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서영이>, 새 인물들 많아진 이유

 

<내 딸 서영이>는 연장 없이 50부작으로 끝낸다고 한다. 이제 41부를 끝냈으니 거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막판에 <내 딸 서영이>는 새 인물들이 유독 눈에 띈다. 이제 이혼까지 하고 새롭게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서영이(이보영) 앞에 갑자기 나타난 학창시절 그녀를 쫓아다니던 성태(조동혁)가 그렇고, 믿었던 남편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재차 며느리마저 거짓말로 결혼한 것을 알고는 충격에 빠졌던 차지선(김혜옥) 앞에 갑자기 나타난 배영탁(전노민)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이 그렇다. 이제 곧 몇 회면 종영할 지점에서 왜 이들은 갑자기 투입되었을까.

 

'내 딸 서영이'(사진출처:KBS)

성태의 출연은 당연하게도 서영이를 잊지 못하는 우재(이상윤)와의 삼각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첫 등장에서부터 성태의 첫사랑이 서영이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냈다는 건 이유가 있는 셈이니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이제 우재와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다른 남자를 만나느냐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삼각관계는 서영이와 우재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지 그들 사이를 확고하게 깨기 위한 것은 아닐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홀로 선 서영이는 바로 그 새로운 출발선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것이다. 애초에 서영이와 우재의 비극은 그 첫 출발선이 엇나가면서 생겨난 것이니 말이다. 우재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바로 이렇게 다시 첫 출발선에 서는 것이다. 다시는 누군가와 엮이고 싶지 않은 서영이를 다시 연애감정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으로 성태 같은 인물은 그래서 필요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이혼해서 남남이 된 우재를 다시 서영이 앞에 세워놓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차지선 앞에 나타난 배영탁이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어찌 보면 마치 의도적으로 접근한 사기꾼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진짜 로맨틱한 남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누구든 누군가의 남편 혹은 엄마로만 살아왔던 차지선을 자기 이름으로 설레게 만들어줄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서영이나 차지선이나 모두 이 드라마에서 지금 하려는 것은 관계에 매몰되었던 자신의 삶을 홀로서기를 통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다시 시작해보려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건 새로운 인물들과의 관계인 셈이다.

 

좀 더 폭넓게 보면 <내 딸 서영이>에서 관계에 실패한 이들은 새로운 관계를 통해 그 고통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영이의 아버지 이삼재(천호진)는 목공가구점 사장인 방심덕(이일화)과의 관계를 통해 과거를 넘어서 현재의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서영이 때문에 강미경(박정아)과 헤어지고 대신 최호정(최윤영)과 결혼한 이상우(박해진)는 그 최호정이라는 속 깊고 착한 아내 덕분에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또 그렇게 이상우와 헤어진 강미경 역시 그 앞에 최경호(심형탁)라는 인물과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즉 엇나간 운명으로 혹은 한 때의 실수나 잘못으로 틀어진 관계가 삶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고 해도 결국 새로운 삶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 새 삶에는 새로운 관계와 인물이 요구된다는 것은 <내 딸 서영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이다. 물론 서영이와 우재는 다시 재결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홀로 서기를 통해 자신을 먼저 사랑하게 된 이가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영이가 앞으로 만들어갈 새로운 관계는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내 딸 서영이>의 막바지에 이르러 새로운 인물들이 투입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이 비극적인 인물들이 갈등을 이겨내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많은 시청자들은 서영이와 우재가, 또 서영이와 아버지가 다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심하게 엇나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데는 그만한 과정들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지금 <내 딸 서영이>는 그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수민 CP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

 

“신미진 PD의 뛰어난 고집이 통했습니다. 제가 부탁한 건 딱 하나예요. 개그맨들이 뜨면 버라이어티에 한 번씩 넣어주잖아요. 근데 그렇게 하게 되면 개그맨들의 버라이어티 MC 따라 하기가 되요. 그래서 <개콘>이나 다른 버라이어티가 보이지 않았던 자연인 개그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했죠. 근데 그게 잘 살았어요. 제가 이 프로그램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자평하는 건... 사실 처음엔 맘에 안 들었거든요. 그런데도 암말 안했다는 거(웃음). - 서수민 CP”

 

사진:전성환

<인간의 조건>의 서수민 CP는 요즘 자다가도 웃음이 나온다고 한다. <인간의 조건>이 이렇게 잘 나오고 반응이 좋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이 프로그램의 시작은 개그맨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짜보라고 신미진 PD에게 숙제를 내주면서였다고 한다. 신미진 PD는 무려 10개의 아이템을 가져왔는데 결국 전부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수민 CP나 예능국 총괄 프로듀서인 박중민 EP 입장에서는 MC도 없이 개그맨들만으로 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미진 PD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4부작 파일럿 얘기가 나오자 “하지 말란 얘기 아니냐”며 반 포기 상태였다고 한다. 그 때 가져온 기획안이 <인간의 조건>이었던 것. 그것도 그다지 마음에 차지는 않았지만 서수민 CP는 박중민 EP에게 이번은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고 했다는 것이다. 후배 기를 살려주는 차원에서.

