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이효리가 껴안은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이런 강도 보고 저런 산도 보고 들판도 보고 이러면서 힐링이 되는 거야. 여행이라는 건.” 이효리의 엄마 전기순씨가 그렇게 말할 때 그에게서는 순간 소녀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저런 산만 쳐다보면 산이 너무 좋은거야 엄마는. 저런 데서 막 누비고 다니며 버섯도 따고 고사리도 꺾고 도라지도 캐고...” 엄마는 그런 산 같은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모양이었다. 

 

JTBC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를 통해 함께 경주로 여행을 떠난 이효리와 엄마는 어딘가 그런 일이 낯설고 어색해 보였다. 그런 여행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취향도 너무나 달라 이효리가 뭘 하자고 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싫다고 말하는 엄마였다. 야경이 좋다며 보러가자고 하면 잠을 자야 한다고 하고, 찜질방에 가자고 하니 머리가 망가진다고 안된다고 한다. 네일아트라도 해보자고 하니 집에 가면 밭일할 걸 뭐하러 그걸 하냐고 하신다. 

 

대릉원에 관심이 있다고 가서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딘가 무관심해 보이고, 경주에 가면 봐야 한다며 첨성대 앞에 가서도 사진 몇 장 찍고는 다 했다고 돌아선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이효리는 우스우면서도 왜 그런 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특히 여행 오면 남는 게 사진인데, 엄마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싫어한다. 왜 찍느냐며 손사래를 치고, 애써 찍으려 하면 어색해한다. 

 

교복을 입고 소녀처럼 변신해 찍은 사진들 중에서 잘 나온 걸 고를 때도 엄마는 이효리에게 “너 사진빨 잘 받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은 보기 싫다 하신다. 귀엽다, 예쁘다, 잘 나왔다고 이효리가 계속 말하지만, 엄마는 부정한다. “늙어가지고 잘 나온 게 어딨어. 다 꼴보기 싫구만.”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이효리의 말에도 “웃는 것보다 그냥 다물고 찍는 게 자연스럽다”고 하신다. 그런 엄마에게 이효리가 농담처럼 슬쩍 말을 얹는다.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요? 사랑하도록 해봐요. 전여사님 우리 모두가 다 늙잖아요.”

 

이효리의 엄마지만 보다보니 자꾸만 우리네 엄마들이 겹쳐진다. 어렵게 살았고 그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여유도 없이 일하며 살아오면서, 이제 좀 여유가 생겼어도 여전히 과거처럼 ‘실용적인 선택’이 삶의 습관이 되어 살아가시는 엄마들. 그래서 나이들고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하는 일들을, 애써 숨기면서 살고픈 마음이 더 많은 엄마들이다. 캠코더로 엄마를 찍던 이효리가 “엄마 팔자걸음이다”라고 말하자 금세 ‘일자걸음’으로 고쳐 걷는 모습에서 엄마들의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으면서도 “눈가 주름도 쫙 펴졌으면 좋겠어. 쫙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이라고 딸이 말하자 엄마는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며 그걸로 만족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슬쩍 딸 자랑을 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난리들인데 뭐. 예쁘고 착하고 얼마나 너그럽고 착한 딸이냐 엄마한테 그래.” 그러면서 “한번 겪어봐라. 한번 부딪쳐봐라.”라는 말로 남들 이야기가 기쁘면서도 자신에게는 좀 소원한 것 같은 마음의 아쉬움도 드러낸다. 

 

가난했던 삶. 당신이 어려서 사랑을 못받아 자식들에게는 사랑을 듬뿍 주면서 키우려 했지만 막상 아빠를 만나고 나서 여유도 틈도 없었다는 말을 꺼내며 엄마는 슬쩍 눈물을 훔친다. “울어?”하고 묻는 이효리에게 “뜨거운 거 먹으니까 눈물이 난다”고 했지만 아마도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을 테다. 이효리는 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있으면 지금도 약간 긴장이 계속 되는 거 같아. 무슨 일이 벌어질까봐. 하도 일이 벌어지니까. 둘이 따로따로 있으면은 괜찮은데 같이만 있으면...”

 

“그런 점에서 너희들한테 미안하다. 엄마로서.” 그렇게 말하는 엄마에게 이효리는 엄마가 사과할 건 없다며 늘 아빠가 먼저 시작했고 그래서 자신이 신랑을 순한 사람으로 골랐다는 이야기도 꺼내놓는다. 이효리는 자꾸만 그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려 하지만 엄마는 그걸 꺼내놓고 싶지 않다. 그 과거를 부정하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엄마가 “좋은 얘기만 하자”고 할 때 이효리가 하는 답변이 가슴에 와닿는다. “좋은 얘기 나쁜 얘기가 어딨어? 다 지난 얘기지.”

