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뻤다>, 황정음은 왜 주근깨 가면을 쓰고 나왔나

 

MBC 주말예능 <복면가왕>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리 이상하게까지 여겨지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나이든 세대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한 마디로 기괴하게 다가온다. 가수가 얼굴을 가리고 노래를 부른다니. 그것도 기괴한 모습의 가면을 쓰고.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가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예뻤다(사진출처:MBC)'

기성세대들이 <복면가왕>에서 느끼는 기괴함은 과거 이 세대들이 봐왔던 많은 가요제와 쇼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 때 방영되었던 국제가요제에서는 마치 우리나라의 대표선수처럼 무대에 올라 여러분을 열창해 관객들을 압도하던 윤복희가 있었고, 대학생들을 위한 대학가요제강변가요제에서 너무나 촌스러운 스타일이었지만 놀라운 가창력으로 주목받은 심수봉이나 이선희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드러내고 뽐내기 위해 무대에 섰다. 조금 부족해도 그들을 위해 마련된 무대가 있었고 대학생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을 선보이면 발탁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러니 이 시절의 가수들을 생각한다면 <복면가왕>의 복면 쓴 가수들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당시 무대에 오르고 노래를 부른다는 건 자기 얼굴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복면 쓰게 만들었을까. 흔히 복면의 기능은 실체를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복면가왕>에서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나오는 목적은 정반대다. 실체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고 오히려 진짜 실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아이돌이라는 얼굴에 복면을 씌우자 숨겨진 가창력이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그저 센 힙합 가수인 줄 알았는데 복면을 씌우자 의외의 깊은 감성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제 한 물 간 가수인 줄 알았는데 복면을 쓰고 나와 여전히 감동을 준다.

 

스스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실체를 드러내는 인물을 우리는 MBC 수목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에서도 발견한다. 여기 등장하는 과거 예뻤으나 역변한 김혜진(황정음)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게다가 옷 스타일도 꽝인데다, 스펙도 보잘 것 없는 인턴 나부랭이. 그런데 그녀가 예쁘다. 감춰져 있는 능력도 있다.

 

만일 김혜진이 예쁜 얼굴로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런 미모의 캐릭터라면 연애도 잘하고 일에 있어서도 능력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의 절친인 민하리(고준희)가 그렇다. 예쁜 얼굴에 잘 빠진 몸매 게다가 스타일도 좋고 좋은 집안까지 갖춘 그녀에게서 우리는 숨겨진 다른 능력이나 매력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당연히 능력도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김혜진이라는 인물은 주근깨 가면을 씀으로써 오히려 그녀의 진가를 드러내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는 예뻤다>가 제목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듯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사실은 예뻤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장치다. <복면가왕>에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듯이,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도 주근깨 가면을 쓰고 이 드라마의 무대에 올라서 있다. 목적은 같다. 진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복면가왕>의 가면 쓴 가수들을 보면서,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지금 우리네 청춘들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 공통분모로서의 가면이라는 장치 때문이다. 이들은 왜 이토록 가면까지 쓰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견해주길 바라게 된 것일까. 그 반대편에 거대한 스펙사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물론 좋은 스펙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걸 내보임으로써 어떤 이득을 가져가려 하겠지만, 대부분의 그렇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복면을 꺼내 쓴다. 제발 스펙을 가리고 실체를 봐달라는 간절한 호소. 그것이 이들 가면 세대들에게서 느껴지는 절절함이다.



미국 영화 <인턴>이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방식

 

영화 <인턴>은 생각 외의 흥행을 거뒀다. 지난 7일 현재 <인턴>의 관객 수는 170만 명에 육박했다. 소소한 휴먼드라마, 게다가 우리네 정서도 아닌 미국식 정서가 담겨진 영화에 이처럼 우리네 관객들이 많이 찾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사진출처: 영화 <인턴>

