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네>를 통해 보는 가족주의의 해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시작부터 나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를 외치며 온갖 민폐를 끼치던 왕수박(오현경)이 집을 나와 식당에 취직했다가 쫓겨나고 노숙자처럼 길거리를 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많은 시청자들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왕가네 식구들>이 이제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왕가네 가족들에게 패악질 하던 캐릭터들이 이제 권선징악, 개과천선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것 또한 시청자들이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왕가네 식구들(사진출처:KBS)'

수박이 동생 호박(이태란)을 만나 오늘이 아부지 생신이라며 돈 봉투를 전하는 장면이나 호박아, 너하고 광박이한테 정말 고맙다. 집도 얻어주고. 난 맏이 노릇도 못하고 못난 짓만 하는데라는 대사를 던지는 것도 그래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왕가네 식구들>의 등장인물들이 수박과 호박이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순간부터 예정된 일이다. 즉 수박이 엄마로부터 편애를 받고 비뚤어지는 인물이며 호박이 구박을 받으나 결국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은 이름에 나타나 있다.

 

문영남 작가의 등장인물 작명 방식은 주말드라마의 공식과 패턴을 잘 드러낸다. 즉 아버지 왕봉(장용)은 가족의 봉이고, 이앙금(김해숙)은 마음 속 앙금으로 비뚤어진 엄마이며, 수박의 남편인 고민중(조성하)은 이혼을 고민하게 되는 캐릭터이고 호박의 남편 허세달(오만석)은 실속 없이 허세만 가득한 민폐형 캐릭터다. 마치 RPG 게임처럼 시청자들은 이들 앞으로의 전개를 예감케 하는 이름의 캐릭터들이 벌이는 마인드 게임에 들어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름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왕가네 식구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기치 못한 전개나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발견 같은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권선징악이나 가족이 최고같은 누구나 다 아는 가치의 반복이면서 비슷비슷한 가족드라마 전개의 반복이지만 그래도 시청률이 45%에 육박하는 놀라운 수치다.

 

물론 막장드라마를 통해서 흔히 봐왔듯이 시청률과 완성도 혹은 작품성에는 아무런 비례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 드라마의 평균적인 시청률이 10%대이고 20%를 넘기면 성공작으로 치부되는 시대에 무려 50%를 넘보는 시청률을 내고 있다는 것은 작품성과 상관없이 이 시간대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사회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 시간대의 가족드라마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왕가네 식구들>만이 아닌 이 시간대의 KBS 주말극이 일정하게 높은 시청률을 내왔다는 것은 작품 그 자체보다 이 시간대가 가진 프리미엄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시청자들은 무슨 일인지 이 시간대에 KBS 주말극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있다. 거기에는 편안한 기대감이 있고 그 기대감을 적절히 배반하다가도 채워주는 말 그대로 시청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 드라마의 공식이 있다. 그 공식을 시청자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알기 때문에 즐기는 면이 더 크다. 마치 한 시간 동안 벌어지는 게임처럼.

 

여기에는 이 시간대의 주말드라마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가족주의가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즉 최근 주중 드라마들을 보면 가족주의보다는 해체되는 가족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한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불륜을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의 불완전함을 얘기하고, <미스코리아><별에서 온 그대> 같은 작품은 가족이 등장하긴 하지만 가족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전개가 대부분이다. 최근 종편이나 케이블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들도 그렇다. 물론 시대극을 다루고 있는 <맏이>는 예외가 되겠지만(이 드라마 역시 과거 가족에 대한 향수를 다룬다는 점에서 현 가족의 해체를 역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로맨스가 필요해3><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같은 드라마들은 가족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더 추구한다.

