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기술과 예술, 현실과 상상 사이

파벨만스

극장 앞에서 어린 샘(마테오 조리안)은 겁에 질려 있다. 영화에는 거인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샘에서 아버지 버트(폴 다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르지 않으며 여러 사진을 빠르게 돌려 빛에 투과시키면 동영상이 된다는 ‘모션 픽처’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것이 그저 기술이고 허구라는 걸 알려줌으로써 샘이 겁먹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노력이다. 

 

버트는 컴퓨터 천재 공학도로서 산업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극복해가며 기술을 발전시키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샘에게 하는 영화에 대한 설명은 다소 어린 아이에게는 과하고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이해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런 버트와 달리 피아노에 천재성을 가졌지만 아이 셋을 낳고 가정에 눌러 앉게 된 엄마 미치(미셸 윌리암스>는 샘에게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아들아, 영화는 꿈이란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파벨만스>의 이 같은 오프닝은 짧지만 영화에 대한 두 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고 이를 편집해 영사기에 돌림으로써 가능한 과학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해 더 좋은 카메라가 등장하면 더 좋은 영상들을 보다 쉽게 찍어 영화로 만드는 게 가능해진다. 그것은 결국 영화 역시 자본이 투입되는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미치가 말하듯 현실을 훌쩍 넘어서는 상상의 세계를 담아내고, 인간이 꿈꾸는 것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예술이다. 샘은 그래서 버트와 미치라는 서로 다른 삶과 예술에 대한 입장을 가진 인물들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부모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애써 자신을 누른 채 가족을 지키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결국 파열음을 낸다. 

 

샘은 아버지가 평생 엄마를 숭배하듯 헌신해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예술과 예술적 삶에 대한 갈증을 억누른 채 평범한 가정에 눌러 앉아 스스로 파괴되어가는 엄마를 이해한다. 어린 샘은 서로 다른 부모를 각각 이해하지만 그들의 부딪침이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렵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 배타적으로 보이는 양자들을 끌어안는다. 친구들과 영화를 찍으면서 아버지가 아이디어를 내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것처럼 특수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낸다. 그러면서 기술과 현실의 차원을 뛰어넘는 예술과 상상으로 그가 만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파벨만스>는 샘이라는 아이를 통해 그가 가족들과 더불어 친구, 연인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보고 찍은 영화에 어떤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가를 에둘러 담고 있다. 엄마와 아빠의 설득을 통해 처음 그가 보게 된 영화 <지상 최대의 쇼>에서 기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에 빠진 샘이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와 자동차를 충돌시켜 보고 엄마의 제안으로 그걸 카메라에 찍게 되는 장면은 그의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헌사를 담은 영화들이 있다.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시네마 천국>이 그렇고, 최근 방영됐던 <바빌론>도 그렇다. 이중 <파벨만스>는 <시네마 천국>에 더 가까운 영화지만, 그 안에는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거장의 영화가 어떤 토양에서 어떤 영향들을 받아 탄생했는가에 대한 단초들이 담겨있다. 영화 속에서 보리스 삼촌이 등장해 “예술과 가족, 그게 너를 둘로 찢어놓을 거란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가족과 예술의 대립항은 그에게는 중요한 숙제였던 걸로 보인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동화 같은 가족애를 담은 영화를 그려내곤 했던 감독이다. <파벨만스>라는 제목이 달린 것도 그래서다. 이것은 샘 파벨만이라는 거장의 탄생을 그리는 영화지만, 그걸 만들어낸 건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지향점으로서 늘 가족을 담았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지만, 동시에 <파벨만스>는 이를 기반으로 영화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아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각별한 영향을 주고받는 우리에게도 이 영화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것은 한 재능 있는 아이가 현실을 넘어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들을 부모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지지해줘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가 이 영화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가족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끝내 이 영화를 통해 하고픈 말이었을 지도.(사진:영화 '파벨만스')

섣부른 사이다도 뻔한 고구마도 싫다...하이퍼 리얼리즘 드라마

며느라기2

카카오TV <며느라기2>가 돌아왔다. 시즌1에서 <며느라기>는 이른바 ‘하이퍼 리얼리즘 드라마’라고 불렸다. 주말드라마에서 틀에 박힌 모습으로 반복되던 시월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실제로 겪는 시월드를 지나치게 극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더 큰 공감대를 이끌어서다. 