 

“그래서 박중민 EP와 농담으로 방송 나갈 때 첫 방이 괜찮으면 우리 이름을 넣고 아니면 빼자고도 했어요. 결국에는 이름 들어가는 게 자랑거리가 됐지만(웃음).”

 

막상 나온 프로그램이 너무 괜찮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 프로그램의 불안 요소였던 MC가 없이 개그맨에 최적화시켰다는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콩트에 익숙한 개그맨들은 설정에 더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에 들어가면 자꾸 설정을 하고 상황극을 하려다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망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의 조건>은 거꾸로 갔다. 개그맨들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기보다는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왔고 더 잘 될 수 있었던 것.

 

“박성호는 설정이 없으면 불안해해요. 갸루상 같은 분장을 해야 편안해지는 편이죠. 그래서 <인간의 조건> 들어갈 때도 너무 불안해 했어요. 그런데 아무 설정 없이 그냥 들어가더니 오히려 김준호와 케미(관계)를 만들어 내더라구요. <개콘> 이면에 이런 불편한 관계도 있구나 하는 걸 시청자분들도 흥미롭게 보아주셨죠. 사실 이 둘의 관계는 진짜예요.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변화해가는 모습이 훨씬 진정성 있는 재미를 만들어내죠.”

 

서수민 CP는 <인간의 조건>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배운 게 있다고 한다. 앞으로는 후배가 뭐 한다고 할 때 말리기보다는 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겠다는 것이다. 나름 본인도 예능에 있어서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 나름의 경험과 기준으로 판단을 하지만 <인간의 조건>을 통해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예능PD들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게 있어요. 예능하면 꼭 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1,2,3가 있는데 이것 없이 과연 제대로 나올까. 메인 엠씨가 없고 게임이 없고 오락성이 없는데 과연 될까. 그런데 되는 걸 보면서 시청자가 원하는 건 다른 거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이건 지금 현재의 예능 트렌드와 <인간의 조건>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대중들은 언젠가부터 예능의 양념들(서수민 CP가 말하듯 게임이나 메인 MC, 오락성 같은)에 질려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그 양념을 빼버림으로써 오히려 대중들이 원하는 담백한 예능의 맛을 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갈 수 있게 신미진 PD를 잡아준 건 나영석 PD였습니다. 사실 처음 휴대폰, TV, 인터넷 없이 살기 미션에 대해 저나 박중민 EP나 뭐 딱히 잡히는 게 없어 걱정이 많았죠. 그래서 신미진 PD는 꽤 신랄한 비판을 받았는데 그때 같이 회의를 했던 나영석 PD가 이거는 분명히 된다고 확신을 갖고 말하더라구요. 왜? 하고 물었더니 지금 국장님도 휴대폰 없이 사는 삶에 대해서 물어 봤을 때 아무런 그림이 안 떠오른다고 얘기하시지 않았냐고 하지 않았냐. 마찬가지다. 뭐가 될지 모르는 게 버라이어티의 시작이다. 게임이 있고 뭐가 있으면 뭐가 나올 지 다 예상이 되지 않냐. 그것보다는 뭔지 모르겠다는 궁금증이라도 생기고 그래야 성공 가능성이 있다, 고 얘기하더라구요. 후에 몇 번 촬영장에 찾아갔는데 그 때마다 나영석 PD가 말하더군요. 이건 대박이야!”