 

결국 작금의 현실에서 가족은 과거 같은 가족드라마 틀로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 늘 가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던 김수현 작가마저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는 결혼에 대한 회의적인 담론들을 담고 있다. 이 드라마가 시청률이 저조한 이유는 김수현 작가의 팬들이라면 기대하기 마련인 가족주의의 틀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의 해체가 드라마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면 <왕가네 식구들> 같은 KBS 주말드라마의 성공은 거꾸로 가족주의에 대한 판타지를 이어가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가 과도한 민폐 캐릭터 때문에 막장 논란을 일으키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이 민폐 캐릭터가 권선징악의 형태로 결말을 맞을 것이며 또한 가족이라는 오히려 더 공고해진 틀 속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시청자들은 안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가네 식구들>을 보다보면 해체되어가는 가족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와 반발을 느끼게 된다. 거기 등장하는 민폐 캐릭터들은 그것을 촉발시키는 촉매제인 셈이다. 그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결국은 용서하고 다시 끌어안는 동안 우리는 가족은 여전히 지켜져야 할 최후의 보루라고 느끼게 되는 것. 하지만 이러한 안간힘은 이 시간대가 마치 유일하게 남은 가족주의의 성전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뻔하고 식상해도 자꾸만 되새기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열심히만 하면 될까? 자숙이 필요한 이유

 

비는 월드스타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게 꽤 많은 논란을 갖고 있다. 워낙 인기가 있던 스타였기 때문에 그 논란의 후폭풍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월드투어와 주식 관련한 구설수는 그 첫 번째 논란의 시작이었고 이후 할리우드 진출과 군 입대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터진 김태희와의 열애설 보도로 인해 엉뚱하게도 군 복무 태만 논란이 불거졌다. 군 당국의 신속한 조치가 이어지면서 이내 잠잠해질 즈음, SBS <현장21>에서 밀착 취재한 연예병사 복무실태가 방영된 후 비에 대한 논란은 다시 떠올랐다.

 

사진출처:큐브엔터테인먼트

군대 문제만큼 대중들에게 민감한 부분이 있을까. 대중들은 제대로 된 군 복무를 요구했지만 비는 아무런 제재 없이 전역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노래를 발표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비는 과거 자신이 최고의 스타로 올라갈 때 그러했던 것처럼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잘 노는 오빠콘셉트로 무대에 올라 건들대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폼 잡지 않는 엔터테이너라는 이미지를 그려냈다. 그가 발표한 라송이 태진아가 부르는 것 같다는 비아냥에 이른바 비진아로 콜라보레이션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논란에 대한 정면 돌파. 열심히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는 떨궈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논란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정서 속에 잠복되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의 노력이 무대 바깥에서 벌어졌던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은 요즘처럼 연예인의 일상이 활동과 구분 없이 일어나는 일상화된 방송 트렌드 속에서는 거의 착각에 가깝다. 그래서 비 역시 엠넷의 <레인이펙트> 같은 자신의 일상을 꺼내놓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것일 게다. 하지만 대중들의 마음 속에 복무 태만의 연예병사 이미지가 남아있는 한 비호감이 호감으로 둔갑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많은 이들이 논란 연예인에 대해 용서를 말한다. 끝없는 논란이 가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에는 그들의 몫이 분명 존재한다. 상처 입은 대중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는데서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란 연예인들이 일종의 자숙기간을 갖는 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와 뉘우침의 의미를 보여주고, 그것으로 대중들의 마음이 진정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일이다. 물론 본인은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사죄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대중들의 정서와는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빠 어디가> 시즌2에 출연한 김진표에 대한 논란 역시 그 대처방식이 안이하기는 마찬가지다. 과거 방송에서 일베를 연상케 하는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서 김진표 스스로 사과를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들끓는 대중 정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필이면 <아빠 어디가>가 대중들에게는 일종의 유사가족을 형성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아빠 어디가>가 일종의 유사가족 판타지를 제공한다면 그 속에 있는 김진표는 논란으로 인해 그 판타지를 일시에 깨는 존재가 된다. 대중들은 바로 그 점이 불편한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반감도 더 커진 것이다.

