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 새드엔딩 싫지만 그래도 불사신 주인공이라니

 

불멸의 유시진’, ‘좀비 유시진’, ‘불사조 유시진’. KBS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송중기)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유시진은 이제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되어가고 있다. 교전 중 총에 맞아 의식을 잃었고 원대복귀 하지 못했으며 사망 통지까지 날아온 그지만 1년 후 알바니아에 의료봉사를 간 강모연(송혜교) 앞에 그는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태양의 후예(사진출처:KBS)'

그렇게 돌아온 유시진에게 강모연이 말도 안돼라고 말하는 대목은 아마도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였을 게다. 이미 죽은 줄 알고 깊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1년을 지낸 그녀가 아닌가. 그런 그녀 앞에 다시 돌아온 유시진은 그녀에게 그 어려운 걸 또 내가 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였다.

 

사실 유시진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강모연에게 전해지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도 그가 진짜로 죽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 모두 바라는 엔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껏 수차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르크에서 강모연이 납치되었을 때도 그녀를 구하다 총에 맞은 바 있고, 국내에서 벌어진 총격전에서도 총에 맞았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툭툭 털고 돌아와 여전히 농담을 날렸다. 그러니 그가 전장에서 총에 맞아 쓰러져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누구나 예상했을 것이다. 만일 살아 돌아오지 않고 끝난다면 그건 지금껏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유시진이라는 캐릭터의 일관성(?)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유시진이 이렇게 죽을 고비를 끝없이 겪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이 이 달달한 멜로드라마에 긴장감을 유발하고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후예>는 삼각, 사각의 멜로 구도를 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멜로드라마에서 삼각, 사각 구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긴장감을 만들기 위함이지만, 이 드라마는 대신 전쟁, 재난, 전염병 같은 것들이 사랑의 장애물로 활용된다. 따라서 유시진이나 강모연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긴장감은 높아진다.

 

특히 유시진이 불사조가 된 까닭은 그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라는 직업적 특수성 때문이다. 강모연이 일하는 병원이라는 공간보다 유시진이 뛰어들어야 하는 전장이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러니 멜로의 장애로서 그가 끝없이 위험 속에 들어가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문제가 생긴다. 삼각, 사각 멜로의 장애라고 해봐야 남녀의 마음이 돌아섰다 다시 돌아오는 정도로 그럴 듯한 이야기의 개연성이 만들어지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는 장애라면 계속 해서 살아 돌아온다는 것이 그럴 듯한 개연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알바니아의 어느 풍광 좋은 곳에서 추모의 꽃다발을 내려놓는 강모연 앞에 갑자기 나타난 유시진의 몰골은 방금 어딘가에서 탈출해 돌아온 듯 초췌해 있었다. 아무리 극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지만 바로 유시진이 강모연에게 달려온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김은숙 작가는 <태양의 후예>판타지라고 못 박은 바 있다. 하지만 판타지도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갖춰져야 공감이 가지 않을까. 그 누구도 새드엔딩을 바라지 않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되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자칫 지금껏 잘 달려온 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나쁜 녀석들>, 순간 <미생>보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이에겐 정규직 채용의 기회와 대폭 연봉 인상을 약속드립니다.” <나쁜 녀석들>의 이 대사를 들으며 순간 <미생>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대사는 나쁜 놈들 잡는 나쁜 놈들이라는 기발한 설정의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 나오는 것이다. 이 대사를 던지는 황여사(이용녀)라는 인물은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 팔아먹는 이른바 회사의 대표 정도 되는 인물이다.

 

'나쁜 녀석들(사진출처:OCN)'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비리 형사를 가장해 들어온 나쁜 녀석들은 그러나 정체가 들통 나면서 수십 명의 칼든 이 회사의 사원들에 둘러싸인다. 출입구는 통제되고 인터넷 사내전화 핸드폰을 비롯한 모든 통신기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이들을 도와줘야할 후위의 타격대들 역시 황여사에 월급(?) 받는 나쁜 놈들이다.

 

오구탁(김상중)은 황여사를 인질로 해서 회사를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칼든 회사원들은 끝없이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좀비물의 새로운 해석처럼 보인다. 밀폐된 공간은 공포감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는 수술대는 좀비 영화가 갖고 있는 컬트적인 느낌마저 준다. 게다가 이 회사에는 아이들마저 그 끔찍한 현장 속에 붙잡혀 있다.

