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마술사>, 영화라는 판타지가 줄 수 있는 것

 

<조선마술사>라는 제목은 기묘하다. 조선이라는 실제 역사의 무게감에 마술사라는 어딘지 판타지적인 소재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조선시대로 돌아간 장르물이라는 형태로 <조선명탐정>을 필두로 해 <조선미녀삼총사> 나아가 <해적>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영화들이 시도해온 역사 장르물(?)들이다. 어찌 보면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을 조선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버무려 새로운 퓨전을 추구한 작품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영화<조선마술사>

제목에서 드러나듯 <조선마술사>는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시대에 환술(마술)을 하는 환희(유승호)라는 인물이 있다는 설정도 그렇고, 그가 마술을 하는 곳이 물랑루라는 기루라는 점은 아예 대놓고 물랑루즈를 염두에 둔 것을 드러낸다. 물론 그의 마술쇼에 보조자로 아낙네가 올라와 사랑을 표현한다거나, 신체 토막 마술 같은 걸 시도한다는 건 당대의 윤리적 잣대로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니 <조선마술사>는 영화의 허구로서 봐야지 현실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그 독특한 재미의 지점들을 모두 놓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일단 인정하고 보면 <조선마술사>는 의외의 다양한 장르적 재미들을 선사하는 영화다. 조선시대를 설정으로 하는 마술은 하나의 예술적인 퍼포먼스처럼 보이고, 그 마술을 통해 신분 차이를 훌쩍 뛰어넘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는 마치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펙과 오드리 햅번의 이야기를 조선시대판 희비극 버전으로 바꾼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들을 옥죄어 오는 복수의 화신 청나라 마술사 귀몰(곽도원)의 등장으로 후반부 벌어지는 마술 무대에서의 한 판은 흥미진진한 액션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따라서 심각하게 현실 문제나 사회적 사안들을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오롯이 이 장르들의 문법 안에서 어떤 재미적 요소들을 찾는 데 더 집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린 시절 학대 받으며 자라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마술사 환희나 나라와 가족을 위해 청나라에 팔려가는 입장이 된 공주 청명(고아라) 그리고 환희 곁에서 그를 사랑하지만 누이로서 현실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시각장애인 보음(조윤희)이라는 세 청춘이 접하고 있는 현실의 어려움은 지금의 각박한 현실에 내몰려진 청춘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어느 날 저잣거리에 나왔다가 우연히 가게 된 산길에서 배고픈 아이들을 먹여 살리다가 결국은 길바닥에 죽어나가는 엄마를 보게 된 청명은 그 살벌한 현실이 자신만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많은 민초들 전체의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는 이 세상의 아픔을 짊어지려 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속에서 잠시 현실을 벗어나 판타지로서 위안을 제공하는 마술의 실체를 영화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유승호와 고아라는 이 이색적인 조선시대의 마술 같은 사랑이야기를 이물감 없이 잘 연기해내고 있다. 특히 아이처럼 좋아하다가 아기처럼 흐느끼는 고아라의 연기는 <응답하라1997> 이후 꽤 안정감 있는 몰입을 보여준다. 여기에 호위무사로 등장한 이경영의 든든함과 유럽의 광대가 조선시대 버전으로 그대로 바뀐 듯한 박철민의 놀라운 감초 연기는 이 판타지를 꽤 그럴 듯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어준다.

 

물론 영화도 그 자체로는 하나의 환술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것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바꿔주지는 못하니 말이다. 다만 현실에 지친 대중들에게 몇 시간의 위로와 위안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환술이 되지 않을까. 저 조선시대에 피폐한 민초들이 환희의 환술을 보며 잠시 간의 고통을 잊으려 했던 것처럼. <조선마술사>는 그래서 영화라는 판타지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것 중의 하나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암살><베테랑>, 쌍 천만의 진의를 살리려면

 

