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의 이병헌, ‘선덕여왕’의 고현정

이른바 한류스타들의 연이은 드라마 참패 이후, 연기자 파워는 거품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올 최고의 연기자 파워를 보여준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아이리스’의 이병헌과 ‘선덕여왕’의 고현정이다.

‘선덕여왕’의 성공은 물론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만, 그 중 미실 역할을 백 프로 이상 해낸 고현정의 힘이 컸다의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극은 간단하게 말해, 미실이라는 권력을 세워두고, 그 권력을 빼앗아가는 덕만(이요원)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극의 힘은 전적으로 미실에서 비롯되고 미실에 의해 추진력이 생기며, 미실의 패배로 인해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다.

고현정은 미실을 연기하면서, 냉혹할 정도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고, 심지어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역할이면서도 주인공이 흠모할 정도의 매력을 발산했다. 덕만의 멘토 같은 역할을 해주고, 결국 덕만을 여왕의 자리까지 올려준 것은 결국 미실이었다. 그러니 그 냉철함 속에 합리적인 사고방식까지 갖추고, 때로는 여성으로서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보여주는 미실이라는 역할이 어찌 무겁지 않을까.

고현정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서 세치 혀와 눈 꼬리를 올리고 입 꼬리를 꼬는 몇 가지만으로도 이 사극을 거의 장악해나갔다. 50부까지 팽팽함을 잃지 않고 사극이 흘러온 힘은 바로 이 미실과 그 미실을 연기한 고현정의 호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미실의 죽음과 함께 그 드라마의 힘을 책임져야 하는 덕만의 모습이 정치지도자로서의 미실을 닮아간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 드라마에서 미실은 사라졌지만, 그 아우라는 여전히 남은 분량 내내 극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이리스’의 이병헌은 드라마 시장에 영화적 실험성을 가미한 이 한국형 블록버스터 드라마라는 다소 모험적인 세계를 대중적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냈다. 이 드라마의 소재나 스토리텔링, 그리고 연출은 결코 쉽거나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의 대중적 인기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이병헌이 보여준 멜로와 액션을 넘나드는 연기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고현정이 한 자리에 앉아서 몸이 아닌 말로 칼바람 나는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카리스마를 선보였다면, 이병헌은 온 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강력한 액션을 통해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 편 촉촉이 젖은 눈빛으로 여성 시청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몸을 아끼지 않는 폭발적인 액션과, 그 몸이 심지어 슬프게까지 느껴지는 처연한 멜로가 아우러지자, 드라마는 끝없이 달리면서도 그 안에 감정을 포획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이병헌의 존재감이 반가운 것은 그간 우리네 드라마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던 남성 카리스마의 부활을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남성 카리스마는 과거의 마초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감성적인 면이 어우러진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것은 향후 우리 드라마가 그려나갈 남성 캐릭터들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병헌이 가진 연기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헌과 고현정. 이 두 배우가 올해 최고의 연기자 파워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 그 핵심은 연기자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는 끝없는 새로운 연기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현정은 청순한 이미지 틀에서 벗어나 털털한 이미지를 거쳐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까지 소화해내면서 명실공히 연기자로의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냈고, 이병헌은 멜로에서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자신만의 연기영역을 확보했다. 이것은 과거 일부 한류스타들이 이미지의 반복을 보여주던 양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즉 이제는 연기의 질만이 연기자 파워를 만들어내는 시대라는 것을 이 두 배우는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미실의 죽음에서 '모래시계' 태수가 떠오르는 이유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 아름다운 최후를 맞았다. 이제 드라마 속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우리네 드라마史에 남을 족적을 남겼다. 먼저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사극 속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드라마 전체에 힘을 부여하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힘을 지닌 캐릭터였다. '선덕여왕'의 시작이 덕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미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미실이라는 강력한 여성 카리스마를 세워두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서 덕만(이요원)과 유신(엄태웅), 비담(김남길), 춘추(유승호) 등의 캐릭터가 세워질 수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자결한 미실 앞에서 덕만이 하는 말, "당신이 없었다면 자신도 있을 수 없었다"는 그 말은 캐릭터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바로 덕만이 술회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미실은 단순히 악역으로 치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때론 강력한 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덕만의 멘토 역할을 해주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미실은 악역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잘못 만난 안티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상적인 덕만과 상반되게 현실 정치 감각을 가진 인물이 미실이다. 덕만이 곧잘 하는 말, "미실이 하는 방식으로 해야겠다"는 말은 이 인물이 가진 뛰어난 능력을 말해준다.

