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이기기만 하던 세계 최고의 국수 조훈현(이병헌). 그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기재를 보이는 이창호(김강훈, 유아인)를 거둬 제자로 키운 것. 문제는 너무나 뛰어난 기재를 갖고 있어 제자의 성장이 순식간에 이뤄졌다는 것이고, 그래서 제자를 키운 스승이 도전을 받는 상황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영화 ‘승부’는 바로 이 조훈현과 이창호의 드라마틱한 사제대결을 통해 진정한 승부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그린 작품이다.
사실 영화는 실화 자체가 가진 힘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 조훈현에게 배웠지만 결국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내 스승을 이겨버린 이창호의 등장은 당시 바둑계에 충격 그 자체였다. 1990년 벌어진 최고위전을 시작으로 이창호는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하나 빼앗았고 조훈현의 시대는 저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절치부심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조훈현 9단은 91년 이창호와 치러진 대국에서 명승부를 펼치며 이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둑에 대한 영화지만, 바둑을 몰라도 될 정도로, 사제지간이라 남다를 수밖에 없는 승부에 집중한다. 이긴 제자는 마음껏 즐거워하지 못하고, 진 스승은 좌절하면서도 그런 제자를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네 덕에 나도 많이 배운다”며 자신 역시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조훈현은 제자에게조차 배울 수 있다는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다. 그는 “창호가 그랬듯이 이제 제가 창호한테 도전하겠다”고 말하는 스승이자 패자다. ‘제자는 스승을 이기는 것만이 참된 보답’이라고 조훈현은 늘 말했다고 한다. 조훈현은 승자도 언젠가는 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패자가 됐을 때 보여주는 품격이다. 불복을 모르는 우리의 현 정치가 한 수 배워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 '승부')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넷플릭스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가 KBS에서 방영됐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시청률과 화제성이 폭발했을 결과들이 떠오른다. 물론 방송의 결과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상상으로 이런 예상을 해보는 일이 별 의미 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상상까지 동원해 보는 건, 그간 KBS가 유일하게 지속해온 가족드라마가 갈수록 고꾸라지고 시청층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폭싹 속았수다>를 써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임상춘 작가는 사실상 KBS가 낳은 작가다. MBC 단막극 <내 인생의 혹>과 SBS 단막극 <도도하라>를 쓰며 2014년에 데뷔했지만 본격 데뷔작이라 여겨지는 건 차영훈 감독과 함께했던 KBS 4부작 <백희가 돌아왔다>다. 그 후 <쌈, 마이웨이>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임상춘 작가는 차영훈 감독과 함께 <동백꽃 필 무렵>으로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2019년 시청률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도 <동백꽃 필 무렵>은 무려 23.8% 최고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에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제 KBS가 끌어안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커진 임상춘 작가가 올해 새로 가져온 <폭싹 속았수다>는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방영됐다. 600억짜리 대작이고 스타 드라마 감독인 김원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캐스팅도 아이유에 박보검은 물론이고 문소리, 박해준에 나문희, 김용림, 염혜란, 정해균, 오정세, 엄지원, 백지원 등등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 아닌 연기자들이 없다. 사이즈가 커졌다는 말이 딱 실감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임상춘 작가의 세계가 얼마나 가족 서사를 깊이있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게다가 <폭싹 속았수다>는 그 가족 서사에 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대의 흐름을 애순의 어머니 광례(염혜란), 애순(아이유, 문소리), 그리고 애순의 딸 금명(아이유)으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로 풀었다. 시대극의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시대극과 가족드라마는 사실 과거 지상파 드라마의 대표적인 장르들이었다. 하지만 가족에서 개인 서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시대의 변화와, 미디어의 변화, 지상파의 제작환경 변화 등과 맞물려 이들 장르들은 서서히 힘을 잃었던 게 사실이다. 여전히 KBS만 가족드라마(주말드라마)와 시대극(<오아시스>나 <오월의 청춘> 같은)을 시도하고 있지만 반향만 예전만 못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바뀐 시대에 맞는 시대극과 가족서사가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 우리 시대에 맞는 가족서사와 시대극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고, 또 그 힘 또한 강력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중장년 구독자층의 시청 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제 구독료만이 아니라 광고 수익을 목표로도 하고 있는 넷플릭스로서는 이러한 시청 세대의 폭이 늘고 있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KBS 같은 지상파가 가족서사와 시대극 같은 어찌 보면 공영방송에 어울리면서도 지금의 트렌드에 맞는 서사들을 발굴해내는 일이 OTT를 흉내내 장르물에 뛰어든다거나 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들이 가족드라마를 점점 외면하는 건, 가족서사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가족서사만을 적당한 클리셰로 범벅해 보여주는 가족드라마들에 질렸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새롭고 참신하며 감동도 주는 가족서사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폭싹 속았수다>의 임상춘 작가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가와 서사를 발굴하려는 노력, 어쩌면 여기에 현 지상파들이 가진 딜레마를 풀 열쇠가 있지 않을까.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대한 국내외 반응이 뜨겁다. 또한 작품을 쓴 임상춘 작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쌈마이웨이>부터 <동백꽃 필 무렵>을 거쳐 <폭싹 속았수다>로 이어지는 임상춘의 세계는 일관되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폭싹 속았수다
