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대, ‘바빌론’이 100년 전 할리우드를 추억한 건

바빌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말을 태워 옮기는 트럭이 멈춰서고 운전수가 내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에게 트럭을 불렀냐고 묻는다. 그러자 매니는 말이 아니라 코끼리라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화를 내던 운전수는 그러나 뒤편에 서 있는 진짜 코끼리를 보며 깜짝 놀란다. 절대 안된다는 운전수에게 매니는 할리우드 인사들이 벌이는 파티로 코끼리를 옮기려 하는 것이고, 그걸 해주면 파티에도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운전수는 기꺼이 이를 수락한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길에서 코끼리를 태운 트럭을 거대한 똥 세례까지 받아가며 매니와 운전수가 오르는 기상천외하면서도 코믹한 광경이 펼쳐진다.

 

데미안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의 이 도입부는 그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한 편의 기발한 은유처럼 그려진다. 도대체 어떤 파티길래 코끼리까지 등장할까 궁금하지만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 재즈음악이 가득한 그 곳은 한 마디로 광란과 난장의 끝판이다. 마약과 섹스에 취해 반나로 춤을 추며 갈수록 혼돈 그 자체가 되어가는 그 난장은 자극의 끝판이다. 그러니 코끼리가 등장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곳은 돈과 화려함으로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들, 제작자들, 감독들, 배우들이 모여 코끼리처럼 매혹적으로 시선을 끌지만 똥 세례를 싸대는 코끼리 같은 엉망진창의 대혼돈이 뒤섞여 있다. 

 

엉망진창이지만 유혹적이고 무엇보다 그것이 현실 공간이지만 완전한 비현실적인 판타지처럼 보이는 환각 파티 현장은 바로 데미안 셔젤 감독이 영화에 대해 갖는 양가감정을 잘 보여준다. 현실에서 허공으로 붕 떠있는 듯한 광경들이 펼쳐지고 실제로 혼몽해진 이들이 인파들 위에 올려져 옮겨지며, 뒤섞여 혼음을 펼치는 모습은, 파티 다음 날 보여지는 영화 촬영장의 난장과 기막힌 댓구를 이룬다. 환각 파티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전쟁통이 따로 없는 영화 촬영장이다. 

 

그런데 그 정신없는 난장판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인물들이 눈에 띤다. 전날 파티장에 대뜸 찾아와 스스로를 ‘타고난 스타’라 말하며 그 혼돈 속에서도 시선을 잡아 끌던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파티 때문에 펑크 낸 배우 대신 창녀 역할을 맡아 단박에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파티장에서 넬리 라로이를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매니는 넬리에게 영화판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는 무성영화의 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때문에 영화 촬영장에 우연히 왔다가 기회를 잡는다. 잭 콘래드는 술과 마약에 쩔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만 감독의 ‘액션’ 소리에 영화 속 인물이 되어 연기한다. 영화 촬영장은 대 혼돈 속이지만 그 안에는 이마저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데미안 셔젤 감독은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조악하고 나아가 경박해 보이기까지 한 영화의 현장들은 다름 아닌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다. 녹음기술이 들어가 있지 않아 하나하나 자막을 찍어 인서트 컷으로 넣었던 시대의 풍경이다. 잭 콘래드는 그 무성영화 시대 영화가 탄생시킨 스타다. 대사를 할 필요가 없고, 영화는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극장의 관객들을 환호하게 했던 시대. 당시 영화는 기차역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어 보여줘도 경탄의 박수를 받던 시절이었다. 

