터 예정된 일이다. 즉 수박이 엄마로부터 편애를 받고 비뚤어지는 인물이며 호박이 구박을 받으나 결국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은 이름에 나타나 있다.

 

문영남 작가의 등장인물 작명 방식은 주말드라마의 공식과 패턴을 잘 드러낸다. 즉 아버지 왕봉(장용)은 가족의 봉이고, 이앙금(김해숙)은 마음 속 앙금으로 비뚤어진 엄마이며, 수박의 남편인 고민중(조성하)은 이혼을 고민하게 되는 캐릭터이고 호박의 남편 허세달(오만석)은 실속 없이 허세만 가득한 민폐형 캐릭터다. 마치 RPG 게임처럼 시청자들은 이들 앞으로의 전개를 예감케 하는 이름의 캐릭터들이 벌이는 마인드 게임에 들어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름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왕가네 식구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기치 못한 전개나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발견 같은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권선징악이나 가족이 최고같은 누구나 다 아는 가치의 반복이면서 비슷비슷한 가족드라마 전개의 반복이지만 그래도 시청률이 45%에 육박하는 놀라운 수치다.

 

물론 막장드라마를 통해서 흔히 봐왔듯이 시청률과 완성도 혹은 작품성에는 아무런 비례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 드라마의 평균적인 시청률이 10%대이고 20%를 넘기면 성공작으로 치부되는 시대에 무려 50%를 넘보는 시청률을 내고 있다는 것은 작품성과 상관없이 이 시간대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사회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 시간대의 가족드라마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왕가네 식구들>만이 아닌 이 시간대의 KBS 주말극이 일정하게 높은 시청률을 내왔다는 것은 작품 그 자체보다 이 시간대가 가진 프리미엄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시청자들은 무슨 일인지 이 시간대에 KBS 주말극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있다. 거기에는 편안한 기대감이 있고 그 기대감을 적절히 배반하다가도 채워주는 말 그대로 시청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 드라마의 공식이 있다. 그 공식을 시청자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알기 때문에 즐기는 면이 더 크다. 마치 한 시간 동안 벌어지는 게임처럼.

 

여기에는 이 시간대의 주말드라마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가족주의가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즉 최근 주중 드라마들을 보면 가족주의보다는 해체되는 가족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한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불륜을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의 불완전함을 얘기하고, <미스코리아><별에서 온 그대> 같은 작품은 가족이 등장하긴 하지만 가족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전개가 대부분이다. 최근 종편이나 케이블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들도 그렇다. 물론 시대극을 다루고 있는 <맏이>는 예외가 되겠지만(이 드라마 역시 과거 가족에 대한 향수를 다룬다는 점에서 현 가족의 해체를 역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로맨스가 필요해3><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같은 드라마들은 가족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더 추구한다.

 

결국 작금의 현실에서 가족은 과거 같은 가족드라마 틀로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 늘 가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던 김수현 작가마저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는 결혼에 대한 회의적인 담론들을 담고 있다. 이 드라마가 시청률이 저조한 이유는 김수현 작가의 팬들이라면 기대하기 마련인 가족주의의 틀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의 해체가 드라마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면 <왕가네 식구들> 같은 KBS 주말드라마의 성공은 거꾸로 가족주의에 대한 판타지를 이어가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가 과도한 민폐 캐릭터 때문에 막장 논란을 일으키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이 민폐 캐릭터가 권선징악의 형태로 결말을 맞을 것이며 또한 가족이라는 오히려 더 공고해진 틀 속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시청자들은 안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가네 식구들>을 보다보면 해체되어가는 가족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와 반발을 느끼게 된다. 거기 등장하는 민폐 캐릭터들은 그것을 촉발시키는 촉매제인 셈이다. 그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결국은 용서하고 다시 끌어안는 동안 우리는 가족은 여전히 지켜져야 할 최후의 보루라고 느끼게 되는 것. 하지만 이러한 안간힘은 이 시간대가 마치 유일하게 남은 가족주의의 성전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뻔하고 식상해도 자꾸만 되새기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신데렐라 없어도 더 쫄깃한 '응답1994'의 멜로

 