흙수저 인생들의 고군분투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아이유)은 제주 해녀의 딸로 자라났다.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엄마는 새아버지와 살면서 애순을 시댁에서 살게 했다. 그나마 그 집이 먹고 살기 때문이었는데, 그 곳에 얹혀 살던 애순은 어린 나이에도 사실상 식모 역할을 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엄마가 애순을 다시 데려가지만 그 엄마도 스물 아홉의 나이에 생을 등졌다. 결국 열 살 먹은 애순은 새아버지의 아이들을 돌보며 소처럼 밭을 일궈 양배추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본래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육지로 가서 대학도 가고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지만 고단한 삶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단한 삶을 계속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건 늘 애순 옆에 딱 달라붙어 그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는 관식(박보검) 같은 따뜻한 인물이 있어서다. 섬놈에게는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애순은 관식과 결혼하고 드디어 행복을 느낀다. 시인이 되는 꿈은 접었지만 너무나 예쁜 아이들을 보며 애순은 후회하지 않는다. 관식 또한 마찬가지다. 운동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그 무쇠 같은 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꺼이 헌신한다. 물론 아이가 사고로 죽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겪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서로를 의지해가며 살아간다.
<폭싹 속았수다>는 바로 이런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흙수저 인생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 애순과 관식 같은 인물은 사실상 6,70년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들의 쉽지만은 않았던 삶을 대변한다. 물론 제주라는 환경이 다르지만, 그 격동의 세월에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 살아보겠다고 했던 그 세대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진 것 없어 살 집 하나 얻는 것조차 몸이 부서지게 일을 해야 가능했지만, 서로를 응원하고 지켜봐주는 가족이 있어 그 난관들을 뚫고 나왔던 그들의 삶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지나고 나서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현재가 그들의 고군분투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을 드라마는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대단한 입지전적인 인물의 성공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범한 이들의 출세담도 아닌 평범한 흙수저 인생들의 고군분투가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너무나 드라마틱한 인생 모험담으로 그려진다. 때론 쨍쨍 내리쬐는 햇볕처럼 아팠지만 때론 따뜻한 봄날의 행복도 겹쳐져 있던 인생 모험담.
소외된 이들을 바라보는 임상춘 작가의 따뜻한 시선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과 관식이라는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위대하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임상춘 작가의 일관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다. <쌈마이웨이>에서 그 시선은 스펙이 없어 변방으로 밀려난 채 살아가는 흙수저 청춘들을 들여다 봤다. 아버지가 흙수저면 그 삶이 대물림되는 청춘들이 마주한 세상의 벽은 결코 넘기 쉽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 변방에서 이들은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태권도 국가대표를 꿈꾸던 고동만(박서준)은 격투기 선수로 나서고, 뉴스데스크 앵커를 꿈꾸지만 현실은 백화점 인포 데스크에서 일하는 최애라(김지원)는 방송국 대신 지방행사를 뛰고 격투기 전문 아나운서가 된다. 즉 <쌈마이웨이>는 스펙이 없다는 이유로 ‘쌈마이’ 취급 하는 세상 속에서 이 건강한 청춘들이 서로를 의지해가며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소외된 이들이 살아내고 버텨내는 생활 생존서사는 임상춘 작가의 세계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임상춘 작가의 세계는 늘 중심이 아닌 변방이 배경이다. <쌈마이웨이>가 지방 소도시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을 그렸다면, <동백꽃 필 무렵>은 옹산이라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그 곳에 어린 아들과 함께 들어와 까멜리아라는 술집을 운영하는 동백(공효진)의 삶을 그렸다. 외지인인데다, 예쁜 얼굴에 술집 운영을 하는 미혼모라는 동백의 배경은 편견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 촌므파탈 용식(강하늘)의 동백에 대한 순애보는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마을 사람들도 차츰 동백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용식과의 달달한 로맨스가 이어진다. 연쇄살인범 까불이의 등장으로 동네는 흉흉해지지만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의 연대는 이 위기들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 가장 힘겨운 시기를 거쳐야 비로소 꽃이 피어난다고 하던가.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 같은 편견으로 고통받은 모든 이들에게 그 힘겨움이 ‘꽃이 피어나기 위한’ 고난이라고 위로해주는 드라마다.