 

넬리 라로이 역시 이런 시대의 끝자락에 기회를 잡아 벼락스타가 된다. 저 환각의 파티에서 누가 더 과감한 행동과 춤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주목을 받게 되는 것처럼, 넬리 라로이는 타고난 끼로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바빌론>은 무성영화 시대에 탄생한 스타의 성장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시 정점에 올랐던 스타가 유성영화로 변화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심지어 엽기적인 느낌을 주는 현장을 그저 카메라에 담기만 해도 영화가 되고, 그것이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했던 무성영화 시대는, 목소리와 현장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유성영화 시대를 맞아 영화와 대중들 사이에 놓여있던 가림막이 한 꺼풀 벗겨진다. 잭 콘래드는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된 영화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관객들을 목격하고, 가식 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는 것으로 무성영화 시대에 벼락스타가 됐던 넬리 라로이는 이제 말도 안 되는 불어까지 구사해가며 자신을 포장해야 상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한다. 결국 그 끝은 우리가 이미 영화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비극이다. 한 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타들은 그 빛을 지나 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왜 하필이면 지금 데이먼 셔젤 감독은 시간을 100년 전으로 되돌려 무성영화 시대의 끝자락을 들여다본 것일까. 그건 다시 현재 영화가 마주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아름다운 도발이 아닐 수 없다. OTT가 생겨나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이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은 분명 영화에 변화가 생기고 있는 시대다.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스타와 감독과 제작자들이 탄생할 테지만, 그렇다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밀려난 저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한참이 지난 후 다시 할리우드를 찾았다가 우연히 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는 매니를 통해 전한다. 

 

시대는 계속 바뀐다. 그건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2023년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바뀐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시대를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만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변화된 시대를 맞아 어느 날 갑자기 비웃음을 사는 위치로 추락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디 스타들만의 이야기랴. 보통 사람들 역시 한 때를 구가하지만 시대 변화 속에서 기성세대로 구세대로 밀려나지 않던가. 그래서 할리우드 가십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스마트 진)이 혹평을 한 일에 화가 난 잭을 위로하는 한 마디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의 재능으로 빚은 영화만큼은 천사의 영혼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

 

시대가 바뀌어도 그 시대를 만들었던 이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 또다시 맞이하게 된 영화의 변화의 시대에 대해 100년 전 이야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과거의 시대는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되지만, 그 안에도 빛나는 열정들이 있었고 그것은 당대의 영화라는 기록을 통해 후대에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 무려 세 시간짜리 영화지만 극장에서 봐야 진짜 맛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데이먼 셔젤 감독은 영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전하고 있다. (사진:영화'바빌론')

‘나의 해방일지’, 손석구에 대한 추앙이 말해주는 것들

나의 해방일지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되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은 구씨(손석구)에게 뜬금없이 ‘추앙’이라는 단어를 쓴다.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말.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 대사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붕뜬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2회 말미에 ‘추앙’이라는 대사가 나온 후 2주가 지나 5회 정도에 이르자 이 대사는 어딘가 유행어처럼 될 조짐을 보인다. 적어도 “날 추앙해요”라는 말 한 마디로 <나의 해방일지>를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을 쉽게 구분할 정도다. 

 

추앙이라는 단어는 미정이 뱉어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어는 구씨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전으로 추앙이라는 단어가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이라는 뜻을 찾아보는 구씨. 그리고 뜬금없이 미정에게 “확실해? 봄이 오면 다른 사람 돼있는 거? 추앙하다 보면 다른 사람 돼있을 거라며?”하고 툭 던지는 말이나, “하기로 한 건가?”하고 미정이 묻자 “했잖아. 아까 낮에.”라며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갖다 주려 넓이 뛰기 선수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던 일을 말하는 구씨.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라는 캐릭터는 독보적이다.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인물이고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투, 말까지 예사롭지 않다. 누군가 던지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가 갑자기 온몸으로 보이는 ‘추앙의 행위’는 그 답답함을 일거에 날려 보낼 만큼 더 강력한 힘으로 터져 나온다. 

 

미정네 집 밭일과 공장일을 도와 주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멀리 걸어 나가야 있는 마트에서 결국은 술이 모자라 또 나가야 할 걸 알면서도 꼭 두 병씩만 사서 집에 돌아오는 사람. 그리고 홀로 평상에 앉아 산 저편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러려니 멍하니 그 비를 맞고 있는 사람. 이상하게도 마음이 측은해지고 ‘추앙’ 같은 비일상적인 단어도 막 쓰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구씨다. 

