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공주>, 어째서 이 사회는 피해자가 도망치게 만드는가

 

이 영화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은 영화가 무겁게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집단성폭행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17살 또래의 감성을 이토록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 이질적인 부딪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소재 상 무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 무거운 소재에 침잠해 여전히 살아가는 한 피해자 소녀의 소소한 일상까지 뭉개버리지는 않는다. <한공주>라는 영화의 대단함이다.

 

사진출처: 영화 <한공주>

영화는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한공주라는 17살 소녀가 타지로 전학을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있는 그 타지에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엄마는 재혼했고 아빠는 세상을 떠돌며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그 빈 집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죄책감에 시달리던 친구가 자살했다. 그리고 피해자가 된 그녀는 어찌된 일인지 보호받기보다는 가해자 학부모들에 의해 쫓겨 다닌다.

 

한공주가 새로운 학교로 와서 새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노래를 하고 또 수영을 배우는 이야기는 집단성폭행이라는 소재를 복수극의 형태로 늘 다뤄왔던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이례적일 수밖에 없다. 사건이 벌어진 후 피해자로 낙인찍혀 평생을 그 끔찍한 사고의 언저리에 붙들려 살아갈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피해자는 어쨌든 상처를 껴안고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새로운 삶을 위한 작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한공주에게 수영이란 그 작은 노력을 보여주는 행위다. 부모와 어른들에게 휘둘리던 공포의 물 속 같은 삶 속에서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나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자꾸만 가라앉는 한공주에게 친구는 물을 살살 달래야가라앉지 않는다고 말해주지만 그녀에게 물은 여전히 무거운 현실이고 두려움이다.

 

온 몸 구석구석 배어있는 그녀의 고통은 처연한 목소리가 되어 노래로 흘러나온다. 친구들은 그 노래 주변으로 몰려들지만 한공주는 그 노래를 타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없는 상황이다. 그것이 알려지는 순간 또 다시 가해자의 어른들이 찾아와 자신을 짓뭉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어른들은 이토록 부끄러운가. 자신들의 자식만을 생각하는 그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는 한공주를 영원한 피해자로 만드는 이유다.

 

이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는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된다. 거대하게 넘실대는 한강물이 가녀린 존재들을 삼켜버리는 두려움의 존재라면 동시에 물은 스스로 헤엄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영혼의 안식처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한공주가 그토록 수영에 집착한 것은 두려움을 넘어 자유를 얻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게다.

 

<한공주>는 기존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이 다루던 방식과는 달리 집단성폭력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그래서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우리들의 편견(피해자는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 있다는 식의)에서 비롯된 것이란 걸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한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어른이라는 게 창피해지는 시간, <한공주>는 피해자가 보호받기 보다는 도망치게 만드는 이 이상한 나라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려낸다.

<아빠>, 아이라 한계라던 우려 어떻게 씻었나

 

<아빠 어디가>는 처음 화제가 되던 그 시점부터 줄곧 제기된 우려가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함께 하기 때문에 어른들의 예능과는 달리 할 수 있는 미션에 한계가 있을 거라는 거였다. 사실이었다. 초반 <아빠 어디가>는 그 날 잠을 잘 집 선택과 저녁거리를 아이들이 구해오는 미션 그리고 저녁을 해먹고 잠을 자면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또 아침을 해먹는 미션 등을 반복했다.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이러한 패턴의 반복은 금세 식상해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제작진은 아이들의 속내를 알아보는 몰래 카메라 설정이나 한밤중에 폐가를 다녀오는 담력 테스트 등을 미션으로 넣기도 했다. 그 자체로는 훨씬 높은 수위의 재미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여기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았다. 미션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몰래 카메라는 아이들의 사적인 내면을 끄집어내는데다 자칫 어른들의 몰취미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도 잠시, 몇 개월이 지난 현재 뒤돌아보면 <아빠 어디가>의 성장이 꽤 성공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단조로움은 사라졌고 매 회 예상치 못한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이들의 첫 두발 자전거 타기 같은 소재나 어른들이 즉석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준 흥부놀부전 같은 소재는 <아빠 어디가>의 이런 성취가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잘 말해준다.