영화 <암살><베테랑>의 천만 관객 돌파에 의해 쌍 천만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만들어졌다. 그 힘들다는 천만 관객을 같은 시기에 두 편의 한국영화가 달성한 것. 그래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사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천만이라는 상업적 수치에만 너무 집중하다보면 거기 담겨져 있는 진짜 의미를 놓칠 수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암살>,<베테랑>

사실 요즘처럼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유통, 제작, 홍보마케팅이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 천 만 관객은 이제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닐 수 있다. 상업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일원화된 유통 배급의 힘으로 천 만 관객에 도달하는 일이 과거보다는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이라는 특수성은 이를 가능케 하는 시즌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래서 쌍 천만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이처럼 공고히 구축된 제작 배급 시스템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수치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다는 것은 자칫 이 독점적인 상업적 시스템에 대한 암묵적 지지에 그칠 수 있다. 그것은 <암살><베테랑>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려고 한 사회적 메시지들을 그저 상업적 성공으로만 결말짓는 일일 수 있다.

 

물론 <암살><베테랑>이 모두 천만 관객을 넘어서는 대박 흥행을 가능하게 했던 건 그것이 상업적으로 잘 만들어진 장르물이라는 외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들을 다루면서도 마치 액션물의 영웅담을 보는 듯한 경쾌함을 유지한 <암살>이나, 재벌과 서민 사이의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갑을 시스템을 갖고 왔지만 통쾌한 액션으로 영화를 풀어낸 <베테랑> 모두 상업영화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에 뇌관처럼 박혀 있던 현실적인 문제제기가 없었다면 이처럼 대중들이 호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암살>이 결국 얘기하려는 건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다.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투사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인물이 반민특위의 재판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법정을 빠져나오는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에 깊은 여운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암살>은 상업적인 영화의 끝에 현실적인 무게감의 숙제를 남겨놓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친일파의 문제는 현재의 거대 자본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베테랑>이 제기하는 재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베테랑>은 자본의 힘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가하는 재벌의 문제를 액션 장르로 잘 그려낸 영화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자본이 어떻게 서민들의 살 터전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밀어내버리는가를 잘 보여준다. 법 정의조차 재벌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이 현실 속에서 <베테랑>은 일종의 서민 판타지를 그려냈다. 그것은 물론 영화적 판타지지만 그 판타지 속에는 서민들이 가진 울분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저 허구로만 치부될 수 없는 것들이다.

 

<암살><베테랑>이 모두 천만 관객을 넘기게 된 데는 거기에 현실에 부재한 것을 희구하는 대중 정서가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천만 관객을 상찬하면서 상업적 성공에 대해서만 얘기하다보면 정작 이 영화들이 깔고 있는 상업적이고 자본적인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놓치는 부조리를 갖게 된다. 영화를 보며 그토록 대중들이 열광했던 건 그 안에 자본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뤄지지 않을 해결책들이 영화적 판타지로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영화들이 던지고 있는 메시지들이 현실적인 울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자본의 놀라운 힘은 자본을 비판하는 것조차 상업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두 시간여의 판타지를 보고 그저 통쾌함을 느낀다고 해도 영화관 밖을 나오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이런 정서들조차 상업적으로 만들어져 또 다른 자본이 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되는 지도 모른다.

 

물론 <암살><베테랑>은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에는 분명 진정성이 있다. ‘천만이라는 수치가 얘기해주는 건 그 상업적 성공만이 아니라 지금의 대중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분노와 갈증이다. 이제 현실이 그 마음들에 응답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모든 것들의 자연스러운 혼재, <냄새를>의 세계

 

달콤함과 살벌함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 적어도 SBS <냄새를 보는 소녀>에 있어서만큼은 이 경계가 무너진다. 장르적 재미에 엄격하거나 그 틀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런 공감각적인 형사물에 적이 놀랐을 수 있다. 이 드라마에는 이토록 철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 범죄를 실행해 옮기는 권재희(남궁민)라는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드라마는 일찍부터 그의 정체를 드러내놓고 그가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은폐하는가를 자세히 보여준다.