 

도대체 이 미스테리한 인물의 정체는 뭘까. 왜 박해영 작가는 이런 인물을 미정네 집 근처에 포진해 놓은 걸까. 미정을 추앙하는 몸짓으로 웅크렸던 날개를 펴고 날았던 일 때문에 창희(이민기)는 하루 종일 구씨 이야기를 한다. “오늘 날 진짜 뜨거웠거든? 머릿 가죽 다 벗겨지는 줄 알았거든? 인간 염창희 이렇게 고추 따다 뒤지는구나. 고추는 뭐고, 나는 뭐고, 태양은 뭔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구씨 뛰는 거 보자마자 그냥 정신이 번쩍 드는데...”

 

창희가 추앙하기 시작한 구씨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작은 변두리 마을에 자신을 가둬둔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구씨라는 인물 때문에 이 변두리 마을과 서울을 오가며 매일 가짜 행복과 가짜 위안에 지쳐가며 ‘채워진 적 없는’ 미정과 창희가 조금씩 변화해간다. 미정은 대뜸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고, 비 오고 천둥치는 날 그가 걱정되어 그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창희는 구씨의 비상으로 무력하기만 했던 삶에 작은 활기를 찾아내고, 집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구씨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 눈빛이 반짝반짝하다. 

 

구씨라는 인물은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서 있음으로써 그와 관계하는 인물들을 반추해내는 그런 존재처럼 보인다. 미정이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고 말하며 겨울이 오기 전 “어떤 일이든 해야 되고” 한 번은 “채워져야”한다고 말한 건 그래서 마치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건 친구들에게 구씨 추앙을 늘어놓는 창희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짜 멋지고 싶다. 멋짐을 드러내려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진짜 멋진 그런 삶을 꿈꾸는 것. 

 

물론 그건 구씨의 실체가 아니다. 구씨는 결국 변두리 마을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둬놓은 알코올중독자일 수 있으니 말이다. 방 한 가득 채워진 빈 술병이 그걸 말해주고, 어쩌다 뜨거운 물을 발에 쏟아 다쳤어도 별 고통도 호소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오죽 무료하면 마트에 갔을 때 네 병을 사면 한 번만 가도 될 그 길을 굳이 두 병씩 나눠 사서 또 걷겠는가. 그는 마치 시간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데 그런 구씨에게 미정이 다가가고, 아무 조건 없이 “좋기만 한 사람”으로 구씨를 대하려 하면서 구씨도 변화한다. 주급을 받자 미정에게 문자를 보낸다. ‘돈 생겼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나 구씨’라고. 그 추앙의 문자 하나가 미정을 웃게 만든다. 두 사람은 변두리 당미역에서 만나 흔한 돈가스를 별 대화 없이 먹는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던 사람이 보내는 문자 하나와 함께 먹는 식사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흔하게 “언제 한 번 밥 먹자”고 말하는 그런 헛소리도 아니고 매일 의미 없이 보내고 맞장구치는 허망한 문자도 아니다. 온전히 ‘채워진 말이고 문자’일 테니.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 마음 속 한 구석에 무언가에 소외되거나 상처 입은 채 더 이상 달리거나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고 날개를 접고 있는 저마다의 ‘구씨’가 있는 지도 모른다. 가짜 위로와 가짜 행복 속에서 허망한 말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들을 버텨내며 꾹꾹 봉인해 뒀던 구씨.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구씨를 찾아내게 하고 추앙하게 함으로써 그 답답한 곳으로부터 해방해주라 말하고 있다. “날 추앙하라”는 말은 그래서 타인에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저 거짓 속에서 함부로 대해왔던 스스로를 추앙하라고.(사진:JTBC)

