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아랑사또전>은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보면 볼수록 기묘한 사극이다. 판타지 멜로인 줄 알았는데 액션에 미스테리에 심지어 공포까지 장르를 넘나든다. <전설의 고향>에서 봤던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과 그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사또 이야기처럼 시작했지만, 그것은 이 사극의 1%도 안되는 전제에 불과했다.

 

'아랑사또전'(사진출처:MBC)

귀신을 보는 사또 은오(이준기)는 처녀귀신 아랑(신민아)이 가진 비녀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줬던 것임을 알아채고 그녀의 죽음을 밝히는 일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갑자기 홍련(강문영)이라는 미스테리한 존재가 등장하면서 복잡해진다. 인간을 해하는 절대악이자 요괴인 홍련은 등장인물들과 모두 관련을 맺고 있다. 그녀는 은오의 어머니(아마도 죄를 짓고 쫓겨난 선녀 무연이 몸을 빌린)이고, 저승사자 무영(한정수)의 동생이며 아랑의 죽음과 관계된 인물이다.

 

홍련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는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야기가 하나씩 단서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흘러가며 알 듯 모를 듯한 대사 몇 마디로 단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점이 은오나 아랑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인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옥황상제(유승호)나 염라대왕(박준규)의 시점이지만 이들은 좀체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에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극이 갖는 인물들 간의 계층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은오는 자기 스스로 “귀신들린 얼자”라고 표현하며 출신이 만든 한계와 설움을 드러내지만, 정작 이 사극에는 양반과 상놈 사이도 수평적 관계로 그려진다. 은오와 그의 하인 돌쇠(권오중)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이 사극은 인간과 귀신 혹은 인간과 천상의 인물들(옥황상제나 염라대왕, 저승사자 같은) 사이에도 위계를 그다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양 사이에 걸쳐진 인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은오는 인간이면서 귀신을 보는 존재이고 아랑은 귀신이면서 시한부 생을 부여받은 인간이다. 홍련은 혼은 타락한 선녀이면서 동시에 육체는 은오의 어머니인 인물이다. 이 사극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은오와 아랑, 홍련이 이렇게 걸쳐진 인물이기 때문에 천상과 인간세계의 경계가 깨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 인간세계의 반상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랑은 “죽으면 다 똑같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계 짓기가 무의미하다는 걸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랑사또전>은 이 구별 없는 세상을 그리려 한 것일까. 귀신과 인간이 공존하고, 천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그림으로써, 인간 세계 속의 구별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부질없는 욕망의 소산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경계가 없는 기묘한 사극, <아랑사또전>은 그래서 불친절한 문제작이다. 액션이면 액션, 멜로면 멜로, 공포면 공포까지 각각의 장르들은 그 자체로 보면 꽤 괜찮은 완성도를 갖고 있지만 이것을 한꺼번에 이어 붙이고, 단계별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동시다발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이야기는 복잡해졌다. 이렇게 단서들을 꼭꼭 숨김으로 해서 반전을 노린 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반전효과가 적은 것은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면서 기대감 또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전은 기대감을 배반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이해시키고 몰입시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끊임없는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빠뜨린 후, 결국에는 간단한 액션으로 문제를 풀어내거나 아랑과 은오의 멜로로 이야기를 끝맺음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허무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청자들을 미로 속에 넣고 한껏 혼란에 빠뜨리는 작가의 악취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아랑사또전>은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좀체 알려주지 않는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장르가 아닌 완성도, 시청자들의 달라진 눈높이

 

드라마 시청자들이 달라지고 있다. <추적자>와 <유령> 같은 장르 드라마들의 선전이 그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물론 시청률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드라마 시청률이 낮아졌다는 점과 그것을 감안했을 때 시청률이 괜찮은 편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화제성 면에서 단연 압도하고 있다는 점은 과거와 달라진 시청자들의 성향을 예감하게 한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추적자>가 시청률 18%에 육박하고 있는 건 물론 이 드라마가 가진 강력한 극성 덕분이다. 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만 같은 리얼리티에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쏟아져 나오는 명대사들, 잘 구축된 캐릭터를 제 옷처럼 입고 연기하는 연기자들, 게다가 숨 쉴 틈 없이 속도감 있게 잘 짜여진 연출까지 뭐하나 빼놓을 것 없는 완성도가 바로 그 높은 시청률의 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추적자>처럼 본격적인 추격 액션물이 이만한 성과를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는 <추적자>의 밑바탕에 가족과 서민에 대한 대중정서가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홍석(손현주)이 국민 아버지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즉 <추적자>는 전형적인 추격 액션 장르를 가져왔지만 여기에 한국적인 색채를 덧입히는데 성공했다. 그저 쫓고 쫓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네 정서를 집어넣었다는 점이 성공 포인트다.