물론 로버트 드니로에 앤 헤서웨이의 조합이 주는 기대감은 분명히 있다. <인턴>의 홍보 포인트가 꽃할배 로버트 드니로를 인턴으로 둔 젊은 여사장 앤 헤서웨이라는 건 확실히 그림이 된다. 무수한 작품에서 놀라운 연기력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드러냈던 로버트 드니로. 게다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그 신입이었던 앤 헤서웨이가 이제 젊은 CEO로 나온다니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17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 동원을 한 <인턴>의 의문은 좀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가진 낸시 마이어스 특유의 따뜻한 휴먼드라마의 힘일까. 그런 점이 없지는 않다. 이 영화는 인턴으로 들어온 70세 벤(로버트 드니로)이 인터넷 쇼핑몰로 단 몇 년만에 큰 성공을 거둔 줄스(앤 헤서웨이)에게 일종의 인생 상담을 해주는 영화다. 즉 회사에서는 벤이 줄스의 인턴이지만, 인생에서는 줄스가 벤의 인턴이라고 말해주는 영화.

 

그 안에는 우리에게도 잘 통하는 아날로그 정서가 깔려 있다. 즉 줄스가 운영하는 회사의 대부분은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굴러간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하는 지시도 이메일로 전달되고 고객들도 직접 대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불만사항도 인터넷으로 통해 전해지고 수정된다. 이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온 벤은 다른 인턴이 컴퓨터 주변기기와 스마트폰을 꺼내놓는 장면에, 오래된 가방에서 노트와 펜, 계산기를 꺼내놓는다. 디지털로 어딘지 쿨해 보이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회사에 벤은 따뜻한 아날로그적 인간관계를 풀어놓는다.

 

이러한 아날로그 정서를 바탕으로 사장을 보필하는 충직하고 경험 많은 벤 같은 비서(혹은 친구나 동료)에 대한 판타지도 있다. 워킹맘의 입장인 줄스는 그래서 일과 가정생활 모두를 잘 해내고 싶은 직장여성들과 공감하는 면이 있다. 벤은 정서는 아날로그지만 마인드는 혁신적인 사람이다. 능력 있는 여성이 가정사 때문에 집안에 주저앉는 것을 그는 안타깝게 바라본다.

 

<인턴>의 성공에는 연기자들에 대한 믿음과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아날로그적인 정서의 훈훈함이 분명 깔려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만한 성공의 이유를 모두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의 빈 구석을 채워주는 건 <인턴>이라는 제목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이 영화는 미국의 기업들이 일종의 사회 기여 차원에서 하는 시니어 인턴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즉 은퇴한 시니어들을 기업이 인턴으로 채용하는 일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젊은 인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 속에서의 인턴이 우리나라에서의 인턴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인턴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저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같은 인물이거나 현재 방영중인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황정음)일 것이다. 정규 채용이 되기 위해 시키는 일이면 뭐든 하는 존재. 그렇게 죽어라 일해도 정규채용은커녕 쫓겨나기 일쑤인 그런 존재.

 

즉 이 영화의 인턴이라는 제목은 기묘하게도 일종의 착시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인턴으로 들어갔지만 CEO와 거의 대등한 위상을 보여주고 심지어 그녀의 일은 물론이고 삶까지 인생 상담을 해주는 인턴. 우리네 인턴과는 너무나 달라서 하나의 판타지가 되는 그런 인턴이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인턴이라는 착시효과의 판타지를 보게 된다면, 중년 이상의 관객들은 영화가 말해주는 아날로그 정서와 은퇴해도 여전히 강력한 능력으로 남아있는 경륜이 효용가치가 있다는 판타지를 보게 된다. 물론 워킹맘들은 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일과 가족을 모두 지켜내는 판타지를 들여다볼 것이다.

 

이러니 기묘하게도 <인턴>이라는 영화는 우리네 인턴제와는 너무나 다른 미국식 인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우리 정서와 판타지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인턴판타지와 실버 세대의 인정 욕구 그리고 워킹맘들의 판타지가 그것이다.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네 관객은 이 영화를 우리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예뻤다>가 재조명한 빼꼼녀 황정음의 진가

 

MBC <그녀는 예뻤다>에 등장하는 르누아르의 작품 시골의 무도회는 이 드라마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무도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춤을 추고 있는 남녀. 남자에게 이끌려 한껏 행복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무언가 시선으로 말을 건네는 듯한 그림. 그런데 <그녀는 예뻤다>가 주목하는 건 이 여자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발코니 밑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들을 슬쩍 훔쳐보고 있는 이른바 빼꼼녀에 주목한다.