‘왕이 된 남자’는 여진구에게 제대로 연기의 판을 깔아줬다

영화 <광해>로 연기력 확장을 입증했던 이병헌을 보는 듯하다.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의 여진구 이야기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그저 우연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왕이 된 남자>가 가진 이야기가 여진구라는 연기자의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특별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그건 바로 여진구가 연기하는 하선이라는 광대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하선(여진구)은 가면을 쓰고 당대의 시국을 연기로 풍자하곤 하던 광대다. 얼굴이 왕 이헌(여진구)과 같다는 이유로 암살위협을 받는 왕 대신 왕좌에 앉아 왕을 연기한다. 하선을 그 자리에 앉힌 건, 점점 잔혹해지고 정신을 놓고 있는 이헌에게 그래도 충성하던 이규(김상경)다. 이규는 이헌을 모처에 옮겨 놓고 마약에 중독되고 환청에 시달리는 그를 회복시키려 한다. 

하선과 이헌은 그 성격이 극과 극이다. 이헌은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을 따르던 경인대군마저 죽게 만들고, 그것은 내내 그의 악몽으로 되돌아온다. 심지어 장인마저 죽이라 명하는 포악함을 보이지만, 그 포악함은 그의 유약함이 만들어내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하선은 이헌과는 달리 죽을 지라도 ‘인간다운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건 어쩌면 광대라는 직업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광대는 결국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이입을 통해 연기를 하는 이가 아닌가. 

물론 1인2역은 같은 연기자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을 연기해내는가를 통해 그 연기공력을 드러내게 해주는 장치일 수 있다. 하지만 <왕이 된 남자>에서 여진구의 연기가 남다르게 보이는 건 단지 1인2역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하선이라는 광대의 직업적 특성이 여진구의 연기에 대한 몰입을 더 극대화시켜주고 있어서다. 

영화 <광해>에서 이병헌이 그랬듯이, <왕이 된 남자>에서 여진구는 왕을 연기하다 점점 왕이 되어가는 광대를 연기한다. 그것은 연기자가 어떤 역할에 빠져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궁에 들어와 이헌의 역할을 연기하던 하선은 차츰 왕이라는 자리가 만들어내는 역할들을 조금씩 해나간다. 자신의 누이동생 달래(신수연)가 신치수(권해효)의 아들 신이겸(최규진)에게 욕보였다는 사실을 알고 생겨난 복수심은 그 몰입을 더 강화시킨다. 또 궁에서 만난 중전(이세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를 지키려는 행보 역시 하선을 그저 왕 연기에서 점점 왕처럼 몰입시키는 힘을 부여한다.

즉 <왕이 된 남자>는 폭군을 대신해 왕이 된 광대가 궁에 적응해가며 진짜 왕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진구라는 연기자(광대)가 왕 역할에 조금씩 빙의되어가며 나중에는 온전한 왕에 몰입하는 그 과정을 담고 있기도 하다. 중전을 구할 증좌를 갖고도 그를 구하기보다는 대비를 몰아낼 생각을 하는 이규에게 하선이 “비단옷 차려입고 권세를 누리면 뭐합니까? 짐승만도 못한 생각만 가득 차 있는데! 사람다운 생각은 조금도 못하는데!”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하선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자신이 죽게 한 경인대군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린다며 제 귀를 찔러버린 이헌을 보고 그가 다시 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이규는 결국 하선을 벼랑 끝으로 데려가 칼을 꽂고 “광대 하선은 죽었다. 이제 네가 이 나라의 임금이다.”라고 선언한다. 이제 온전히 하선이 왕의 위치에 서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연기의 관점으로 보면 여진구라는 배우가 한 걸음 더 왕 역할 깊숙이 들어가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진구는 <해를 품은 달>, <뿌리깊은 나무>, <무사 백동수> 등에서 아역으로 등장해 주목받은 배우다. 사극과의 인연은 그래서 그 후에도 <대박>이나 영화 <대립군> 같은 작품으로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아역이 성인역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모든 연기자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성인 역할을 하며 출연했던 드라마들에서 여진구는 도전적이었지만 그만한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런 그에게 <왕이 된 남자>는 확실한 한 판 무대를 열어주고 있다. 잘하면 살판이고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남사당패 광대들의 대사들이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연기의 절절함 또한 그만한 진정성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렇게 깔린 판 위에서 광대가 왕이 되는 신명 나는 한 판 연기의 세계 속으로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하고 있다.(사진:tvN)



