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판타지+실용 > 논란

‘공부의 신’이 가진 현 교육제도에 대한 태도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천하대(사실상 서울대의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다)를 가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반은 전형적인 우리네 교육 정책의 엘리트주의를 그대로 답습한다. 특별반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은 그래도 선택받은 아이들이지만 나머지 병문고 아이들은 거꾸로 버려진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물론 천하대 특별반을 만드는 강석호(김수로) 변호사는, 늘 그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룰 속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룰을 바꾸기 위해서 천하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위해 엘리트 교육 시스템을 답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한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본래의 뜻을 갖고 있는 ‘공부’라는 말이 이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공부의 신’과 잘 어울리는지도 의문이다. 항간에는 ‘공부의 신’이 아니라 ‘입시의 신’이 더 맞는 표현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입시를 위한 문제풀기의 방법을 익히는 과정을 주로 보여준다. 문제풀기와 실제 배움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논란거리들에서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거꾸로 현실에서 찾아진다. 아마 드라마가 우리네 교육 현실을 실감나게 다루지 않고 그저 뜬구름 잡는 이상만 떠들어댔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이상적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네 교육현실은 한창 꿈꾸어야 할 아이들이 하루 네 시간씩 자며 입시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니 이 참담한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교육을 다루는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부의 신’은 바로 그 현실을 그대로 가져와 드라마의 바탕으로 깔아놓는다. 그리고 이 현실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는다. 만일 현실을 현실 그대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그려냈다면 ‘공부의 신’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부를 해야할 시간에, 혹은 아이들 공부할 시간에 굳이 이 드라마를 보며 현실의 씁쓸함을 곱씹을 시청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현실 상황 위에 그것을 넘어서는 판타지를 집어넣음으로써 시청자들이 현 교육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대리 체험하는 쾌감을 제공했다. 물론 ‘수학의 신’ 차기봉(변희봉) 선생이나, 춤과 노래를 하는 앤써니 양(이병준) 같은 영어 선생이 학교에서(아마 학원에서는 가능할 것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천하대 특별반에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고, 그 사연을 넘어서 도전하는 모습과 이를 도와주는 선생들의 이야기는 지친 수험생과 부모들에게 드라마가 주는 작은 위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 ‘공부의 신’은 보다 강력한 양념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판타지 위에 지극히 실용적인 공부의 방법(문제 푸는 방법이 더 많지만 이것이 더 실용적이다)들을 제공한 것. 영어문장을 독해할 때, “단어를 모르더라도 찾아보지 말고 일단 때려 맞춰라”라는 방법이나, 수학문제를 풀 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서로 문제를 내보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니 이 실용적인 정보들은 판타지와 만나면서, 판타지를 더욱 강화하는 힘을 부여한다. 저렇게 공부하면 나도 천하대(사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다르지만.

‘공부의 신’의 성공방정식은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이다. 즉 현실을 바탕으로 제시하고 그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은 후, 추가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스토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힘은 이 드라마가 “기존 잘못된 교육정책을 결국은 인정하고 심지어는 부추기고 있다”는 그 논란의 불씨마저 압도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해 우리는 양가감정을 갖게 된다. 드라마의 내용에 강력히 공감하면서도(현실적인 공감),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그 마음. 드라마의 성공이 그만큼 현실의 실패를 말해주는 그 씁쓸한 상황, 이것이 ‘공부의 신’의 성공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신구세대를 아우른 '찬란한 유산'의 판타지가 말해주는 것

'찬란한 유산'이 그리는 세계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제 아무리 올바른 기업관을 가진 사업가라고 하더라도 제 혈육이 아닌 제 3자에게 기업을 물려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신문지상에 연일 보도되는 편법 증여의 문제는 그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찬란한 유산'의 풍경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론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한편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젊은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찬란한 유산'의 은성(한효주)은 신데렐라로 여겨질 만큼 행운아다. 그녀는 장숙자 여사(반효정)와의 특별한 인연(그것도 단 일주일의 인연)을 통해 절망의 끝에서 엄청난 희망을 부여잡은 인물이다. 물론 그녀는 그저 유산을 물려받아 호의호식하겠다는 장숙자 여사의 후세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그녀가 잡은 행운은 혈연, 학연, 지연 같은 운명적 고리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기회로 볼 수 있다. 각종 연줄이 거미줄처럼 쳐진 현실에서 공평한 기회란 역시 한낱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찬란한 유산'은 이처럼 두 가지의 판타지를 쥐고 달려간다. 그 첫 번째는 유산만을 바라는 철없는 혈육을 내치는 장숙자 여사로 대변되는 판타지다. 아무리 못나도 자식에게 단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 하지만 판타지를 통해 '찬란한 유산'은 그 가려운 부분을 속 시원하게 긁어준다. 환이(이승기)와 그 가족들 앞에서 은성에게 진짜로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자리는 심지어 복수극의 그것처럼 통쾌함마저 안겨준다.

