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풍자를 존대로 하란 말인가

 

뭐 대놓고 욕을 한 것도 아니다. 정책을 잘 지키란 얘기였고 그간 정치인들이 해왔던 웃지못할 코미디 같은 짓은 하지 말아달라는 뼈있는 <개그콘서트>식의 덕담이었던 셈이다. 정치와 코미디의 유사점에 대한 농담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이 방송 내용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바람직한 정치풍자로 보기 어렵다며 행정지도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정치풍자’란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참으로 애매모호한 표현이 아닐 수 없지만, 적어도 방통심의위측의 말을 잘 새겨보면 적어도 그들이 말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풍자’가 무엇인가를 가늠할 수 있겠다. 방통심의위는 “정치풍자라 함은 정치권의 부조리나 과오 등을 빗대어 폭로하고 이를 통해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아직 국정을 시작하지도 않은 대통령 당선인을 대상으로 ‘훈계조’로 발언한 것을 두고 바람직한 정치풍자라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이 말에는 묘한 엇나감이 있다. 즉 개그맨 정태호가 한 발언은 박근혜 당선자에 대한 당부이지 잘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다. 비판의 대상은 박근혜 당선인이 아니라, 그간 웃지못할 코미디를 대중들에게 제공(?)했던 정치인들이었던 것. 더 이상 그들처럼 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의 개그식 표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방통심의위의 말에는 그 비판을 마치 박근혜 당선인에게 직접적으로 던져진 것처럼 받아들인 뉘앙스가 묻어난다.

 

아마도 그 대상이 대통령 당선인이 아니라 한 정치인이었거나 아니면 그저 일반인이었다면 이런 발언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인이나 그저 일반인에게는 해도 되는 훈계조의 풍자가 왜 대통령 당선인에게는 안 되는 걸까. 늘 정치인들이 대선 때만 되면 얘기하는 ‘대통령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는 말은 대선 지나고 나면 잊혀지고 지워지는 거짓말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대통령이든 정치인이든 그 권한은 국민에 의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 어느 누가라도 당부는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통심의위가 말하는 대통령 당선인에게 “잘 들어”, “지키길 바란다”, “절대 하지 마라” 같은 반말이나 ‘훈계조’의 표현이 잘못됐던 걸까. 이 말 역시 특별히 대통령 당선인이라고 해서 풍자를 하는데 있어 반말이나 훈계조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고 앞서간 생각이다. 이것은 풍자의 사전적 의미는 알아도 그 진짜 의미는 잘 모르며, 또 그 효과적인 풍자의 방법도 잘 모르는 데서 기인한 생각이다.

 

풍자란 결국 권위의 해체에서 나오는 웃음이다. 그러니 풍자에 존댓말을 쓰는 것은 실로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비아냥이 아니라면 말이다(만일 비아냥이 담긴 존댓말이라면 그것이 또 문제로 지목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풍자가 들어가는 개그코드들은 심지어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에게도 반말을 쓰고 훈계를 던지는 것이 다반사다. 그것이 풍자의 진면목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풍자를 하지 말라고 하든지, 다 해도 좋으니 높으신 분들을 대상으로는 하지 말라고 했다면 좀 솔직했을 게다. 하지만 같은 풍자를 놓고서 ‘바람직한 풍자’와 ‘바람직하지 않은 풍자’를 나눠놓는 식으로 애매모호한 논리를 만들어 행정지도 조치를 내리는 것은 자칫 정치 풍자 같은 개그의 소재 표현을 위축되게 만들 수 있다.

 

사실 이 정도 풍자는 당사자라도 허허 웃으며 넘어갔을 일이다. 하지만 더 좋지 않은 건 당사자도 가만있는데 알아서 앞서가는 과잉된 행동들이다. 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적어도 풍자의 영역만큼의 숨통은 마음껏 열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내버려둘 순 없는 걸까. 풍자는 본질적으로 대상의 고저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권위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반말이나 훈계조의 표현 정도는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정치풍자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점점 어려지고, 빨라지는 스타탄생

 

저스틴 비버의 'Baby'로 직접 짠 안무와 랩을 새롭게 시도한 방예담의 오디션 영상은 방송 직후 15시간만에 100만뷰를 돌파했다. 방예담과 같은 조에서 경쟁했던 악동뮤지션은 안타깝게도 조 2위에 머물러 생방송 진출을 단번에 이루지 못했지만, 이것은 역시 과정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오디션 무대에서 발표(?)한 음원들이 모두 차트 상위에 오른 악동뮤지션은 이미 오디션 참가자라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음악적 세계와 스타일을 갖춘 악동뮤지션에게 혹평이 나온 것은 그 기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 기대치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K팝스타2'(사진출처:SBS)

