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간, 사랑과 욕망의 사중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하는 그녀를 가슴에만 묻어놓고 멀쩡히 결혼해 살다가 갑자기 살 수 있는 날이 90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는다면. 그녀와 함께 해야 행복할 것 같은 남은 마지막 날들을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찾아와 이제 90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뒤늦게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나 헌신적인 남편이 옆에서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진짜 사랑을 찾아갈 것인가.

어느 날 자신과 함께 살아온 아내 혹은 남편의 사랑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그 혹은 그녀를 보내줄 것인가. ‘90일 사랑할 시간(이하 구사시)’은 사랑하며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행복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드라마다.

현지석, 90일 남은 남자의 선택
현지석(강지환 분)은 췌장암 말기 판정에 즈음해 고미연(김하늘 분)을 떠올린다. 죽음 앞에 당당할 인간이 어디 있을까. 그는 90일을 고미연과 함께욕망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그 90일의 삶 속에 끌어들인다. 죽음 앞에서 현지석은 세상의 모든 윤리와 금기를 넘어선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달려가는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해준 현실들(아내와 아이는 물론이고 고미연과 그녀의 남편)이 모두 흔들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마치 불나방이 불을 찾아들 듯 사랑 속으로 몸을 던진다.

만일 그의 선택이 그저 멀리서 고미연을 쳐다보고 그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저 혼자만 태우는 것이었다면 ‘구사시’의 드라마는 이처럼 강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의 극적 구성상 현지석의 선택은 당연한 것.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 과정과 끝을 목도한다. 결국 죽어 없어지는 그 끝을 보면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욕망은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저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남은 사람들을 모두 거친 격랑 속으로 끌어들인 자신의 선택은 옳았던 것일까.

고미연,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의 선택
고미연은 너무나 ‘착하고 헌신적인’ 남편, 김태훈(윤희석 분)의 모습에 화가 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자꾸만 이 남편이 아닌 90일 남은 남자, 현지석에게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90일 후면 사라질 그’라는 절박감과 애절함이 그녀를 자꾸 그에게로 욕망하게 만든다. 그런데 모든 걸 이해해주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남편 김태훈은 그녀의 선택을 힘들게 만드는 존재다. 심지어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그 남자에게 보내주는 김태훈에게서 고미연은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만일 그녀의 선택이 죽어가는 그에 대한 연정이 아닌, 현실적인 사랑이었다면 어땠을까. 운명적인 사랑이란 나이가 들면서 차차 현실적인 사랑으로 변모하기 마련. 멀어서 환타지가 되고 마는 운명보다는, 차곡차곡 삶의 관계들을 쌓아 가는 사랑을 선택했다면 그를 보내고 자신도 차로 뛰어드는 그런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욕망이 다 타고나서 결국 제 자리로 온 것이 아닌가. 그녀는 왜 그다지도 어려운 선택을 했던 것일까. 혹시 그건 사랑이 아닌 연민이나 욕망 같은 건 아니었을까.

박정란과 김태훈, 반려자의 행복을 위한 선택
이 마지막 90일의 시간 속에서 갑작스레 불타올라 타오르는 남녀의 뒤안길에 남은 박정란(정혜영 분)과 김태훈의 욕망은 애증에서부터 비롯된다. 자신의 사랑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됐을 때, 그들은 미움과 함께 더 활활 타오르는 욕망을 갖게 된다. 보내줘야 할 것인가, 잡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잔인한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들도 보내줘야 할, 혹은 잡아야할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내주자니 욕망이 그걸 막고, 잡자니 반려자의 행복을 꺾는다는 죄책감이 그걸 막는다. 그래서 보내줬다가도 다시 잡고, 잡다가도 다시 보내주는 그들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끝에서 다시 질문을 던지는 ‘구사시’
90일 이라는 시간의 용광로 속에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을 덩어리째 집어넣고 시종일관 불을 지핀 ‘구사시’는 바로 이 ‘선택’에 대한 드라마다. 불륜과 불치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구사시’가 신파가 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선택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 때문이다. 마지막에 가서 현지석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드라마를 이어가는 장면들은, 죽음을 끝으로 눈물바다를 만들며 끝나는 그런 드라마와 ‘구사시’가 다르다는 점을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이 욕망의 사중주의 핵심에 있던 현지석이 죽음으로써 그 욕망은 끝을 보게되지만, 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그 욕망을 이어보려고 한다. 이미 죽은 현지석이 그들에게 하나하나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장면은 물론 남은 자들 스스로가 만든 욕망과의 화해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장면들을 보면서 시청자들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그 사랑과 슬픔과 고통과 행복이 하나의 삶의 과정이라는 관조적 시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가 끝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욕망하는가, 사랑하는가.