두 번째 판타지는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사회에서 맘껏 뜻을 펼치는 고은성으로 대변되는 판타지다. 시험대로 제시될 2호점을 살리는 과정은 사실상 이 땅의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의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이 판타지적 존재를 심정적으로 지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캐릭터가 가진 고운 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산, 재산만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백성희(김미숙)와 유산 상속만을 꿈꾸는 환이네 가족과의 대비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은성은 실로 노력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환이와 은성 사이의 멜로가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노력하는 모습이 먼저 그려지고, 환의 마음이 그 모습에 점점 흔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긍정의 드라마가 신구 세대를 모두 끌어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판타지가 하나로 엮여져 있기 때문이다. 장숙자 여사와 고은성의 끈끈한 관계는 두 판타지의 고리를 보다 강력하게 연결해주고, 대중들을 그 세계로 끌어들이는 원동력이다. '찬란한 유산'이 타 드라마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쉽게 30%의 시청률을 돌파한 것에는 그만큼 우리네 심연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이 판타지들의 힘이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별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정석적인 이야기에 충실한 '찬란한 유산'의 성공은 따라서 그 정상적인(정상적이어야 하는) 일들이 판타지로나 존재하는 현실을 거꾸로 드러내준다. 올바른 기업관이나 실력과 노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는 우리에게는 판타지에 불과한 것일까. 주말 저녁 이 찬란한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한 편으로 씁쓸함이 느껴졌다면 이것이 바로 그 정체가 될 것이다.

‘꽃남’과 ‘돌아온 일지매’, 원작만화에 가까워진 드라마

물론 원작이 만화이지만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캐릭터들 역시 순정만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인물들이다. 초부유층 자제들인 F4의 일상은 무대회, 별장, 파티 같은 순정만화 속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분명 고등학생이지만, 신화고등학교가 재학생들에게 주는 파격적인 특혜로 인해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모습 따위는 발견할 수 없다. 왜? 만화 속에서 그런 이야기는 재미가 없으니까.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멋진 꽃미남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비일상적인 모습들이다. F4의 리더인 구준표(이민호)와 스포츠카를 타고, 분위기 있는 꽃미남 윤지후(김현중)와 함께 말을 타고, 식사를 할 때도 하녀들의 시중을 받거나 주방장의 특별 서비스를 당연한 듯 받는다. 쇼핑을 할 때면, 한 백화점을 통째로 빌리기도 한다. 물론 그 백화점도 그 주인공의 것이다.

드라마로 보면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만화로 보면 당연한 이 판타지의 세계는 따라서 드라마 속으로 틈입한 만화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만화의 흐름과 드라마의 흐름은 호흡이 다르지만, 판타지라는 접점을 공유하는 순간, 시청자들의 시선 자체를 돌려놓는다. 젊은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만화적 감성에 익숙하지만, 나이든 세대라도 ‘꽃보다 남자’를 보며 그 판타지에 푹 빠질 수 있는 시청자라면, 적어도 소싯적 ‘캔디’나 ‘베르사이유의 장미’같은 순정만화 한두 편쯤은 빠져서 본 적이 있는 분일 것이다.

‘꽃보다 남자’가 순정만화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였다면, 최근 방영되며 그 독특한 연출이 화제가 된 ‘돌아온 일지매’는 고 고우영 화백의 그 독자적인 만화 세계를 사극 속으로 들어들였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작자의 개입이 들어가는 내레이션의 활용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저들끼리 만나고 부딪치며 대사를 주고받지만, 그 위에 그들을 내려다보는 작자의 해설이 고우영 만화의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것은 ‘삼국지’나 ‘수호지’, ‘초한지’같은 원전들이 있는 작품들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면서 만화화해온 고우영 화백 나름의 노하우가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사극 ‘돌아온 일지매’에서 작품 몰입을 방해한다는 논란을 일으킨 책녀의 존재는 바로 그 내레이션을 드라마화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 책녀라는 내레이션은 조금 낯선 존재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고우영 만화의 진짜 재미에 접근하게 해준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우영 화백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이야기를 중심인물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주변인물에서부터 서서히 중심인물 쪽으로 끌어간다는 점이다. 발차기의 고수로 옆으로 걷게 된 왕횡보(박철민)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이야기의 화두로서 등장하고 그 인물이 주인공과 얽히면서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가는 구조가 고우영 만화의 또다른 재미이다. 이러한 주변에서부터 중심으로 가는 이야기 구조는 ‘일지매’같은 서민들의 영웅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특히 빛을 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일지매를 다루지만 주변부 인물들 예를 들면 구자명(김민종) 같은 인물 또한 빛나게 됨으로써 한 영웅만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 각각이 자신만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가진 인물로 조명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지매라는 원전 해석이 아닌 고우영 화백 자신만의 작품이 특별히 빛나고 여러 차례 타 장르에서 재해석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꽃보다 남자’나 ‘돌아온 일지매’는 모두 원전 만화를 드라마화한 것이 아니라, 만화 그 자체를 보는 재미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인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그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순정만화 그 자체인 드라마와, 책장을 넘기듯 몇 편으로 제목 지어진 고전이 되어버린 일지매라는 고우영 만화를 드라마를 통해 보는 새로운 재미를 경험하고 있다.