미실은 또한 여성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캐릭터이기도 하다. 미실은 이 사극 속에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캐릭터다. 그녀는 칼을 휘두르거나 전쟁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저 한 자리에 앉아 판세를 읽고 거기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 칼의 힘보다 더 강력한 말의 힘만으로 상대방을 오금을 저리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 미실이다.

이 정적인 상태에서 온전히 카리스마를 보여야 하는 미실이라는 캐릭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고현정이라는 연기자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틀고, 눈꼬리를 조금 올리는 것만으로 미실이 가진 힘을 온전히 표현해냈다. 즉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고현정이라는 연기자에게도 큰 의미가 되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고현정은 청순한 이미지에서 탈피해 털털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꾀해왔고, 이번 작품을 통해 요염하면서도 악마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비극적인 복잡한 캐릭터를 소화함으로써 연기 스펙트럼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빛나는 캐릭터의 하차가 아쉽기 때문일까. 미실의 죽음 앞에 '선덕여왕'의 인물들은 저마다 예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5년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은 청순한 모습으로 최민수와 연기 호흡을 맞추며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고현정에서 당시 최민수가 보여주었던 카리스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실의 최후에, 드라마史에 길이 남게 된 모래시계' 태수(최민수)의 죽음이 연상되는 것은, 미실이라는 캐릭터가 일궈낸 여성 카리스마의 절정과 그것을 연기한 고현정의 변신이 놀랍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한 시대는 흘렀고, 카리스마 역시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져 왔다. 미실은 바로 그 지점을 표상하듯 서 있는 캐릭터다.

'선덕여왕'의 고현정, '드림'의 박상원, '스타일'의 김혜수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은 주역은 아니지만 이 사극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사극은 바로 이 미실이라는 악역 캐릭터에서부터 그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그 힘으로 굴러가며 주역은 물론이고 주변인물들까지 이 캐릭터에 의해 창출되고 움직여진다. 이 사극이 가진 미션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이 절대 권력의 소유자인 미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은 어쩌면 이 사극의 가장 중요하고도 힘겨운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 극은 흥미진진하게 흘러갈 수 있다.

이것은 '드림'의 강경탁(박상원)이란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드림'이 스포츠 에이전트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로서 그 핵심적인 틀이 복수극에 있다면, 그 틀을 쥐고 있는 인물은 강경탁이다. 비정하고 철두철미한 이 악역은 청춘을 온전히 바쳐 개처럼 일해 부와 명예를 쌓아온 남제일(주진모)을 저 바닥까지 내치는 인물이다. 이로써 남제일은 이 드라마 속에서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저 스스로 스포츠 에이전트로서 성공해 강경탁을 무릎 꿇려야 한다. 따라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강경탁을 연기하는 박상원은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주말 드라마, '스타일'의 박기자(김혜수)는 이 드라마 속에서 도무지 넘어서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악역이다. 직장상사의 표상처럼 과장되게 그려지는 이 박기자는 이서정(이지아)이라는 말단 직원의 캐릭터를 구축해주는 인물이다. 박기자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는 이서정은 이로써 그녀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서정의 성장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이 '스타일'에서 박기자는 그 성장의 동기를 제공한다. 박기자 역할의 김혜수가 그 어떤 주역들보다 돋보이고 중심축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고현정이나 박상원, 김혜수 같은 이제는 중견이 된 연기자들이 매력적인 악역으로 돌아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악역이란 드라마의 척추 같은 역할을 한다. 극을 만들어내고 극을 움직이게 하며 심지어 거꾸로 주역을 이끌어가기도 하는 악역이 주역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으면서도 악역이라는 이유로 자칫 꺼려할 수 있는 이 배역을 기꺼이 끌어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여전히 주역을 맡아도 빛날만한 자신들만의 아우라를 가진 연기자들이 아닌가.