 

실제로 드라마가 늘 소비하던 시월드는 ‘악마화’되어 표현되는 경향이 있었다. 며느리에게 대놓고 집안 운운하며 무시하고, 막말까지 일삼는 빌런화된 시어머니는 그래서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드라마 속 캐릭터’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저런 시어머니가 요즘 어딨니?”하고 실제 시어머니들이 말할 정도로. 

 

하지만 <며느라기>는 달랐다. 너무나 평범하고 또 며느리를 나름 배려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평범한 시월드 속에서 민사린이라는 초보 며느리가 겪는 ‘미세 먼지 차별’을 담고 있어서다. 빌런화되지 않은 시월드 속 먼지 차별은 그것이 특수한 사례가 아닌 누구나 별 문제시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 생겨나는 가부장적 시스템의 부조리라는 걸 드러낸다. <며느라기>의 가치는 바로 이 하이퍼 리얼리즘이 주는 격한 공감과 그것이 드러내는 시스템의 문제를 우리 모두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시즌2의 첫 회는 시즌1과 달라진 남편 무구영(권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민사린이 시월드에서 겪는 차별들을 갈등들을 통해 인식하게 된 무구영은 시즌1에서 보여줬던 시어머니 생일상 에피소드와는 다른 시즌2에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가 일이 바쁘다며 자신이 여동생 무미영(최윤라)과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나선 것. 시댁 식구들은 여전히 며느리가 시어머니 생일상도 안차린다며 ‘도리 운운’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무구영은 “며느리 도리가 어딨냐?”고 민사린을 방어하고 나선다. 

 

즉 이제 시즌1의 초보 며느라기 시절은 지났다는 걸 시즌2 첫 회는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담는 이유는 시즌2의 이야기가 이제 며느라기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라는 걸 예고한다. 그것은 제작발표회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임신, 출산, 육아 관련 문제들이다. 아이는 언제 갖느냐고 자꾸만 부추기는 시어머니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민사린과 무구영은, 마치 그것이 결혼하면 당연한 일처럼 치부되지만 사실은 직장 가진 여성이 겪어야할 엄청난 현실의 격랑을 예고한다. 

 

시즌1에 이어 <며느라기> 시즌2에도 요구되는 건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포착하는 시선이 아닐까 싶다. 너무 과한 섣부른 판타지 사이다도 또 뻔한 고구마 전개도 아닌 표현 그대로의 하이퍼 리얼리즘의 시선. 늘 봐왔던 극적 대립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인물들이 저마다 마주한 상황 속에서 보여주는 리얼한 반응들이 촘촘히 쌓여가며 부딪치고 그 과정 자체의 공감을 일으키는 드라마가 그것이다. 

좋좋소

이 달에 공개를 앞두고 있는 왓챠 오리지널 콘텐츠 <좋좋소> 시즌4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도 <며느라기2>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직장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 속에서도 <좋좋소>가 말 그대로 ‘격공’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끈 것 역시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들여다 본 너무나 리얼한 중소기업의 직장생활 현실이 공감됐기 때문이다. <좋좋소>는 조충범(남현우)이라는 사회 초년생이 정승 네트워크라는 중소기업에 들어가 겪는 자잘한 일상의 부딪침들을 담담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물론 코미디가 깔려 있지만 거기에는 중소기업의 조악한 현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믿음으로 가는 거라며 계약서도 잘 쓰지 않으려는 정사장(강성훈)이나 회사에 불만을 드러내며 독립해 나가는 백차장(김경민), 가장의 무게가 웃프게 느껴지는 이과장(이과장), 그리고 당차면서도 현실적인 이미나 대리(김태영), 사회생활이 익숙하지 않아 보이지만 남다른 에너지로 사무실을 밝게 만드는 이예영(진아진)까지. 이 드라마는 어느 특정 인물을 빌런화하지 않고 저마다의 장단점이 서로 부딪치는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오히려 큰 공감대를 얻었다. 