혹자는 만화 같아서 유치하고, 몰입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드라마가 만화와 동거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드라마를 꼭 리얼리티만으로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만화에서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과 판타지 그 세계 자체를 여행하는 것이 자유롭게 공존하듯이 이제는 드라마도 여러 형태들을 껴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해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화 같은 ‘꽃보다 남자’와 ‘돌아온 일지매’. 진짜 만화의 묘미를 아는 시청자라면 그것이 오히려 만화 같아서 더 재미있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화를 보는 눈과 드라마를 보는 눈

부유층에서도 초부유층에 속하는 이른바 F4의 리더인 구준표(이민호)는 자신이 사랑하게된 서민 금잔디(구혜선)의 집을 찾아간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구준표가 제아무리 부잣집 자제라 해도 여자친구의 부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라는 세계 속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밥상을 앞에 두고 구준표는 높다란 의자 위에 앉아 콩자반을 들고는 “이런 걸 먹느냐”고 묻고 심지어 멸치를 보고는 ‘이건 무슨 벌레냐’고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잔디의 부모는 무릎꿇고 앉아서 구준표가 반찬 중 갈치를 알아 봐준 것에 대해 감탄하고 고마워한다. 물론 이 장면이 어른들의 속물근성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목적 자체가 없다. 매일 매일의 힘겨운 세탁 일 같은 것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계는 찌질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는 곳이 ‘꽃보다 남자’의 세계다. 이 곳은 돈이 있으면 자신의 그룹의 백화점에서 여자친구와 단둘이 쇼핑을 즐기기 위해 비상벨을 깨 손님들을 내쫓을 수 있고, 부모에게 간단히 통보하고 해외로 그 딸을 데려갈 수 있는 세계다.

구준표는 입만 열면 구질구질한 서민들의 생활을 하찮은 눈빛으로 내려다보지만, 이 드라마 속의 그는 늘 추앙 받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잘생긴데다가 돈이 있는 그가 서민인 금잔디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꽃보다 남자’는 이 상황을 좀더 양극단으로 표현한다. 즉 금잔디에게 쏟아지는 극단적 이지메 상황을 먼저 보여준 후, F4라는 판타지적 인물들이 그녀를 구하는 식이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논란까지 일기도 하지만 극에서 극으로 갈 때, 판타지는 더 커진다.

‘꽃보다 남자’가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막장드라마의 하나라고 비판받는데는 바로 이 극에서 극으로 오가는 판타지와, 판타지라고 해도 어떤 일정 부분 현실과 맞닿는 지점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비현실성의 노출 때문이다. 극단적인 부자의 행동은 판타지 속에서는 오히려 매력적인 욕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실과 만날 때는 언뜻 그 금전만능주의의 속살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막장드라마라고 비판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상황을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드라마가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꽃보다 남자’를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드라마로 보는 시선과, 전혀 다른 만화의 드라마 버전으로 보는 시선이 나뉘어져 있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판타지를 가진 것이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드라마의 하나로 ‘꽃보다 남자’를 본다면 이 드라마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이 된다. 이 세계 속에서는 오로지 판타지만 존재할 뿐, 현실적인 배려는 전혀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를 보는 시선, 즉 잠시 현실을 잊고 판타지 속으로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이 드라마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다.

‘꽃보다 남자’를 바라보는 극단적인 두 시선이 이처럼 공존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만화적 요소와 드라마적 요소의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판타지가 주는 재미에 깊이 빠져 TV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청자가 그 드라마 속에서 현실적인 모습들 예를 들어 이지메 상황이나 사생활 노출 같은 범죄에 가까운 장면을 보았을 때 잠깐 현실로 돌아오는 그 지점이 두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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