 

'인간의 조건'(사진출처:KBS)

사실 박중민 EP나 서수민 CP의 걱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능을 하면서 예능적인 핵심 코드들을 다 빼겠다는 건 큰 실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영석 PD는 어떻게 <인간의 조건>의 성공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턱없는(?) 자신감이 <1박2일>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1박2일>은 결국 연출을 빼고 관찰을 통해 재미요소들을 발견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굳이 연출이나 기획하지 않아도 분량이 나오는 걸 늘 봐왔던 나영석 PD는 그래서 상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기존 멤버로 계속 갈 건지 아니면 조금씩 새로운 개그맨을 투입해서 바꿔나갈 건지를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너무 같은 그림만 나오는 거 아니냐는 지적도 많았고요. 하지만 일단은 지금 그대로 가려구요. 중요한 건 이야기지 굳이 새로운 그림을 만드는 건 아니라고 봐요. 지금 이대로도 박성호와 김준호처럼 그 멤버들 사이에 다양한 케미가 가능하거든요. 이 기본을 유지하고 중간 중간에 숙소를 자연스럽게 개그맨들이 찾아올 수는 있겠죠. <인간의 조건>이 좋은 게 이 프로그램으로 <개콘> 개그맨들도 자극이 된다는 거예요. 여기 들어오고 싶어 하는 개그맨들이 생긴 거죠.”

 

<개콘>이 늘 아쉬웠던 부분은 이 프로그램에서 성장한 개그맨들이 그 연장선 위에서 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부분 <개콘>의 개그맨들은 성장하면 이 프로그램을 나와 버라이어티에서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은 다르다. <개콘>을 하면서 동시에 콩트 코미디 이상으로 개그맨이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할 수 있다. 개그맨들로서는 확실한 발판이자 성장기회가 만들어진 셈이다.

 

“<개콘>을 잘 하면 또 다른 자기를 메이킹 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건 개그맨들에게는 중요한 것 같아요. <인간의 조건>은 그래서 <개콘>과 또 개그맨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예능인 셈이죠.”

 

<인간의 조건>은 <개콘>의 이면 같은 느낌을 준다. <개콘>이 무대 위에서 분장을 하고 연기를 하는 개그맨들을 보여준다면 <인간의 조건>은 그 분장을 지우고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온 맨 얼굴의 개그맨들을 보여준다. 두 개의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그래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닌 <개콘>의 짝패 같은 느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양상국, 무엇이 이 개그맨을 주목하게 하나

 

<해피투게더> 약한 남자 특집에서 양상국은 같이 출연한 김태원, 이윤석, 김성규와 자신이 왜 함께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몸이 약한 남자들(?) 속에서 그는 마음이 약한 남자였다. 개인택시를 운영하는 아버지가 혹시나 사고가 날까 걱정된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양상국은 눈물 많기로 소문난 ‘국민 울보’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인간의 조건'(사진출처:KBS)

“마음만은 특별시다.”고 말함으로써 그 반전을 통해 웃음을 주지만 양상국은 뼛속까지 촌놈이다. 연예인 같지 않은 수수한 모습에 개그할 때의 사투리 그대로가 평상시 말투인 그는 콩트 속의 캐릭터와 실제 모습의 간극이 별로 없다. 물론 콩트가 만들어내는 상황 속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캐릭터의 성격이나 성향이 실제와 거의 같다는 얘기다.

 

이 일관성(?)은 양상국에게서 대중들이 어떤 진정성을 느끼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조건>을 하면서 유독 양상국이 재조명되고 재발견된 건 특히 진정성이 중요한 이 프로그램의 성격과 그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양상국은 <인간의 조건>에서 늘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부지런한 모습과, 개그맨 선배 동료들을 기다리며 때로는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따뜻한 심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개그콘서트>가 콩트 코미디라는 조금은 과장된 영역을 갖고 있다면, <인간의 조건>은 그 가면을 벗고 일상인으로 돌아온 개그맨의 맨 얼굴을 보이는 곳이다. 그런데 이 양상국이 갖고 있는 촌놈 캐릭터는 그저 콩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실제였다는 것. 양상국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도 이 촌놈 캐릭터를 일관되게 가져갈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본래모습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였다.

 

<인간의 조건>이 무언가 하나를 빼냄으로써 얻게 되는 어떤 것을 그려내는 ‘아날로그형 예능’이라는 점에서도 양상국의 촌놈 캐릭터는 잘 어울린다. 첫 번째 미션으로 휴대전화와 TV,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도시인들의 필수품을 제거함으로써 나올 수 있는 해프닝을 보여주는데, 양상국은 그 자체로 도시 속의 촌놈이라는 아날로그형 캐릭터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촌놈 캐릭터가 휴대전화와 TV와 인터넷이 없어 답답해하는 반전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웃음을 주었고, 그 다음에는 본래 촌놈으로서의 진짜 푸근한 모습이 보여짐으로써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

 

서수민 PD는 양상국이 <인간의 조건>을 만들고 있는 신미진 PD의 기획의도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개그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본래 <인간의 조건>은 ‘도시라는 정글 속에서 원시인처럼 살아가기’라는 콘셉트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의도된 일이라기보다는 양상국의 본래 모습이 그저 잘 맞아떨어진 것일 게다.