사극의 그림자 악역, 그들에게 박수를

드라마의 반은 그 몫이 악역이다. 드라마라는 갈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악독한 인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적을 두고 무슨 재미로 드라마를 볼까. 특히 대결구도가 관건이 되는 사극엔 화끈하게 욕먹고 확실하게 힘을 만들어주는 악역이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주인공만큼 사극을 장악해나가는 소문난 악역이 있으니, KBS ‘대조영’에서 신홍 역할을 맡고 있는 김규철과, MBC ‘주몽’에서 금와왕의 부인, 원후 역할을 맡고 있는 견미리다. 이 관록의 연기파 배우들은 공교롭게도 과거 ‘불멸의 이순신’과 ‘대장금’에서 확실한 악역을 소화해낸 바 있다.

몸을 아끼지 않는 명연기, 김규철
연극무대를 고집했던 그의 연기는 애초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서편제’에서 오정해와 공동주연을 했던 것 이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4년부터 드디어 ‘불멸의 이순신’과 ‘부활’로 악역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악역 연기는 음모에 능한 모사꾼. 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배신을 일삼는 그의 연기에 걸려들면 제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욕이 나올 정도로 뿜어내는 카리스마가 강하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임천수 역할로 분한 그는 청소년기를 이순신과 함께 보내던 선량한 역할에서부터 아비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결국 이순신을 배신하는 역할까지 소화해낸다. ‘대조영’의 신홍 역할 역시 희대의 간웅이자 매국노. 신홍은 부모가 적진에 잡혀있는 부지광을 회유해 요동성의 문을 열게 하는 인물로 시작해, 지금은 연남생의 책사로 역시 당나라와 연남생을 손잡게 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향후에는 부씨 집안의 장자인 이해고를 도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대조영을 괴롭힐 작정이다.

그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2005년 KBS 수목 드라마 ‘부활’에서 악역, 최동찬 역을 소화해내며 악역도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사고로 골절 수술을 받았지만 끝까지 휠체어 연기 투혼을 펼치며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킨 그에게 시청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표독 연기 물오른 견미리
견미리의 악역 이미지는 대개가 ‘대장금’ 최상궁에서 나온 것. 수랏간 최고상궁을 두고 한상궁, 대장금과 벌이는 대결구도에서 확실한 악역을 선사했다. ‘대장금’의 힘은 온전히 견미리가 펼친 표독스런 악역이 반이라 할 정도로, 그녀는 출세에 대한 무서운 집념을 가진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최상궁 역을 확실하게 소화해냈다.

최근 ‘주몽’에서 활약하고 있는 견미리는 궁궐 내에서 자식을 앞에 둔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주몽’이 좀체 부여를 벗어나 나라 건국에 일찍이 앞장서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식들을 앞세운 원후 역의 견미리와 유화부인 역의 오연수의 대결이 볼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악역은 대개가 ‘자기 사람’을 성공시키려는 욕망에서부터 비롯된다. ‘대장금’에서 금영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면 ‘주몽’에서는 자식 대소와 영포를 앞세운다. ‘주몽’에서 다른 점은 금와의 유화부인에 대한 사랑을 보며 살아온 질투심과 자식에 대한 모성애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스타’가 아닌 ‘연기자’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제 중견 탤런트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는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녀의 연기 결은 폭이 넓다. 하지만 이 어쩔 수 없는 악역의 매력은 그 중 백미가 아닐까.

사극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보다 칼에 맞고 쓰러지는 사람이 더 잘해야 한다고 한다. 늘 빛만 보다 보면 그 빛이 사실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깜박 잊는 경우가 많다. 김규철이나 견미리 같은 드라마 깊숙이 그림자를 만들어 빛을 강조해 주는 악역들이 없다면 사극은 결코 빛날 수 없다. 그들에게 박수를.