 


'그녀는 예뻤다(사진출처:MBC)'

주역이 되지 못하고 그걸 쳐다보고 있는 조연. 그녀는 어쩌다 자기 인생에서 주역이 아닌 조연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 <그녀는 예뻤다>의 혜진(황정음)은 역변한 외모와 보잘 것 없는 스펙과 처지 때문에 어린 시절 첫 사랑이었던 성준(박서준) 앞에 나서지 못한다. 평범한 얼굴이거나 못생긴 얼굴의 여 주인공이 미남에 능력 있는 남자와 어쩌다가 로맨스를 갖게 되는 그렇고 그런 로맨틱 코미디의 설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만일까. 그 이면에는 이른바 스펙사회로 대변되는 번지르르한 이력서 뒤로 제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낼 기회조차 갖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 자체를 포기하는 젊은 세대의 고충이 깔려 있다.

 

누구나 화보 속의 인물이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그 화보 속 인물을 흘낏 흘낏 훔쳐보며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고, 누구나 잡지 속의 멋진 인물을 꿈꾸지만 어쩌다 보니 험하디 험한 그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주인공은 저 편에 있고 우리는 늘 관객의 입장에 서 있다. 저 르누아르의 빼꼼녀처럼.

 

하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 주목하고 바라봐주지 않았을 때 누구나 저 빼꼼녀였다. 훈남이 되어 돌아온 성준도 혜진이 우산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비오는 거리 한 구석에 앉아 과거의 고통 속에 떠는 빼꼼의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유학 가는 날 시골의 무도회의 퍼즐에서 그 빼꼼녀부분을 떼어내 혜진에게 건네준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빼꼼의 존재였던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시간이 흐른 뒤 돌아온 성준의 시골의 무도회퍼즐에는 그 빼꼼녀의 조각이 빠져있다. 드라마는 성준이 이제 빼꼼녀의 조각처럼 되어버린 혜진을 찾는 이야기다. 달라진 얼굴. 보잘 것 없는 스펙으로 인턴으로 들어와 마치 심부름센터 직원처럼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토달지 않고 열심히 하는 그녀는 더 모스트라는 잡지를 만드는 사무실에서도 빼꼼녀. 그런데 과연 그녀의 진가가 빼꼼녀에 불과한 것일까.

 

사무실에서 그녀의 진가를 먼저 발견한 인물은 신혁(최시원)이다. 호텔 스위트룸 장기투숙객이면서 편의점 컵라면을 즐기는 이른바 스위트룸 노숙자라는 독특한 캐릭터인 그는 사무실 바닥에 떨어진 빼꼼녀퍼즐 조각을 주워 혜진에게 건넨다. 이 사무실에서 마치 빼꼼녀 퍼즐 조각 같은 혜진의 진가를 그가 먼저 발견한 것처럼. 혜진이 예전에는 자신이 예뻤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금도 그래하고 한 마디를 툭 던진다. 과거형으로 살아가는 혜진을 현재형으로 끌어낸 것.

 

<그녀는 예뻤다>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신분으로 태생으로 학벌 같은 스펙으로 또는 외모로 덮어놓고 있는 많은 진가들을 발견하고 상찬하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단지 혜진이라는 인물의 로맨스에만 마음이 심쿵한 것이 아니라, 늘 바닥으로 떨어져도 계속 해서 심기일전하는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저릿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드라마가 건드리고 있는 진짜를 느낀 것일 게다.