 

<며느라기>의 시월드나 <좋좋소>의 직장생활은 그간 숱한 드라마들이 다소 뻔한 방식으로 극화해온 소재다.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심지어 선악 구도를 세우고, 한 사람을 빌런화함으로써 고구마 설정으로 뒷목을 잡게 만들거나, 그들을 뒤집는 방식으로 사이다 판타지를 줬던 게 그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시점으로 우리가 일상으로 겪는 이런 상황들에 대한 공감을 얻던 시대는 지났다. 있는 그대로 자질한 디테일들을 애써 극화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진짜 이 갑갑하고 답답한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시청자들은 이제 오히려 조미료를 뺀 이들 하이퍼 리얼리즘에 격공하고 있다.(사진:카카오TV, 왓챠)

'허쉬'가 기자 앞세운 드라마의 징크스를 깨기 위해서는

 

기자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는 안 된다? 드라마업계에 자리하고 있는 징크스는 여지없이 이번에도 재연되고 있는 걸까. 기자를 소재로 하고 있는 SBS 금토드라마 <날아라 개천용>과 새로 시작한 JTBC 금토드라마 <허쉬>가 바로 그 드라마들이다. 

 

비교적 잘 나가던 <날아라 개천용>이 주연배우 배성우의 음주운전으로 인해 최대 고비를 맞고 있는데다, <허쉬> 또한 황정민 같은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스타배우를 캐스팅하고도 첫 회 3.3%(닐슨 코리아)에서 2회 2.5%로 시청률이 추락했다. 

 

<날아라 개천용>은 드라마 같은 삶을 산 실제 재심 변호사와 기자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약자들을 위해 나서는 이들의 영웅적인 서사가 리얼 판타지라는 강점으로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하지만 하필이면 정의로운 기자 역할을 연기하는 배성우가 음주운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역풍을 맞았다. 리얼 판타지의 몰입감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이정재가 배성우를 대신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 결정되진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새로 시작한 <허쉬>는 어떨까. <허쉬>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영웅적인 기자 상을 판타지로 그리기보다는, 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 언론 시스템을 현실적으로 그린 드라마다. 실제로 <허쉬>는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기자를 그린다. 유배지가 다름없는 디지털 뉴스팀으로 좌천된 기자들은 취재는 뒤로 한 채 보도자료를 베껴 쓰거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다는 일을 하며 스스로를 '기레기'라 한탄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는 <허쉬>는 시청자들로서는 마치 기레기를 변명하는 듯한 뉘앙스로 읽힐 수 있다. "글보다 밥이 무섭다"는 현실은 거꾸로 말해 그 밥을 위해 정론직필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생존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는 기자들이나 그 세계를 아는 언론관계자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겠지만 대중들이 모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허쉬>에게 다시 반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디지털 뉴스팀의 한준혁(황정민)이 과거 자신의 이름으로 나간 가짜 뉴스 때문에 겪은 상처가 있다는 점이다. 그 가짜뉴스로 잘 알고 지내던 한 PD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그래서 마치 자신에게 벌을 주듯 기레기를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 또 다른 각성의 기회가 생긴다. 

 

그것은 자신이 교육을 맡게 된 인턴에게서 벌어진 비극이다. 지방대 출신으로 여러 회사의 인턴을 전전했지만 정직원이 되지 못한 오수연(경수진)이 매일한국에서도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그냥 자신만 입 다물고(허쉬라는 제목이 가진 뜻 그대로) 지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갈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한준혁은 과연 기레기에서 탈피해 새로운 면모를 보일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은 <허쉬>가 반등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드라마는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현실에 결핍된 것들을 채워주는 판타지를 요구하니 말이다. 과연 한준혁의 각성은 <허쉬>의 기대감을 높여 놓을 수 있을까. 나아가 기자 소재 드라마는 안 된다는 징크스를 깨줄 수 있을까.(사진:JTBC)

기레기는 어떻게 탄생하나, '허쉬'의 시스템 고발이 변명이 안 되려면

 

기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잘 안 된다는 통설이 있다. 거기에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서 있는 드라마의 위치가 작용한다. 즉 너무 현실감 있게 기자의 세계를 그리면 고구마 가득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푸념과 변명처럼 다가오게 되고, 그렇다고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를 판타지를 섞어 그리면 너무나 다른 현실과의 부조화 때문에 공감이 안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 

 