사실 지금까지 탈락하지 않고 올라온 <K팝스타>의 참가자들은 이미 어느 정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만들어진 상태다. 이 오디션을 통해 새롭게 결성된 라쿤보이즈, 피겨스케이팅 선수 출신으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화제가 되었던 신지훈, 독특한 감성과 필로 심사위원들을 그 매력에 빠뜨린 최예근 같은 참가자들 역시 그 영상이 100만뷰를 돌파한 바 있다. <K팝스타>라는 방송이 가진 힘과 거기에 얹어진 어린 참가자들의 놀라운 음악적 가능성, 그리고 여기에 기획사 3사의 트레이닝이 삼박자를 이루어 만들어낸 사건이다.

 

어쩌면 이 삼박자란 기존 기획사들이 가수들을 발굴하고 스타를 만들어내는 그 익숙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독특한 음악적 가능성을 갖춘 예비 가수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게 트레이닝을 시킨 후 데뷔와 함께 방송의 힘을 덧붙이는 것. 하지만 이건 엄연히 <K팝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지 신인가수의 데뷔무대가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웬만한 신인가수들보다 더 빨리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오디션 무대는 그 자체로 신인들의 데뷔무대가 되고 있는 인상이다.

 

과거 <슈퍼스타K>가 처음으로 서인국을 우승자로 뽑아놓고도 그가 가수로서 대중들에게 인지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슈퍼스타K2>에서 그 어느 때보다 대중들을 열광시켰던 허각과 존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그 후 음악활동은 다시 원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획사에 소속되고 트레이닝 받고 음반을 내고... <슈퍼스타K2>에서 화제가 되었지만 지금껏 이렇다 할 음악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는 강승윤은 오디션과 실제 가요데뷔 사이에 놓여진 간극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박명수가 <무한도전>에서 작곡한 ‘강북멋쟁이’가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는 현재 방송의 힘을 극대화하기 마련인 오디션 프로그램 그 자체가 데뷔무대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오디션의 과정 그 자체가 신곡 발표의 장이 되고 있는 악동뮤지션은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줬고, 오디션을 통해 그 짧은 기간에도 놀라운 음악적 성장을 보여준 방예담 역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새로운 변화다.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은 가능성을 발굴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 자체가 가수인 무대가 연출되고 있다는 것.

 

<K팝스타>가 스웨그(Swag)를 외칠 때부터 이런 변화는 감지되었다. 독특한 개성과 끼라는 것은 이제 다듬어지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 자체가 가수로서의 존재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대중들이 ‘만들어진 스타’보다는 본래 그가 가진 것으로 ‘이미 스타’인 이들을 더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들어 있다. <K팝스타>는 만들기보다는 발견하려고 했고, 그 발견은 이제 그 자체로 가수 데뷔와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다. 오디션은 따라서 그 자체로 데뷔무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유리해진 건 기성 가요계에 ‘손이 타지 않은’ 끼와 개성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악동뮤지션이나 방예담처럼 주목받는 참가자들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것은 바로 그 트레이닝이라는 인위적 손길을 거의 거치지 않은 개성 덩어리들을 거기서 만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만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주고 기획사 3사는 그 개성을 어떤 틀에 넣기보다는 그 자체로 극대화시키고 살려내는 작업을 해주며 방송사는 그것을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의 영상으로 보여준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 점점 더 어려지고, 또 그들의 데뷔 과정이 점점 더 빨라지는 건 이제 오디션이라는 형식이 대중들에게 이미 익숙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은 이제 결과의 우승자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승자가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과정에서 자신들의 감성을 건드린 누군가를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노래가 좋다면 기꺼이 음원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버스커버스커는 작년 한 해 가요계의 파란을 일으킨 인물들이지만, 정작 <슈퍼스타K3>에서는 톱10에도 들지 못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물론 그는 2위를 차지했지만).