 

항간에는 이것이 너무 지나친 마녀사냥식논란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논란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일정한 진심어린 자숙의 모습을 보였거나 그 대중들의 마음이 누그러지기까지 방송이나 활동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논란이 불거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열심히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송은 면죄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나 김진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서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그들이 대중들의 정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무하며 함께 움직이기보다는 마치 그 정서와 대결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대중들의 정서와 함께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싸울 것인가 함께 할 것인가. 대중들과 같이 걸어가야 할 직업이라면 어떤 선택이 현명할 것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런닝맨>의 진화, 시청자 참여로 가능해지나

 

본래 게임이라는 게 그렇다.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게 더 재밌고, 하다가 조금씩 새로운 룰 같은 걸 만들어 변형시켜나갈 때 더 재밌다. <런닝맨>의 가장 큰 고충은 끊임없이 새로운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제작진이 제 아무리 대단한 게임 매니아이고 아이디어 뱅크라 하더라도 수년을 반복하다보면 어떤 한계점을 보이기 마련이다. 이럴 때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그 아이디어를 시청자들로부터 받는 것이다. 한 사람의 아이디어보다 수백 수천 명의 아이디어가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런닝맨> ‘홍콩에서 온 편지편은 그 훌륭한 사례다.

 

'런닝맨(사진출처:SBS)'

홍콩의 팬 아이린양이 제안한 게임은 장기를 응용한 게임이었다. 동양권에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기라는 게임에서 초와 한의 왕과 차, , , 졸을 가져와 <런닝맨>의 이름표 떼기 게임과 접목시킨 것. 초와 한으로 나뉘어져 각자 가진 기물을 이용해 상대편 낮은 서열의 기물을 없애는 방식은 마치 현실 밖으로 나온 장기 게임을 연상케 함으로써 더욱 흥미로워질 수 있었다.

 

<런닝맨>은 그간 여타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시도하곤 했던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을 구상해 왔다. 하지만 게임 버라이어티라는 특성 상 시청자 참여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아이린양이 보여준 시청자 참여 형식은 <런닝맨>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시청자도 참여하고, 아이디어도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이 끝나고 숨어 있었던 아이린양이 직접 나와 상을 수여하는 장면은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를 남겼다. <런닝맨>의 팬들이라면 아이린양이 그런 것처럼 누구나 이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고픈 욕구를 가질 것이다. 직접 자신이 만든 게임판 위에서 <런닝맨> 출연자들이 게임을 하고 그 우승자에게 자신이 상을 준다고 생각해보라. 그 얼마나 흥분되는 일이겠는가.

 

이것은 한때 침체의 길을 걷다가 다시 부활한 레고가 시도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전 세계 레고 동호인들의 대회를 통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끌어 모으고 그것을 상품화함으로써 팬들을 제작에 참여시켰던 것. 프로슈머의 시대에 소비자(시청자)의 참여는 상품(콘텐츠)의 진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게임 버라이어티라는 한 가지 길로 달려온 <런닝맨>은 실로 다양한 놀이와 게임의 룰을 개발해냈다. 이름표 떼기, 물총 쏘기, 스파이 미션, 공포의 방울 레이스, 보물 찾기 등등 우리가 게임이나 놀이 등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것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만한 추리극 형식이나 판타지 같은 장르까지 게임화 하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주말 예능이라는 지점에 있어 너무 복잡한 게임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위험성이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전과 편안함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해왔던 흔적도 역력하다. 이제는 <런닝맨>이라는 문호를 시청자들에게 개방해야 할 때다. 시청자들이 생각해낸 게임을 마치 테스트하듯이 실현해 보이는 일은 시청자와 함께 뛰는 <런닝맨>이라는 새로운 모토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제안된 게임들 중 어떤 것이 견고하고 훌륭했는가를 품평하는 시간도 가능할 수 있다. 시청자 참여로 <런닝맨>은 과연 새로운 진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실로 기대되는 대목이다.

신동엽의 게이 연예인 언급이 돌 맞을 일인가

 

저는 심지어 연예인 중에서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해요. 그런데 이 남자 게이에요. 근데 이 여자는 자기가 결혼할 남자가 게이라는 걸 몰라요. 게이 중에서 결혼한 남자들 굉장히 많거든요. 애도 낳고... 근데 이거를 얘기를 해줘야 되는 건지...”