전 세계가 주목할 독보적인 임상춘 작가의 세계
<폭싹 속았수다>는 이러한 임상춘 작가의 세계가 훨씬 깊어졌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제주 해녀의 삶을 토속적이면서도 거친 제주 방언의 특색을 더해 그 삶의 신산함을 드러내는 대목은 ‘문학적인’ 느낌마저 준다. 대사의 표현에서도 이런 면모들이 드러난다. “그러게 복어를 왜 건드려? 독으로 버티고 사는 걸.” 같은 대사로 애순의 엄마 광례(염혜란)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해낸다거나 “명치에 든 가시 같은 년” 같은 대사로 광례가 애순을 얼마나 애닳게 생각하는가를 표현해내는 점들이 그렇다.
시인을 꿈꿨던 애순이 쓴 시들도 예사롭지 않다. ‘점복 팔아 버는 백환./ 내가 주고 어망 하루를 사고 싶네’ 같은 기막힌 구절이 돋보이는 어린 애순의 시 ‘개점복’이나, 나이 들어 이제 시인의 꿈을 버린 지 오래지만, 백일장에 장사하러 나왔다가 애순이 쓴 ‘추풍’이라는 시도 그렇다. ‘춘풍에 울던 바람/ 여적 소리내 우는 걸,/ 가만히 가심 눌러/ 점잖아라 달래봐도/ 변하느니 달이요./ 마음이야 늙겠는가’ 나이 들어 이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애순이 봄날의 그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걸 담아낸 이 시에서는 어쩌면 임상춘 작가도 한때 꿈꿨을지 모르는 문학소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번 <폭싹 속았수다>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는 점에서도 임상춘 작가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임상춘 작가는 줄곧 KBS에서 작품을 공개해왔다. 즉 어찌 보면 가장 로컬의 색채가 묻어나는 방송국에서 작품을 해왔던 셈이다. 임상춘 작가 특유의 끈끈한 가족 서사의 매력이 KBS라는 플랫폼과 어울려 <동백꽃 필 무렵> 같은 작품은 최고 시청률 23.8%(닐슨 코리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를 통해 공개되는 <폭싹 속았수다>는 어떨까. 가장 로컬적인 콘텐츠가 글로벌할 수 있다는 걸 지금껏 증명해온 넷플릭스에 임상춘의 세계는 확실한 시너지를 내고 있다. 공개 2주차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시리즈 비영어 부문에서 2위에 올랐다. 한국은 물론이고 브라질, 칠레, 멕시코, 터키, 필리핀 베트남을 포함한 총 41개국에서 톱10 리스트에 랭크된 것. 제주를 비롯한 한국의 현대사 같은 낯설 수 있는 로컬 색깔들이 묻어나는 작품이지만, 부모와 자식 관계나 부부 관계 같은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서사가 담겨 있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어서다.