 

“멋있는 거 못하는 것도 있고요. 서민에다 바보 이런 걸 많이 했죠.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낮은 캐릭터에 더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주목받는 개그맨이지만 개그맨 같지 않은 수수함과 심지어 쑥스러움을 보여주는 양상국. 그를 보면서 아날로그적인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이 세련됨과 첨단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오히려 주목되는가를 잘 말해준다. 촌놈 양상국에 대한 주목은 그래서 문명을 다 털어내고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진정한 ‘인간의 조건’을 떠올리게 한다.

어른들과 똑같은 아이들 예능 전쟁

 

<아빠 어디가>가 뜨니 <붕어빵>이 정글로 간다? 이제는 아이들 예능 전쟁이다. 주말 예능을 잡아야 전체 예능의 기선을 잡을 수 있다는 인식 때문에 한 예능 프로그램이 부상하면 타 방송국에서 비슷한 형식을 차용하는 건 이제 보통의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아빠 어디가>가 나왔을 때에도 많은 이들이 <붕어빵>과 <1박2일>을 퓨전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1박2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을 때, <무한도전>이 원조라는 얘기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한도전>이 이미 미션의 하나로서 했던 부분을 <1박2일>이 가져와 한 분야로 만들어낸 셈이다. 이것은 비판할 일이 아니다. 창조적 수용과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박2일>의 공적은 분명하다. 여행 버라이어티라는 분파를 확고히 만들어 <무한도전>과는 또 다른 영토를 넓혀놓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박2일>이 주말 예능의 장기집권으로 들어가면서 SBS가 내놓았던 <패밀리가 떴다>는 초창기 <1박2일>과 비교되며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는 여행이라는 아이템만 같았지 방향성은 전혀 달랐다. 즉 <패밀리가 떴다>는 차라리 <X맨>의 시골 버전에 가까운 게임 버라이어티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대를 시골로만 바꾸고 게임을 반복하는 그 패턴에 빠지면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생겨난 <런닝맨>은 스튜디오에 있던 <X맨>이 <패밀리가 떴다>를 통해 시골로 나온 후, 이제는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게임 버라이어티로 진화한 경우다. 물론 그 바탕에는 <무한도전>의 추격전 미션 모티브가 깔려 있다. 하지만 <1박2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런닝맨> 역시 게임 버라이어티의 한 부분을 가져와 특화시키고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진화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1박2일>이 <런닝맨>처럼 되어간다는 얘기는 이 진화의 방향이 한 방향으로만 나가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준다. <1박2일>에 많아진 게임 요소들은 본래 이 여행 버라이어티가 갖고 있던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상당 부분 희석시키면서 게임을 오히려 부각시켜 마치 <런닝맨>의 미션을 <1박2일> 멤버들이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1박2일>은 진화의 극단에서 주춤하고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1박2일>의 야생성을 한 방에 눌러 버린 것은 <정글의 법칙>이다. 혹독한 정글이라는 환경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시베리아에서 얼음 물을 맨몸으로 건너는 김병만을 보다 보면 <1박2일>이 한 겨울에 계곡물에 입수하는 장면이 너무 약하게 여겨진다. <1박2일>이 언젠가부터 야생을 강조하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정글의 법칙>의 영향 때문일 게다.

 

이런 주말 버라이어티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치열한 경쟁이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을 성장시켜왔는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번 아이들 예능 전쟁을 이 맥락에서 보면 <붕어빵>이 정글로 떠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정글의 법칙>이 <1박2일>을 약화(?)시킨 것처럼 <붕어빵>판 <정글의 법칙> 키즈편은 아이들의 <1박2일> 같은 <아빠 어디가>와 비교될 것이 뻔하다.

 

실로 원본 없는 복제의 세상이다. 이제 무엇이 원본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예능 프로그램들은 어쩌면 바로 그 접합을 통해 진화해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치열한 경쟁으로 되는 아이템을 반복 복제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남는 것도 사실이다. 아빠와 함께 시골에 가서 하루를 지내고 오던 아이들이 이제는 정글로 가서 며칠을 지내게 된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만큼 치열해진 예능 경쟁의 씁쓸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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