 

결과가 아닌 과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변화시키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하나의 데뷔무대가 되어가고 있다. 방송이 만들어내는 서바이벌 경쟁의 강한 스토리텔링 위에 꾸며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가 매력인 친구들이 매 회 등장해 노래를 발표한다.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조금씩 만들어낸 변화지만 <K팝스타2>는 그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이제 기획사들이 발굴해 트레이닝시켜 방송에 내보내는 과정은 너무 구식이 되어버렸다. 이제 오디션은 기획사가 방송사와 함께 그 과정을 통해 트레이닝하고 방송에 데뷔시키는 새로운 장이 되고 있다.

<무도>와 <런닝맨>, 게임 예능의 딜레마와 해법

 

<무한도전> 뱀파이어헌터 특집은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남겼다. 새벽에 모여 뱀파이어를 잡는 미션이 부여되지만, 이미 그들 중 뱀파이어가 된 정형돈과 그에게 물려 역시 뱀파이어가 된 유재석이 있어 팽팽한 심리전이 만들어졌다. 뱀파이어인 정형돈과 유재석이 탄 차에 길이 올라타면서 그 심리전은 더 흥미진진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존에 갖고 있던 <무한도전> 멤버들의 캐릭터 때문에 상황이 작위적으로 흘러가는 단점도 드러났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어쨌든 캐릭터 쇼이기 때문에 그런 단점조차 쇼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는 <무한도전>이 게임 쇼를 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딜레마가 숨어 있다. 게임이라는 것은 그 방식이 익숙해지면 지루하거나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늘 낯선 형식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낯설다는 것 역시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초반부를 몰입해서 들여다봐야 후반부에서 더 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초반부의 낯설음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결국 캐릭터다. 게임의 미션은 달라져도 <무한도전> 멤버들의 캐릭터는 익숙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이 캐릭터에 집중하면서 서서히 미션을 이해해나가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도 필요하다. 그것은 시청자들이 <무한도전>을 계속 보면서 그 캐릭터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저 어느 날 무심코 돌려 <무한도전>을 보게 된 시청자라면 이 초반부의 낯설음이 어떤 장벽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것은 <런닝맨>도 마찬가지다. <런닝맨> 환생 특집은 그런 면에서 이번 <무한도전> 뱀파이어헌터 특집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런닝맨> 환생 특집은 초반부에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80년 전의 시청에서 벌어지는 미션은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션이 일단락되고 80년 후의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 런닝맨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누가 누구로 환생했는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환생과 미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실로 기발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 흥미롭고도 놀라운 미션을 보여주는 <런닝맨>에서도 <무한도전>과 똑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즉 초반부의 설정이 다소 낯설고 따라서 지루하게까지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미션의 경우 80년 전의 상황 자체가 이 이야기의 전제가 되기 때문에 도입부가 너무 길게 느껴지는 단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익숙해져야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 예능이 TV라는 조금만 느슨해져도 순식간에 채널이 돌아가 버리는 매체와 부딪쳐 생겨나는 간극이다.

 

<무한도전>은 물론 늘 게임쇼를 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런닝맨>보다는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런닝맨>은 다르다. 아예 게임 버라이어티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매번 새롭고 낯선 게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익숙해진 게임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껏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초능력자 미션이나 추리형식을 넣은 셜록 홈즈 미션 같은 독특한 서사의 게임은 <런닝맨>의 팬들을 열광시킨다. 하지만 새롭게 유입된 시청자들에게는 그 형식이 낯설다 못해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최근 <런닝맨>은 한동안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게임 미션을 반복해왔다. 배경을 달리하지만 그저 일대일 혹은 팀 대결을 통해 승자를 가르는 단순한 게임들이었다. 그간 그토록 많이 나왔던 스파이 미션이나 배신 이야기는 한 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게임 예능이 가진 딜레마에 대한 제작진의 고민이 깔려 있다. 마치 영화 같은 <런닝맨> 특유의 게임 미션이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고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시청층을 배려하려는 제작진의 고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런닝맨> 환생 특집은 최근 한 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게임 형식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1938년의 시청과 2013년의 시청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서사는 거기에 환생이라는 장치를 넣어(이름표만으로 이 장치가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능이 아니라 마치 영화 같은 <런닝맨>의 진면목이 이번 특집으로 다시 드러난 셈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시청률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청률을 고민하는 방송사의 중역들에게는 난감한 일이다. 엄청난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과 <런닝맨>의 시청률이 15%에 머물러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언젠가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나 <런닝맨>의 조효진 PD는 이 답보상태의 시청률에 만족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그저 반복적인 미션에 자극을 붙여 시청률을 높이기보다는 그래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소홀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런 다짐은 두 예능 프로에 대해 대중들이 보내는 절대적인 지지의 이유가 될 것이다.