JTBC 새 금토드라마 <허쉬>는 이 중 전자를 선택한다. 섣불리 정의감 넘치고 그 어떤 외압 앞에서도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라는 판타지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 정반대로 이른바 '기레기'로 전락해버린 기자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는가를 찾아간다. 매일한국의 12년차 베테랑 기자지만 이 신문사의 실패자들을 모아놓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디지털 뉴스팀으로 출근해 보도자료를 '복붙' 하며 낚시성 제목으로 조회 수를 끌어올리는 일을 하는 한준혁(황정민)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펜대보다 큐대를 더 많이 잡으며 빈둥빈둥 시간을 때우고, 새로 들어온 인턴들을 교육하면서도 기자로서의 사명감 같은 이야기는 거의 꺼내놓지 않는 인물. 매일한국의 디지턴 뉴스부 기자들의 모습도 한준혁과 그리 다르지 않다. 디지털뉴스팀 정세준(김원해) 팀장은 기사는 잘 썼지만 사내 정치는 몰라 부장 승진에서 계속 누락된 '똥차' 취급을 받고, 김기하(이승준) 기자는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가늘고 길게 살아간다. 엄성한 디지털 뉴스부장은 나름 사내 정치를 하지만 어딘가 '엉성한' 직장인에 가까운 인물이고, 그가 눈치보며 비벼대는 나성원(손병호) 매일한국 편집국장은 기자정신보다 조직의 이익이 우선인 인물이다. 

 

새로 들어온 인턴이라고 해도 기자로서의 패기 같은 게 엿보이진 않는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수히 많은 인턴 경험을 가진 오수연(경수진)은 '기자는 시민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정직원이 되기 위해 목매는 인물이고, 이지수(윤아)는 '밥은 펜보다 강하다'며 생존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는 인물이다. 즉 기자가 되려하는 젊은 인물들 역시 취업 전선에서 기자정신보다는 생존이 우선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걸 이들 인물들은 잘 보여준다. 

 

그나마 기자로서의 근성과 정신을 보여주는 인물은 매일한국 사회부 차장 양윤경(유선)이지만 그 역시 비판적인 기사들이 번번이 광고주와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데스크에 까이는 현실을 마주하며 이제 그만 둘까를 고민한다. 예전보다 많이 꺾였다는 그는 현실을 이렇게 개탄한다. "기자? 여기 기자가 어딨냐? 그냥 다 먹고 살겠다고 붙어있는 월급쟁이들이지." 기자로서 해야 할 일들과 직업정신 같은 게 있지만 이들은 어쩌다 기자가 아닌 회사원이 되어 있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기자가 회사원이 되면 안되는 이유가 한준혁과 이지수가 겪은 사건으로 드러난다. 즉 2013년 방송노조위원장 이용민 PD가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담은 가짜뉴스를 한준혁의 이름을 내게 만든 나성원 국장 때문에 결국 이용민 PD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 당시 한준혁은 나성원을 찾아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항변했지만 사장이 직접 지시해 자신은 힘이 없다며 사장도 정부처에서 찍어 눌러 어쩔 수 없었다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이슈가 나오면 금세 잊혀질 거라 변명했지만 그렇게 벌어진 비극으로 한준혁은 사실상 스스로를 죄인처럼 유배시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수는 다름 아닌 바로 사망한 PD의 딸이었다.

 

생계를 위해 누구나 밥이 중요한 회사원이라는 건 공감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기자가 그저 회사원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 사건은 <허쉬>가 무엇을 담으려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섣부른 돈키호테 기자 판타지를 담기보다는 "허라면 허고 쉿 하라면 쉿 하면 되는 것"이라 말하는 데스크들 속에서 우리가 쉽게 기레기라고 치부함으로써 그런 가짜뉴스가 개인적 일탈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과의 관계로 얽힌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허쉬>의 이런 시스템 고발이 그저 기레기의 현실 한탄이나 변명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대안의 제시가 필요하지 않을까. 기레기로 자조하며 살아가기보다는 무언가 이들의 연대가 만들어내는 반전이 필요한 이유다. 과연 <허쉬>의 한준혁과 이지수는 밥벌이 그 이상의 가치를 이 부조리한 시스템 안에서도 보여줄 수 있을까.(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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