 

이것은 아이이기 때문에 한계라는 시각을 극복하고 오히려 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소재들을 보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찾아낸 결과다. 즉 어른들에게 자전거 타기라는 소재는 그다지 매력적일 수 없지만, 아이들의 첫 자전거 타기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 스스로 패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의 그 모습은 아이에게도 아빠에게도 커다란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아빠 어디가>는 그 아이들이 성장할 때 하나씩 보여주는 순간들을 소재화하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낯선 농작물을 밤에 함께 찾아다니는 미션도 또 농촌 일손 돕기에 참여하는 미션도 마찬가지다.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른들이 농촌에 가서 하는 이런 방송들을 흔하디 흔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하는 새로운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다가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어찌 보면 기존에 어른들이 했던 야외 리얼 버라이어티의 소재들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고 해도, <아빠 어디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이나 무인도 체험, 또는 아빠가 아이들에게 하는 흥부놀부전 같은 즉석 상황극은 이미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서 흔해진 아이템들이지만 그래도 <아빠 어디가>에서는 특별해진다는 얘기다. 게다가 아이가 하나하나 체험해가면서 성장하는 모습은 아빠들에게도 일종의 성장을 만들어준다. 아이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며 아빠들은 아마도 훌쩍 커버린 모습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여기 나오는 아이들이 이제는 시청자들에게도 한 가족 같은 존재로 자리했다는 점이다. 든든한 맏형 민국이와, 겁은 많아도 솔직하고 순수한 윤후, 나이에 비해 의젓한 성선비 준이와 장난꾸러기 상남자 준수 그리고 효심 가득한 홍일점 지아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보게 되는 반가운 얼굴들이 된 것. 바로 이 정서적인 유대감은 <아빠 어디가>가 취하는 소재가 제 아무리 소박해도 그 스토리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밑바탕이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이지 않은가.

 

아이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어른들이 가진 잘못된 편견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시선으로만 아이들을 바라본다면 아이들이 가진 잠재력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거꾸로 아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하다는 시선만이 아이들의 가능성을 더 확장시킬 수 있다. <아빠 어디가>가 프로그램의 성장을 통해 보여준 이 아이에 대한 다른 시선은 그래서 우리네 틀에 박힌 교육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하게 해준다. 어른들의 틀에 가두지 말고 틀 밖의 가능성을 보라고 이 프로그램은 말하고 있다.

아이의 시선으로 성장하는 <아빠 어디가>라는 신세계

 

우리가 본 것은 아이들의 몰래 카메라였을까 아니면 어른들의 몰래 카메라였을까. 혹시 우리가 이 몰래 카메라로 본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아빠 어디가>가 하면 뭐든 달라진다? 몰래 카메라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어른들의 악취미처럼 보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 어디가>에서 동물번역기(?)를 통해 자신들이 돌보는 젖소와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몰래카메라는 의외의 상황으로 이런 우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었다.

 

먼저 이 몰래 카메라는 의도 자체가 달랐다. 아이들을 놀리거나 당황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순수한 동심의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한 것. 동물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이 동화 같은 경험은 아이들에게는 동물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을 갖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또 하고 싶어 아빠를 조르는 준수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달라는 요구에 부끄러움도 이긴 채 어깨춤을 추던 윤후, 그리고 송아지들과도 밀당을 하던 지아는 아마도 이 짧은 소통의 경험이 훗날 꽤 즐겁고 의미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진지하고 모든 걸 진짜로 받아들이는 이 몰래 카메라는 그래서 거꾸로 이를 만든 어른들의 몰래 카메라로 뒤바뀌었다. 송아지 흉내를 내던 성동일과 김성주는 뭐든 진짜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엄마 아빠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됐다. 아이들의 반응을 훔쳐보던 몰래카메라가 어른들의 반응을 보는 몰래카메라로 바뀌게 된 것. 이러한 역전은 <아빠 어디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묘미가 아닐까.

 

이렇게 된 것은 아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실로 아이들의 존재는 지금껏 주로 어른들의 시선에 맞춰져 있던 예능 프로그램들이 바로 그것 때문에 보여주지 못했던 신세계를 우리에게 열어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저 대단할 것도 없는 시골마을에서의 하룻밤이나 저녁 한 끼가 그토록 새롭게 다가왔던 것은 바로 아이들 덕분이었다. 어른들이 모이면 으레 게임을 하고 자극적인 벌칙수행을 하던 것들이 아이들이 서게 되자 그 눈높이로 달라지게 됐던 것.