 

하지만 <유령> 같은 작품이 14%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내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알다시피 <유령>에는 우리네 드라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는 멜로나 가족이야기가 전무하다. 오로지 수사 장르물에 입각해 그것이 줄 수 있는 재미에 집중되어 있다. 때로는 <유령>은 드라마로서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촘촘히 이야기가 짜여지다 보니 잠시 집중을 하지 않게 되면 다음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TV라는 매체를 생각해보면 이런 드라마가 이렇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물론 <유령>은 본격 장르물이 갖는 이런 약점들을 넘어서기 위한 보완책들을 갖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현실에서 쉽게 들어봤던 사이버 범죄들을 소재로 가져왔다는 점이다. ‘타진요 스캔들’을 떠올리게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고, 민간인 사찰 같은 민감한 소재도 에피소드로 활용되었다. 이런 익숙한 소재들은 낯설 수 있는 드라마가 딴 나라 이야기가 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준 셈이다. 게다가 수사 장르물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 있는 반전 포인트들을 다양하게 가져간 점도 성공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보완책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추적자>나 <유령>을 통해 시청자들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은 이제 장르에 대한 편견 없이 드라마를 좀 더 섬세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의학드라마나 사극 혹은 시대극이라면 무조건 성공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상황이다. 새롭게 시작한 의학드라마 <골든 타임>이 아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무신> 같은 사극은 별로 화제가 되지 않지만, <닥터 진> 같은 사극은 연일 화제가 되는 상황이 그렇다. 또 같은 멜로라도 <신사의 품격>이 선전하고 있는 반면, <빅>과 <아이두 아이두>가 부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장르적인 우위를 떠나서 이제는 드라마가 갖는 완성도나 참신성 같은 것이 성패를 가름하고 있다는 얘기다. 화려함은 없어도 팽팽한 대본과 연기가 뒷받침되어 성공한 <추적자>가 그렇고, 다소 복잡하고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건의 얼개나 구성이 촘촘하게 잘 엮어져 있는 <유령>의 성공이 그렇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시청자들의 드라마를 보는 수준이 높아져 있다는 얘기다. 이제 어디선가 했던 비슷비슷한 설정을 반복하는 드라마들에 시청자들은 식상해한다. 관성적인 시청도 물론 여전히 남아있지만 과거만큼은 아니라는 것은, 한 드라마 시청률의 등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드라마의 첫 회 시청률이 높으면 대체로 성공하는 드라마로 생각됐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드라마가 힘이 빠진다 싶으면 시청률이 곤두박질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중반에 시청률이 잘 나왔지만 후반에 이르러 연장을 하면서 시청률이 뚝 떨어졌던 <빛과 그림자>가 단적인 사례다.

 

아마도 미드와 일드를 경험하고 열광했던 시청자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나이 들어 TV의 주 시청층으로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높아진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하면 바로 고꾸라지는 게 요즘 드라마의 운명이 되었다. 초반 기획으로만 봐서는 성공 요소가 별로 없다 여겨졌던 <추적자>의 성공이나, 아직은 조금 시기상조로 여겨졌던 본격적인 장르 드라마인 <유령>의 선전은 그래서 달라지고 있는 작금의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말해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도너츠에 가려버린 '더킹'의 진짜 고충

 

'더킹 투하츠'가 아니라 '던킨 돈허츠'? 과도한 PPL 논란이 불거지고, 마침 시청률이 뚝 떨어지면서 경쟁작인 '옥탑방 왕세자'에 밀려버리자, 심지어 이 추락의 이유가 도너츠 때문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과연 도너츠의 위력(?)이 이렇게 컸던 걸까. PPL에 대한 논란은 언제나 있어 왔지만 PPL 논란으로 인해 시청률이 빠졌다는 얘기는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시청률 추락의 진짜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더킹 투하츠'(사진출처:MBC)

'더킹 투하츠'는 소재적으로나 장르적으로 난점이 많은 드라마다. 즉 남북이라는 소재가 가진 문제와 가상 드라마라는 낯선 장르적 위치는 드라마로서는 실험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남측을 대표하는 왕제 이재하(이승기)와 북측을 대표하는 북한특수부대 여자1호 교관 김항아(하지원)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는 그 자체로 남북 간의 화해무드를 그려낸다.

 

만일 이 작품이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였다면 이 남북 화해의 콘텐츠는 더 힘을 발휘했을 지도 모른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웰컴 투 동막골'처럼. 하지만 드라마는 좀 성격이 다르다. 주 시청층이 연령대가 높은 TV는 그 매체적 성격 탓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의 로켓 발사로 한껏 고조된 긴장감 속에서, 화해 무드의 드라마는 보수적 시청자들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또 이러한 소재적 문제뿐만 아니라, 장르적으로도 이 드라마는 실험적인 성격을 띤다. 즉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는 가상설정과 또 남북이 공동으로 장교대회에 나간다는 상황 등은 모두 보통의 드라마 시청자들에게는 낯선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 게다가 김봉구(윤제문)라는 테러리즘을 상징하는 악역 역시 낯선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캐릭터를 우리는 007시리즈에서 보긴 했지만 드라마에서는 어딘지 현실성 없는 먼 나라 얘기 같은 인상을 준다.

