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격> 폐지 논의, 과연 소재고갈 탓일까

 

<남자의 자격(이하 남격)>이 4년여 만에 폐지 논의에 들어갔다고 한다. 전투기 조종에서부터 마라톤, 그리고 하모니 같은 초창기 <남격>이 보여주었던 참신한 기획들과 호평을 떠올려보면 어쩌다 이렇게 초라한 처지에 몰리게 되었는가가 의아할 정도다. 항간에는 소재 고갈과 시청률 저조가 그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폐지 논의의 원인일까.

 

'남자의 자격'(사진출처:KBS)

지난 주 있었던 윤형빈 혼수 논란은 어찌 보면 현재 <남격>이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멤버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동료들이 선물을 하는 것은 그다지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사적인 일이 공적인 방송을 통해 나가게 될 때는 거기에 합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무한도전>이 하하의 결혼에 즈음해 했던 축의금 콘셉트의 특집에서 막판에 기부라는 선택을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한 공적 기능이 없다면 왜 시청자들이 그들만의 사적인 일들을 굳이 봐야한단 말인가. 게다가 혼수 물품으로 몇 백만 원 운운하는 것은 예능의 주요 시청자라고 할 수 있는 서민들의 감정을 건드린 것과 다르지 않다. 윤형빈 혼수 논란은 그래서 그것을 방송 소재로 하겠다고 결정한 제작진의 실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남격>이 대중들과의 공감대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남격>이 초창기 그토록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이 중년의 아저씨들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되는 몸이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의 춤을 배우려 했고, 술 담배와 스트레스에 찌들어 관리하지 못했던 몸을 관리하려 했으며, 젊은 시절 갖고 있었으나 어느새 현실 때문에 지워버린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도 했다. 그들의 도전은 중년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젊은 세대들에게도 공감대를 주었다. 심지어 귀여운 아저씨들의 이미지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저씨 예능의 가장 큰 도전은 그 아저씨 이미지에 대해 대중들이 갖기 마련인 호불호에서 생겨난다. 즉 아저씨가 진짜 아저씨처럼 보일 때, 매력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초창기 <남격>은 무언가 아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도전들을 통해 이 위험성을 상쇄시켰지만, 차츰 언젠가부터 이 도전의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아저씨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아저씨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남격> 합창단을 무려 3년에 걸쳐 했던 것은 이런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첫 번째 합창단 이야기에 물론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그것을 매년 반복하는 것은 어딘지 <남격>의 매너리즘처럼 보였다.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라는 <남격>의 부제를 떠올려 보면 합창단 콘셉트가 이렇게 반복할 만큼 어울리는 소재인가 의구심이 생겨난다. 결국 ‘죽기 전에 해야 할’이라는 절박감을 똑같은 아이템을 반복함으로써 날려버린 결과가 생긴 셈이다.

 

무언가 굵직한 아이템들이 시도되지 않고 그저 소소한 아이템에 머물게 될 때 <남격>의 아저씨들은 그래도 여전히 아이 같고 순수하며 열정만은 청춘인 그 매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이렇게 없냐’는 네티즌의 비판적인 시선은 그래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하나의 배수진처럼 치고 마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하는 비장함이 살아있을 때 <남격>은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남격>의 폐지 논의는 그간의 흐름들을 볼 때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래도 남는 아쉬움은 있다. 즉 <남격>이 포착해 놓은 중년 아저씨들이라는 훌륭한 세대적 포인트가 못내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혹시 진짜 초심으로 돌아가 자격 있는 아저씨들의 때론 땀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고 때론 여전히 귀엽게까지 다가오는 그 매력을 볼 수 있는 <남격>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일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걸까.

<내 딸 서영이>, 진정한 국민드라마였던 이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 딸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그 딸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아버지. 사위를 구하려다가 자신이 자동차에 치이고도 자기 정체가 밝혀질까 봐 제대로 검사도 받지 않고 도망쳐버린 아버지. 그렇게 존재를 부정한 딸을 위해서 그 딸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만드는 아버지. <내 딸 서영이>의 아버지 이삼재(천호진)가 국민 아버지가 된 이유다.

 

'내 딸 서영이'(사진출처:KBS)

아마도 이 땅의 부모들은 이삼재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위안 받았을 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살아왔고 그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한 평생의 삶. 그 삶에 대해 <내 딸 서영이>의 자식들은 그 부모가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죄송하다”고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아마도 이 자식들의 뒤늦은 회한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부모세대들에게 <내 딸 서영이>의 국민 아버지 이삼재는 대단한 판타지임에 틀림없다.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때로는 가족을 힘들게 만들었던 그 가부장제 하에서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딸. 어느 날 불쑥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해버린 딸.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삶이 좀체 행복할 수는 없었던 딸. <내 딸 서영이>의 그 딸 서영이(이보영)가 국민 딸이 된 이유다.