공개개그삼국지, 마빡이, ‘왕의 남자’

‘왕의 남자’의 장생과 공길이 가진 것이라고는 멀쩡한 사지와 세 치 혀였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사람들에게 그 몸을 놀려 즐거움을 주고, 세 치 혀를 놀려 웃기는 일이었다. 이 시대의 개그맨들은 장생과 공길이 그랬던 것 같은 다양한 기예와 놀라운 순발력을 가져야만 살아남는다. 그들이 저 살 판과 죽을 판을 가르는 줄 위에서 한 판 걸판지게 놀았다면, 이 시대 개그맨들은 공개무대라는 칼날 위에서 편집과 벌이는 ‘몇 분 간의 승부’를 벌인다.

공개개그삼국지
KBS ‘개그콘서트’에 이어,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MBC의 ‘개그야’가 등장하면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은 안정적인 ‘공개개그삼국지’의 형세로 들어간다. 그 바탕은 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재인들이 웃지 않는 왕(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 왕의 마당에서 벌이는 연희처럼, 끝없는 경쟁과 아이디어의 결과였다. 이른바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하는 이 시스템 속에서 당연히 시청률은 상승했다.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개그맨의 단명. 캐릭터라는 탈을 만들어야 하는 개그맨들에게 있어 그 탈의 유통기간이 줄어들었다는 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어쨌거나 장생과 공길처럼 ‘라스트 맨 스탠딩’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사람에게는 갈채가 집중된다. 대중이라는 지엄한 왕 앞에서 개그맨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마빡이다.

마빡이가 말해주는 개그현실
요즘의 개그가 점점 기예의 모습을 띈다는 점에서 그것은 저 조선시대 남사당패들의 연희를 닮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죽을 판에도 뛰어드는 것이다. 개그 무대 위에서는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무인들처럼 몸을 날리는 액션은 물론이고, 온 몸에 물을 끼얹고 크림에 범벅을 하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기도 한다. 마빡이는 가장 단순하게 현재 개그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여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보는 듯하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이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줄 위라는 죽을 수도 있는 현실의 무거움 위에 올라선 장생과 공길이(현대인들) 오히려 그 줄의 탄성을 이용해 하늘로 치고 오르는 것. 마빡이는 개그맨의 현실을 오히려 이용해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얻고 있었다.

무대개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들
아무리 그 정점에 오른 장생과 공길이라 하더라도, 결국 연희가 끝나면 무대 밑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 이것이 무대개그가 가진 한계이다. 몇 분 간의 승부가 끝나면 그 힘으로 한 주를 이어가고, 이것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쉬 사라져버리는 것 말이다. 따라서 무대 밖으로 개그를 옮기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웃음충전소’는 스튜디오와 현장을 오가며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웃음을 잡아낸다. 패러디에 기반한 이 프로그램은 일상을 패러디하고(막무가내중창단), 전원드라마를 패러디하며(지친다 지쳐), 고발프로그램을 패러디하고(진실이 알고싶다), 오락프로그램을 패러디한다(계층공감 올드&형님).

하지만 여전히 무대개그의 경쟁형식에 시청자들은 익숙한 것 같다. 웃음충전소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타짱’은 영화 ‘타짜’의 형식을 빌어 몸 개그 대전을 벌이는 코너로 기반은 바로 이 대결구도에 있다. 또한 그 대전 형식의 밑바탕에는 여전히 마빡이의 유령이 떠다닌다. ‘웃기면 이기고 웃으면 진다’는 이 개그맨의 숙명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순위 1위를 꼽는 ‘타짱’이지만, 실제 ‘웃음충전소’의 시청률이 많이 오르지 않는 것은 역시나 무대개그의 경쟁형식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골라보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장생과 공길’이 저 몸뚱어리 하나로 왕의 눈과 귀를 먹게 했듯이 우리네 개그맨들 역시 올 한해 열심히 몸을 놀려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몸 개그가 대세인 세상, 어찌 그 몸짓이 슬프지 않을까. 각종 시상식에서 그제야 눈물을 흘리는 개그맨들을 보면서 그들의 슬픈 몸짓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얼굴 없는 가수들, ‘미녀는 괴로워’, ‘라디오 스타’

가요계는 올해도 역시 장기불황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연초부터 립싱크니 표절이니, 퍼포먼스니 하는 단어들이 부쩍 많이 들렸고, 급기야 우리네 음악계의 거장이라는 전영혁, 신중현씨의 쓴소리가 떨어졌다. 전영혁씨는 “가수는 노래하고, 댄서는 춤추고, DJ는 음반을 틀면 된다”고 했고, 신중현씨는 “무대에 노래하러 나온 거냐 뛰어다니러 나온거냐”고 했다. ‘라디오 스타’의 최곤 같은 노래하는 가수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중심에는 노래가 아닌, 외모, 춤, 재담으로 기획된 ‘비디오 스타’들이 날치는 데 대한 쓴 소리다.