멜로는 신데렐라가 있어야 된다? 적어도 <응답하라 1994>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가 초거대 재벌가들 사이에 들어간 신데렐라 이야기로 너무 뻔하다는 비판을 받는 반면, <응답하라 1994>는 신데렐라 없고 심지어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멜로만으로도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과거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하지원이 그랬고, <최고의 사랑>의 차승원과 공효진이 그랬듯이 잘된 멜로의 연기자들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 <응답하라 1994>의 멜로는 정우라는 배우에 대한 신드롬을 만들고 있고 또한 늘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던 고아라까지 매력적인 연기자로 재탄생시켰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처럼 촌스런 멜로의 주인공들이 이토록 주목받게 된 것은.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이 그랬듯이 현재의 여주인공이 과거 1994년의 어떤 인물과 결혼을 했는가를 찾는 다소 단순한 멜로를 그린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멜로가 의외로 힘을 발휘한다. 누가 누구와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떻게 관계가 발전됐는가 하는 점은 마치 첫사랑의 추억담처럼 우리를 아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친오빠처럼 다가와 점점 가슴 뛰게 만드는 오빠로 느껴지게 되는 쓰레기 정우나, 그저 하숙집을 들락거리다 점점 가까워지게 되는 칠봉이 유연석은 그 설정 자체가 신데렐라 멜로와는 다른 <응답하라 1994>의 특별한 멜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연세대라는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에다 직업적으로도 향후 의사가 될 의대생이거나 프로야구의 에이스가 될 야구선수다.

 

이것은 나정이(고아라)네 하숙집에 들어와 그녀와 장차 결혼할 지도 모를 다른 후보군들도 마찬가지다. 해태(손호준)는 순천시 버스회사의 막내아들이고, 빙그래(바로)의 부모는 충북 최대 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하며, 삼천포(김성균)는 한번 나가면 기름 값 1500은 드는 배를 가진 집의 아들이다. 물론 이들은 초재벌도 아니고, 드라마는 오히려 이 ‘잘사는 촌놈들’이라는 설정을 신데렐라 이야기로 활용하려 들지도 않는다. 유머 코드라면 모를까.

 

이들 촌놈들이 상경해 벌이는 멜로는 특별할 것 없는 당대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MT를 가고 미팅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팬클럽 활동을 하며 하숙방에서 술내기 게임을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그들이 보여주는 멜로란 오지 않는 삐삐를 밤새워 기다리거나 게임을 빙자해 뽀뽀를 하거나 혹은 아플 때 꼭 껴안아주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등장하는 그 흔한 결혼 반대하는 부모들도 보이지 않고 백화점을 통째로 쇼핑하듯 과시하는 남자의 모습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94>의 멜로가 그 어떤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쫄깃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멜로 속에 존재하는 평등한 시선과 특유의 공감대 덕분이다. 이 드라마에는 1994년의 공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어딘지 촌스럽고 능숙하지 못한 인물들의 행동들이 오히려 멜로를 더 아련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정이를 좋아하면서도 표현은 친오빠처럼 무뚝뚝하게 던지는 쓰레기가 그렇고, 또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애써 속내를 감추려는 칠봉이가 그렇다. 해태와 조윤진(도희)의 관계를 보라. 그들은 대부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 가까워진다.

 

<응답하라 1994>가 신데렐라 이야기 없이도 더 아련한 멜로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1994년이라는 과거의 한 지점이 가진 힘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 그것도 첫 사랑의 추억이 있는 그 청순의 한 기억이란 현실적인 것과 일정부분 거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첫 사랑의 설렘에 집안 형편이나 학벌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은 또한 어쩌면 1994년만 해도 지금처럼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초재벌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와 거의 하녀처럼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그것이 판타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졸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많았지 그것이 사랑도 넘을 수 없는 계급이 되는 현실, 얼마나 치졸하고 치사한가.

 

그래서 이러한 양극화로 인한 수직적인 계급구조가 잘 보이지 않는 나정이네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멜로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큰 판타지로 다가온다. 돈이나 현실이나 집안이나 학벌과 상관없이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가슴 설레며 하는 사랑.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 사랑은 그러나 심지어 치사한 신데렐라 스토리에마저 빠져들게 만드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랑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요즘 청춘들은 학비 마련하랴 취업 준비하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응답하라 1994>가 보여주는 이 너무나 편안하고 때로는 낭만적으로 여겨지는 청춘과 사랑이 왜 판타지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양극화를 더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멜로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응답하라 1994>의 평범한 멜로가 더 강력한 이유다. 양극화 자체를 지워버린 완전한 평등의 멜로라니.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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