<내 딸 서영이>가 관계의 피곤을 넘어서는 법

 

“왜 아버지 하고 싶은 대로만 사랑이라고 하세요?” <내 딸 서영이>에서 아버지 이삼재(천호진)를 다시 만난 서영이(이보영)는 이렇게 말한다. 이삼재가 딸 서영이를 잊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돌며 심지어 딸의 남편인 강우재(이상윤)를 구해주기까지 한 것에 대해서 서영이는 고마움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만 바로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게 들통 나고 결국 강우재와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딸 서영이'(사진출처:KBS)

“늘 아버지 행동이 자식들 위할 거라는 착각 이제 제발 그만 좀 두세요.” 모진 말이지만 이 말 속에는 그간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는 미명하에 했던 무모한 사업으로 오히려 가족들을 힘겹게 했던 것에 대한 서영이의 감정이 들어 있다. “잘 해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는 아버지의 말은 서영이에게는 여전히 되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셈이다.

 

이것은 <내 딸 서영이>가 보여주는 부모 사랑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사랑을 쏟아 붓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자식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때론 그 사랑이 오히려 자식을 힘겹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관계란 바로 이 양면성을 갖는다. 그 어느 사회보다 끈끈한 정과 가족애로 똘똘 뭉쳐 살아가지만, 또 그것이 우리 사회가 갖는 특별한 힘을 만들어내지만, 바로 그 끈끈함은 때론 서로를 파괴하는 관계의 피곤을 가져온다.

 

그렇게 모진 말을 아버지에게 던지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영이는 버스 정류장에 고개를 숙인 채 초라하게 서 있는 아버지가 못내 밟힌다. 자꾸만 외면하려 해도 백밀러로 들어오는 아버지를 외면할 수가 없다. 결국 차를 돌리지만 아버지는 이미 버스를 타고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버스를, 딸은 차를 타고 각자 가지만 그들은 서로를 생각하며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린다.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그 관계의 이중성이 그 장면에는 묻어난다.

 

이 관계의 피곤은 자식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한 측면인 부모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상우야. 서영이... 니 누이 그렇게 만든 거 내 탓이다. 내가 니 누이 그렇게 만들었다....내가 그런 인간이다.. 능력도 없고 생각도 없으면서 그렇게 모자란 놈이다.” 이삼재는 딸을 그렇게 만든 게 자기 자신이라고 자책한다.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던 자신이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심지어 지워버리고 싶었던 딸 서영이, 또 딸의 부정을 받아들이면서도 좀체 그 관계를 지워낼 수 없었던 아버지 이삼재. 이 둘의 비극은 왜 만들어진 것일까. <내 딸 서영이>는 우리 사회만이 가진 끈끈한 가족애의 또 다른 면을 끄집어내 보여준다. 우리는 효와 자애라는 가족의 미덕을 말하지만, 그것은 때론 과잉된 교육열이나 치맛바람 혹은 가족애를 변명 삼는 가족 내의 폭력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결국 이 문제는 관계에 매몰되어 독립적인 주체로서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서지 못한(혹은 못하게 된) 데서 생겨난 비극이다.

 

“집으로 가자”는 아버지에게 “저한테 돌아갈 집이 있어요?”라고 묻는 서영이는 지금 가족이라는 틀에 묶여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 틀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이다. 그녀는 이삼재라는 가족의 틀을 벗어나 강우재라는 가족의 틀에 안기려 했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아픈 경험이지만 그래도 서영이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행복할 줄 알았지만 강우재와 살면서도 “겁나서 미안해서 불안해서 한 순간도 편한 적이 없었다”고 토로한다.

 

“다시 시작해볼 거야. 이서영으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 상우야 나는 한 순간도 이서영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 나는 아버지 딸로 뒷수습하며 살다가 우재씨를 만났지만 그것도 실패했잖아... 난 그냥 나로 살고 싶어.” 이서영의 홀로서기는 그래서 이 관계의 피곤을 벗어나 독립적인 개체로서 가족을 다시 바라보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 이삼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잊고 있었던 목공 일을 하면서 방심덕(이일화)과 다시 새 삶을 엮어가는 이삼재의 모습은 그래서 이 비극 속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게 해준다. 독립적인 주체로 서게 될 때 가족은 구속이 아니라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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