 

아마도 이 땅의 젊은 세대들은 서영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이 늘 보금자리가 될 수는 없는 거라고, 때로는 그 보금자리가 도망치고픈 족쇄이기도 한 거라고, 저 서영이가 당당하게 자기 삶을 선택한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무에 잘못된 일이냐고 서영이를 통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눈에 밟히는 부모의 그림자를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서영이의 눈물은 그래서 자기 삶을 선택했던 젊은 세대들이 그 당당함 뒤에 남겨진 아픔을 대신 씻어내주는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었다.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은 어딘지 애매하다. 단지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해서 흔히들 국민드라마라고 부르지만 때로는 그것이 너무 과하게 여겨지는 건 과연 국민이라는 호칭을 붙일 만큼 모든 세대를 끌어안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삼재 같은 국민 아버지, 서영이 같은 국민 딸은 물론이고, 도무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착하디착한 이상우 같은 국민 동생에, 역시 세상에 없을 것 같은 국민 며느리 호정(최윤영)까지. <내 딸 서영이>는 ‘국민’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드라마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찌 보면 뻔한 소재일 수도 있었고, 때로는 지나친 신파가 될 수도 있었으며, 혹은 너무 틀에 박힌 전개일 수도 있었지만 <내 딸 서영이>가 그토록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우리네 가족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딘지 파편화된 우리네 가족관계는 <내 딸 서영이>가 보여준 것처럼 어쩌면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드라마 제공한 화해의 판타지는 더더욱 우리의 마음을 울렸는지도. <내 딸 서영이>를 진정한 국민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그 가족 판타지가 모든 세대들을 끌어안을 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위탄3> 생방송, 왜 힘이 빠졌을까

 

<위대한 탄생3(이하 위탄3)>의 톱4가 결정됐다. 박우철, 한기란, 나경원, 정진철이 탈락하고 박수진, 이형은, 한동근, 오병길이 4강전에 올랐다. 물론 그 어느 때보다 실력자들이 많았던 탓에 끝으로 갈수록 탈락자에 대한 아쉬움은 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경원이나 정진철이 탈락하게 된 것은 <위탄3>가 멘토제와 심사위원을 분리하기 위해 변화를 시도한 이번 투표 시스템에도 취약점이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위탄3'(사진출처:MBC)

<위탄3>의 변화된 투표 룰은 100% 문자투표를 반영해서 먼저 합격자를 선정하고 난 후 남은 후보자들 중 탈락자를 멘토가 직접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멘토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점수를 줌으로써 당락을 결정하게 되면, 결국 자기 멘티들을 우선 챙길 수밖에 없는 <위탄3>의 멘토제가 가진 결함을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오디션 룰에 대한 제작진의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0대그룹, 20대 초반 남자그룹, 20대 초반 여자그룹, 25세 이상 그룹으로 나눠 세대별로 멘티들을 모아 그들 사이에서 경쟁하게 만든 시스템은 특정 세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나경원과 한동근이 들어있는 20대 초반 남자그룹은 대표적이었다. 나경원이 특유의 끼와 그루브로 이승철의 ‘소녀시대’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불러냈던 데 반해, 한동근은 패닉의 ‘기다리다’를 불렀지만 무언가 새로운 면을 보여주기보다는 약간 정체된 느낌을 주었지만 결과는 나경원의 탈락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렇게 굳이 세대별로 나누지 않았다면 한동근과 나경원은 결승에까지 오르기에 충분한 후보자들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어쨌든 룰은 룰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결정을 봐야 한다면 한동근의 합격과 나경원의 탈락은 온전한 무대에서의 경쟁이라기보다는 그간 방송을 통해 쌓여온 인기투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나경원이 노래를 끝냈을 때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벌써부터 한동근이라는 맞수를 거론하며 나경원에게 “떨어져도 최고였다”는 식의 심사평을 남겼던 것은 아닐까.

 

물론 공정성을 위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나는 <위탄3>의 룰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방송의 측면에서 이 룰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심사위원이 이미 어느 정도 감지하는 결과라면 그 경연이 시청자들에게 주는 긴장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것은 세대별로 멘티를 나눠 그들끼리 경쟁하게 하는 방식이나 100% 문자투표가 가진 약점으로 지목된다.

 

또한 심사위원들의 심사가 그저 감상평이나 극찬 일색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새로운 룰이 갖고 있는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재미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심사위원이 가진 힘은 거의 절대적이다. <슈퍼스타K>의 이승철, <K팝스타>의 박진영이 없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상상해보라. 그 재미는 분명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룰보다 더 큰 문제는 100% 문자투표 방식을 취하고 있는 <위탄3>가 너무 저조한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일 게다. 4강을 뽑는 이번 오디션이 문자투표를 마감하는 시점에 보인 투표수는 11만 표 정도였다. <슈퍼스타K>의 생방송 문자투표가 1백만 표를 훌쩍 넘어서곤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저조한 표수를 100% 반영하는 룰이 과연 ‘대국민 오디션’이라 불릴 수 있는 지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물론 <위탄3>의 멘티별 대결은 지난 멘토제와 심사가 부딪치는 문제를 사전에 봉쇄하고 또 폭 넓은 세대를 고르게 끌고 가겠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룰 역시 특정 세대에게 불리한 점이나, 100% 문자투표가 결국은 인기투표로 흐를 수밖에 없는 점, 또 무엇보다 투표율이 너무 저조해 그것이 대국민투표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점들은 이번 시즌의 또 다른 숙제로 남게 되었다. <위탄3>가 생방송에 와서 힘이 더 빠지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보고싶다>, 멜로가 사회적 메시지를 만날 때