 

나쁜 놈들의 끝장. 이것이 좀비물과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좀비라는 제거해야할 당위성을 두고 가장 잔인하게 그들을 제거하는 이 드라마의 방식이 좀비물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들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해도 사람이 날아가는 박웅철(마동석)의 폭력은 시원시원한 액션으로 돌변한다. 이정문(박해진)의 사이코패스적인 치밀함은 그 괴물들을 제거하는데 맞춤이고 마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정태수(조동혁) 역시 저들 편이 아닌 우리 편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돈이면 사람 장기든 뭐든 빼내는 이 괴물 같은 집단을 황여사의 회사로 비유해내는 장면은 <나쁜 녀석들>이 왜 그토록 대중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사의 비정규직 문제와 사람 등골 빼먹는 노동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지시 하나면 좀비처럼 달려드는 회사원들의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며 이 만화 같은 드라마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사실 이 이야기가 어떤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보여주기 위한 폭력으로만 흘러갔다면 이런 대중들의 열광을 가져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녀석들>은 그 안에 샐러리맨이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현실적인 상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폭력배에 연쇄살인범과 살인청부업자로 구성된 나쁜 녀석들에 자꾸만 동조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동조 끝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쩌다 우리는 이토록 <나쁜 녀석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번뜻 떠오르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괴물처럼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쁜 녀석들에게 갖게 되는 정서적인 지지와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살풍경한 현실. <나쁜 녀석들>을 보며 느껴지는 마음 한 구석의 시원스러움과 끔찍함의 정체다.

 

타자에 대한 시선, 공포에서 공감으로

"들어가도 돼?" 뱀파이어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가 소년에게 묻는다. 소년은 망설인다. 그 소녀가 뱀파이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물어야 해? 그냥 들어오면 되잖아." 하지만 소년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온 소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낸다. 그러자 소년이 소녀를 꼭 껴안는다. 이 짧은 장면은 '렛미인'이라는 영화가 서 있는 공포와 공감 사이의 어느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문지방 하나, 벽 하나의 차이일 뿐이지만, 뱀파이어 소녀와 왕따 소년이 서 있는 거리는 그만큼 멀다. 소년은 소녀를 두려워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소녀의 처지를 공감한다.

'렛미인'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그 가운데 그어진 어떤 선을 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 소녀의 운명은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한 왕따 소년을 만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공감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인간들의 사회에서 타자로 내몰려진 뱀파이어와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왕따 소년을 같은 선 상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루어질 수 없어 더 절절한 사랑을 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공포가 공감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공포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라면 살아있거나 죽어야 하는데, 좀비는 그 중간에 걸쳐져 있다. 즉 시체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인 것. 따라서 이 인간과 다르다는 차이는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다. 게다가 이 좀비들은 인간들을 자신들과 같은 종족(?)으로 만들려 한다. 물어뜯긴 인간이 그들과 같은 좀비가 된다는 이 설정은 마치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이것은 인간의 형상을 지녔으나 피의 욕망 앞에 흡혈귀로 변신하는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공포의 존재들은 파괴되고 제거되어야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로베르토 로드리게스 감독의 '플래닛 테러'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같은 영화에서 좀비와 뱀파이어를 때려 부수는 장면들은 유희적인 성격까지 띤다. 어찌 보면 좀비와 뱀파이어라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세워두는 것으로(그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구 도륙하는 장면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의 콘텐츠들의 시각은 이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일찍이 뱀파이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트와일라잇'은 인간과 뱀파이어 그리고 늑대인간 같은 전혀 다른 존재들이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심지어 서로를 사랑하면서.

'렛미인'은 이렇게 타자에 대한 시선이 공포에서 공감으로 바뀌어가는(혹은 공존하는) 최근 경향을 이어받고 있는 작품이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질성을 보던 것에서 동질성을 보는 방향으로만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도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바라보는 콘텐츠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E.T.' 같은 영화가 그렇다. 그 전까지 외계인 하면 공포의 존재로 그려졌던 것이 이 영화에서는 지구인의 친구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아마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차 세계대전에서 대학살을 경험한 유태인의 후예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다른 존재로 분리하는 시각이 가져온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핏 속 깊이 각인되었을 테니까. 즉 20세기에도 이런 동질성을 찾는 콘텐츠들이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화의 경향은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는 건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단지 해외의 문화 콘텐츠들만의 경향이 아니다. 최근 드라마화 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처럼, 구미호라는 이질적인 존재와 인간은 이제 대결하기보다는 사랑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들 중에서 최근 연재되고 있는 강풀의 새로운 만화 '당신의 모든 순간'은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좀비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 만화는 이들 좀비와 싸워나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은 어느 날 그 좀비들 틈에서 자신의 형을 발견하고는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인공은 좀비들에게서 인간과 다른 점을 바라보기보다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쓴다.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르고 여전히 그 대치국면으로 서 있는 우리들에게 타자에 대한 공포와 공감은 늘 뒤얽혀있다. 반공교육이 한창이던 시절에 우리는 저네들을 마치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보듯 생각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산가족이 만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 역시 우리의 형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연평도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한 시간 여의 포격은 우리를 다시 혼란 속에 빠뜨린다. 이들과 우리는 과연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공존을 생각하는 시대에 여전히 대결국면으로 되돌리려는 이 역행을 우리는 어떻게 또 넘어서야 할 것인가. 뱀파이어 소녀 앞에 서 있는 소년처럼 당혹스럽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