‘골목식당’, 한 사람이 바뀌기 위해서 필요한 많은 것들

애초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지만 홍탁집 아들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백종원으로부터 닭곰탕 레시피를 받아 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닭곰탕을 내놓았다. 뭉클했던 장면은 그렇게 만든 닭곰탕의 첫 번째로 어머니가 시식하는 대목이었다. 이가 좋지 않으신 어머니는 아들의 닭곰탕 국물을 연거푸 수저로 떠먹으며 “맛있다”고 말하셨다. 그건 아마도 미각으로만 전해지는 맛이 아니라, 아들이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해낸 사실이 주는 ‘살 맛’나는 느낌이 더해진 표현이지 않았을까.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 포방터 시장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이 해왔던 이야기를 뒤집었다. 그 한 가지는 돈가스집 이야기였다. 알고 보니 음식으로서나 서빙으로서나 ‘끝판왕’이었던 그 집은 한때의 사업 실패가 준 트라우마 때문에 줄이지 못했던 메뉴를 간편하게 줄이는 것으로 감동적인 성공의 서사를 보여줬다. 영업 시작 전부터 줄지어 늘어선 손님들은 한참을 기다려 음식을 먹고도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는 이들도 흡족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홍탁집 이야기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사장은 아들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어머니가 가게를 전부 맡아서 하고 있는 그 집은 아들이 바뀌지 않으면 솔루션이 전혀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사람이 쉽게 변하는가 하는 점이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송 프로그램이 사람을 바꾸는 일까지 나서는 게 과연 합당한가 하는 점이었다. 시청자들 중에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며 이런 출연자에 공력을 뺄 게 아니라, 노력을 하고 있지만 노하우가 부족해 잘 되지 않는 집을 차라리 대상으로 하는 게 낫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번 포방터 시장편에서 이 돈가스집과 홍탁집은 이 프로그램에 가장 최적화된 집과 그렇지 못한 집의 양극단을 보여준 면이 있었다.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었고, 오랜 세월의 노력까지 더해졌지만 사업 노하우가 부족해 힘들게 버텨왔던 돈가스집은 이 프로그램과 백종원의 도움으로 활짝 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마인드 자체가 준비되지 않았던 홍탁집 아들은 굳이 도와줘야 할까 하는 의구심까지 만드는 집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프로그램이 홍탁집 아들을 통해 보여준 건 결국 장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업 솔루션과 음식 노하우를 갖고 있어도 그걸 활용하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 그래서 심지어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을 바꾼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이 프로그램은 수행한 면이 있었다. 방송이 그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방송이었기 때문에 불가능을 어느 정도는 넘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백종원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면 안된다’며 시청자들이 다 보고 기억하고 있다는 걸 새삼 상기시키기도 했다. 

물론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어 앞으로도 계속 잘 운영해 나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이 홍탁집 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백종원도 말한 것처럼 이 프로그램에 나왔던 음식점들 중에서도 당시에 잘 됐지만 초심을 잃어버려 잘 안 되는 집도 있다. 방송도 백종원도 어느 정도까지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책임질 수가 없는 노릇이다. 

또 한 가지 홍탁집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사실은 한 사람이 바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도움과 계기와 기회들이 주어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주변 상인들을 모시고 자신이 만든 닭곰탕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그 분들은 저마다 이 홍탁집 아들에게 덕담을 해주었다. 또 앞으로 자신들이 감시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만일 홍탁집 아들이 앞으로도 홀로 이 음식점을 잘 운영하게 된다면 이분들의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종원 대표의 남다른 마음과 노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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