 

물론 이런 소재적이고 장르적인 난점을 작가와 PD가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남북 간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문제들보다 더 앞에 두려 한 것이 멜로였을 것이다. 이재하와 김항아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의 화학반응. 이 멜로는 드라마 시청자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아닌가. 이승기와 하지원이라는 연기자 파워를 전면에 세운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소재나 장르에서 낯선 면들을 이 친숙한 인물들을 통해 상쇄시키려는 의도.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옳았다. 이승기와 하지원 투톱은 초반 이 드라마가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또 둘 사이에 밀고 당기는 멜로는 미묘할 수 있는 남북 문제라는 소재의 부담감을 상당부분 상쇄시켜 주었다. 하지원과 이승기라는 대중들에게 좋은 느낌으로 기억되는 배우들이었기에, 이승기가 하지원에게 '빨갱이' 운운해도 그것조차 좋은 인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소재적이고 장르적인 난점을 가진 게 사실이지만, '더킹 투하츠'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실험정신이 의미 있는 작품이다. 지금 드라마계를 보면 이처럼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드라마들보다 마치 성공방정식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몇몇 성공 코드들을 이리저리 끼워 넣어 만든 비슷비슷한 드라마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 작품은 훗날 생각해보면 시청률에서는 조금 낮았더라도 드라마사에 한 의미 있는 지점으로 회자될 가능성이 높다. 가상설정 드라마라는 장르적 시도와 남북 문제라는 소재적 시도를 한.

 

'더킹 투하츠'가 가진 진짜 고충은 이처럼 실험적인 작품을 어떻게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출 것인가 하는 점일 게다. 물론 과도한 PPL이 주는 짜증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도너츠에 가려서 묻혀버린 이러한 노력과 고충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뿌리', 장르의 종합선물상자된 이유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의 첫 시작은 액션 스릴러였다. 궁에 겸사복으로 들어온 채윤(장혁)이 세종(한석규)을 살해하기 위해 상상으로 재구성하는 액션 신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액션은 채윤의 어린 시절인 똘복(채상우)과 세종의 젊은 시절인 이도(송중기)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정치드라마라는 장르로 옮겨간다. 세종과 태종 이방원(백윤식) 그리고 정도전 일파의 정치 대결구도가 그것이다.

이 정치 대결의 이야기는 그러나 정치드라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휼(조진웅)과 조말생(이재용)의 대결구도로 넘어가면서 액션 장르와 뒤섞인다. 태종이 밀본(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진 비밀결사)을 찾아내는 과정은 정치적인 해석과 지적인 추리가 절묘하게 얽혀있는 시퀀스였다. 그리고 이제 이 사극은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채윤의 이야기를 통해 '별순검'이 일찍이 가져왔던 조선판 CSI식의 추리를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그 중간 중간에 건익사공(작은 대롱에 한 줌 물로 사람을 일사시키는 기술)이나 출상술(일종의 경공법)같은 무협적인 요소까지 가미시키고, 왕이 쌍소리를 하고 똥지게를 지며 개소리(?)를 연구하는 식의 코믹적인 요소도 빼놓지 않는다. 이 정도면 사극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들을 소화하고 있는 셈이다. 장르 사극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까.

사극이 퓨전화되고 장르화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사극은 다른 사극에 그만큼 밀접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역사 바깥으로 나온 사극이라는 공간이 장르화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는 여러 기존 사극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촌의 이야기에서는 '제중원'이나 '성균관 스캔들'이 엿보이고, 추리적인 요소는 '별순검'이, 액션적인 요소는 '추노'가, 정치적인 요소는 기존 정치사극들이 떠오른다. 실제로 송중기와 장혁의 조합은 그들이 출연했던 작품들을 연상케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조합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어떻게 기존 사극들 그 이상의 장르적 재미를 보여주고 있는 걸까. 아마도 이것은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장태유PD의 연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출적인 측면만 빼놓고 보면 이 사극은 우리네 사극들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장르 운용에 묘가 있는) 미드가 가진 장르적 전통을 더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궁 안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건들은 '24'같은 미드의 긴박감을 연상시키고, 채윤이 북방에서 벌이는 전투 신들은 '글래디에이터'처럼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불필요한 스펙타클의 비효율을 넘어선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성취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선대의 사극들이 해놓은 성과와 다채로운 장르들이 결합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적인 이야기와 액션 그리고 추리가 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사극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사극만큼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실험이 가능한 공간은 없다. 사극은 역사는 물론이고, 역사 바깥의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가능성이 열려진 공간이다. 옛이야기가 가진 힘은 현대극의 장르들이 실험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어서게 해준다. 그러니 정통사극에서 퓨전사극을 거쳐 장르사극까지 넘어온 마당에 사극이 실험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고 한탄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거쳐 온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하고 변용하는 것만으로도 사극의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창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금 그 사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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