 

누구나 가족사에 아픔 하나쯤은 다 있게 마련이다. 특히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부모님들과 겪어온 현 세대들이라면 이효리와 엄마의 이런 여행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게다. 하지만 그런 아픈 과거들은 애써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을까. 이효리는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려 한다. 나이들어 잔주름이 생기면 생기는 거고, 본래 팔자걸음을 걷는 건 숨길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픈 가족사 역시 애써 부정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이효리는 말하고 있다. 

 

“너무 사랑하는 엄마가 힘들 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그 시간이 나에겐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평생 가슴에 남아 있고, 그래서 더 잘해야 됐는데 반대로 이상하게 그것 때문에 더 엄마를 피하게 되는 안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좀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게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의 무기력한 모습을 다시 확인하는 게 너무 두려워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그런 마음을 좀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런 마음들이 엄마하고 나의 사랑을 확인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런 마음들을 용감하게 물리쳐 보고 싶어요.”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같은 제목에는 사실 부모와 조금 소원해진 자식들에게는 필요한 ‘용기’ 같은 게 느껴진다. ‘단둘’이 여행을 가는 일은 가족의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고, 그래서 한 걸음 떨어져 그 살아왔던 삶을 좀더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효리와 그 엄마의 지극히 사적인 여행처럼 보이는 이 프로그램이 그들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한때는 피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를 솔직하게 꺼내놓고 마주하는 이효리의 용감한 마음은, 우리도 갖고 싶고 또 가져야될 것 같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던 그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진:JTBC)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박은빈의 부모가 그려낼 장애에 대한 두 시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고래사냥법 중 가장 유명한 건 새끼부터 죽이기야. 연약한 새끼에게 작살을 던져 새끼가 고통스러워하며 주위를 맴돌면 어미는 절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대. 아파하는 새끼를 버리지 못하는 거야. 그 때 최종 표적인 어미를 향해 두 번째 작살을 던지는 거지. 고래들은 지능이 높아. 새끼를 버리지 않으면 자기도 죽는다는 걸 알았을 거야. 그래도 끝까지 버리지 않아. 만약 내가 고래였다면 엄마도 날 안 버렸을까?”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박은빈)는 함께 탈북자의 폭행상해 사건을 맡은 동료 변호사 최수연(하윤경)에게 엄마 고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남다른 고래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그래서 업무 중에도 불쑥 고래 이야기가 튀어나오곤 하는 우영우. 이 드라마에서 고래는 여러 가지 상징으로 사용된다. 바다에서 살지만 포유류라는 다소 이질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자폐스펙트럼을 갖고 있지만 사회에 나와 살아가는 우영우를 상징하기도 하고, 수족관에 갇힌 돌고래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사회에서의 편견에 갇혀 있는 우영우를 말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영우가 엄마 고래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처럼, 이 드라마에서 고래는 ‘위대한 엄마’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새끼를 버리지 않는 엄마. 하지만 자신에게는 없는 그런 엄마. 우영우가 맡은 폭행 상해 사건의 가해자인 탈북여성은 또 다른 엄마 고래 같은 존재다.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어쩌다 사건에 휘말리게 됐지만, 이 엄마는 아이 때문에 5년 간이나 도망자 생활을 한다. 아이가 너무 어려 엄마를 기억하지 못할까봐 그렇게 5년 간 지낸 후, 죗값을 받기 위해 자수한다. 처벌을 받는 두려움보다 아이를 잃을까 싶은 두려움이 더 큰 모성이다. 

 

그런데 우영우의 엄마 고래 이야기는 탈북여성에 대한 이야기에서 꺼내진 것이지만, 실상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만약 내가 고래였다면 엄마도 날 안 버렸을까?”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우영우는 버려졌다. 그런데 그는 왜 엄마로부터 버려졌을까. 이 부분은 드라마가 차후에 조금씩 사연을 풀어놓을 것이지만, 어쩌면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장애에 대한 시선과 이를 갖고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이를 도외시하고 있는 사회의 엇나간 편견 같은 것들을 담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 단서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우영우의 아버지 우광호(전배수)를 통해 찾아진다. 엄마는 버렸지만 아버지는 많은 걸 희생해가며 우영우를 끝까지 지키고 키웠다. 재혼을 한다거나 하는, 자신을 위한 삶보다 딸을 위한 삶을 선택하고 그의 재능을 알아내고 관심 있어 하는 법 공부를 시켜 변호사가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한 사람의 희생이 장애를 가진 이의 가능성을 살려냈다. 