 

“높은 담장 밖에서 너는 죄도 없이 고개 숙이고 있었어. 하지만 난 아버지 땜에 고개 숙이지 않을 거야. 수연아 사랑하자.. 우린 사랑하자. 더 많이 사랑하자.” <보고싶다>에서 한정우(박유천)가 이수연(윤은혜)에게 키스하며 깔린 이 속 얘기에는 이 드라마가 가진 독특한 결을 잘 보여준다. 이 대사는 한정우와 이수연의 14년에 걸친 사랑을 압축하면서도, 동시에 이 사랑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보고싶다'(사진출처:MBC)

이수연이 죄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살인자(심지어 실제 살인자도 아니었지만)라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14년이 지난 후 그 아버지 세대가 씌우는 주홍글씨는 이제 한정우의 몫으로 다가온다. 이수연이 사망한 것처럼 꾸민 것도, 강형준(유승호)을 절름발이로 만들고 그의 어머니를 정신병자로 만든 것도 모두 한정우의 아버지 한태준(한진희)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드라마 속 거의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바로 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정우는 “아버지 땜에 고개 숙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그것은 그 시대의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연에게 “사랑하자”고 한다. 과거 어른들의 굴레 속에서 더 이상 그 자식들이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다.

 

또한 어찌 보면 이수연은 한정우와 엮이면서 자신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휘둘리게 된 이 드라마 속 최대의 피해자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과거의 기억조차 하기 힘든 상처를 다시 바라보고 다시 한정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걸까. 또 그녀는 자신을 14년 간이나 보살펴온 강형준이 그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돌변해 그녀에게 살인 누명까지 씌우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이수연은 이렇게 토로한다.

 

“벌 받아야지. 그런데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만 해줘. 정우야. 나 너 많이 미워했었다. 억울한 데 화낼 데가 없어서 복수해야지 그러구 너 괴롭히기도 했었잖아. 근데 네가 너무 사랑해주니까 미움도 싹 없어지더라구. 상처도 다 나아지고.” 이 드라마는 심지어 살인이 벌어지는 복수를 배경으로 깔고 있지만 복수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가 복수를 통해서 풀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보고싶다>는 그 상처가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는 길은 처벌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쁜 기억은 지워내고 좋은 기억을 더 많이 살리라는 것. 이것은 <보고싶다>라는 멜로드라마가 사회적 메시지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사회적인 아픔, 특히 잘못된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통에서 벗어나는 젊은이들의 처절한 노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 읽으면 어른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사회와 그 사회에 의해 고통 받는 작금의 청춘들은 이 드라마의 이야기와 조응하는 면이 있다.

 

한정우는 이수연의 발에 난 상처를 보며 묻는다. “아직도 볼 때마다 아파?” 그 상처는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 이 상처 보면 아빠 피해 도망치던 기억보다 네가 지금처럼 내 발등 감싸주던 기억이 더 많이 난다.” 그 기억 속에서 어린 한정우는 어린 이수연의 발에 난 상처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이렇게 말해준다. “이제 안 아프지? 안보이니까.” 그리고 손 마술을 한다. “쏴- 지워졌다. 나쁜 기억. 이제 다시 만들면 돼. 좋은 기억.” 고통이나 상처는 그 제공자에 대한 복수로 인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내는 좋은 기억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고통 없는 좋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이 드라마는 한정우의 흥미로운 농담으로 그 메시지를 전한다. “닭장 속에는 암탉이. 꼬끼오- 문간 옆에는 거위가. 꼬끼오- 배나무 밑엔 염소가 꼬끼오- 외양간에는 송아지. 꼬끼오-” 한정우의 농담에 까르르 웃는 이수연에게 그는 이제 진짜 노래를 불러준다. “닭장 속에는 암탉이. 꼬꼬댁- 문간 옆에는 거위가. 꽥꽥 꽥....외양간에는 송아지. 음메- 도로 위에는 경찰들이 거기서!” 깜짝 놀라는 이수연에게 한정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이 노래에는 깊은 뜻이 있어요. 암탉은 꼬꼬댁, 송아지는 음메, 경찰들은 거기서. 다 각자 위치에서 제목소리를 내면서 살자는 뜻이지. 김형사 아저씨가 그러셨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멜로가 존재할까. 남녀 간의 달달한 사랑의 대화 속에서조차 사회적인 메시지가 불쑥불쑥 나오는 멜로라니. 심지어 취조실에서조차 눈물과 감동을 느끼게 하는 <보고싶다>는 멜로드라마이면서 동시에 휴먼드라마이고 또한 사회극의 하나라고 볼만 하다. 흔히 퇴행적인 신데렐라로만 달려감으로써 점점 가치를 잃어가던 멜로드라마는 이로써 <보고싶다>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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