 

'냄새를 보는 소녀(사진출처:SBS)'

권재희가 의사 천백경(송종호)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유기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다. 그는 부주방장과 비밀 레시피를 만드는 시간을 자신의 알리바이로 이용한다. 미리 레스토랑에 도착해 요리를 준비해 오븐에 넣고, 타이머를 이용해 자동으로 시간에 맞춰 켜지게 만들어놓은 후 그는 트레일러에 천백경의 차를 실어 낯선 곳에 버리고 온다. 예약된 음식이 조리되는 그 시간을 자신의 알리바이로 만든 것이다.

 

드라마는 이 과정은 세밀하게 시간별로 보여준다. 알리바이를 더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 대리기사를 이용해 레스토랑에 두고 간 차를 국도휴게소로 가져오게는 하는 시퀀스는 그래서 기막힌 알리바이의 장치가 된다. 그 차가 나가는 걸 본 부주방장에게 권재희는 전화로 집에 향신료를 가지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대리기사가 국도휴게소로 가져온 차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돌아온다. 굳이 천백경의 차를 옮기는데 트레일러를 이용하는 점이나, 트레일러의 번호판을 바꾸고, 대리기사에게 대포폰을 쓰는 등의 디테일들은 심지어 이 권재희의 치밀한 범죄행각을 흥미롭게 만든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런 살벌함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권재희에 의해 동생을 잃은 뒤 감각을 잃어버린 최무각(박유천)과 역시 그에게 부모를 잃은 뒤 냄새를 보는 초감각을 갖게 된 오초림(신세경)의 달콤한 멜로가 또 한 축이기 때문이다. 순경이지만 동생의 복수를 위해 강력계의 일원으로 수사에 뛰어든 최무각을 초감각 소녀 오초림이 돕는다. 그것은 냄새를 보는 초감각을 이용한 특별한 수사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오초림이 개구리 극단에서 개그맨을 꿈꾸는 소녀라는 점은 이 달콤 살벌한 수사멜로물(?)에 코믹한 설정까지 덧붙여 놓는다. 무뚝뚝한 최무각이 오초림과 콤비가 되어 개그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장르적인 틀로만 바라보면 낯설다. 심각한 살인사건의 수사를 하는 주인공이 갑자기 극단에서 개그 코너를 선보인다는 건 만일 그리스 시대 극작가들이 봤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장르는 혼재되고 왜 캐릭터는 장르 안에서 비현실적으로 일관성만을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다. 개구리 극단 대표 왕자방(정찬우)이 최무각에게 집 날려 먹을 때도 머리에 꽃 달고 개그했어... 개그맨은 그런 거야.”라고 얘기한 게 바로 진짜 현실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애도하면서도 개그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닌가.

 

달콤함과 살벌함의 혼재. 범죄물과 멜로 게다가 코미디까지 뒤섞이는 장르의 경계 해체.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어우러지는 건 마치 무감각 소년이 초감각 소녀와 만나는 그 설정처럼 자연스럽다. 이것은 초감각 소녀 오초림이 바라보는 냄새의 세계와 같다. 거기에는 일관된 냄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취와 향기가 뒤섞여 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오초림의 시선은 그래서 이 수상한 드라마가 가진 장르 같은 경계를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다.

 

그래서 이 <냄새를 보는 소녀>의 세계 안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뒤섞여있는 현실의 실체들이 보여진다. 강력계 형사가 되고픈 순경, 개그우먼이 되고픈 초감각 소녀, 연쇄살인범 셰프. 우리가 일반적으로 봐왔던 직업군들의 일관성이 이들에게는 없다. 형사물과 범죄물이 갖고 있는 그 살벌함이 로맨틱 코미디의 달달함과 잘 어우러지는 세계. 너무 진지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가벼울 이유도 없는 그런 세계.