 

캐스팅의 최적 조건은 그 배우의 입장과 캐릭터가 딱 맞아 떨어질 때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혜진을 200% 생생하게 연기해내고 있는 황정음은 이 드라마에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주목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황정음이라는 배우는 말 그대로 빼꼼녀였다. 어딘지 과장된 연기 때문인지 그녀가 이 정도의 배우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빼꼼녀는 실로 긍정적으로 역변했다. <내 마음이 들리니>를 거쳐 <비밀>에서 연기의 영역을 확장한 그녀는 <킬미 힐미>로 확고한 배우의 위치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예뻤다>는 황정음의 확실히 깊어진 연기의 다채로운 결을 느끼게 해주는 드라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로맨틱 코미디가 가져야할 웃음은 물론이고 그 밑바닥에 깔린 슬픔까지도 느껴진다. <그녀는 예뻤다>. 이건 드라마의 제목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빼꼼녀의 가치를 끄집어낸 연기자로서의 황정음도 그렇다.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잉여들><능력자들>, 소재가 아까운 청춘 예능

 

잉여 혹은 덕후. 우리네 청춘들에게 익숙한 두 단어는 어떻게 MBC의 파일럿 예능의 키워드가 되었을까.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잉여라 비하되기도 하는 청춘들의 무일푼 유럽 여행기를 다루는 것이었고, <능력자들>은 이른바 덕후라고 불리는 마니아들을 스튜디오로 소환해 그들의 덕질이 의외로 놀라운 전문가적 식견과 결과들을 만들어낸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사진출처:MBC)'

물론 이 두 파일럿 프로그램은 안타깝게도 괜찮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보여줬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콘셉트와 맞지 않는 출연자들이 나와 그 진정성이 애매해졌고, 무엇보다 노홍철의 복귀작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부담이 되었다. <능력자들>은 오드리 햅번 마니아, 치킨 마니아 그리고 사극 마니아 같은 흥미로운 일반인 출연자들을 등장시키고도 예능적인 재미를 뽑아내지 못했다. 물론 파일럿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하나의 결과를 향한 과정일 수 있다.

 

어찌 보면 정규화되기 힘든 파일럿 프로그램의 결과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프로그램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건 그 소재가 지금껏 지상파 예능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았던 청춘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잉여와 덕후. 사실 약간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지만 그것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청춘의 긍정으로 그려질 수도 있는 소재였다.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좀 더 깊게 이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되새겼다면 프로그램의 공감대는 커졌을 수 있다.

 

잉여란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느껴지지만 사실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즉 잉여는 어떤 기준점이나 중심점을 세워뒀을 때 그 자투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중심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다. 하지만 애초에 기준과 중심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가하는 의구심을 갖는다면 잉여는 긍정적인 의미로 바뀔 수 있다. 기성사회가 세워놓은 성공의 시스템과 기준점들이 있기 때문에 잉여라 치부되는 것이다. 그것 자체를 무시하거나 무너뜨리면 잉여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단어가 된다.

 

이것은 덕후도 마찬가지다. 물론 <능력자들>은 제목에 담겨 있는 것처럼 이 덕후들을 전문가 못지않은 능력자로 담아내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무언가 현실과 유리된 채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식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운 게 덕후라는 단어라면, 이제 그것은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것처럼 청춘들의 삶의 열정이 되어주고 심지어는 삶 자체를 바꿔놓기도 하는 힘이 된다.

 

만일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보다 진정성을 살려 진짜 잉여로 내몰린 청춘들의 긍정을 담아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능력자들>이 그 좋은 기획의도를 잘 살려내 청춘들을 긍정하면서도 그저 이런 인물들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예능적인 포인트들을 잘 살려냈다면? 아마도 이 두 프로그램의 성취는 다른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능력자들>은 실로 소재가 아까운 파일럿 예능이다. 하지만 이 두 프로그램은 소재만으로 프로그램이 세워질 수는 없다는 걸 잘 보여주었다. 잉여의 긍정성을 담으려던 의도도 그 진정성을 담지 못하니 프로그램의 잉여가 되어버리고, 덕후들을 능력자로 담아내려는 의도도 그 보편적인 재미를 담보하지 못하니 마니아 프로그램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 프로그램들이 정규화 된다면 청춘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이 좋은 소재와 기획의도가 갖고 있는 의미들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세세한 노력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