 

그런데 엄마는 왜 버렸을까. 아직 그 엄마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드라마의 스토리텔링 구조로 봤을 때 우영우의 엄마는 법무법인 한바다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태산의 대표 태수미(진경)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건 아직까지 추정이지만 이런 추론은 라이벌 관계를 가진 두 회사의 이름으로도 어느 정도 유추된다. 우영우라는 고래를 받아준 건 ‘한바다’다. 태수미가 대표로 있는 회사 ‘태산’은 고래가 살 수 없는 곳이다. 위로만 올라가려 해서 더 이상 고래를 받아줄 수 없는 곳. 

 

만일 태수미가 우영우의 엄마이고, 남다른 야망으로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장애를 가진 아이를 버렸다면 그 상황은 장애에 대해 사회가 갖는 편견이 드리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공을 위해 앞으로만 달려가는 사회는 장애를 가진 소수자들을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하지 않던가. 

 

모성으로 표현됐지만 사실 이건 좀 더 확장해서 장애를 사회가 어떻게 수용하고 끌어안는가에 대한 화두처럼 보인다. 단순하게 보면 장애가 있어도 끝까지 옆에서 지켜준 우광호와 끝내 버린 엄마를 대척점으로 세워 어떤 선택이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길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바다의 정명석(강기영), 한선영(백지원), 이준호(강태오), 최수연(하윤경)처럼 장애가 있어도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버리고 떠나버린 우영우의 엄마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우영우가 꺼낸 엄마 고래 이야기가 특히 슬픈 건 그래서다. 그는 그래도 몇 프로 안 되는 서번트 증후군이고, 그래서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해 잘 살아내고 있는 인물이며 나아가 이건 드라마로서 어느 정도 판타지가 더해진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존재’라는 상처가 거기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그래서 슬프면서도 이 인물을 보듬고 싶고 세상 밖으로 당당히 나오게 하고픈 마음이 일었을 게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온 그 삶이 “저는 우영우입니다.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라고 당당히 소개될 수 있게.(사진:ENA)

'며느라기'가 보여주는 비뚤어진 역할 고정관념 문화

 

부부 두 사람만 살면 별 문제가 없을 듯싶다. 하지만 시월드에 한 번 갔다 오면 부부 사이에서는 냉기가 흐른다. 카카오TV <며느라기>가 보여준 제삿날 시댁 풍경은 며느리 민사린(박하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너무나 차별적인 모습에 불편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작은 아버지가 한 편에서 술판을 벌일 때, 시어머니 박기동(문희경)은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민사린과 부엌에서 제사상을 차린다.

 

그런데 남편 무구영(권율)도 아내 민사린이 그렇게 혼자 고생하는 걸 모르거나 당연히 여기는 건 아니다. 다만 시월드의 분위기가 며느리들이 일하는 게 당연한 듯 흘러가고, 그래서 민사린이 희생하는 것으로 그 화목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감수할 뿐이었다. 그래서 무구영은 민사린에게 그 일을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 역시 남편과 아들로서 모두 잘 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런데 사린아. 부모님 만나는 날만 그냥 그렇게 있어주면 안될까?" 무구영이 원하는 건 그런 날들만 아내 민사린이 그렇게 해줬으면 하는 거였다. 민사린 역시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잘 하려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혼돈스럽다. 그 제삿날의 풍경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또 남편의 마음도 이해되는 면이 있어서다.

 

무구영은 자신 역시 장모님에게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편이었다. 장모님을 찾아가 가게 정리하는 걸 도와주고 노래방에서 오랜만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민사린은 엄마와 함께 잠자리에서 아빠가 효자라 엄마가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엄마는 "자기 부모한테 잘 하는 사람이 상대방 부모한테도 잘한다"며 "시집가면 여자가 많이 참아야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래야지 또 가정의 평화가 오고 또 그게 나중에 다 내 복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민사린의 엄마가 말하듯 자기 부모한테 잘 하는 사람이 상대방 부모한테도 잘할까? 또 시집가면 여자가 참야 되는 게 당연한 일일까. 가정의 평화가 오고 나중에 내 복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걸 감당하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며느라기>에서 민사린의 고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엄마다. 그 역시 며느리로서 겪었던 일들이 아닌가. 하지만 어째서 엄마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딸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민사린의 시어머니인 박기동도 무씨 집안의 며느리로 감당해온 세월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며느리에게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반복하게 하는 걸까. 그가 딸 무미영(최윤라)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며느리에게 하는 그것과는 왜 그렇게 다를까. 무미영 역시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같은 며느리로서 민사린에게 전화한 무미영은 자신의 엄마와 함께 찜질방에 간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안다며 미안해한다.