 

무각은 극단에서 보조스텝으로 전락해 상심하는 오초림에게 불족발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매운 불족발에 슬픔을 숨겨 오초림은 눈물을 쏟아낸다. 그리고 음식점을 나오며 이렇게 말한다. “눈물 콧물 다 뺐더니 아주 시원하네.” 이것은 쿨 하고픈 현 세대들의 표현방식일 것이다. 그 시원함이 무엇 때문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랴. <냄새를 보는 소녀>의 기묘한 재미가 달콤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살벌함에서 기인한 것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입소문에 의해 희비 엇갈린 <킹스맨><그레이>

 

영화 <킹스맨>의 선전은 놀랍다. 19금 영화로서 400만 관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에 대한 홍보가 그리 대단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점을 떠올려보면 이런 기록은 이례적으로까지 여겨진다. 그저 많은 외화 중 하나일 뿐으로 여겨졌던 <킹스맨>은 관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흥행에 급물살을 탔다.

 

사진출처: 영화 <킹스맨>

반면 영화 시작 전부터 주부들의 포르노니 전 세계 영화계를 강타한 작품이라는 문구들로 화제가 되었던 19금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하 그레이)>는 애초의 기대와 달리 관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모양새다. 지난달 말에 개봉했지만 지금껏 30만 관객을 조금 넘어서는 기록을 보이고 있다. 무엇이 이런 희비쌍곡선을 만들었을까.

 

결국 입소문의 영향이 컸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킹스맨>은 애초의 기대보다 훨씬 흥미로운 스파이 액션에 성장드라마 게다가 폭력 미학까지 덧붙여지면서 볼거리가 풍성했다는 의견들이 쏟아진 반면, <그레이>는 기대와 달리 야하지도 또 파격적이지도 그렇다고 무언가 철학적인 탐구도 없었다는 반응이다. <킹스맨>이 입소문의 순풍을 탔다면 <그레이>는 역풍을 맞으면서 점점 열기가 식어버렸다.

 

과거 같았다면 해외에서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그레이>에 우리네 관객들의 관심 또한 뜨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 영화가 외화에 못지않은 장르적 성과와 흥행 성적을 가져가고 있어서인지 최근 들어 해외의 반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되고 있다. 대신 중요해진 건 외화라도 그것만이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차별점이 뭐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킹스맨>은 국내 영화가 도무지 다루지 못하는 성격의 영화가 아닐 수 없다. 007 시리즈 같은 스파이 액션 장르는 물량 공세도 공세지만 그 문화적 정서적 차이 때문에 국내에서 만들어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기껏해야 <아이리스><베를린> 같은 남북이 얽힌 우리식의 스파이 액션이 가능할 뿐이다. 게다가 타란티노식의 폭력 미학 역시 국내 영화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 영역이다. 우리 영화와는 차별적인 부분이 충분히 느껴지면서 동시에 나름의 장르적 재미에 충실했다는 점은 <킹스맨>의 대성공을 만든 가장 큰 요인이다.

 

하지만 <그레이>의 경우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새로운 소재도 아니고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가학-피학적 섹스에 대한 건 이미 우리의 <거짓말>이 더 실감나게 다룬 바 있다. <거짓말>의 현실성에 비하면 <그레이>는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성적 소재를 떼어내고 보면 <그레이>는 그저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의 반복이다. 잘 생기고 모든 걸 가진 나쁜 남자에 끌리는 여자의 이야기는 국내 멜로드라마들의 닳고 닳은 소재다. 그러니 우리네 관객들이 <그레이>를 통해 새로운 점이나 신선한 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제 우리 영화계에 있어서도 홍보마케팅 같은 포장은 그것만으로는 영화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홍보마케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따른 작품만이 가진 고유한 콘텐츠적인 특징이 묻어나지 않는다면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콘텐츠의 자생력에 따라 화제가 되지 않았어도 입소문이 그 힘을 다시 만들어내기도 하고, 제 아무리 화제가 된다 해도 입소문이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어놓으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된다는 걸 저 <킹스맨>의 성공과 <그레이>의 실패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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