특히 소외된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깊이있게 천착함으로써 그 삶을 위대한 모험담처럼 그려내는 임상춘 작가의 세계는 비정한 자본주의의 틀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에게 한바탕 씻김굿 같은 눈물을 통한 거대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세계가 주목할만한 작가의 탄생이다. (글:시사저널, 사진:넷플릭스)
망한 게임 택배왕을 만든 회사 차차게임즈는 망하기 일보직전이다. 이 회사를 산인그룹 M&A 팀장 윤주노(이제훈)는 사려고 한다. 택배왕이라는 게임 때문이다. 워낙 게임의 차원을 넘어서는 디테일 때문에 그 시스템(지도나 물류 시스템 등)을 활용해 쉽게 이커머스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다. 전통적인 유통과 물류를 해온 산인그룹은 이커머스에 일찍이 뛰어들지 않아 한계에 봉착했다. 차차게임즈를 사는 일은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JTBC 토일드라마 <협상의 기술>은 이처럼 M&A라는 치열하고 냉정한 비즈니스의 세계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다. 지금껏 직장을 다룬 작품들이 적지 않았지만, <협상의 기술>은 본격 기업극화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 디테일이 다르다. 실제로 이승영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무수한 사례들과 취재를 거쳐 실제 비즈니스의 리얼리티를 만들려 노력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 담긴 M&A 관련 에피소드들이나, 기업 내부에서의 권력 다툼, 건설로 성장했지만 이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살아남게 된 회사 인물들의 고뇌 같은 것들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M&A라는 비즈니스의 세계가 냉정하다는 걸 잘 말해주는 건 이 팀을 이끄는 윤주노라는 인물의 캐릭터에도 담겨있다. 위기에 처한 산인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M&A 전쟁에 뛰어든 윤주노는 도통 표정이 없고 그래서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백사’라 불리는데, 머리를 하얘서 그렇게 불리는 줄 알았더니 실은 행동하기 전 ‘백번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신중하고, 협상에 있어서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협상의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선택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즈니스의 세계가 냉정하다는 건 그 치열한 경쟁을 말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기계적인 차가움만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래서 어디든 감정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협상의 기술>이 3,4회에 다룬 차차게임즈 인수 에피소드는 이를 잘 말해주는 소재다. 차차게임즈 차호진(장인섭) 대표가 오수연(박하랑)을 짝사랑해 자신이 만든 게임 택배왕과 하이스퀘어에 똑같은 이스터에그(개발자들이 자기 흔적을 숨겨두는 것)를 남기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차호진은 게임에 브금을 녹음했던 오수연을 짝사랑했지만, 공대생답게(?) 그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지 못했다. 대신 오수연의 집 앞 꺼진 가로등 대신 랜턴을 100일동안 걸어두고 가져오고 하는 일을 했던 차호진은 결국 오수연이 자신과 함께 게임 개발을 했던 선배 형 도한철(이시훈)과 사귀게 되자 그 회사를 나와버렸다. 도한철은 오수연도 빼앗고, 차호진이 개발했던 게임도 도둑질해 하이스퀘어라는 게임을 출시해 큰 성공까지 거둔다. 차호진은 억울해 도한철에게 절도로 소송을 걸었지만 회사는 망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게임 안에 심어 둔 이스터에그는 차호진이 오수연에게 계속 보내는 사랑의 고백이 됐다. 게임 안에서 꺼진 불을 밝히는 인물은 차호진의 분신이고, 그 불빛 저편에는 오수연의 분신인 캐릭터가 그림자로 어른거린다. 차호진 대표의 오수연에 대한 순애보는 이 차갑고 비정하기만 할 것 같은 비즈니스의 세계가 그것 역시 심장이 뜨거운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걸 드러낸다. 기업 극화이지만 멜로의 감성들이 피어나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협상의 기술>이 이스터에그 속 순애보를 통해 담은 건 그저 멜로 서사만이 아니다. 그 이스터에그는 도한철이 차호진의 개발물을 훔쳐갔다는 증거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택배왕의 이스터에그와 하이스퀘어의 이스터에그가 똑같이 어두운 밤길 불을 밝히는 것이라는 걸 알아낸 M&A팀은 이를 통해 도한철과 딜을 함으로써 그로부터 차차게임즈에 100억을 투자하게 만든다. DC의 지분 10%까지 얹어서. 그리고 이 에피소드의 마무리는 오수연이 우연히 택배왕의 이스터에그에 담긴 비밀을 알고 놀라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협상의 기술>은 이처럼 디테일한 비즈니스의 세계를 담으면서도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안판석 감독 특유의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쌓아나가는 연출력은 이 복잡해 보이는 서사들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그래서 빠져서 보다보면 M&A라는 비정한 세계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인간적 감정들과 분노와 희열이 교차하는가를 실감하게 해준다. 좋은 대본에 베테랑 연출이 더해지고 그 위에서 배우들의 단단한 연기가 펼쳐지면서 생겨난 간만에 보는 흥미진진한 본격 기업극화가 아닐 수 없다. (사진: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