 

딸과 시누이, 며느리와 엄마, 시어머니, 장모. 모두 다른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한 사람이 모두 가질 수 있는 호칭들이다. 그런데 그 같은 사람이 가는 곳에 따라 관계 속에서 이렇게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는 건 왜일까. 그건 그 호칭에 따른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단단한 가부장적 문화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인데 딸로서 하는 역할과 시누이, 며느리, 엄마, 시어머니, 장모의 역할이 왜 이렇게 다를까. 그런 역할에서 벗어나 그냥 한 개인으로서 똑같이 대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 날만 그렇게 있어주면 안될까?"라는 무구영의 말은 그래서 언뜻 이해되는 듯싶지만 사실은 그런 상황에서 가부장적 문화들이 부여했던 역할들을 당연히 받아들여 달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 비뚤어진 관계들이 굳어져 버리고 심지어 당연시됐던 건 '그런 날들'만 그렇게 있어준 일들이 반복되면서였으니 말이다.(사진:카카오TV)

'산후조리원'이 꼬집는 결혼, 임신, 출산에 대한 편견들

 

결혼을 하고 나면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고 나면 엄마가 된다? 그래서 출산을 하고나면 더 이상 여자로서의 매력은 사라지게 된다? 이런 사회적 편견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tvN <산후조리원>은 출산 후 남편과의 관계가 달라질까 불안해하는 오현진(엄지원)의 상황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결혼, 임신, 출산에 대한 편견들을 꼬집었다.

 

아름답게 쏟아지던 별똥별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오현진의 가슴으로 그 별똥별이 날아와 꽂히는 꿈을 꾼 오현진은 출산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젖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산후조리원 원장 최혜숙(장혜진)의 마사지로 뭉친 젖을 풀어주는 다소 '동물적인 모습'을 남편 김도윤(윤박)이 보게 되는 상황. 출산 후 자꾸만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을 들키게 되는 오현진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가 달라졌다는 데 불안감을 느꼈다. "수치심을 잃어버린 채 제3의 성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세레니티 산후조리원에서 모범 엄마의 표상처럼 행동하는 조은정(박하선)은 이 시기가 부부사이의 터닝 포인트라며 그 시기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서로를 계속 사랑하는 부부로 사느냐 그냥 엄마 아빠 역할에 충실한 부모로 사느냐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조은정은 그래서 부부사이에도 긴장을 놓치면 안 된다며 "애 낳고 이 시기에 여자들 모양새가 참 별로"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최대한 안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이루다(최리)라는 신세대 엄마가 마치 작가의 목소리가 빙의된 듯한 말로 꼬집는다. "에휴 결혼 진짜 피곤하네요. 아니 애 낳은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 바람 날까봐 걱정해야 되잖아요. 바람피우는 남자가 예방이 되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시기에 바람피우는 남자가 더 나쁜 거 아니에요? 왜 그 이유를 여자한테서 찾아요? 아니 이상해서요. 남편이 바람을 펴도 긴장을 놓친 여자 잘못이라 생각하는 게." 그러자 말문이 막힌 조은정이 아이를 낳아도 서로를 위해 노력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다는 이야기였다고 하자 이루다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그럼 언니 남편은 무슨 노력을 하시는데요?"

 

이루다는 결혼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아이를 낳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은 미혼모라고 했던 이루다는 아이 아빠인 세레니티의 원장 아들이 프러포즈를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이루다는 결혼같은 건 안한다고 예전부터 말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뜻을 전했다. 원장 아들은 그 때는 아이가 없었고 지금은 아이가 있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고 했지만 이루다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근데 우석아 요미가 생겼다고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물론 이루다의 이런 이야기는 평범하다 보긴 어려웠지만 거기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

 

오현진이 스스로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고 걱정하고 괴로워함으로써 남편까지 의심하게 되는 상황은 어째서 만들어지는 걸까. 그것은 여자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다는 그 사회적 통념이 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통념에 의해 달라진 역할이 정해지고 그걸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처럼 부여된다는 것. 괴로워도 마치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로써.

 

드라마는 남편 김도윤에 대한 오현진의 의심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걸 통해 달라지는 건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라는 걸 에둘러 말해준다. 그런 변화는 나이 들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나 관계가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아내에게 숨기고 싶었던 치질 수술 사실을 들킨 김도윤 또한 오현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만, 그들은 그 경험의 공유를 통해 더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에게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줄 수 있었던 시절은 끝났다. 하지만 달라진 우리의 관계도 제법 괜찮았다."

 

결혼, 임신, 출산으로 인해 우리들은 새로운 지칭을 갖게 된다. 여성들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며 남성들은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된다. 그래서 부여되는 새로운 역할들이 생겨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게다. 하지만 그런 역할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거기 매몰되거나 그 역할들만 강요받는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일 수 없다. <산후조리원>은 특히 여성들에게 결혼, 임신, 출산을 통해 더더욱 강요되는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비판하고 있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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