 

심지어 무인도에 가서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자 그 불모의 공간이 그저 야생의 생존지가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모험심을 갖게 만드는 보물섬으로 변모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펼쳐질 ‘친구와 함께 가는 여행’ 역시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껏 수없이 여행 버라이어티들이 해왔던 친구 미션과는 전혀 다른 재미를 선사할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의 눈높이가 거기에는 있기 때문이다.

 

처음 <아빠 어디가>가 호평을 받을 때조차 먼저 걱정스럽게 나온 의견들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을 수 없는 주말예능에서 자칫 아이들을 데리고도 자극적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초반부 몇 차례 몰래 카메라 설정에 대한 찬반은 바로 이런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행에서 보여줄 수 있는 소재가 한정적일 거라는 걱정이었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밥 해먹고 하룻밤 자는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

 

하지만 최근 <아빠 어디가>를 보면 이 두 가지 우려가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몰래 카메라마저 뒤집어버리는 아이들의 순수함이 주는 자신감과, 아이들의 시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여행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아빠 어디가>를 보면서도 어른들의 예능의 관점에서 이를 쳐다봤던 것이 분명하다. 저 몰래 카메라를 하던 김성주와 성동일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던가. 그들이 전혀 다른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아이들은 우리에게 그네들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것은 <아빠 어디가>가 지금의 대중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른들의 세상에 갇혀 그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우리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갑자기 아이들의 시선을 보여준다. 심지어 동물과도 소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닌가. 다 큰 어른들이 소통할 줄 모르고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싸우는 현실 속에서 <아빠 어디가>가 보여주는 동화는 그래서 그 어느 것보다 더 비판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박민하, 예능보다는 연기에 집중하는 편이

 

단언컨대 영화 <감기>의 지분율이 있다면 그 절반 이상은 온전히 아역 박민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혁이 시종일관 뛰어다니고 수애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전전긍긍하는 건 전적으로 박민하가 연기하는 미르라는 아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에 고통스러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 미르라는 아이의 배경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감기>에서 아역 박민하는 이토록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다.

 

박민하(사진출처:영화<감기>)

아이여서일까. 아니면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대로 천재 아역이라서 그런 것일까. 조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는 이 미르라는 역할을 박민하는 아무런 이물감 없이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만일 아역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약간의 틈입을 만드는 연기력 부족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이 영화 전체의 몰입을 방해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박민하는 틈입을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관객들이 더 극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어냈다.

 

초반부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모습에서 시작해 차츰 긴장감을 높이는 박민하의 표정의 변화는 이 영화의 고조되는 극과 거의 동일선상에서 움직인다. 연기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의 감성을 백 프로 끌어내면서도 어떤 점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릴 지 알고 있는 듯한 여유마저 엿보이는 이 아역에게서 분명 좋은 연기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심지어 연기 경력도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박민하의 연기는 말 그대로 극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려는 이야기는 그녀가 <감기>에서 어떤 연기력을 보였는가 하는 그런 점이 아니다. 이토록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아이가 왜 그 동안 심지어 대중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아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녀는 심지어 ‘안티 카페’가 생겼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녀가 ‘순수함을 잃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대중들의 반응 때문이다.

 

이제 겨우 만 6세의 아이가 <붕어빵>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목받고 <해피투게더>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어른 뺨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대중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아이의 모습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 즉 연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시키면 몇 초만에 뚝딱 눈물을 흘리고 노래를 부르며 울먹이고 또 금세 걸 그룹의 섹시 댄스를 흉내 내는 모습을 아이답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모습은 최근 리얼 예능이 추구하는 ‘진정성’면에서는 분명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 6세의 아이에게 예능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것과 연기가 요구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연기적인 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게다가 그녀는 타고난 연기자의 자질을 갖고 있다)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이제 갓 만 6세의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어른들의 배려와 관리다. 박민하라는 아이의 가능성을 알아봤다면 이 아이가 섣불리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이 과연 득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연기는 본업이고 예능은 그저 하는 것이라고 쉽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예능에서 만들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연기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연기자는 결국 자신의 이미지에 연기가 영향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이라도 <감기>같은 작품을 통해 박민하라는 장차 촉망되는 연기자를 발견한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이 아이가 가진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로 차근차근 걸어 나가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박민하에게 지금 필요한 건 잦은 예능 출연이 아니라 더 좋은 작품을 만나 연기자로서 경험해가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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