 

'마녀사냥(사진출처:JTBC)'

<마녀사냥>그린라이트를 꺼줘라는 코너에서 신동엽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연예인이야기를 꺼냈다. 이 내용은 한 매체에 의해 신동엽 게이 숨기고 결혼한 연예인 홍석천과 나만 안다”’는 제목으로 기사화 됐다. 기사 제목도 그렇고 이 기사의 내용만을 들여다보면 마치 신동엽이 게이 연예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의도적으로 꺼내놓은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한편 기사의 말미에 쓰여진 신동엽은 해당 남자 연예인 성 정체성에 관해 홍석천과 나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내용은 오보다. 방송에는 아예 그런 내용 자체가 들어 있지 않다. “홍석천과 나만 알고 있다는 멘트는 홍석천씨랑 저만 (그린라이트를) 안 껐네요.”라는 말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오보를 적시하고 그걸 제목으로 뽑아내자 기사는 마치 신동엽이 자극적인 멘트를 하기 위해 영리한 방식으로 폭로를 한 듯한 인상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기사 밑에 달려진 댓글들은 온통 신동엽에 대한 비난과 욕으로 가득 채워졌다. 댓글 속에는 신동엽이 이 멘트를 한 후 (아버지가 게이임을 밝혔던) 샘 해밍턴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전혀 방송 내용과 다른 글들도 덧보태졌다. 비난이 전혀 다른 사실들을 더하면서 심지어는 신동엽 자신이 그 연예인이 아니냐는 비상식적인 말까지 덧붙여졌다.

 

늘상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마녀사냥>에서 신동엽이 게이 연예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것을 폭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 날 선배가 밝힌 남자친구의 외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내용의 사연 때문이다. 즉 후배의 남자친구가 외도를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중간입장에서 이걸 밝히는 게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꺼내놓았던 것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오로지 게이 연예인이야기 폭로에만 초점이 맞춰진 기사는 앞뒤의 맥락을 뚝 잘라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게다가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게이 이야기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사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즉 거기에 홍석천이 이른바 게이 대표로 버젓이 출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신동엽이 게이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홍석천이 거기 앉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녀사냥>이 다루는 성담론의 수위는 높다. 그래서 19금 딱지를 붙인 것이고 성인들을 위한 솔직한 남녀 간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기도 하다. 게이 이야기 또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개방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날 게이 연예인 언급을 하면서 신동엽이 굳이 덧붙인 멘트 역시 성 소수자에 대한 그의 배려가 묻어난다. “그런데 그런 게 힘들죠. 진짜 그런 상황이 되면은... 게이분들의 장점이 굉장히 많거든요. 굉장히 따뜻하고 섬세하고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닌가.”

 

물론 이 성에 있어 개방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호불호와 취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오보에 앞뒤 맥락을 끊고 자극적인 부분만을 끄집어내 이상한 뉘앙스를 덧붙인 기사는, 물론 그 기사 내용이 방송 내용을 그대로 붙인 것이라고 하더라고 그 편집 때문에 전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다. 이제 사실왜곡만이 오보인 시대가 아니다. 사실을 달리 편집하면 오보가 되는 시대라는 얘기다.

 

물론 오보는 실수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인터넷에 뜨는 기사들을 보면 이것이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지난 올해의 영화상에서 이정재와 송강호의 인사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 논란이 만들어지고 결국은 한국영화기자협회가 사과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진 것은 단적인 사례다.

 

의도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으나 그 결과와 파장은 적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마녀사냥이 대단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소소해 보이는(사실은 소소하지 않은) 사안들에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그램의 제목이 <마녀사냥>이다. 물론 여기서 마녀란 마녀사냥의 마녀를 뒤집는 이야기다. 당당해진 마녀의 이야기랄까. 그러니 <마녀사냥>이 당하는 마녀사냥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