연기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스타라는 허울보다는 연기자라는 실재에 더 몰입하는 것은 실로 중요하다. 이것은 중견 연기자라는 칭호를 받는 그들에게도 그렇지만, 우리네 드라마 전체의 성장을 위해서도 그렇다. 한때 청춘스타들로 빛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연기자들은 어찌 보면 우리 드라마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그들이 기꺼이 스타의 스포트라이트보다 드라마의 척추 역할로 돌아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한류스타라는 빛 속에 여전히 서서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연기자들이 외면당하는 것은 이처럼 큰 틀 속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보다는 여전히 하고 싶은 역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의 드라마를 보는 시각은 그만큼 성숙해졌다. 그들은 이미 드라마 속에서 악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그 악역 속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해내 기꺼이 박수를 쳐준다. 드라마의 성패가 그 드라마를 움직이는 매력적인 악역의 발굴에 있다고 볼 때, 어쩌면 이런 선택을 하는 중견 연기자들의 어깨 위에 우리네 드라마의 향방이 달려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악역의 중견들, 그 의미있는 귀환은 주목받고, 박수받을 만한 일이다.

‘찬란한 유산’의 백성희, ‘선덕여왕’의 미실, ‘시티홀’의 고고해

‘아내의 유혹’에서 악녀 신애리(김서형)의 트레이드마크는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눈을 치켜뜨는 것이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드라마는 거친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바로 이 연기로 시청자들을 바들바들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등장한 악녀들은 신애리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소리를 지르기보다는 차분해졌고, 감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논리적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눈을 치켜뜨기는커녕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들이 더 살벌한 것은.

‘찬란한 유산’에서 백성희(김미숙)는 미소 짓는 악녀의 절정을 보여준다. 남편의 사고소식을 듣고는 보험금을 혼자 챙기려 배다른 딸인 은성(한효주)과 그 동생 은우(연준석)를 길거리로 내쫓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지체아인 은우를 멀리 내다버리기까지 한다. 살아온 남편을 반기기는커녕 갖은 거짓말로 은성을 만나려는 그를 절망에 빠뜨리고, 모든 것이 탄로 나자 거꾸로 은성을 거둬 유산까지 주려하는 장숙자(반효정) 여사를 찾아가 거짓말로 은성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그녀는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자신이 하는 행동에 감정을 최대한 숨긴다.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거짓말은 이 차분하게 숨겨진 감정 뒤에서 좀체 진면목을 드러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앞에서 답답할 정도로 착하기만 한 고은성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뭐라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 미소 짓는 악녀에게 완벽한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미소 짓는 섬뜩함은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늘 방긋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살벌한 칼날이 느껴진다. 덕만을 놓친 병사의 목을 치면서 그 피가 얼굴에 튄 채로 살짝 웃는 모습은 귀기스럽기까지 하다. 앞에서는 공손한 척 예를 다하다가 갑자기 귓속말로 천명공주(신세경)에게 “도망쳐라!”하고 명령할 때, 그 숨겨진 칼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시티홀’의 고고해(윤세아) 역시 같은 부류다. 이름처럼 앞에서도 고고한 척 우아함을 떨지만 사실은 뒤에서 한 사람을 파멸로 몰아붙이는 그 모습은 똑같은 미소짓는 악녀의 자질을 가졌다. 자신이 갖고 싶은 조국(차승원)을 취하기 위해 그녀는 신미래(김선아)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정치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녀의 목적은 그러나 조국이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획득하려는 권력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우아한 악행은 때론 자본이 행하는 그것과 닮은 구석이 많다.

악녀들이 이처럼 감정을 숨긴 모습으로 진화하는 것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악역이 아니고 악녀냐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점점 여성 편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바가 크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보다는 여성과 여성의 대결구도가 그만큼 볼만해졌다는 얘기다.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와 대결하는 것은 바로 구은재(장서희)라는 여성이고, 이것은 ‘찬란한 유산’의 백성희-고은성, ‘선덕여왕’의 미실-덕만, ‘시티홀’의 고고해-신미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여성과 여성의 대결구도에 우리네 드라마가 가진 갈등 구조 속에 빠질 수 없는 멜로라인이 결부되면 그 대결구도는 더 힘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악녀들은 이제 자신들이 가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바로 감정 자체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해진 섬세함을 무기로 삼는 것이다. 요즘 드라마들에 유독 악녀들이 많고 그녀들이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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