얼굴 없는 가수들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우리네 외모지상주의의 한 단면을 건드린 영화. 그런데 그 언저리에서 함께 걸려드는 논란거리가 있으니 바로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판치는 가요계의 문제들이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보여주는 음반계 립싱크와 대리가수는 종종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과거 사이버가수들의 립싱크는 때론 실제 가수들에게도 코러스라는 형태로 행해지곤 했다. 이로써 ‘노래하는 가수’보다 ‘춤을 추거나 개그를 하는’ 가수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일단 시제품이 나와 히트를 치면, 대량생산되는 것이 시장의 논리. 가창력이나, 좋은 노래를 가진 가수들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던 가요계에 기획사들의 바람이 일었다. 기획사들은 모든 것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상품을 고르듯, 가수를 골라내고(어떨 때는 조합을 하기도 한다), 노래를 붙이고, 댄스를 붙여서 음반을 찍어냈다. 가수의 노래도 중요했지만 거기에 곁들여진 댄스와 무엇보다도 잘 생긴 외모가 더 중요했다. 그러자 기획사들은 얼굴과 춤을 먼저 보았다. 노래는 점점 그 다음 문제가 되었다. 노래는 몇 달간의 합숙과 연습, 그것도 안되면 녹음 과정에서 코러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됐다.

얼굴만 있는 가수들의 딜레마
얼굴만 있는 가수들 뒤에는 당연히 얼굴 없는 가수들이 있게 마련. 그들은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가 그랬던 것 같은 심적인 괴로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가수로서의 상품성이 떨어지는 경우, 선택해야 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가수들은 음반이 팔리지 않는다고 해서 음반작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 상품이었던 가수들은 음반이 팔리진 않는다는 건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가 잠적한 사이, 얼굴만 있는 가수, 아미가 음반작업 대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모습은 우리네 가요계를 보는 것만 같다. 가수들이 무대가 아닌 각종 예능프로그램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음반시장이 불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토요일, 일요일 저녁만 되면 수많은 이름 모를 가수들이 시청자들을 웃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장기자랑 하듯이 노래와 춤을 홍보한다. 가끔씩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탤런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지경이니 노래는 더더욱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가수로서 얻은 이미지를 그나마 살리기 위해 가수 이외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 아니면 그렇게라도 홍보를 해야한다는 것. 이것이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처한 딜레마다.

위기의 기요계, 라디오 스타들은 어디 있나
간단한 이야기지만 가수들은 노래를 할 때 가수다. 가수들이 노래를 하지 않고 연기를 하고, 개그를 할 때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러나 요즘은 이 간단한 이야기가 간단치만은 않은 상황이다. MBC 생방송 100분 토론에서 제기된 ‘위기의 가요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디지털 음원이 그 문제의 바탕을 제공했고, 여기에 가수들의 엔터테이너화는 노래의 쇠퇴, 음악영역의 획일화 등으로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런 총체적인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대중음악의 질적 하락, 그로 인한 시장 침체가 반복되었다.

가수 탓, 디지털 음원을 갖고 있는 이동통신사, 유통사 탓, 상업적으로만 무장한 제작자 탓하며 ‘누구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저 ‘라디오 스타’의 최곤이 TV에서 밀려나고, 중심에서 밀려나, 저 변방의 라디오 진행자로 생활해야 하는 환경이다. 아무리 음반계가 불황이라고 해도 가수들이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너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순위 프로그램은 공정성과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라 가수 홍보 프로그램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노래보다는 볼거리에 더 집중되는 것도 문제다. 가수들은 오히려 연예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가 아닌 입담으로 승부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라이브 형식의 가요 프로그램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순위 프로그램과 달리 이 프로그램들은 철저히 ‘노래하는 가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성공작으로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KBS2 TV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될 것이다. 가수들의 열창과 거기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관객들이 만들어가는 이러한 라이브 프로그램들은 실제로 음악을 음악으로 온전히 돌려주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가요계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순위 프로그램이 아닌 순수 라이브형 가요 프로그램이다. 문제는 시간대. 대부분의 이들 라이브 무대는 새벽에 열린다. 이 시간대를 저녁시간대 정도로 당길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시간대라도 변방에서 노래 하나 붙잡고 살아가는 ‘라디오 스타들’이 대거 귀환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